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 제35장. 우성암(牛聖庵)/ 5.사도(師道)

작성일
2022-12-30 03:28
조회
916

[421] 제35장. 우성암(牛聖庵) 


5. 사도(師道)


========================

우창이 설명을 듣고 있던 화련 보살이 손을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신세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손을 들자 우창도 일순 긴장하면서 물었다.

“보살께서 궁금하신 것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화련이 조용히 물었다.

“스승님께 이러한 말씀을 여쭙는 것이 어쩌면 무례(無禮)라고 할 수도 있겠어요. 그래도 궁금해서 여쭤보고 싶네요.”

“어떤 것도 좋으니까 기탄없이 말씀하셔도 됩니다.”

“실은, 스승이란 무엇인지 여쭙고 싶어서요. 이런 질문도 가능할지? 괜히 여러분의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망설이게 되네요. 그래도 말씀해 주신다면 고맙겠어요.”

화련 보살의 말을 듣고 다른 제자들도 우창의 답이 궁금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우창도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으나 비록 미리 생각하지 않았더라도 지금 생각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말했다.

“보살님께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스승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시니 이것이야말로 학문의 길을 가기로 했다면 반드시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창도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같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화련이 합장으로 감사함을 표했다.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선, 사(師)의 뜻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은데 여기에 대해서는 염재가 넓은 상식을 갖고 있으니 할 말이 있다면 청하겠네.”

염재도 우창의 설명이 궁금하던 차에 자기에게 글자에 대한 의견을 묻자, 다행히 약간의 연구가 있어서 말했다.

“스승님께서 하문(下問)하시니 부족한 상식으로나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행여라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이어서 설명했다.

“사(師)는 원래 군대에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다섯 사람을 오(伍)라고 합니다. 이것은 다섯 사람이 앞에서 줄을 맞춰서 서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오(伍)가 다섯이면 그것을 양(兩)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인원으로 말하면 25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 양(兩)이 다섯이면 졸(卒)이라고 합니다. 졸의 인원은 125명이 됩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여기저기에서 붓을 꺼내 들고는 적느라고 바빴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내 잊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것을 본 염재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졸(卒)이 다섯이면 그것을 여(旅)라고 합니다. 여는 여단(旅團)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1여(旅)는 인원이 625명이 됩니다. 그리고 여(旅)가 다섯이 되면 그것을 사(師)라고 하지요. 1사(師)는 3,125명입니다. 이것을 사단(師團)이라고 합니다. 이로 미뤄서 보건대, 3천 명을 이끌만한 정도의 역량(力量)이라면 비로소 스승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사단장(師團長)을 장군(將軍)이라고 하고, 전쟁할 적에 깃발에다가 수(帥) 자를 써서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장은 장수 수(帥)라고도 합니다. 수(帥)와 사(師)의 글자는 같은 뿌리라고 보겠습니다. 두건 건(巾)은 두건을 두르고 전장(戰場)을 누비는 장수(將帥) 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을 원수(元帥)라고도 합니다. 두를잡(帀)은 학문을 가르치는 곳에 울타리를 두르고 3천여 명이 모여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봤습니다.”

비록 복잡한 이야기였으나 염재가 차근차근 설명하자 모두가 잘 이해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우창이 물었다.

“염재의 말을 들어보니 비로소 사(師)의 뜻이 명료해지는군. 그렇다면 글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풀이를 할 수가 있을까? 가능하면 여기에 대해서도 풀이를 부탁하고 싶네.”

염재는 우창의 질문이 항상 매섭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은 없었다. 알면 아는 대로 말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염재가 말했다.

“사(師)의 왼쪽에 있는 글자는 쌓일퇴입니다.”

이렇게 말한 염재가 글자로 썼다.

421-1

“이 글자는 흔히 따로 사용하지는 않는 글자입니다. ‘쌓인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학문이 쌓이거나, 군졸(軍卒)이 쌓이거나, 무엇이든 많은 세월을 차곡차곡 쌓았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입구(口)가 겹쳐 있는 것도 어쩌면 나이를 많이 먹어서 지혜가 쌓였다는 의미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구나. 전혀 생각하지 못했네. 오른쪽의 두루 잡(帀)은 건(巾)을 두른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위에 일(一)이 있는 것으로 봐서 큰 깃발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군. 그러니까 이것을 조합(組合)한다면, 3천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자신의 깃발을 드날리는 것이라고 정리하면 되지 싶은데 어떤가?”

