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세계적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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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토에 해당하는 나라를 찾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중국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中國)이라고 하는 글자에서도 이미 무토적인 느낌이 팍팍 오기는 하지만, 중국의 이미지에서도 역시 토의 기운이 상당히 강한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중국은 가운데 있는 나라인가? 아니면 중간쯤 가는 나라인가? 그도 아니라면 명중한다는 의미인가를 물어본다. 그러나 결론은 아마도 가운데라고 하는 곳으로 가지 않을까 싶다. 가운데라고 하는 것은 바로 무토의 특성과도 전적으로 일치를 보이기 때문인데, 과연 중국인들이 중국이라는 이름을 지을적에 이러한 점도 고려를 해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어쩌면 우리보다도 더욱 뛰어난 음양오행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나라의 이름에도 토의 기운이 강한 글자인 中을 국호로 삼지 않았겠느냐는 추리를 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인들은 치우치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한국 사람들이 괜히 서둘러 댈적에도 중국인들은 느긋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만만디’라는 별명을 붙여줬던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만만디라고 하는 의미가 토의 느릿한 모습과 완전히 일치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을 오행으로 나누면 충청도가 이 토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그러면 충청도 사람들이 느린 점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해야 하는데 아마도 한국인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멍청한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모두는 충청도 사람의 느린 것에 대해서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충청도와 중국의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충청도는 이미 목이라고 하는 대전제 위에서 토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고, 중국은 목이라고 하는 의미가 없이 그냥 그대로 토라고 보는 것이다. 특히 토의 정신을 강조하는 무토는 양토이면서도 노골적인 행동이 된다. 그리고 남의 삶에 간섭도 잘 하게 된다. 이것은 토의 성분 중에서도 양토의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본다.

그리고 중국의 산하에는 대단히 높은 산악들이 많이 있는데, 이것도 역시 ‘戊土-山’ 이라고 하는 공식에 연결이 된다고도 하겠다. 이렇게 중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구조와 무토라고 하는 특성을 연결시켜보면서 참 잘도 어울려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묵묵하게 버티고 앉아있는 모습.... 강태공이 낚시줄에 모든 시름을 싣고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 관운장이 오로지 신의만을 중히 여겨서 조조에게 목숨을 버리는 모습... 장자(莊子)가 세상의 선악에 치우지지 않고서 그 모두를 포함한 채로 소요(逍遙)하는 모습32)에서 중국을 느껴보고 무토를 이해 해보려고 한다. 특히 장자에서 느껴오는 ‘생긴대로 살아라~’고 하는 가르침은 오로지 모방과 일류를 닮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비웃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같아서 함께 너털웃음을 웃어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중에 한가지 생각나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옮겨 보겠다. 특히 음양오행편에서는 이미 혼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드린 적이 있다.




勞神明爲一 而不知其同也 謂之朝三 何謂朝三 曰 狙公賦茅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 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노신명위일 이부지기동야 위지조삼 하위조삼 왈 저공부모왈 조삼이모사 중저개노 왈 연칙조사이모삼 중저개열 명실미휴이희노위용 역인시야 시이성인화지이시비 이휴호천균 시지위양행




이렇게 한자로 한번 적어봤다. 관심이 있으신 벗님이라면 한번 쯤 살펴봐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내용은 조금만 잘 살펴보면 능히 짐작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럼 간단하게 해석을 해보자.

(앞쪽에서부터 치우친 편견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내놓은 다음에...) 한쪽으로 수고스럽게 정신을 기울이지만 그것이 결국은 같은 것이라는 점에대해서는 알지를 못하는구나. 이것을 조삼이라고 하는 말로 대신 할 수가 있겠다. 조삼이라고 하는 것은 뭔 말인가 하면, 옛날에 원숭이를 잘 부리는 사람이 원숭에게 말했다. “너그들 아침에는 상수리를 3개 주고 저녁에는 4개 줄태니 그리 알아라.” 이렇게 말하자 많은 원숭이 들이 화를 내면서 싫다고 떼를 썼다. 그러자 다시 원숭이 주인이 말하기를 “그러면 내가 양보하마, 아침에는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주겠다. 불만없지?”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원숭이들이 기뻐하였다는 말이다. 이 이야기와 같이 실제적으로는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어리석은 원숭이는 단지 기쁨과 노여움이 번갈아서 발생했다. 그러나 성인은 이러한 부분적인 것에 대한 집착이 벗어나서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안목이 통달했기 때문에 전체를 관찰하게 되고, 그래서 안팎으로 모두를 바로 알고 있는 것이다. 한쪽만을 주장하고 자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는 이미 중심을 잃은 것이다. [장자 내편 齊物論 중에서]




