2. 물의 마음

작성일
2007-09-10 18:35
조회
7834

다른 것들도 인생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봤으니 이번에도 한번 물과 인생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흔히 하는 말이 사람은 늙어봐야 안다고 했다. 젊어서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말은 아니겠지만, 나이를 먹어보면 그 사람이 젊어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알게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 우리 명리학도(命理學徒)는 이러한 말에서 무엇을 읽어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본다. 무엇 하나라도 간과(看過)해서는 안되는 것이 학자인데, 하물며 인생의 운명을 연구하는 명리학자라면 이러한 말의 의미가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정도는 생각하고 파악해둬야 할 것이라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들기도 한다. 그럼 낭월이가 파악하고 있는 ‘늙어봐야 안다.’는 말의 의미를 말씀드리겠다.




노년(老年)의 시기를 오행에서는 물에 해당한다고 보자. 그리고서 물의 형태를 생각해 보았다. 그랬더니, 물의 형태는 삼체(三體)의 변신이 모두 가능하다는 간단한 이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삼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만 별 것은 아니고, 기체(氣體), 액체(液體), 고체(固體)의 삼체를 말하는 것이다. 원래가 별것도 아닌 것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것이 낭월이의 특징이니 도리없는 일이지만, 사실은 이렇게 평범하게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 속에서 의외로 깊이있는 말씀을 듣기도 하므로 가볍게 여길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인생의 늙음을 고체처럼 단단하게 굳어서 보낼 것인가?’

‘아니면 액체처럼 유연하게 보낼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기체처럼 아예 승화되어 버릴 것인가?’




가) 기체(氣體)의 노년(老年)




이렇게 질문을 한다면 어느 것을 선택을 할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아마도 기체처럼 살게 된다면 우리는 신선이라는 말로 불러야 할런지도 모른다. 신선은 우화등선(羽化登仙)을 한다고 하는데, 우화등선이란 날개나 생겨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인가보다. 그렇지만 육신에 날개가 나기야 하랴 싶다. 다만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다는 말로 새겨들어본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일생을 얼마나 피나게 수련했는가에 달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수행을 한 사람의 몫은 기체로 존재하는 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범인에게는 꿈도 꾸지못할 영역이므로 접근불가한 대목일런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체로 된 물(老年)은 세간에서 살면서도 아무런 속박이 없이 그렇게 자유롭게 살다가 간다. 전혀 틀에 매이지도 않고 혈연이나 명예욕에 사로잡혀서 늙으막에 재판정에서 사형을 언도받는 치욕을 당하지도 않는다. 그야말로 ‘주리면 먹고, 곤하면 잔다.’는 서산대사의 말대로인 것이다. 과연 어떻게 늙어야 이렇게 될것인가... 나 자신도 늙으면 이렇게 될 수가 있을까... 참으로 고민스러운 대목이라고 하겠다. 너무나 부럽지만 정진을 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얻어질 수가 없는 경지이기에 평생 게으름이 특기인 낭월이로써는 참으로 가능성이 없는 분야이다.




나) 고체(固體)의 노년(老年)




다음으로 반대적인 입장에 있는 고체를 생각해보자. 늙으면 모든 것이 굳어진다. 몸도 마음도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다. 손발도 예전 같지가 않고, 허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뿐이랴, 머리조차도 예전처럼 활발하게 움직이지가 않는 것도 또한 어쩔 수가 없는 현실인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늙어가는 모습의 공통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은 숙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자식들은 세대차이가 난다는 이유로 상대를 하지 않는다. 세대차이가 나는 이유는 이해력이 부족한 탓일 것이다. 늙은이가 젊은 자식들의 생각을 따라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더욱 적절한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괄시를 받아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평생을 그렇게 자신의 영역만을 주장하면서 살아온 삶이라면 늙어서도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많이 경험하고 많이 생각한 사람이 훨씬 상대하기가 좋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느낀다. 도회지에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상대를 해본 사람은 이해력이 상대적으로 넓다. 이기적인 듯 해도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면 남의 입장을 훨씬 더 잘 이해하는 것이 도회지의 사람들이다.

반면에 시골에서만 살아온 사람은 어떤가? 흔히 말하기를 시골사람의 순박함을 이야기한다. 물론 사실이다. 도시의 찌들은 상황의 각박함은 없을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해타산에 관계된 일로 의견대립이 되어보라 전혀 말이 들어가지를 않는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서 깜짝 놀리게 되는 것이다. 평소에 시골사람의 순박함에 대해서만 생각을 했던 사람이라면 그 충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외골수로 자신의 입장만을 강조한다. 전에 고물행상을 할 적에, 고물상 주인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시골사람이 더 무섭다구, 물세를 내지않는 사람들하고는 싸울 생각을 말아야 한다구, 이해력이 없어서 설명을 해봐야 몰라, 그러니까 웬만하면 그냥 피하라구 장사하러 다니려면 별별사람이 다 있으니까 말이야.”

하고 조언을 해줬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뭘 그러랴... 싶었는데,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그러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과연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좁은 공간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사고력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상대하는 사람들도 항상 그동네의 그사람들 뿐인바에랴...