우창이 염재를 도와서 정리해 주자 염재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제자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망설이던 차에 스승님께서 정리해 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러니까 학문의 세계가 넓고 깊어서 일문(一門)을 이룰 만한 정도의 경지(境地)에 도달한 분을 스승이라고 하면 되지 싶습니다. 이상이 제자가 알고 있는 기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스승님의 말씀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큰 도움이 되었군. 고맙네. 그러니까 스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如實)히 보여주는 뜻이었군. 3천 명의 사람을 안내한다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잖은가? 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제자가 3천이 되어야 스승이라는 뜻은 아닐 것으로 보네. 그만큼의 역량이 된다면 그를 일러서 스승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그래서 공자나 부처가 스승의 반열에 오른 것이지만 비록 제자는 없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사상(思想)이나 깨달음을 이뤘다면 이미 그도 스승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군.”

“잘 알겠습니다.”

염재와 말을 마친 우창이 이번에는 화련을 향해서 말했다.

“이제 스승의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師道)란 보살도(菩薩道)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보살도의 의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창이 이번에는 화련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갔다. 화련도 이러한 분위기가 좋았는지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조용조용하고도 또렷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자가 알기로 보살은 보리살타(菩提薩埵)를 줄인 말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우리 말이 아니라 인도에서 전래 된 말이죠. 의미는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한다’는 뜻이라고 해요. 풀이하면, ‘위로는 스스로 진리의 깨달음을 구하면서 길을 못 찾은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길을 안내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랍니다. 과연 스승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르지 않아 보여요.”

“아하, 그런 뜻이 있었군요. 잘 알겠습니다. 보살의 길과 스승의 길이 서로 많이 닮아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스승이란 후학(後學)을 이끌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여기에 잘 어울리는 말이 있다면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는 진명이 손을 들고 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에 ‘온고이지신’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뜻인지 알고 싶어서 여쭙습니다.”

진명이 이렇게 묻자 우창도 그 의미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도록 풀어서 설명했다.

“온고(溫故)라는 말은 이미 옛사람들이 가르친 것을 잘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네. 또 지신(知新)이라는 말은 알던 것을 더욱 새롭게 한다는 의미가 되니까 단순히 책이나 가르침으로 전달받아서 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은 ‘온고이지신’이라고 할 수가 없지. 전해 받은 것은 다시 자신의 역량으로 더욱 새롭게 다듬고 키워서 전해줘야 하는 까닭이라네. 이렇게 설명해 주면 알겠는가? 네 글자로 하려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이라고 해도 뜻은 같아.”

진명이 이해되었다는 듯이 합장했다. 우성암에서 공부하다가 보니까 저절로 마음의 표현에는 합장이 되는 것도 신기했다. 예전에는 감사의 표현을 공수로 했었는데 자연스럽게 화련의 모습을 보고 닮아가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한 우창이 다시 말했다.

“옛것을 배우는 것은 아무래도 쉽다고 하겠지. 그러나 그것을 더욱 새롭게 다듬는 것에는 스스로 깊은 사색과 실제로 겪은 체험이 포함되어야 하므로 쉬운 일이 아닌데, 이러한 것을 하지 않는다면 스승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라네.”

“그렇다면 과연 스승님은 참스승이시네요. 항상 어제에 집착하지 말고 오늘을 살펴보라고 하시니까요. 호호호~!”

진명이 우창을 스승으로 모시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지가 손을 들었다. 이렇게 이야기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것은 우창도 바라던 바였다. 우창이 현지를 말없이 바라보자 현지가 말했다.

“예전에 혜암도인을 따라다니면서도 배웠고, 이제는 우창 스승님께도 배우잖아요? 그래서 비교를 할 수가 있는데, 두 분의 가르침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말하자면 혜암도인께서는 일정한 기준이 없어요. 문득 생각이 나면 말씀해 주시고, 또 물으면 답을 주시지만, 일부러 일정한 계획을 세워서 가르치는 것은 관심이 없으신 것으로 보여요. 그래서 자유롭게 떠돌면서 발길이 닿는 대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시는 모습인데 스승님은 반드시 기승전결(起承轉結)이 있어서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제대로 활용을 할 수가 있는 사람을 만들려고 애쓰시는 것도 느껴졌어요. 그래서 문득 왜 혜암도인께서 현지를 스승님께 떠맡기고 훌훌 떠나가셨는지를 짐작하겠어요. 그것조차도 자비심이고 사랑이라고 느껴져서 말이에요.”

