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 제35장. 우성암(牛聖庵)/ 2.소용돌이의 중심(中心)

작성일
2022-12-15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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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제35장. 우성암(牛聖庵) 


2. 소용돌이의 중심(中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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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산새 소리를 들으면서 잠이 깬 우창이 뒷산으로 향했다. 맑은 기운과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산에 오르면 좋을 것만 같아서였다. 뒷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리 험하지 않아서 산책길 정도로 여겨도 좋을 만큼 완만했다. 어제의 고된 수련으로 인해서 다리가 뭉친 것 같아서 아팠지만 움직여야 풀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수우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저 멀리 동평호가 조그마하게 보일 정도로 날씨가 맑았다.

‘기공(氣功)이라.....’

우창은 어제 처음으로 체험해 본 기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분명히 인공적인 목적에 의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보면 되지 싶었다. 왜냐면 그러한 기공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일상에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인데 그 엉거주춤한 자세로 몸을 비틀어서 집중하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서 미지(未知)의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은 셈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자연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를 인위적(人爲的)인 노력을 해서 바꾸려는 것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돌아오니까 염재가 마당을 거닐다가 우창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스승님, 산책 다녀오십니까? 그러지 않아도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여쭙고 싶었습니다.”

“아, 염재구나. 새벽바람이 상쾌해서 한 바퀴 돌았네. 궁금한 것은 뭐지?”

“실은 어제 기공의 수련을 해보고 많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오행을 공부할 적에는 마음이 편안하고 궁리하는 즐거움도 컸는데 기공을 해보니까 왠지 힘들고 거북한 느낌이 들었는데 왜 그런지에 대해서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아, 염재도 그랬구나, 실은 나도 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던 중이었네. 곰곰 생각해 보니까 아마도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어서가 아닐까 싶었네.”

“예? 그렇다면 자연의 흐름을 거스른다는 것은 결국은 순응(順應)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지.”

“왜 그렇게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고자 합니까?”

“인간이기에 그러는 것이라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닌 모든 생명체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데 유독 인간만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다는 의미입니까?”

“그렇다네. 특히 인간 중에서도 선도(仙道)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자연을 거스르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

“아니, 선도를 수련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순응해서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도인술(道引術)이나 호흡법(呼吸法)은 대부분 선도를 수련하는 곳에서 나왔다고 본다면 결코 자연의 이치에 순응한다고 보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지. 우선 호흡법도 그렇지 않은가?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면 되는 것에 방법을 만든다는 것만으로도 인위적으로 자연의 흐름을 그슬려서 불로장생(不老長生)을 꿈꾼다면 이것이야말로 자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니겠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염재도 곰곰 생각하더니 또 새로운 의문이 꼬리를 문다는 듯이 물었다.

“아, 이제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선도는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는 것이라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대각(大覺)을 이뤘다는 부처는 그러한 수행을 했습니까? 설산(雪山)에서 고행(苦行)하며 깨달음을 추구한 것을 보면 그것도 또한 자연의 이치는 어긴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여쭙습니다.”

“내가 부처에 대해서 많이 듣지는 못했으나 들어본 바로는 부처가 기공을 연마했다는 말은 못 들었네.”

우창이 그간의 상식을 떠올리면서 말하자 염재는 다시 물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대성(大聖)이신 공자는 어떻습니까?”

“그에 대해서도 내가 들은 바로는 특별히 기억나는 이야기가 없군.”

“그렇다면 성인들이 깨달음을 위해서 기공을 연마하지 않은 이유가 있겠습니까?”

“감히 그들의 생각조차 안다고 말을 할 수가 있겠나? 하하하~!”

“물론 그렇습니다만, 스승님의 견해가 궁금해서 여쭙습니다.”

염재는 진지하게 기공의 수련에 대해서 우창에게 묻고 있었다. 우창도 대충 둘러댈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또 뭔가 깨달음의 실마리를 얻게 될 수도 있으므로 생각을 정리해서 말했다.

“생각해 보니, 정신적(精神的)인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이러한 수련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네. 알다시피 선인(仙人)은 장생불사(長生不死)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그것은 육신을 오래도록 살아있게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건강장수를 이루기 위해서 이러한 방법을 찾아내지 않았을까 싶군. 문득 대승(大乘)과 소승(小乘)의 관계가 떠오르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나?”

“예, 큰 수레와 작은 수레에 대한 말씀인가 싶기는 한데 의미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아, 모르는구나. 원래는 소승이라는 말이 없었지. 그냥 수행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네. 수행의 목적은 해탈(解脫)에 있었다네. 해탈은 스스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네.”

“그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누구라도 수행한다면 정신적으로 자유로움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맞아, 그런데 나중에 다른 무리가 나와서 자신들은 대승이라고 했다는 거네.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기존의 이론을 주장한 사람들은 소승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라네.”