물론 시골에 살아도 교제의 폭이 넓은 사람은 예외겠지만, 보통 그렇게 농촌에서 늙은 사람의 사고력은 아무래도 굳어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그래서 환경도 무시할 수가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겠지만, 실은 사주팔자의 형태로써 살펴봐도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의 격국은 도회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의 격국에 비해서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것도 사주팔자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문제는 또 있다. 소위 말하는 ‘전문화의 시대’에 얻어진 부산물이라는 생각도 해보기는 하는데, 사람이 자신의 학교를 나와서 자신의 전문분야에서만 일생을 일하다가 그 연구실에서 정년퇴직을 한 사람의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많은 생각이야 하였겠지만, 그 ‘깊이’에 대해서는 탓을 할 것이 없겠으나, ‘넓이’에 대해서는 뭔가 문제가 있을 것이 뻔하다. 넓지않은 시야도 고정관념이 강하게 작용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서는 일류의 권위를 자랑하지만, 연구실만 벗어나면 모두가 생소한 것들 뿐이라면 이 사람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 생소한 분야로 파고 들것인가? 아니면 도로 연구실로 들어가서 자신에게 익숙한 분야에 대해서나 연구를 할 것인가? 연구실로 도로 들어가버린 사람이라면 이 사람도 아마 고체의 노년을 맞이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대열에 서야 할 것이다.




다) 액체(液體)의 노년(老年)




액체는 그래도 물의 본연의 모습은 잃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기화(氣化)까지는 바라지도 못하겠지만, 얼음덩어리는 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몸도 마음도 유연한 노년이라면 그런대로 멋진 인생이라고 할만 하지 않으랴 싶다. 언제나 새로운 사람과 더불어서 공통의 화제로 한참을 이야기 나눌 수가 있는 여유로움은 물의 특성이다. 여기에서 장자(莊子)의 한토막을 말씀드리고 싶다.




천하의 성군이라는 요임금이 변방을 순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가 임금에게 인사를 드리면서 축수의 기원들 드렸다.

“성군이시어, 장수를 누리소서!”

“싫으네, 오래살면 욕된 일이 많아서 말이야.”

“그럼 임금이시어, 부유하소서!”

“그도 싫으네,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이 많아지걸랑.”

“임금이시어, 백자천손(百子千孫)하소서!”

“싫으네, 자식이 많으면 골치가 아퍼.”




그러자 국경을 지키던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만나보니까 그저 군자(君子)정도밖에 않된다는 것을 알겠군요. 하늘은 만민에게 일거리를 주는 법이거늘 아들이 많은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재물이 많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줘버리면 편안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천하가 편안해져서 다스림이 없이도 잘 다스려 진다면 천년을 살은들 골치아플 일이 뭡니까?”




이렇게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이 이야기가 장자의 어느 편에 있었는지는 기억력이 부실해서 잘 모르겠는데, 대략 이야기는 비슷할 것이다. 이야기를 보건데, 요임금도 굳어있었던 모양이다. 자유롭고 유연한 사고력은 아니라는 느낌이 든다. 물론 실제로 그랬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늙으막에 이렇게 성지기의 말대로 유연한 마음으로 살 수가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할 뿐이다.

이러한 정도의 사고방식이라면 기체까지는 몰라도 액체로써는 충분하리라고 생각되어서 한말씀 드려봤다. 장자의 이야기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내용들이 많아서 열심히 읽었던 책 중에 하나였는데, 그 중에서도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이야기이다. 벗님은 이렇게 세가지의 노년이 있으니 어느 노년을 맞이하게 될는지 조용히 한번쯤은 생각을 해보는 것도 무익하지많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멋진 생의 마무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상(五常)에서의 지혜(智慧)가 늙은이에게 해당한다는 말과 일치한다. 오죽하면 우리 속담에 ‘늙은 쥐가 항아리를 뚫는다.’고 하겠는가? 하다못해 한 마리의 쥐도 늙으면 그 단단한 항아리를 구멍낼 요령을 터득하고 있다는 말이니 하물며 인간이 되어서 이렇게 지혜가 없어서야 정말 어디 인생을 잘 살았다고 하겠는가? 아무래도 젊은 사람의 머트로운 삶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는 늙으막의 유유자적함은 늙어보지 못하고서는 맛보기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옛 이야기 중에 한가지 생각나는 것은, 고려장 시절에 어느 정승이 중국으로 부터 받은 어려운 퀴즈를 받고 고민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오니까 고려장의 시기가 도래했는데도 차마 자식이 아버지를 매장할 수가 없어서 마루아래의 비밀방에서 숨어살으시던 노부(老父)께서 아주 간단하게 정답을 일러주셔서 위기를 모면하고는 왕에게 그 연유를 말씀드리고 결국 고려장이라는 풍습을 없애버린 기가막힌 노인의 지혜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나 학교에서 한번쯤 듣고 지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모든 경험을 후학들에게 나눠줄 수가 있는 노년(老年)이 되고, 젊은 제자들이 헛된 길을 헤메는 시간낭비를 줄여주기도 하니 참으로 멋진 노인의 지혜이다. 그렇게 늙었다면 자연의 법리에 잘 따른다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인생의 마무리를 저녁노을의 장엄한 황혼처럼 물들이는 것이 五行에 있어서의 水에서 배울 공부라고 생각한다. 물은 응고(凝固)하는 성분이다. 그래서 늙은이는 뭔가를 마음에 뭉쳐둔다. 자신의 일생을 정리해서 마음에 묻어 둘수도 있고, 아들 며느리가 자신을 서운하게 했다는 것을 마음에 뭉쳐둘 수도 있다. 스스로 만들어서 스스로 저장하는 것이 물이다. 노인네가 꽁하고 서운해 한다고 젊은 사람들은 섭하다고 하지만, 이렇게 뭉쳐지는 것이 또한 노인이고 물의 본성이다.

