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논산]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

작성일
2013-04-16 07:44
조회
2178
[충남 논산] 노성(魯城) 궐리사(闕里祠) 2013년 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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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벗꽃이 피려다 말고 또 말려다 피고 있는 2013년의 4월은 그렇게 추운 봄이다. 새로운게시판을 하나 만든 다음에, 여기에 사용할 제목을 잡는 것이 자못 만만치 않아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충남 논산]으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나중에는 [경북 울릉]까지도 가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살짝 들기는 한다. 여하튼 시작은 이렇게 해 보자. 혹 작심삼일이 되든 용두사미가 되든 그것이 뭐 그리 대수겠는가 싶다. 그냥 오늘이 즐거우면 그뿐~!!


궐리사는 한국에 두 군데가 있다. 하나는 수원에 있는 화성 궐리사이고 또 하나는 논산의 노성 궐리사이다. 지도에 나타난 위치는 아래와 같다.




네이버에서 저장한 궐리사 주변의 위성지도이다. 지도를 클릭하면 조금 큰 그림을 볼 수 있다. 오른쪽에는 궐리사가 있고 왼쪽에는 노성향교와 명재고택이 있다. 


  궐리사 부분만 조금 크게 보면 이렇게 생겼다. 노성궐리사는 사당과 관리하는 집이고 왼쪽에는 중앙으로 공자님 석상이 있고 그 좌우로 4대 현인의 석상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기로 든다면 노성과 상월의 중간에 교촌리가 된다. 아마도 교촌이라는 뜻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은 짐작을 해 본다. 향교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었으니까 학교마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감로사에서 궐리사까지는 20리 길 즉 8km이다. 아마도 걸어간다면 두어 시간 잡으면 되지 싶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곳이면서도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첫 번 째의 사진기행으로 선택을 한 것이기도 하다.



궐리사 입구를 나타내는 홍살문이다. 홍살문은 충절과 정절을 의미한단다.





  홍살문을 지나면 외삼문(外三門)이 나타난다. 아니, 보인다.




  외삼문 옆에는 궐리사에 대한 설명안내판이 있으니 이러한 것은 탐방객에게 유익한 자료를 제공한다. 잘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입력을 해 봤다.







지정별 : 기념물 제20
위 치 :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301
시 대 : 1716  


궐리사는 공자가 자란 마을인 궐리촌(闕里村)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공자의 영정(影幀)을 봉안한 영당(影堂)을 말한다. 궐리사는 강릉, 제천, 화성(수원) 등에 있었으나 현재는 화성과 이곳 노성에만 남아있다. 1687(숙종13)에 송시열(宋時烈)이 건립을 추진하였고, 권상하 등 송시열의 제자들이 1716(숙종42)에 노성 니구산(尼丘山)에 세웠다. 그 후 중국에 가는 사신 편에 공자의 영정을 부탁하여 숙종 44년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791(정조15)에는 송조(宋朝) 오현(五賢)인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주희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配享)하였다. 1805(순조5) 관찰사 박윤수 등이 지금의 위치에 옮겨 세웠다. 현재의 규모는 당시 규모보다 축소된 것으로, 일명 춘추사(春秋祠)라 한다. 건물 배치는 하마비(下馬碑)와 홍살문이 있고 외삼문, 강당인 현송당(絃誦堂), 내삼문, 사우(祠宇)인 궐리사 그리고 모성재(慕聖齋)와 관리사, 문간채 등이 있다. 권리사의 남쪽에 석주(石柱)가 있는데, 사용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네모난 기단 위에 배흘림의 각주석(角柱石)을 세우고 탑()의 지붕돌을 그 위에 올려놓은 모습과 궐리라는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아 아마 권리사의 표시물로 이용된 듯 하다.








뭐든 시키는대로 잘 한다. 그래서 서명도 했다.



 그렇지만 서명을 한다고 해서 궐리사의 공자님을 참배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굳게 닫힌 외삼문을 지나면 다시 내삼문이 있고 그 안에 맨 위쪽으로 궐리사의 현판이 붙은 이 건물이 보인다. 물론 담장 너머로 넘겨다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둘러 본 다음에는 왼쪽의 공자 석상이 있는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공자님이 계셨는데도 논산에 자리를 잡은지 20여 년만에 첫걸음을 했으니 무심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늘을 찌를듯이 우뚝하게 솟아있는 석탑(?)이다. 아니 석주(石柱)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중간에 글자가 보인다.



