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 효천 선생의 한 생각

작성일
2007-09-04 14:38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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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이 있어서 가끔 만나는 도반(道伴) 중에 효천(曉天) 선생이 있는데, 어느 날 문득 丙辛이 머물 자리를 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다음과 같은 표를 보여주었다. 낭월은 辛金은 일간에 붙이고, 丙火는 월지에 붙여서 해결을 보고자 하는데, 문득 이렇게 관찰을 하면 안 되겠느냐는 이야기를 해서 함께 생각을 해 보자고 했다.












終柱


時柱


日柱


月柱


年柱


 


後生


孤獨


主體


表現


統制


心理


偏官宮


偏印宮


比劫宮


食神宮


偏財宮


天干












地支


劫財宮


傷官宮


正財宮


正官宮


正印宮


墓地


希望


身體


道德


慈愛


心理

 

우선 적당한 이름을 붙이기가 어려워서 종주(終柱)라고 했다. 삶을 마칠 적에 사용하는 기둥이라는 의미로 생각을 할 수 있겠다. 이 자리는 戊土의 다음이 되는데, 戊土를 종교궁(宗敎宮)이라고 할 수가 있으므로 종교의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다음의 생명, 즉 후생(後生)으로 보면 어떻겠느냐는 점과 이번의 생명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나타낼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는데, 과연 일리가 있다고 하는 생각을 했다.

천간의 배치를 보게 되면 丙→戊→庚→壬→甲으로 흐르는 것은 상생(相生)의 질서가 있다. 지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辛→癸→乙→丁→己로 배열이 된다. 이러한 설명을 낭월의 소견으로 정리를 한다면 丙火는 편관이 된다. 그러므로 두려운 곳이 되며, 죽음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된다. 죽음에 대해서 두렵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는 말로 대신 할 수가 있겠다.

丙火는 빛이다. 사람이 죽으면 빛이 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은 영체(靈體)를 의미하게 되며 丙火가 신령(神靈)이라는 것과 그대로 연결이 될 수가 있다. 영체가 빛으로 변해서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는 것을 윤회(輪廻)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다음에 지지를 보게 되면 辛金이 된다. 이것은 흑체(黑體)가 되는데, 죽어서 육신(六神)은 깜깜한 무덤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으로 대입을 할 수가 있으며, 다시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는 화장(火葬)을 하는 경우에도 의미하는 바는 같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생전(生前)에 수행(修行)을 많이 하여 영혼(靈魂)이 가벼워진다면 하늘로 승천(昇天)하거나 뛰어난 영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며, 죄업(罪業)을 많이 조성(造成)하게 된다면 깜깜한 흑암(黑暗) 지옥(地獄)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헤어날 기약이 없다고 하겠으니 탐욕(貪慾)은 지옥의 고통이 되고 공덕(功德)은 승천(昇天)의 희열(喜悅)이 된다고 해석을 할 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종주(終柱)를 어떻게 찾아 낼 수가 있겠느냐는 점인데, 이것은 생전에 스스로 살아 온 여정(旅程)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다. 즉 사주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살아가는 과정에 의해서 죽음의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사주의 구성에 따라서 형성(形成)이 되는 것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그야말로 사주를 포함해서 자신의 행위(行爲)를 모두 포함해서 결정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기 때문이다.

혹 앞으로 출생(出生)을 한 시간이 보다 정확하게 나타난다면 태어난 시간의 분(分)을 이용해서 종주를 찾아 낼 수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어차피 사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음의 시각에서 그 다음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지에 대해서도 추론(推論)을 하는 것이 전혀 무의미하다고 할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러한 논리의 실체에 대해서 대입하기가 어려운 관계로 아직은 구체적인 연결의 고리를 찾지 못하겠지만 이러한 관점을 놓고 앞으로 다시 생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대입을 할 방법은 또 궁리를 해야 하겠지만 적어도 이렇게 생각을 할 힌트를 찾은 것에 대해서 효천(曉天) 선생의 직관력(直觀力)은 대단하다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이렇게 잠시 지면을 할애하여 독자께 생각의 한 조각이 되도록 소개를 한다. 이와 같이 학문(學問)의 길은 직관(直觀)과 사유(思惟)가 함께 어우러져서 이어지는 연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