“그렇다면 대승의 수련은 해탈하지 않습니까?”

“물론 해탈하는데 여기에 추가로 붙는 것이 있었던 것이지.”

“추가로 무엇이 붙는다는 말씀이신지.....?”

“대승은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를 주창(主唱)했다네.”

“그 의미는 ‘너와 내가 동시(同時)에 불도(佛道)를 이룬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것이 대승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혼자서 깨달음으로 가는 것은 작은 수레라고 한 것이 그러한 의미에서 나온 것이라네. 대승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나 혼자만이 아니라 같이 가자는 이야기였으니까 말이네. 그것을 보살도(菩薩道)라고 했다더군.”

“아, 이제야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홀로 성불하는 것은 소승이고, 함께 성불하는 것은 대승이라는 뜻이지요?”

“맞아.”

“그렇다면 부처도 소승이었습니까?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왕궁과 부왕을 버리고 야밤에 도주했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건 좀 다른 문제라네. 그가 깨달음을 얻고서 혼자서 고요함을 즐기다가 떠났으면 소승이지만, 중생교화를 했으니까 대승이라고 봐야지. 즉 도를 이룬 다음에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대승과 소승으로 나눌 수도 있다는 말이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것과 기공을 수련하는 것이 무슨 관계인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그러한 성현들이 수련하지 않았던 이유가 궁금해서 해본 생각이었다네. 신선은 자신의 영생불사를 바라면서 수행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여인의 몸에서 기운을 취한다는 방중술(房中術)까지도 연구한 것을 보면서 해본 것이네. 하하하~!”

“혹시 스승님은 어제 하루의 수행으로 이미 지치신 것은 아닙니까? 왠지 그러한 느낌이 조금 들기도 합니다.”

“어허~! 내 속을 들킨 셈인가? 염재는 어땠나?”

우창이 그렇게 말하면서 염재의 의견을 물었다. 실로 우창은 이렇게 몸을 괴롭히면서 수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 그러셨습니까? 그런데 제자는 무척 좋았습니다. 마치 땅과 하늘을 하나로 이어주는 제 몸이 된 듯한 느낌이어서 그야말로 공(工)자가 떠올랐습니다. 문득 이렇게 하다가 보면 신선(神仙)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조차 들었거든요. 그런데 스승님의 느낌은 좀 다르셨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맞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이게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싶은 생각 말이네. 마치 사마귀가 파리를 노리고 있는 것처럼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도 했다네.”

“그러셨습니까? 참으로 의외입니다. 그래서 부처나 공자는 기공을 수련했느냐는 생각까지도 하셨단 말이지요? 참 재미있습니다. 하하~!”

이렇게 웃던 염재가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서는 기공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신 것입니까? 설마하니 깨달음으로 가는 도구라고 생각하셨던 것은 아닙니까?”

우창은 염재의 말을 듣고서야 기공은 정신의 수련이라기보다는 몸을 단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몸을 수련하는 것이라면 정신세계에서 다룰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군. 기공은 몸을 단련하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하겠네. 어쩌면 몸을 바탕으로 삼고 수련해서 정신세계로 들어가는 우회법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군. 그러니까 기공만 수련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다만 천지(天地)의 기운(氣運)과 하나가 되는 방법이라고 보면 어떻겠습니까? 어제 연마한 자세를 생각해 보면 나선형(螺旋形)으로 비틀었잖습니까? 이렇게 비트는 것은 기운의 소용돌이가 움직이는 것과 같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순환도 같은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지상(地上)의 기운이 나선형을 이루는 이치에 대해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 태극권(太極拳)을 연마하면서 노사(老師)께 들었던 이야기로는 그냥 쭉 뻗는 것은 돌려서 뻗는 것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가 이와 같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 들은 말로는 그러한 원리를 발경(發勁)이라고 했습니다.”

평소에는 과묵하던 염재가 기공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말을 잘하는 것도 우창에게는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을 뻗는다는 발경(發勁)에 대해서는 지광에게 물어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아침을 먹으라는 거산의 말에 식당으로 향했다. 조촐하지만 정갈한 아침밥을 먹고는 차담(茶談)의 시간에 우창이 지광에게 물었다.

“형님께 여쭤볼 말씀이 있습니다.”

“오, 뭔가?”

“염재가 말하기를 태극권의 수련에 발경(發勁)이 있다고 했습니다. 어제 기공의 자세에서도 나선형(螺旋形)의 동작이 느껴졌는데 이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인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무슨 말인가 했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하셨네.”

