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3] 제40장. 방랑객(放浪客)/ 2.달변(達辯)과 궤변(詭辯)

작성일
2023-11-1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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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 40. 방랑객(放浪客)

 

2. 달변(達辯)과 궤변(詭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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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객실을 살펴봤으나 노인은 꼼짝도 없이 잠만 자는 듯 기척이 없었다. 그리고 점심때나 저녁 무렵이 되어서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고단하게 돌아다니느라고 쌓였던 여독(旅毒)을 푸느라고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헤아렸다. 궁금한 것은 많았지만 고단한 몸을 쉬고 있는데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저절로 일어나도록 가만히 두도록 했다.

저녁 식사의 시간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발견한 춘매가 인사를 하고는 세면장(洗面場)으로 안내했다.

간밤에는 무척 많이 고단하셨던가 봐요. 여기에서 씻으시겠어요?”

춘매를 바라보면서 노인이 말했다.

오호~! 고맙네. 복 받으시겠군. 허허허~!”

춘매가 어제저녁에 본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아마도 진명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수하고 나온 노인의 모습은 생기가 넘쳐 보였다.

주무시느라고 밥도 굶으셨어요. 저녁 공양 드시러 가요. 호호호~!”

춘매를 따라서 식당으로 가면서 입구에 붙은 이름을 발견하고는 물었다.

낭자, 이곳이 오행원이오?”

, 맞아요. 오행원에 인연이 되신 것에 감사드려요. 호호~!”

춘매의 해맑은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노인이 말했다.

이런~! 쓸모없는 늙은이에게 감사할 것이 무에 있겠소만, 이 집의 이름이 오행원이라니 기분은 좋아지는구먼. 허허~!”

이런 기회를 놓칠 춘매가 아니었다. 상을 차려놓고는 옆에 앉아서 말을 걸었다.

조금 전 말씀이 이곳이 오행원이어서 다행이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요. 혹시 해주실 말씀이 있으면 듣고 싶어요. 오행에 의미가 있다는 말씀이잖아요?”

춘매가 이렇게 다가앉아서 묻자, 지그시 바라보던 노인의 눈가에 웃음기가 배어 나왔다. 이렇게 말하는 춘매가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다가 말했다.

귀여운 낭자로군. 그대 이름은 뭔고?”

고마워요. 저는 왕혜연(王惠燕)이에요. 여기에서는 춘매(春梅)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그렇게 불러주셔도 되어요. 호호호~!”

오호 춘매 낭자로구나. 참 좋은 아호로군. 그 호는 누가 지어 줬을꼬?”

노인이 이렇게 말을 건네자 춘매는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스승님이 지어 주셨죠. 그런데 뜻이 좋다고 하시니까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어요. 춘매는 어떤 의미예요?”

춘매가 또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춘매의 눈을 바라보고는 다시 말했다.

인고한풍후(忍苦寒風後)에 봉춘만리향(逢春萬里香)이로다. 이렇게 멋진 호를 지은 그대의 스승도 인품이 범상치는 않겠구나. 허허허~!”

노인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춘매도 진명처럼 청기(淸氣)가 보이는지를 느껴보려고 실눈을 뜨고서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여느 노인과 조금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가 없어서 내심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나 노인이 멋진 대구(對句)로 춘매의 뜻을 읊조리자 귀가 번쩍 열렸다.

아니, 그건 무슨 뜻이에요? 조금만 풀어서 설명해 주세요. 그나저나 밥상을 드려놓고 예가 아니네요. 우선 식사부터 하세요. 드시고 나면 궁금한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들어볼게요. 호호호~!”

이렇게 말하고는 따뜻한 물을 떠다가 옆에 놓고는 잠시 주방으로 들어가서 과일을 깎았다. 노인에게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서였다. 과일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또 그에 대한 설명을 듣고 싶었다. 노인이 먹는 것을 보면서 밥이 부족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그릇을 더 떠서 옆에 놓아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국에 말아서 후룩후룩 먹는 것을 지켜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차린 밥상을 달게 먹는 것보다 더 보기 좋은 것도 없다. 상을 물리고서 과일을 앞에 놓자 노인이 춘매의 물음에 답했다.

이제 배도 채웠으니 밥값을 해야지? 그러니까 춘매란 의미는 기나긴 혹한(酷寒)의 냉풍(冷風)을 맨몸으로 견뎠더니, 봄을 만나서 그윽한 매향(梅香)이 만리(萬里)로 뻗어간다는 뜻이니 어찌 좋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냔 말이네. 어떤가? 과연 오행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썩 어울리는 호가 아닌가? 허허허~!”