 궐리(闕里)이다. 여기에 대한 안내문이 있어서 다시 살펴본다.




궐리탑이란다. 탑이라고 하면 탑인 것이지. 석주라고 해야 할 필요는 없지 싶다. 내용이 궁금하다.





궐리탑(闕里塔)

노성궐리사(魯城闕里祠)는 공자(孔子)가 탄생한 궐리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1716(숙종42) 노성의 니구산(尼丘山)에 건립하였으며, ‘궐리라는 글씨가 금각되어 있는 궐리탑 역시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궐리탑은 높이 3.91m, 석주의 지름이 38cm, 기단은 86.14로 오늘날의 기관명을 표시하는 현판과 같은 기능을 하였으며, 석주에 음각으로 쓰여진 궐리(闕里)’라는 글씨는 송시열선생의 제자인 문순공 권상하의 작품이다.


네모난 기단위에 북두칠성을 의미하는 7개의 별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배흘림의 각주석을 세웠으며 꼭대기에는 정방형의 옥개석이 올려져 있다.


기단위에 그려져 있는 북두칠성의 맨 끝 별이 공자가 탄생한 중국 곡부의 니구산을 가르키고 있으며 탑부분에 옥개식의 홈부분은 별의 빛을 의미한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다.







  설명을 보면 공자가 태어난 궐리촌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노성의 니구산에 건립했다고 되어 있는데 자꾸 '니구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니까 또 궁금증이 솔솔 솟아난다. 그래서 니구산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보기로 했다. 더구나 설명에서 중국 곡부의 니구산을 가르키고 있다고 하니까 니구신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봐서 자료를 좀 찾아봐도 좋을 것 같아서이다.
  감로사의 터전을 마련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 노성산의 뒷편에 있는 서니암(西尼庵)이다. 절 이름도 참 이상하게 지었다고 했더니 니구산의 서쪽에 있는 암자라는 뜻이라고 했는데 이렇게 어딘가에서는 그 흔적이 남아있기도 하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한국에서는 니구산(尼丘山)이라고 하지만 중국에서는 공자님의 이름이 공구(孔丘)라서 니구산의 구를 빼고 그냥 니산(尼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런데 궐리사의 뒷산은 원래 니구산이라고 이름이 붙었기 때문에 그대로 니구산으로 통용이 되었던 모양이다. 요즘은 노성산(魯城山)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산 정상에 석성이 있고 그 이름이 노성(魯城)이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사진은 2006년도에 찍은 것인데 노성산성 그러니까 노상산의 정상이다. 돌로 쌓은 성벽이 좀  허술하기는 하지만 공주를 지키는 길목이기 때문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보는 것은 가능하겠다. 그리고 그 위에 정자를 보면 약간의 힌트가 있는 편액을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편액의 이름이 니성산정(尼城山亭)이다. 그러니까 니구산의 니(尼)와 노성의 성(城)을 넣어서 쓴 글씨로 보이는데 이것이 아마도 본래의 산성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지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왜냐하면, 니구산에 쌓은 성이면 니구성이 맞고 니구가 너무 길다면 니성이라고 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료는 계백장군유적지에 있는 백제군사박물관에 전시된 노성산성의 사진이다. 그야말로 참고자료이다.


  그로 인해서 고을 이름도 노성이 된 것인데 이렇게 흐르다가 보니까 니구산은 자료집에서만 존재하는 의미가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눈여겨 보지 않는 사람은 노상산이라고 하는 것은 알아도 니구산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지나치기 쉬울 것이다.


  그럼 노성은 왜 노성이냐? 그것은 아마도 노(魯)나라의 성(城)이라는 뜻일게다. 결국은 노나라, 공자, 궐리, 니구산 등이 모두 공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여하튼 니구산이 니산으로 바뀌었지만 그 자리가 어디쯤인지 찾아보자는 생각이 일어나서 지도로 위치를 확인해 봤다.