이렇게 말하면서 얼굴이 복잡하게 보였다. 혜암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이 교차하는 느낌이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우창이 말했다.

“평소에도 항상 걸리는 것을 싫어하셨으니 아마도 그러셨나 봅니다. 남의 스승이 된다는 것에는 그만큼의 책임도 따르니까요. 그리고 스승에게서 배운 자만이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는 생각도 합니다. 나름대로 체계적인 과정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실은 나중에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더라도 문제없이 전달할 수가 있도록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이 없지 않습니다. 항상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도록 힘쓰겠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하나씩 질문을 하자 가만히 있던 거산(居山)도 묻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지 손을 들었다.

“거산도 궁금한 것이 있었나? 말해 보게.”

“제자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따르면서 배워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서당에서 약간의 학문을 익히기는 했습니다만, 그것은 어려서 부모님께서 시키는 일이니까 그대로 따랐을 따름이지요. 그런데 스승님과 동행하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여쭙고 싶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승과 선생(先生)의 차이가 무엇일지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의미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으로 봐서 차이가 없지 싶은데 느낌은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우창이 거산의 말을 들으면서 잠시 생각해 봤다.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를 정리하지 않으면 자칫 거산에게 혼란을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일행을 열심히 따르면서 하나라도 배우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스승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말했으니 대략 이해가 되었을 것으로 보네. 그렇다면 선생과는 무엇이 다를까? 지금 생각해 보니 자연의 이치를 가르치는 자는 스승이라고 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는 자는 선생이라고 하면 어떨까? 물론 이것은 칼로 무를 자르듯이 선명하게 구분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지. 살아가는 것에도 자연의 이치는 있기 마련이고, 자연의 이치를 가르친다고 해서 살아가는 이치를 도외시(度外視)하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네.”

우창이 이렇게 답을 하자 거산이 다시 물었다.

“예전에 듣기를 ‘주자(朱子)가 잘못 써놓은 것을 후학이 고치지 못했다’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스승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산도 나이에 비해서 통찰력이 깊었다. 질문하는 것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우창이 다시 설명을 이었다.

“오호~! 거산의 공부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구나.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항상 혼돈과 깨달음으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자가 잘못 말한 것이 무엇인지는 아는가? 내가 어떻게 말을 할 것인지는 그 원인부터 이해하고서 나서야 설명을 할 수가 있지 싶어서 말이야.”

우창이 다시 묻자 거산이 들었던 이야기를 정리해서 말했다. 이야기는 모든 대중이 즐거워하는 바였다. 상식도 추가하면서 머리도 식히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涇以渭濁(경이위탁),湜湜其沚(식식기지).」라고 했답니다. 이 의미를 풀이하면, ‘경수는 위수를 만나면 흐려지지만 그래도 가끔은 그 흐려짐이 맑아지기도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위수(渭水)는 그 물빛이 탁하고, 경수(涇水)는 맑은 물이라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20221230_153810[참고자료: 위수와 경수의 사진]


이야기를 듣던 우창이 거산의 말에 동의했다.

“그렇지. 거산의 이야기로 봐서는 주자가 그것을 반대로 말했다는 의미인가?”

“맞습니다. 주자는 『주희집전(朱熹集傳)』에서 말하기를 「경탁위청(涇濁渭淸)」이라고 했으니 이것을 풀이하면 ‘경수는 탁하고 위수는 맑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주자가 시경을 풀이하면서 착각(錯覺)해서 써놓은 것으로 누가 봐도 명백한 오류(誤謬)이지만 아무도 그것에 대해서 고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스승님이시라면 어떻게 대하실 것인지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20221230_160401참고자료: 경수는 위수로 흐르고 위수는 황하로 흐르는 지도]


“과연 거산은 공부하는 학자로군. 그렇게 발전하는 것이라네. 내가 그 구절에 대해서 언급할 기회가 있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주자의 착각이므로 이렇게 바로 잡는다’고 말을 했을 것이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보는 것은 과거의 주자에 갇히지 말고 오늘의 주자가 되어서 밝음을 추구하는 까닭이라고 해 둘까?”

“오, 염재는 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스승의 길에도 등급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상중하로 논할 수가 있다면 어떻게 논할 수가 있을지요? 이것은 앞으로 우리의 마음가짐에도 중요할 것으로 생각되어서 여쭙습니다.”