이렇게 말한 지광이 모든 제자에게 주목하라고 이르고는 저마다 편한 자세로 차를 마시다가 지광의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염재도 옆에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아우가 말한 발경은 회전하면서 움직이는 것을 말하네. 가령 돌 팔매질을 하더라도 그냥 던지는 것보다 돌을 회전시키면서 던지게 되면 더 멀리 날아가는 이치와 같은 것이라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소용돌이라고도 하지. 소용돌이는 어디에서 볼 수가 있던가?”

지광이 대중을 보면서 묻자, 거산이 손을 들고 말했다.

“태풍이 불어올 적에도 소용돌이가 흙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봤고, 하천에 물이 범람할 적에도 물이 구멍으로 빨려들어 가면서 소용돌이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산이 말하자 지광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중을 둘러봤다. 모두가 동의한다는 듯한 표정을 보고는 이어서 말했다.

“맞았어. 거산이 말한 대로 소용돌이는 자연의 현상에서 기운이 폭발적으로 움직일 적에 보인다네. 그런데 기운이 강력할 적에는 눈으로 볼 수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소용돌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번의 물음에는 거산도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지광이 화련 보살에게 물었다.

“보살님 혹 송화분(松花粉)이 있습니까?”

그러자 화련 보살이 말했다.

“그야 송화 떡을 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려고 지난봄에 말려둔 것이 있지요.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한 줌이면 됩니다. 좀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지광이 말하자 부탁받은 화련 보살이 송화가루를 담은 주머니를 들고 와서 건넸다. 그러자 지광은 그것을 받아 들고는 말했다.

“자, 뒷산으로 가보세. 내가 재미있는 것을 보여주지.”

지광의 말에 모두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는 뒷산으로 향했다. 뒷산이라고 해봐야 바위의 옆으로 타고 올라가는 길이었고, 잠시 후에 바위 위로 올라갈 수가 있었다. 모두 자리를 잡고 서자 지광은 잠시 허공을 응시하더니 약한 실바람을 등지고서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에서 노란 가루를 한 주먹 집어서 허공에다 뿌렸다. 그러자 송화가루는 삽시간에 허공에서 맴돌면서 날아올랐다. 그것을 지켜보자 과연 바람이 강하지 않았는데도 저마다 소용돌이를 만들면서 날아올랐다.

“자, 어떤가? 이와 같다네.”

지광이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그 장면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마치 허공에서 숨은 비밀을 송화의 가루가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명료하게 움직이는 것이 신기해서였다. 잠시 그렇게 맴돌던 가루들이 모두 어디론가 날아서 사라지고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지광을 보면서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귀를 기울였다.

“공기나 물만 소용돌이가 아니라네. 칡덩굴이나 등나무 덩굴도 소용돌이를 치면서 움직인다네. 세상의 만물은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있지. 하다못해 새벽에 피어나는 나팔꽃조차도 그러하니 더 말해서 뭣하겠나 싶군.”

지광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에 잠긴 우창이 말했다.

“과연 형님이십니다. 문자로 설명할 수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발경의 이치를 알겠습니다. 그런데 다시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자연의 모든 것이 소용돌이를 치는 이치가 궁금합니다.”

우창이 다시 궁금한 것을 묻자 지광이 웃으면서 말했다.

“하늘의 일월성신(日月星辰)은 회전하는가?”

“그렇게 보입니다. 태양도 돌고, 달도 돌아가지 않습니까?”

그렇다네. 춘하추동은 회전하는가?

“당연합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네. 반복(反復)은 다시 돌아온다는 뜻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춘하추동은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

지광이 이렇게 묻자 우창도 잠시 생각해봤다. 올해의 봄이 작년의 봄과 같은 것인지를 묻는 뜻은 알겠는데,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가 바뀌면 태세(太歲)가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른데 단지 봄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복했다고는 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한 다음에 말했다.

“반복이 아니지요. 그래서 나선형이라고 하는 것일까요? 비슷하지만 작년의 봄이 올해에도 돌아왔다고 하기보다 시간으로 본다면 이미 한 해가 지나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지광도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당연하다네. 모든 이치는 직선(直線)이 아니라 나선(螺旋)이라네. 그리고 나선은 흐름을 따르는 것이고, 직선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기도 하다네. 마차는 직선으로 가는가? 아니면 나선으로 가는가?”

“마차는 당연히 직선이 아닙니까?”

“달리는 사람은 어떤가?”

“그것도 같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창의 답변에 지광이 흡족한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그렇다네. 그래서 힘이 드는 것이라네. 만약에 나선으로 움직인다면 힘이 훨씬 덜 들여서 움직이게 될 것이네. 그러나 마차나 뛰는 사람이 나선으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할 수 없이 그 부담을 고스란히 안게 되는 셈이지. 하하하~!”

