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癸는 마무리에 해당한다.

작성일
2007-09-1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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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흘러흘러서 계수까지 오면 인생은 마무리를 하게 된다. 유종의 미를 거두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살면서 돈을 많이 벌었던 지위가 높았던 가난하게 살았던 아무 상관이 없다. 그냥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마무리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무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좀더 살아보려고 아둥바둥 하는 모습은 흔히 볼수 있는 장면이고, 이렇게 자연에 순응하면서 초연하게 자신의 삶의 마무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마도 만명에 한 사람도 어려울 것으로 생각해본다. 그만큼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十干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되고, 이것은 자연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계수의 특징 중에 하나는 생동감(生動感)이다. 축- 늘어져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약동하는 움직임이 그 가운데에 전개되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정신력이 적어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응집되었을 적에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자신의 모든 일생의 경험을 한 덩어리의 기(氣) 에너지로 응집을 시켜서 활기있게 마무리를 한다면 이 영혼은 틀림없이 다음생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될것으로 생각된다. 서산대사의 한 말씀이 떠오른다. 어느 객이 대사에게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스님, 도인(道人)의 삶은 어떠합니까?”

“배고프면 밥먹고, 졸리우면 잠자는 것이라네~!”

“에구~ 그야 누구나 하고 있는 것인뎁쇼~ 좀더 화끈한 뭐가 없을까요?”

“모르는 소리 말게나, 누구나 하고 있지만 실은 자고 싶을 적에 자지 못하고, 웃고 싶을 적에 웃지도 못한다네, 더구나 먹고 싶을 적에 먹을 수도 없지 이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네. 자네는 과연 왕이 옆에 있다면 잠이 온다고 해서 잠들수가 있겠는감? 그리고 초상집에서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해서 노래가 나오겠는감? 그러나 도인은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이네. 이게 도인의 삶이라네 헐헐헐~~!”




이러한 대화를 나눴다고 하는데, 단순하다면 참으로 단순한 이야기가 가끔 머릿속에 남아서 맴도는 경우가 많다. 과연 도인의 삶은 그렇겠다는 공감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경우도 있는데, 역시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무리인 듯 싶고, 대충 윤곽만이라도 아련하게 짐작하는 정도라고 보겠는데, 여기에서 도인의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이렇게 그 마음이 정리가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癸水의 영역에 도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임수만 해도 뭔가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가는 분위기의 강물이었다고 한다면, 이제 계수의 영역은 전혀 에측불허가 될런지도 모른다.

때로는 속삭이듯이 이슬비가 되어서 내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또 언젠가는 마구 휘몰아치는 폭풍우가 되어서 집이던 다리던 앞에 걸리는 것은 모조리 부셔버리는 무서운 수마(水魔)가 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바위에서 졸졸 흐르는 약수가 되어서 목마른 등산객의 갈증을 달래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보이는 듯 보이지않는 안개가 되어서 온 산천을 가려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것이 계수이니까 이것이야말로 도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싶은 생각이 언뜻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한 평생의 마무리를 각자 살아온 과정대로 멋지게 처리한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봐도 상관 없을 듯 싶다. 그런데 자신의 일생이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멋지게 살아온 사람은 뭔가 자유로운 곳으로 승화가 되겠지만, 시궁창과도 같은 삶을 살았다고 한다면 그의 계수는 아마도 썩은 물이 될것으로 추리를 해본다. 물은 각자 어떻한 삶을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생각해보는 것이다. 시궁창물처럼 살아왔다면 아마도 다음에 도착할 곳의 풍경도 어렴풋이 떠오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이것도 짧은 안목으로 보는 관점이 될 것이다.

어디에 있던지 자연의 섭리에 따르고 살아왔다면 아마도 결국은 바다로 모여드는 물처럼 하나가 되어서 커다란 바다에서 넘실거리면서 자신이 지나온 길을 즐겁게 이야기 할듯도 싶다. 중요한 것은 언제 어디를 거쳐오던지 그 마음에 속박만 없다면 자유로운 마무리를 할 수가 있지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癸水의 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렇게 인생이 살아가는 일평생을 十干의 특성에 대입해서 이해를 해보았다. 아마도 대개의 사람은 이러한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일 것으로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당연히 이견이 있는 분이 계시리라고 생각된다. 다만 이렇게 설명을 해볼 수도 있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어도 전혀 불만이 없겠다. 중요한 것은 십간의 순서를 보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과 너무나도 흡사하게 배열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着眼)하다 보니까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연결지어 본 것이다.

좀더 부연설명을 한다면 만약에 50에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면 이 사람에게는 金水의 기운이 부족하다고 봐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결실이 되지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완전한 영혼으로 진화를 하는데 상당한 걸림돌이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더구나 20대에 세상을 떠난다면 이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된다. 그야말로 木火의 기운만 간직한 채로 허공을 떠돌 듯 싶다. 결실이 되지못한 영혼은 저세상으로 이동을 하는데에도 많은 문제를 갖고 있을 것 같아서 해본 생각이다. 그리고 가정에서도 왕왕 말썽을 부리는 영혼들은 비명에 횡사를 당한 젊은 영혼들이 대부분이라는 설명을 무녀들에게서 들으면서 그러한 생각이 전혀 황당하기만 한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해본다.

그 중에서도 매우 나쁜 것은 돌발사고를 당한 경우라고 하겠다. 스스로 죽는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어느 순간에 사고를 당해서 갑자기 육체를 떠난 영혼은 아마도 상당기간 구천을 헤메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영혼에게는 자신이 육신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일러줘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 영혼들은 산소에 파묻힌 자신의 육체를 애착해서 어두운 땅 속에서 허구한날을 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납량특선으로 방영하는 공포물을 보면 그러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고 젊고 이쁜 처녀는 더더욱 자신의 육체에 대한 애착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모양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단지 꾸며낸 것으로만 돌리기 보다는 그 속에서도 뭔가 꿈틀대는 진리가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관찰한다면 상당한 타당성을 발견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낭월이는 어느것 하나라도 소흘하게 넘기지 않으려고 항상 주의깊게 관찰을 하지만 역시 안목의 한계는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연의 참 소식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서 이렇게 주변의 상황을 늘상 관찰하면서 배워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지혜가 뛰어나신 도인들은 한 순간에 그 모든 의심을 풀어버리고 빈배처럼 자유롭게 노닌다고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