“그렇지, 생각하기에 따라서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겠지만 대략적(大略的)으로 구분을 할 수는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네.”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우선 하급(下級)의 스승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하급이라면 지식(知識)의 전달자(傳達者)에 머무르는 경우가 아닐까 싶네. 그야말로 책이나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그대로 베끼듯이 전달하는 경우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네. 이런 스승을 판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질문을 자주 하면 알게 되니까 말이네.”

“단지 질문하는 것으로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만약에 그 스승이 단순한 전달을 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질문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하겠는가? 아니면 두렵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이론적인 것만 습득하고 실제의 상황에서는 경험을 쌓지 않는다면 책에 나온 것은 답을 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라면 답을 하기가 곤란할 수가 있겠지? 그러니까 질문하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울 것이네. 그래서 질문은 받지 않는다고까지 하면서 가르치는 스승도 있다고 들었네. 그런 사람에게는 깊은 이치를 체득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이런 스승에게 공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얼른 새로운 스승을 찾아서 떠나야 하지 않겠나?”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런 경우라고 한다면 스승의 자질(資質)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스스로 확실하지 않은 이론이나 배우기만 하고 확인하지 않은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3천의 군사를 통솔하고 이끌 능력이 부족한데도 어쩌다가 스승이 되어서 고생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오히려 스승이 아니라 선생이라고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겠군. 하급의 스승은 선생이라고 해도 되겠네. 다음으로 중급(中級)의 스승이라고 한다면 가르침과 체험을 모두 잘 겪었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네. 다만 지나치게 권위(權威)를 내세울 수가 있네. 자신이 깨달은 것이 세상에서 유일한 이치인 것처럼 도도하게 굴면서 행여라도 반문(反問)하는 제자가 있으면 잡아먹을 듯이 공격을 할 수도 있다네. 이러한 스승이라면 하급은 면했으나 아직도 아집(我執)에 갇혀서 항상 새롭게 진화하려는 마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네. 그렇다면 성장을 멈춘 고목(枯木)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지. 고목에는 싹이 돋지 않는 것처럼 그러한 스승에게서 공부한다면 보고 배우는 것도 딱 그만큼 일 테니 바람직한 스승이라고 하기는 어렵지 싶군.”

“대부분의 훈장님은 그러하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제자가 어려서 공부했던 글방의 훈장님도 가르침에 의문을 품고 여쭙고자 하면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자칫하면 회초리를 불러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서 문득 그분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맞겠지요?”

“크게 틀리지 않는다고 하겠네. 아마도 중급의 스승이 가장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 그야말로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을 따름이고, 교학상장(敎學相長)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겠지. 조금 전에 거산이 물었던 주자의 오류를 그대로 전승(傳承)하고 고치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호들갑을 떨게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하하~!”

“아, 교학상장은 ‘제자를 가르치면서 자신도 깨우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과연 그렇겠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지상최대(地上最大)의 지식이며, 여기에 새로운 깨달음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스승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상급(上級)의 스승은 어떻겠습니까?”

“남들이 보면 스승인지 제자인지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로 토론을 할 적에는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문답(問答)을 즐길 것이네. 그리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하는 제자를 가장 예뻐할 것이네. 왜냐면 그런 제자야말로 자신의 게으름을 채찍질할 것이기 때문이라네. 그러한 스승이라면 행여라도 제자를 자신의 아집에 의해서 잘못된 길로 안내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런 스승도 있겠습니까?”

“왜 없겠는가? 어제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오늘 깨닫게 되면 즉시로 그것을 솔직(率直)하게 말해서 제자들이 하루라도 헛된 가시밭길을 방황하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일 테니 자칫하면 함량(含量)이 부족한 스승으로 보일 수도 있다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하급의 스승과는 그 궤(軌)를 달리한다네. 항상 의식은 깨어있기에 무슨 질문이라도 기꺼워하고 궁리하면서 제자의 물음에 응답하고자 하는데 때로는 답을 찾느라고 며칠이 걸리더라도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이네.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나는군. 어디 한 번 들어볼 텐가?”

“물론입니다. 스승님.”

“어느 암자에 고승이 계셨는데 그 절의 신도로 다니던 여인이 하루는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왔더라네. 여인이 아이를 마당에서 뛰놀라고 하고서 고승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대사님 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건강이 걱정될 정도이니 그것을 먹지 말라고 한 말씀만 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지.”