대충 의미가 이렇다. 이미 고사를 통해서 모두 알고있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 숨쉬고 있는 의미는 다시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전혀 손해를 볼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무토의 중용성을 느낄 수가 있어서 과연 중국에서 나올 수 있는 내용의 글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치우친 안목이 되지말고 전체를 보라는 이야기를 그렇게도 간절하게 말하고 있는 내용은 참으로 무토의 냄새가 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이해 될 수 있다는 것도 역시 중국이라고 하는 특징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이것도 나라를 바꾸게 되면 아마도 장담만은 못할 것이라는 점에 생각이 미친다면 누가 어떻게 말을 했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디에서 말을 했느냐고 하는 것도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가령 똑같은 정치발언이라고 하더라도 방송국에서 할 때와 국회에서 할 때와 술자리에서 할때의 상황은 분명히 다른 것이다.이렇게 장소에 따라서도 이야기의 내용은 형식을 달리한다는 점에 대해서 착안을 해본다면 중국이라고 하는 특성에서 할 수 있는 말과, 한국이라고 하는 특성에서 할수 있는 말은 다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한 예로써 어느 서양의 철학자는 지구가 돈다고 하는 말을 했다고 해서 목이 잘렸다. 과연 그러한 말을 중국에서 했다면 목이 잘렸을까... 한번 생각 해볼만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어쨌거나 중국은 지역적으로 무토를 많이 닮았고, 그러한 의미에서 무토를 이해하면 되겠다. 토 중에서도 陽土에 해당하고 이것은 토기운이라고 하는 관점으로 보게 되는 실마리가 되기도 한다. 과연 중국사람들에게서 질적인 의미에서의 기질보다도 기운으로써 토기운이 강한지를 살펴볼 거리도 있을 법 하다. 그 중에서도 토기운은 어디던지 골고루 들어있어서 세상을 움직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세계 어디를 가던지 항상 존재하는 이름이 있다. 이른바 ‘차이나타운’이 그것이다. 이 중국인마을은 어느 곳에 가더라도 모두 존재를 하고 있는데, 중국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나라 소식도 듣고 상거래도 하고 그렇게 자신만의 특징을 살리고 있는 모양이다. 한국에서의 차이나차운은 명동 중국대사관 부근의 뒷골목인 모양이다. 이렇게 세계 곳곳에서 자신들의 부락을 형성하고 그 나라의 경제권에 항상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과연 토의 기운을 물려받은 백성 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즉 토의 원만하게 잘 사귀는 특성으로 인해서 어디를 가던지 자신의 목적하는 바를 성사시키는 것으로 생각을 해봤던 것이다.

그리고 흙처럼 어디를 가던지 적응을 잘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곳에서든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을 질수 있다는 중국인들... 셋만 모이면 벌써 뭉칠 생각을 하고 열만 보이면 벌써 하나의  집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 주변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알리는 모습도 역시 중국인다운 모습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어느 상황에 처하던지 일단은 뭉치는 것이 제일 기준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갑목나라(한국)와는 뭔가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벗님 스스로가 더 잘 아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둘이 모이면 약점을 찾고 셋이 모이면 편을 가르고 열이 모이면 벌써 깨어지게 되는 분위기가 얼핏 생각나서이다.

전에는 이렇게 한국사람들이 서로 화합을 못이루고 머리터지게 싸우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의견과 잘 맞지 않아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렇게 한국인의 특성 속에는 단독으로 살아가는 소나무의 특성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생각을 하게 되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대상의 판단도 달라지겠지만, 낭월이가 보기에는 갑목의 특성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이 되는 것이다. 즉 갑목은 서로 어울릴 수가 없다. 물론 세력이 약할 적에는 하나로 뭉쳐서 외세에 대항하는 점도 이지만, 웬만큼만 안정이 되면 서로에게는 서로가 짐이 되는 모양이다. 나무는 어차피 어울릴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일까? 이것을 중국사람과 비교를 해보면 느낌이 다르다.

얼마전에 호주에서는 한국인들끼리 서로 이권문제로 인해서 유혈이 낭자하게 싸웠다는 소식을 들었다. 만약에 중국인들이라면 그렇게 했겠는가를 생각해볼적에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의 특성에는 옆의 나무가 자라면 자신에게 그늘이 발생하는 피해가 생긴다. 그래서 자기 위에는 사람이 없어야만 자기의 역량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시기와 질투심이 강하게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잘 하는데, 단체가 되면 반드시 시비거리가 발생해서 깨어지기 쉬운 점에서 한국인의 체질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우리 나라를 비하시킨다는 생각이 들런지도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탁월한 국민이라는 점이 있고, 또한 천지자연의 이치가 그러하므로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에 비해서 중국인든 통일된 사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세계 어디를 가던지 중국인의 파워는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다 보니까 이러한 아쉬움을 표해 보는 것이다. 과연 토의 기운은 어디에서던지 잘 적응을 하게 된다는 특징을 생각하다가 문득 이러한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