노인이 이렇게 풀이하자 춘매는 그렇지 않아도 맘에 드는 호였지만 그 애착이 더욱 커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오행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썩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또 이해되지 않아서 다시 물었다.

어르신께 또 여쭙고 싶은 것이 있어요. 오행을 공부하는데 춘매가 잘 어울리는 것이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세요.”

춘매는 오행이 뭔고?”

노인이 묻는 말을 춘매가 알아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얼른 답했다.

그야 춘()이니 목()이죠. 맞죠?”

.”

춘매가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들은 노인은 간결하게 라고 물었다. 더 말을 해 보라는 의미라는 것을 이해하고는 또 뭘 묻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다가 말했다.

또라니요? 다른 것이 있나요?”

춘매가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고 되묻자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오호~! 공부의 길이가 짧구나. 허허허~!”

춘매가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수밖에 없는지라 순순히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전부거든요. 무엇을 말씀하신 것인지 설명해 주세요.”

그래? 그렇다면 냉기(冷氣)는 뭔고?”

냉기는 수()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알아듣겠네요. 호호호~!”

그래? 다행히 귀머거리는 면했구나. 허허허~!”

귀머거리라고요? 호호호~!”

, ()도 보이는가?”

금이 어디 있죠?”

아니, 금이 안 보인단 말인가?”

안 보이는데요? 어디에서 금을 찾아야 하나요?”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우창이 지나는 것을 춘매가 보고는 말했다.

스승님, 어르신과 이야기 중이에요. 이리 오세요.”

우창이 보니까 노인장과 춘매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오랫동안 같이 있었던 것처럼 편안해 보였다.

어르신 푹 쉬셨습니까? 우창이 문안드립니다.”

, 덕분에 꿀잠을 잤구려. 한 달이나 밀린 잠을 다 털어낸 것만 같으니 말이오. 그런데 제자를 잘 가르치지 못했나 보군. 허허~!”

우창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자리에 앉으면서 춘매를 바라보자 춘매가 노인에게서 들은 대로 말했다.

스승님, 춘매의 아호에서 금도 보이세요? 금을 찾으라고 하시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르신께서 농으로 말씀하신 것 같아요? 스승님이 보기에도 그렇죠?”

춘매는 우창에게 응원해 주기를 바라면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우창이 머리를 한 대 쥐어박힌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보통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直感)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말했다.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춘매에서의 금은 주체(主體)가 아닐까 싶습니다. 춘매라는 두 글자를 말씀하신 것인지요?”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노인은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창이 그 표정을 보면서 노인의 깊이를 가늠하고자 했으나 그 생각은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노인이 다시 물었기 때문이었다.

우창이랬나? 그대는 견백(堅白)’이라는 말을 들어 봤는가?”

처음 듣는 말씀입니다. 그 의미를 듣고자 합니다.”

, 그렇게 상식(常識)이 자라의 콧구멍보다 작아서 무슨 자연의 도를 살핀단 말인가? 스스로 공부하지 않고 제자들과 노닥거리면서 제 잘난 자랑이나 하고 있다면 도대체 뭘 가르친다는 말인지 우습군. 허허허~!”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에 춘매는 슬그머니 화가 났지만 그래도 우창이 대응하는 것을 지켜보자는 생각으로 가만히 기다렸다. 우창이 노인의 말을 곰곰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견백(堅白)이라는 말은 흰 것이 견고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흰 것은 오행으로 금()에 속하니 인간의 본성(本性)을 의미하겠고, 본성이 단단하다고 하면 주체가 강건(剛健)하다는 의미가 되겠으니 저마다의 가슴에 잠재되어있다고 보면 천상천하(天上天下)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인 불타(佛陀)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자존(自尊)이라고 이해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견백은 불타의 가르침에 대해서 논하는 것을 다른 말로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창이 이렇게 설명하자 노인이 눈을 껌뻑이더니만 크게 웃었다.

뭐라고? 어허허허허~!”

우창은 노인이 웃는 것으로 봐서 정답에서 한참을 빗나간 것이겠거니 싶었지만 그 두 글자만으로 풀이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서 물었다.

어르신 죄송합니다. 공부가 접시에 담긴 물보다 얕은 까닭에 가당치 않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가르침을 청합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노인이 과일 한 쪽을 먹으면서 우창을 유심히 바라봤다. 우창도 관상을 보는가보다 싶어서 가만히 앉아서 앞을 응시했다. 그러자 노인이 입을 열었다.