물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인생의 마무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五行論을 잘못 배운 것이라고 하겠다. 물이 도둑놈이나 사기꾼이 아니라, 이렇게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지혜라는 것도 여기서 알아 둬야 할 중요한 물의 마음이다. 실제로 물은 쉬임없이 움직인다. 고요하다고 하는 아침바다도 기실은 잠시도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다. 어려서 안면도의 해변에서 자랐기 때문에 바다의 구조를 대략 이해한다. 특히 갯펄만 보이다가도 어김없이 푸른 물로 채우는 바다의 조수는 언제나 신비한 대상이었다. 이렇게 쉬임없이 움직이는 물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지혜가 물을 닮았다는 옛 어르신의 말씀에 공감을 하게된다.

또 하나의 물은 다음의 세대로 연결이 되는 통과다리라는 점이다. 물이 응고를 한 자료를 모아서 다음의 세대를 위해서 저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대뇌에 축적이 된다고 한다. 대뇌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진화의 과정을 거쳐오면서 변화된 뇌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구피질 신피질하면서 구조분석을 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초창기에 물에서 생명이 발생했을 적에 입력된 생활정보가 뇌에 보존되고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것 같은데, 그렇다고 본다면 이 뇌는 자료보관소라고 할 수 있겠고, 그러한 맥락에서 뇌는 오행이 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법하다. 사실 머리 속에는 수없이 많은 신비한 구조가 후학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전생의 기억이 과연 뇌의 어느부분에 저장이 되어 있는지도 참으로 궁금하다.

불가에서 도를 닦아가는 과정에서 숙명통(宿命通)이라는 신통력이 발생하는 시기가 있다. 글자 그대로 과거의 운명을 모조리 알게 되는 신통력이 숙명통인데 이러한 신통력이 생기면 자신을 포함해서 어떤 사람이던지 그사람의 과거에 대해서 거울을 보듯이 훤하게 알아본다고 한다. 이 숙명통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의 이번 생에서의 과거뿐 아니라 전생과 또 전전생의 일생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것을 알게되는 것은 어떤 귀신이 이 도인을 따라다니면서 그 사람의 전생을 일러주는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 속에서 과거의 연결고리에 해당하는 뇌의 기능이 잠에서 깨어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이러한 저장창고의 문을 어떤 지혜의 열쇠로 열기만 한다면 자신의 과거 모든 생에 대한 보관자료를 읽어 볼수가 있다고 하는데, 자신의 보관창고를 여는 열쇠를 얻었다면 다른 사람의 보관창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열쇠로도 사용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여섯가지의 신통력 중에서 과거의 기억을 다시 읽어볼 수 있는  숙명통은 참으로 매력적인 능력이라고 하겠다. 요즘 서점가에서는 전생의 여행에 대한 흥미있는 책들이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한데, 이러한 것을 보면서 역시 사람은 전생에 대해서 흥미를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은 자신의 뇌의 기능 중에서 극히 일부분만을 사용하다가 죽는다고 한다. 2%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소숫점 이하를 사용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활용성은 대개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정도에서 머무는것으로 생각된다. 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전생의 기억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게 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고 본다. 전생에 한 일은 습관이 되어서 어쩐지 그일을 되풀이하면 오래전에부터 익숙하게 해왔던 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료의 보관소가 바로 뇌라는 구조인데, 이 뇌라는 구조는 이번 생에서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에 불과하지만 이미 이 뇌속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전생의 모든 영상자료를 한부 복사해서 갖고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신이 어느 날 전혀 이번 생에는 와본 적이 없는 장소에 도달 했을적에 그 공간이 아주 오래 전에 머물렀던 것같이 편안하고 익숙한 상황이 되어서 당황하는 경우가 가끔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오행으로 치면 水의 기능에 해당하고 그 중에서도 저장하는 기능에 포함된다고 생각이 된다.

이 수의 기능이 나무의 씨앗을 만들어서 보관을 하는데 그 응고력이 좋기 때문에 천년묵은 은행나무의 자료를 그대로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뉴스를 통해서 보니까, 피라밋 속에서 씨앗을 얻어다가 심었는데 그 씨앗에서는 2천년 전의 토마토가 열렸다고 하는 보고를 보면서 과연 씨앗의 힘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물의 힘이라고도 느꼈으니 이렇게 구석구석에서 접하는 소식들에서 五行의 참 소식이 무엇인가를 항상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