“그럴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은 원래 단 것을 좋아하니까요.”

“그런데 고승은 아이를 한참 바라보더니 보름 후에 다시 데리고 오라고 말을 하더라는 거야. 그래서 여인은 참 이상한 일도 있다는 생각했지. 그냥 한 말씀만 해 주면 될 텐데 뭘 다시 오라고 하나 싶었던 것이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다시 보름 후에 아이를 데리고 찾아갔더라네. 그런데 고승은 다시 보름 후에 오라고 하더라는 거야. 여인은 슬며시 화가 났을 테지만 그래도 존경하는 스님인지라 꾹꾹 눌러 참고서 다시 보름 후에 찾아갔더라네.”

“제자가 생각해도 좀 이상하기는 합니다. 왜 그러셨는지 궁금합니다.”

“다시 보름 후에 찾아가자 그제야 고승이 말을 하더라는 거야. ‘아가야 사탕을 많이 먹으면 건강에 안 좋을 수가 있으니 이제부터는 하루에 하나씩만 먹거라.’라고 말이지. 아이도 알겠다고 했는데 정작 아이의 어머니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고승에게 물었다네. ‘그 말씀을 하시는데 왜 그렇게도 어렵게 말씀하셨어요?’라고 말이지. 그러자 고승이 답을 하더라는 거야. ‘실로 나도 사탕을 좋아해서 그것을 끊지 못했는데 나도 끊지 못하면서 어린아이에게 끊으라고 말을 차마 못 하겠더군. 그런데 보름이면 끊을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보름이 되어도 사탕이 생각나서 안 되지 않겠나. 그래서 다시 보름을 더 노력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사탕을 봐도 먹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았네. 그제야 아이에게도 말을 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라네. 허허허~!’라고 하셨다더군.”

그 말을 듣고 모든 대중이 감동했다.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은 가르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떠올라서였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상대에게는 좋아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같은 말이기 때문이었다. 염재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의 말씀에는 참으로 깊은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말로만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알 것처럼 말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그 이치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러한 말을 듣는다면 큰 깨우침이 되겠습니다. 이러한 스승이야말로 최상급(最上級)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네. 어떤 스승은 자신의 학문에 대한 반성은 없고, 자신은 경사(京師:首都)의 태학(太學)에서 공부했다는 것이나 크게 써 붙여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는 경우도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더군. 그래서 큰 기대를 하고서 찾아갔다가는 상처만 안고 떠나는 경우도 허다할 것이네.”

“맞습니다. 자신의 학문을 보여주는 스승도 있고, 자신의 스승이 위대하다는 것만 떠벌리는 스승도 있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연구하지는 않고 공자님이 위대하다고만 떠드는 사람도 같은 부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지. 참으로 맞는 말을 했군. 그러니까 스승을 만나는 것도 저마다의 인연이겠지만 일단 만난 다음에는 무엇을 배울 것이며 무엇을 가르치는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네. 스승 된 자의 마음도 항상 열어놓고 연구하지 않는다면 또한 맹인(盲人)이 길을 안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냔 말이네. 물론 나도 그래서 게으르지 않으려고 노력은 하지만 천성이 우둔하니 그대들이 불행할 따름이네. 하하하~!”

우창의 말에 모두 웃었다. 그러자 이야기를 열심히 듣고 있던 화련이 말했다.

“화련의 어쭙잖은 질문으로 인해서 이렇게나 많은 공부를 하게 되었어요. 화련이 보기에는 스승님이야말로 참선(參禪)을 수행하는 선사(禪師)라고 해야 할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이렇게나 후학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가르친다면 어찌 잘못된 길로 안내할 까닭이 있겠나 싶어서 말이지요. 이참에 화련도 오행의 이치와 자연의 공부를 제대로 좀 해봐야 하겠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합장하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존경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인사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우창은 마음에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제대로 안내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도 겹쳐 들었다. 다만 오늘 아는 만큼만 가르칠 뿐 억지로 잘하려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거산이 손을 들었다.

“오, 거산은 또 어떤 고견이 있는지 말해 보게.”

“아닙니다. 스승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스승의 길에 대해서 이해하고 보니까 이제는 제자의 길에 대해서도 한 말씀을 청해 들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승님의 명쾌한 가르침을 청합니다.”

거산이 이렇게 말하자 이번에도 대중들의 이목이 우창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알고 싶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