둘러 붙이는 품이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는 입신지경(入神之境)이로군. 공손룡(公孫龍)이 찾아왔다가 놀라서 자빠질 일일세. 허허허허~!”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답변들 잘 드린 것입니까?”

엉터리 답이지만 조리가 정연하니 틀렸다고만 하기도 어렵겠다는 말일세. 완전히 생짜는 아니라는 말이기도 하고. 허허허허~!”

가르침을 청합니다.”

우창이 합장하면서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노인이 설명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공손룡(公孫龍)이라는 학자가 있었다네. 그는 이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깊은 통찰(洞察)을 하고 있었지. 그의 주장을 보면 백석(白石)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지. 가령 흰 돌이 있다고 할 적에 이 돌을 보면 빛깔이 희다는 것은 알 수가 있지만 단단한지 무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했다네. 그렇지만 그 돌을 만져보면 단번에 단단한 돌인지를 알 수가 있단 말이지. 그래서 단단한 것과 흰 것은 서로 다르다는 것으로 분류하는 방법을 창시했으니 참으로 탁월한 관념(觀念)이라고 할 수가 있지.”

노인의 말을 들어봐도 춘매는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흰 돌은 무엇이고 단단한 것은 또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차피 흰 돌은 있는 것이고, 그 돌이 단단하면 단단한 흰 돌인데 무슨 말이 이렇게 어려운지 납득되지 않아서 노인에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다시 이해하기 쉽게 말씀해 주세요.”

맞아, 그의 말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지. 그래서 그를 궤변가(詭辯家)라고 한다네. 허허허허~!”

아니 그렇다면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한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데 그것을 알아야 한단 말인가요?”

이번엔 춘매가 오히려 슬그머니 화가 나서 약간 불편한 어조로 노인에게 대들 듯이 말했다. 그러자 노인이 또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진흙 속에도 황금이 있는 법이고, 미치광이의 헛소리에도 진리가 있는 법이거늘 어찌 그리 당돌하게 말을 하는고? 그대는 죄인집거(罪人執炬)라는 말도 모르는가?”

춘매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서 우창을 바라봤다. 우창은 알고 있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우창이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 말씀인즉 어둠 속에서 죄인이 횃불을 들고 가다가 내게 그 불을 준다면 받지 않겠느냐는 뜻이 아닙니까?”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춘매가 바로 얼마 전에 들었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는 말했다.

아하! 그걸 또 죄인집거라고 하는 것이었네요.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줄은 몰라도 뜻은 알죠. 그러니까 궤변을 일삼는 사람의 말속에서도 진리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거죠?”

춘매가 이렇게 말하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그러니까 가려서 받아먹을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 성현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모두가 옳은 것이 아니라 그중에는 옳은 것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단 말이네. 그 정도라도 알아들으니 올 여름은 오행원에서 노닥거려도 되겠구나. 허허허허~!”

노인은 제멋대로였다. 그러니까 올 여름은 오행원에서 밥이나 얻어먹으면서 편하게 살겠다는 말이 아닌가? 춘매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우창을 바라봤다. 그러자 우창이 노인에게 말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큰 스승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오행원의 복이고 우창의 안목을 열어 주실 귀인이십니다. 그냥 가신다고 해도 머물러 달라고 부탁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스스로 머무르시면서 가르침을 나눠주시겠다고 하니 이보다 고마울 데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합장하고 머리를 조아리자 춘매는 내심 못마땅했다. 노인이야말로 궤변을 주워섬기면서 빌붙어서 밥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속셈인 것이 빤히 보여서였다. 그래서 뭐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우창이 눈짓으로 막고는 서재로 안내했다. 노인도 두말없이 우창의 뒤를 따라왔다. 춘매도 그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한지 앞장서서 서재에 불을 켜고 찻물을 끓였다. 그 사이에 진명과 자원이 춘매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따라 들어왔다.

오늘은 스승님의 가르침도 없고 해서 심심하던 차에 춘매가 서재로 나오는 것을 보고 차나 얻어먹으려고 들어왔어. 호호호~!”

진명의 말에 춘매가 말없이 우창의 뒤를 따라오던 노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진명과 자원도 춘매의 눈길을 따라서 바라보다가는 진명이 댓돌에 오르려던 발을 다시 내려놓고는 노인에게 뛰어갔다. 갑작스런 진명의 행동에 우창도 놀랐다. 진명이 노인에게 다가가서는 바닥에서 절을 했다. 바닥에 평평한 돌을 깔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할 줄은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노인은 미소를 짓더니 진명을 향해서 말했다.

