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논산]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명재고택

작성일
2013-04-16 11:52
조회
1824
[충남 논산] 노성향교(魯城鄕校)와 명재[윤증]고택 (2013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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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성에는 권리사와 윤증고택(바뀐 이름이 명재고택)이 대표적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권리사를 둘러보게 되면 당연히 향교와 윤증고택도 겸해서 보는 것이 코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같이 둘러보게 되면 적당한 시간이 소요되므로 지나는 길에 둘러보게 되었다.




  23번 논산에서 상월로 가는 중간에 노성면이 있고 소재지에서 들어가는 안내판을 볼 수 있다. 노성산성, 노성향교, 명재고택의 방향이 한꺼번에 왼쪽으로 가라는 방향을 지시한다.






  오른쪽에 권리사가 있고 왼쪽에 노성향교와 명재고택이 있다. 이렇게 세트로 구색을 갖추고 있기도 쉽지 않은데 그런 의미에서 노성산은 유교의 특별한 곳이라고 할 만도 하지 싶다.





  조금 확대한 지도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양반가의 모습을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는 고가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한다.





  가는 길머리에 이러한 비각이 하나 있어서 눈길을 끈다. 그런데 담장 너머로 본 바로는 비각이 없고 편액이 하나 걸려있을 뿐이다. 그리고 글이 쓰여있는데 멀어서 판독이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도움말을 살펴봤다.





  아하, 그러니까 열녀인 공주이씨의 덕을 기리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위는 검게 불에 그을린 흔적으로 보여서 읽기가 어렵지만 대략 징검다리 판독법으로 유추를 해 보니까, 윤증 선생의 어머니가 오랭캐에게 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죽는다고 하여 순절한 인연으로 정경부인으로 대우를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니 아마도 아들이 잘 되어서 죽은 다음에 아들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성향교의 홍살문이다. 충절과 정절의 표징으로 세운다. 뒤로 보이는 것은 예전에는 니구산(尼丘山), 현재에는 노성산(魯城山)이다. 배산임수의 편한한 지형에 자리를 잡고 많은 유생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사서삼경을 암송하고 천하를 토론하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유도회 노성지부이기도 하고, 노성향교이기도 하다는 편액이다. 외삼문의 중앙에 태극이 삼태극이다. 이것은 궐리사의 이태극과 비교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궐리사는 공자를 모시는 곳이라서 음양(陰陽)으로 표시를 했는데 여기에서는 그 가르침을 배우게 되므로 음양의 이치를 논하기 위해서 음양중(陰陽中)으로 변화를 의미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살펴본다. 물론 문은 굳게 잠겨져 있다.







지정별 : 기념물 제118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8
시 대 : 조선시대


<!--[if !supportEmptyParas]--><!--[endif]-->향교는 조선시대 관립 교육기관으로 각 고을마다 세워져 교육과 교화를 담당하였던 곳이다. 노성향교는 언제 세워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형교의 처음 위치는 현재 노성초등학교 부지였던 것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지금의 자리에 옮기어 지었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 유생들이 기숙하던 곳인 동재(東齋) 양현재(養賢齋)와 수직사인 모화당(慕化堂),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인 명륜당(明倫堂), 내삼문 그리고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서재를 생략하고 그 자리에 수직사를 두고 있는데, 수직사를 별도로 구역을 설정하거나 항교와 격담을 두지 않는 등 일반적인 배치와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 측면 2칸의 겹처마에 맞배지붕이다. 이곳에는 공자의 영정을 비롯한 증자, 맹자, 안자, 자사 등 오성(五聖)과 송나라 2(-정이, 주희), 우리나라 18현 등 모두 520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대성전에서 송나라 2현만 모신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명륜당(明倫堂)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서 삼강오륜과 세상을 다스리는 고등의 학문을 배우고 토론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명륜의 문이 닫히고 말았으니 이 땅에서 윤리(倫理)를 어떻게 지킬 수가 있겠느냐는 함성이 담장 너머로 울려퍼지는 것 같기도 하다. 문을 닫은 곳은 산골의 벽지 분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향교나 서원을 기웃거려보면 또한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유학(儒學)도 살리고 과학(科學)도 살리고, 또 경제학도 살리면 얼마나 좋으랴만 서구의 공격적인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막아보려고 애를 쓴 선비도 없진 않았겠지만 대세의 흐름을 거스리기는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새로운 학문이 들어와서 유익한 점도 많다는 것은 인정을 해야 하겠지만 낭월의 소견으로는 왜 공생(共生)을 이루지 못하고 성패(成敗)의 논리에 빠져서 적자생존(適者生存)하고 패자필멸(敗者必滅)의 논리로 결판을 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중국의 문화혁명이 우리나라에서도 훑고 지나간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박제(剝製)된 향교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본다.