“오호~! 참으로 오묘합니다. 현상(現象)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왜 그러한 형태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허~! 아직도 모르겠나? 세상의 모든 움직이는 것은 그와 같이 움직이는 까닭이란 말이라네.”

“그러니까 발경의 원리도 자연의 힘을 이용한다는 것입니까?”

“맞아, 우리는 자연을 거슬러서 직진으로 움직이지. 그래서 저마다의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지. 그러니까 기공은 인공적인 노력으로 자연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것이 목적이라네. 어제는 하지 않던 운동을 하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을 것이네. 그렇지만 그것이 익숙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 흐름을 타게 된다네. 축지법(縮地法)도 결국은 천지(天地)의 기운이 흘러가는 소용돌이를 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네.”

우창은 비로소 그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삼라만상은 회전(回轉)하면서 운동한다는 것을 알았고, 직진으로 움직이는 것은 그만큼의 부담을 안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나팔꽃의 줄기가 회전하는 것조차도 자연의 이치에 순응한다는 것을 생각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것도 하나의 깨달음이라고 할 만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다시 물었다.

“형님의 말씀에 비로소 많은 의문점이 풀렸습니다. 모든 것은 돌고 있다는 것인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오늘부터 자연의 모습이 달리 보이지 싶습니다. 역시 형님의 혜안은 우제에게 항상 깨침을 주시십니다. 하하~!”

우창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지광이 말했다.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이로군. 어제는 아마도 많이 힘들었을 거네. 왜냐면 기공을 처음으로 하면 마치 멈춰있던 마차를 말이 끄는 것처럼 힘이 드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지. 그러니까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 낫고, 내일은 또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을 것이네. 그렇게 오랜 시간을 연마하게 되면 비로소 일상인 것처럼 편해지게 된다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기의 흐름을 타게 되고, 그것이 바로 기공의 첫 번째 관문이라고 할 수가 있다네. 하하하~!”

“잘 알겠습니다. 모쪼록 형님의 가르침을 최대한 깨닫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오행을 배워야지? 아우님이 기공을 익히는 것이 힘든 만큼이나 내가 오행을 이해하는 것도 힘이 든다네. 하하하~!”

“에구~ 뭘 그러시려고요. 괜한 말씀이십니다. 하하~!”

이렇게 담소하다가 다시 우창의 가르침이 시작되었다. 기공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듣던 진명과 현지도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창이 설명하는 오행의 변화에 푹 빠져들었다. 특히 현지는 이미 기본적인 것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창의 이야기는 또 다른 느낌이 있어서 처음으로 접하는 것처럼 새로움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오행의 생극(生剋)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현지가 손을 들었다. 우창이 말해보라고 하자 알고 있는 대로 말했다.

“생(生)이란 목생화(木生火)요, 화생토(火生土)요, 토생금(土生金)이요, 금생수(金生水)이며, 다시 수생목(水生木)이에요. 그리고 극(剋)이란 목극토(木剋土)하고, 토극수(土剋水)하고, 수극화(水剋火)하며, 화극금(火剋金)하고, 다시 금극목(金剋木)하는 것이고요.”

현지도 그 정도는 안다는 말을 할 수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으로 답을 했다. 현지의 말에 우창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목생화란 무엇을 말합니까?”

이번에도 현지가 답을 했다.

“그야 나무가 불을 생(生)해 주는 것이죠.”

현지의 말에 우창이 다시 물었다.

“나무가 불을 생하고 나면 나무는 어떻게 됩니까?”

“나무는 죽어서 불이 되어요.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잖아요.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고는 스스로 죽어가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참 슬픈 일이군요. 원래 생(生)이 그렇게 슬픈 것이었습니까?”

“예에? 무슨.....?”

현지가 말뜻을 모르겠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우창이 차근차근 설명했다.

“생이란 서로 살아나는 것이어서 상생(相生)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불을 살려주고 스스로는 불타서 재가 된다면 그것을 어찌 상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어요? 도리어 화극목(火剋木)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예? 화극목이라고요? 그런 것이 있나요?”

현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물었다. 그러자 우창이 다시 설명했다.

“오행의 생극이란 생이 되는 경우와 극이 되는 경우를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단순하게 외워서 기억하는 생극은 실제로 한 사람의 사주를 접했을 적에 아무런 쓸모가 없지요. 그래서 오행의 생극이라는 것은, 목생목(木生木)과 목극목(木剋木)을 알아야 하고, 목생화(木生火)와 목극화(木剋火)도 알아야 하는 것이 올바르게 오행의 생극을 아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설명할 테니까 잘 듣고 혹 이해가 되지 않으면 다시 질문해 주시면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설명하는 과정에서 현지도 비로소 오행의 깊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단순하게 외워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또 우성암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