어허~! 이런, 이렇게 눈이 밝은 낭자가 오행원에 있었구려. 허허허허~!”

스승님께서 오행원을 찾아 주셨으니 이보다 큰 행운이 어디 또 있겠어요. 정말 깊은 감사를 드려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진명이 항상 허허롭게 웃으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 보다가 이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대하는 것을 본 자원과 춘매는 의아했지만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어볼 요량으로 노인이 안으로 들어가도록 길을 비켜줬다. 노인은 성큼성큼 진명을 따라서 서재로 들어갔고 환하게 밝혀 놓은 서재에 들어가자 진명이 상석에 앉도록 배려했고, 노인도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우창이 다시 노인에게 합장하고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큰 혜안으로 가르침을 주고자 하신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제라도 진명의 도움으로 알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노인도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네. 문전축객(門前逐客)에 하도 익숙해서 오히려 이렇게 나오면 내가 어색하다네. 허허허허~!”

우창은 진명이 어제 말한 것이 떠올라서 이렇게 응대했을 따름인데 노인은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이었던지 차를 따라 주자 받아서 마시면서 제자들을 훑어봤다. 그리고는 다시 진명에게 말했다.

낭자는 어떻게 그리 좋은 눈을 얻게 되었는고?”

진명이 옆에 앉았다가 노인이 묻자 공손히 대답했다. 그동안의 진명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자세를 보면서 모두 내심으로 놀랐다. 그리고 노인의 정체에 대해서 더욱 궁금한 마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뭐라고 말을 할 상황이 아님을 알고는 가만히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차만 마셨다.

스승님의 안내로 약간의 소득이 있었습니다. 어제저녁에 어르신을 모셔 왔다는 말씀을 듣고서 짐작했는데 오늘 뵈니 과연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요. 인연이 오행원까지 이끌어 주셨으니 우리 모두의 복인 줄을 알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진명이 다시 합장하고 말하자 이번에는 춘매가 조금 전에 나누는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아까 말씀해 주시려던 것을 마저 듣고 싶어요. 죄인집거는 알겠는데 단단한 돌은 무엇이며 춘매에서 금()을 찾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어요.”

춘매의 말에 진명과 자원도 무슨 말인가 싶어서 호기심이 동했다. 그래서 모두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자 노인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했다.

견백설(堅白說)의 단점(斷點)은 궤변(詭辯)이 맞아. 그러나 장점은 감각기관의 인식(認識)이 같지 않다는 것이라네. 눈은 흰 돌은 보지만 무게는 알 수가 없고, 손은 무게는 알더라도 돌이 검은지 흰지는 알 수가 없다는 뜻이란 말이지. 마찬가지로 자연을 바라볼 적에도 눈으로 빛을 보는 것과 코로 냄새를 맡는 것과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모두 다르단 말이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본 것을 흡사 귀로 들은 것으로 생각하거나, 코로 맡아 본 것을 눈으로 본 것으로 착각하는 일들이 흔하단 말이네. 춘매(春梅)를 보면서 이른 봄에 새빨갛게 핀 매화를 떠올리기도 하지만 그 앙상한 가지마다 가시들이 돋아나 있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고, 혹한의 냉기를 견디면서 봄을 기다리는 강건함도 생각할 수가 있으며 춘매라는 이름에서 희망을 놓지 않는 주체를 보기도 하는데 우창이 그러한 소식을 알고서 답을 했다는 것이 신기해서 해준 말이라네. 말하자면 칭찬이라고 할 수가 있지. 그런 답을 하는 사람을 만났던 것도 하도 오래여서 말이지. 허허허허~!”

노인의 장광설(長廣舌)을 들으면서도 춘매는 정확한 의미가 이해되지 않았으나 우창과 자원은 벌써 무슨 뜻인지를 바로 헤아렸다. 이렇게 춘매의 이름을 놓고서 한바탕 시험판이 벌어졌었다는 것을 알게 된 자원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싸부, 시험에 통과하신 것을 축하드려요. 호호호~!”

우창이 자원에게 미소를 띠고는 노인에게 감사의 합장을 했다. 그러자 춘매도 합장하면서 말했다.

춘매는 아직도 무슨 뜻신지 명쾌하지는 않지만 대략 느낌은 전해졌어요. 그렇다면 춘매의 토()와 화()도 있겠네요?”

자신의 아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주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라서 춘매는 내친김에 오행을 모두 들어보고 싶어서 질문을 퍼부었다. 그러자 노인도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명색이 오행원(五行院)이라면 하다못해 한 잔의 찻물에서도 오행을 읽어내야 하지 않겠나? 허허허허~!”