  내친 김에 생각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본다면, 초등학교에서는 소학(小學)을 필수로 공부하게 하고, 중학교에서는 논어(論語)를 가르치며, 고등학교에서는 대학(大學)을 배우게 하고, 대학에서는 중용(中庸)과 주역(周易)을 가르친 다면 어떤 변화가 생길 것인지를 떠올려 봤다. 위아래도 없고 오로지 점수를 채우는 기계처럼 되어가는 젊은이들을 보면 언제라도 마음은 씁쓸할 수 밖에 없는 일이고 이것은 비단 낭월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잠자고 있는 향교는 역사의 뒤안길에서 화려했던 과거의 영화를 꿈꾸고 있는 듯 싶다.







[윤증고택 - 개명하여 명재고택]


  이번에는 윤증고택으로 걸음을 옮긴다. 앞에 보이는 것이 향교의 명륜당이다. 연못가에 서있는 매화나무에서 느껴지는 세월감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처럼 안쓰러운 마음을 유발시키는 것 같다. 그런데 둥치만 봐서는 다 죽은 나무처럼 보이는데도 가지에서는 꽃이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이라고 할 밖에.





  자꾸만 윤증고택이라고 하는데 왜 명재고택이라고 하는가 했더니 그 사이에 개명을 한 모양이다. 어른의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아호로 부르는 것이 좀 고상해 보이긴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명재고택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중요민속자료 제190
소재지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6
시 대 : 조선시대


<!--[if !supportEmptyParas]--><!--[endif]-->조선 숙종때의 학자인 윤증(尹拯 :1629-1714) 선생의 고택이다. 고택을 향하여 왼쪽에 장방형의 연못)이 있고, 중앙 부분에는 샘이 대지보다 낮게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평면이 자형으로, 높지 않은 기단위에 사랑마당과 바깥마당을 주변에 두었고, 안채의 남쪽에는 행랑채가 위치하고 있어, 전체 구조는 자형을 이룬다. 안채의 모른쪽 뒤편에 사당(祠堂)이 있으며, 안채으 앞에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는데, 행랑채나 대문이 없고 전면 개방 되어 있다. 사랑채는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하며 그 세부기법은 19세기 중엽의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대청, 누마루, 고방(庫房) 등의 짜임새가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은 대체로 중부지방 양식을 따르면서도 남도풍을 기미한 특이한 형태이다. 사랑채 앞의 축대와 샘, 연못과 나무에는 한구 정원의 아름다움이 스며 있으며, 뒤안의 장독대와 울창한 숲은 우리나라 살림집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다. 조선시대 우리 지방의 양반 가옥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멋진 고목나무가 눈길을 끈다. 논산시에서 보호수로 지정이 된 나무란다. 그 아래로 줄을 지어 있는 장독대를 보니 많은 식구가 있는 것 같지만 아마도 판매를 목적으로 장을 만들거나 아니면 그냥 장식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윤증, 아니 명재고택에서 된장을 판다는 말을 못 들어봐서이다.






  그 입구에서는 등산하러 왔다가 갈가에서 뜯은 쑥을 다듬고 있는 두 여인이 분위기를 돋운다. 여인은 이렇게 모든 일을 벗어나서 운동을 하러 나왔음에도 쑥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서 가족이 좋아할 표정을 떠올리면서 채취하는데 몰입이 되는 모양이다. 천생의 주부인가 싶다.









  가족이 나들이를 했는지 엄마가 아기를 놓고 사진찍어주고 있는 장면이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이렇게 따사로운 주말의 오후에 아이와 함께 고택을 찾을 정도의 수준이라고 한다면 화목한 가정임이 틀림 없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을 해 본다.







  더운 여름 날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서 밖을 내다보면서 시원한 수박이라도 한 쪽 먹으면 운치가 있을 풍경이 떠오른다. 주변의 풍경이 특별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허술하지도 않은 산수의 중간에 적당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는 고택의 모습은 품격이 있어 보인다.






  이렇게 개나리와 진달래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바로 시간을 말해준다. 어느 봄날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날에 이 자리에 내가 있었노라는................


  문득 제주도에서 사진을 찍다가 세상의 인연을 마친 김영갑 선생이 떠오른다. 그의 사진집에 붙여진 이름 하나는 『그 섬에 내가 있었네』였다. 그래~ 그 자리에 내가 있었지.... 사진은 아무리 빨리 찍어서 본다고 해도 이미 과거완료형의 언어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자리에 내가 있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로군.     <!--[endif]-->  





                           2013년 4월 13일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