 지도에서 A는 노성의 권리사이고, B는 중국 산동성의 곡부에 있는 니산의 위치이다. 거의 정서(正西)의 방향으로 보면 되겠다. 궐리탑의 설명에 보니까 북두칠성의 별자리가 중국의 궐리를 가리키고 있다고 했는데 그것이 뭔 말인가 하여 다시 기단석을 보니까 점을 찍어 놓은 것이 보인다.



이러한 것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고 말 수 있는 것이니 설명문을 잘 봐야 한다. 여기저기 패인 흔적이 보인다. 이것이 북두칠성이라는 이야기이고 그 중에 하나가 서쪽으로 니구산을 향하고 있다는 말이겠다.


  이렇게 지도로만 확인을 할 것이 아니라 중국의 니구산을 닮아서 니구산이라고 했다니까 과연 닮았는지가 또 궁금해진다. 그래서 사진을 찾아봤더니 대략 검색이 된다.



  중국의 니산이라고 한다. 앞에 보이는 높은 산일 것이라고 대충 어림짐작만 해 본다. 그리고 니산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를 추적했더니 니산서원(尼山書院)이 있단다. 그래서 사진을 찾았다.


  붉은 글씨로 틀림없이 니산서원이라고 써져 있으니 여기가 니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다. 그리고 규모도 자못 상당한 것으로 보인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공자의 모친께서 니구산의 굴에서 기도를 하여 공자를 얻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시 찾아봤다. 그랬더니 과연 공자굴이 나타난다. 그래서 재미가 솔솔 난다.




  부자동(夫子洞)이라고 했는데 부자는 공부자를 말하고 공부자는 공자의 존칭이므로 결국은 공자의 동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그 유적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내부를 보니까 과연 그 안에서 기거하면서 기도를 했을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이렇게 중국에는 분명히 니산이 있고 공자굴도 있음을 확인했으며 니산서원에서 공자를 추모하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흡족하지 싶다. 물론 한국의 니구산이 노나라의 니구산과 얼마나 닮았는지는 비교를 하기가 어렵겠지만 적으로 마음으로는 분명히 닮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하면 니산과 권리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었으므로 다음 장면으로 이동을 한다.



  공자님의 상호를 보니까 어딘가에서 봤던 그림과 겹쳐진다. 공자의 초상화에서 봤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묵은 파일을 뒤져서 공자상을 찾아 봤다.



  공자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앞니가 밖으로 나와있는 그림인데 권리사의 석상도 이 이미지를 바탕으로 조성이 된 것으로 짐작해 본다. 참고로 화성 권리사에도 공자의 석상이 있는데 상호는 다르다.



  석상에도 명히 앞니가 두 개 밖으로 나와있는 모습이다.



  운동이 사진기행의 주요 목적이라는 것이 생각나서 뒷산으로 한 바퀴 돌아봤다. 그리고 앞을 보니까 탁 트인 황산벌을 바라보면서 서 있는 공자상으로 좌우에 네 분의 성인들이 모시고 있는 형상이다. 이름을 보니까, 자사(子思)와 안연(顔淵)이 앞에서 봐서 오른쪽이 시립하고, 증자(曾子)와 맹자(孟子)가 왼쪽으로 시립하고 있다.


   문득 목숨을 책임지고 수행했던 자로와,먹거리를 공급했던 자공의 상도 모셨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목숨걸고 호위를 했음에도 끼일 수가 없는 것은 몸으로 한 것과 정신세계는 서로 다른 것이라는 생각으로 정리를 해야 할까 보다.



  증명사진이다. 어느 봄날의 하루는 이렇게 살았노라는.........



[궐리사를 둘러 본 후]


궐리사를 둘러본 소감은 생동감은 없었다는 것인데 아마도 어느 유적지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은, 대부분의 서원이나 향교들이 그냥 하나의 상징으로만 그 의미를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를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시대가 물러나면서, 급속하게 들이닥친 서구문화는 자칫하면 고리타분한 옛날의 유물 정도로 생각하기조차 하는 것이 신식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생각이라고 한다면 당연한 결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곳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누구던지 찾아와서 둘러보려고 하면 기꺼이 안내를 하고 도움을 구하면 친절한 설명을 해 주면 좋으련만, 문을 굳게 잠가 놓고 사람이라도 기웃거리면 도둑인가 싶은 생각이라도 할까봐 괜히 캥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내 지역의 유산을 둘러보면서도 상쾌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2013년 4월 13(己酉)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