노인의 말을 듣던 우창이 궁금한 것을 물었다.

어르신께 여쭙습니다. 견백을 말씀하신 것을 다시 곰곰 생각해 보니까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것이 서로 다르듯이 다섯 사람이 보는 관점도 모두 다르다고 이해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춘매를 생각해 보면, 비록 오행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을지라도 궤변처럼 말해서 누구라도 반박(反駁)하지 못할 정도의 설명은 할 수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까?”

우창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아무렴~! 늙은이가 보기에 그대는 항상 이치에 맞는 진리에 대해서만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란 말이네. 세상의 일은 참으로 복잡다단(複雜多端)한데, 어찌 그렇게 지당(至當)한 말로만 어리석은 사람들의 머리를 일깨우려 하느냔 말이지. 때로는 기기묘묘(奇奇妙妙)하고 괴상망측(怪常罔測)한 논리가 진리를 압도(壓倒)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비로소 달변(達辯)이라고 하지 않겠나? 공손룡이 그래서 명성을 얻었듯이 말이네. 무예(武藝)에는 취권(醉拳)도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나? 허허허~!”

노인의 말에 우창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아찔했다. 평소에는 항상 합리적인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노인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것조차도 집착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제자가 어리석어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자비심을 베풀어서 조금만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렇게 물은 것은 우창도 우창이지만 같이 듣고 있는 자원과 진명을 위해서도 한 말이었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자원이나 진명에게 이해가 부족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한몫했기 때문이었다. 우창이 묻자마자 노인도 답을 쏟아냈다.

오호~! 이 늙은이의 입을 빌어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속셈인가?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로군. 허허허~!”

노인은 이미 우창이 이해했으면서도 다시 묻는 것에 대한 의도를 파악했다는 듯이 이렇게 한바탕 웃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대가 생각하는 대자연은 꽃피고 새가 날며 가을에는 나무가 열매를 맺는 풍경이란 말이네.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의 풍경이로군.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던가? 폭풍우(暴風雨)가 몰아치기도 하고 오뉴월에 서리가 내리기도 하는 것이 대자연이 아니던가? 이렇게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이 일어나는 곳도 틀림없는 자연이라는 것을 알면서 짐짓 모르는 척을 한단 말인가?”

이렇게 말하던 노인은 차를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가 하면 인생살이는 또 어떤가? 진리를 알면서도 얼렁뚱땅하고 눈 한번 꿈쩍하면서 이익을 챙기는 장사꾼도 당연히 인생의 한 부분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자연과 인간사가 둘이 아니라고 할 수가 있으려면 이러한 것에 대해서도 능수능란(能手能爛)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나? 때로는 말하기 귀찮으면 잠든 것처럼 하기도 하고, 또 말을 깨닫지 못하면 몽둥이로 후려쳐야 할 필요도 있단 말이네. 예전에 임제(臨濟)라는 화상이 제자를 가르치면서 귀청이 찢어지라고 ~!’을 외친 것이나, 동산(東山) 화상이 부처를 묻는 제자에게 몽둥이를 들고 달려든 이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부디 그대의 깨끗하고 순수한 것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알량한 관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한갖 글방의 서생(書生)에 불과할 따름이라는 말이네. 허허허허~!”

이렇게 말을 마친 노인이 목이 마르다는 듯이 다시 차를 한입 가득 마셨다. 그것을 본 진명이 노인에게 말했다.

큰 스승님의 기운이 왜 청광(淸光)인지를 이제야 알겠어요. 생생(生生)하고 역력(歷歷)한 체험(體驗)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종횡무진(縱橫無盡)하는 것이 영락없는 목기(木氣)를 누리고 계신 까닭이었네요. 우창 스승님은 금기(金氣)를 누리고 계셔서 자명(自明)하다면 큰 스승님께서는 고요한 것을 바람처럼 한바탕 휘저어서 변화를 가르치는 까닭임을 알겠어요. 호호호~!”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노인이 진명을 보면서 말했다.

그것참 요물일세~! 허허허허~!”

노인의 말에는 말하는 것이 예쁘고 귀여워서 맘에 쏙 들었다는 의미가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실체를 이 정도라도 파악한 것에 대한 칭찬이기도 했다. 진명이 노인에게 물었다.

큰 스승님의 존호(尊號)를 아직도 여쭙지 못했어요. 이제 내력에 대해서 좀 말씀해 주실 때가 되셨어요. 그러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는 우리가 잠을 이룰 수가 없겠어요. 어서 말씀해 주세요.”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노인을 바라보면서 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