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적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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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학이 아무래도 인간의 길흉을 논하는 것이 커다란 목적이라고 한다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는 무토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의 구성원인 가족에서는 무토의 위치가 어디일까? 아무래도 위와 아래를 서로 붙잡아 주는 역할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집안에서 큰 아들의 위치를 여기에 대입시켜 놓고 생각을 해볼까 한다.

아시다 시피 큰아들이라고 하면 자못 어깨가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장남의 부담감이라고 해볼 수도 있겠는데, 장차 두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져야하고, 또 동생들의 앞길에도 상당부분 간섭을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래선지 대개의 장남(長男)들은 나름대로 적당한 무게가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막내아들과 큰 아들의 노는 모양은 분명히 다르다고 봐야 하겠다. 딸과는 또다른 무게를 갖고 있는 위치가 바로 무토의 부담감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위치에서 경거망동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른도 계시는 마당에 전권을 장악할 수도 없는 어중간한 입장이 되기도 한다. 장남의 위치는 그래서 어렵다고 생각되는데, 이것은 얼마전에 있었던 장남의 하소연과도 무관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한테 시집온다카는 여자가 오데 있능교? 시부모도 계시고 동상들도 수두룩하니까네 올 사람이 없는기라요. 내사마 피와 살이 섞인 가족들이니 아무 상관이 없지만서도 젊은 여자들이사 그런거 부담시러버서라도 맡을라꼬 할턱이 엄지요뭐. 그래서 제나이 마흔 다섯 살이지만도 아즉 장개를 몬가고 있는기라요. 그렇다고 집을 나가뿔 수도 엄꼬....”

이러한 하소연을 들으면서 과연 무토의 고민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남자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결혼을 못했다면 참으로 답답할 일이다. 그래도 장남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집을 뛰쳐 나가지도 못하고 가정을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에서 중용성이 살아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마음대로 저지를 수 없는 것이 장남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의 장남은 일찌거니 이러한 책임(?)을 포기한 사람도 많이 있을 것이다. 특히 아내에게 바짝 쥐어서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장남들은 살아가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잔소리를 한다고 불평을 하는 아내의 요구대로 멀지감치 모셔다가 버리는 장남도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하는 행동이야 곱게 볼 수가 없겠지만, 그 마음은 능히 짐작이 된다. 어느 자식이 어머니를 내다 버릴 연구를 하랴... 오죽했으면 그런 행동을 했으랴... 이런 생각이 든다. 역시 장남의 고민이라고 해야 하겠다.

이렇게 생각이 많다보니 자연적으로 사유하는 깊이가 커지고 또 그만큼 안목도 높아지기 마련이다. 적어도 많이 생각한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관찰력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철학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뭔가 자신이 살아온 환경의 절박한 여러 가지들이 얽히고 설켜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드라마에서 얻어지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개똥철학29)일 것이다. 단지 훌륭한 위인전에서 배껴서 앵무새처럼 써먹는 것과는 애초에 그 무게부터가 다르다. 흔히 식자(識者)들은 말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다.”

“칸트가 이렇게 말했다.”

“공자님이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했다.”

“누구누구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이야기를 할적에는 이러한 말이 붙어 다니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은 그렇게도 자신이 없는지 오로지 책에서 오려내고 박제한 위인들의 쓰레기30)만을 잔뜩 짊어지고 다니는 박사님들도 의외로 많은가 보다. 여기에 비하면 장남인 무토의 안목은 비록 폼새는 별 수가 없어 보일는지 몰라도 그 속에 들어있는 삶의 무게는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를 할 수가 없는 인생의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해본다. 가정적인 의미에서 무토의 역할과 장남의 역할을 서로 연관시켜 보면서 무토의 종합성향을 추측해 본다.




한편 이러한 성분을 국가적인 관점으로 관찰해 본다면 아무래도 대학생활 정도로 연결을 시키고 싶은 생각이다. 대학교에 다닐 정도의 연령이라면 기성세대와 신세대를 연결하는 중간 작용을 할 것으로 생각이 되는데, 대학에서 그러한 작용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아무래도 잘못된 학창시절이라고 보겠다. 그리고 일단 청소년 시절을 종합하는 상황으로써 이해를 해도 되겠다. 그리고 대학원 까지도 포함을 시켜야 할것같기도 하다. 대학원까지 거치면서 작은 자신의 세계에서 보다 넓은 광야로 안목을 넓혀나가는 과정이라고 보고, 나름대로 중화를 시켜보겠다고 나서는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자신의 안목을 믿고서는 학생운동도 하게되고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민중을 위해서 뭔가 봉사를 한다는 사명감으로 운동권에 가담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삐따닥~한 시각으로 바라다 보는 어른들은 학생이 공부는 하지않고서 쓸데없는 공명심으로 세상을 시끄럽게 한다고 못마땅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학생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마음먹는 용열한 어른들을 가엾게 여기면서 자신들이 그들을 위해서 더욱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불태우게 되는 악순환이 전개되는가 보다.

결국 이러한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이 바로 무토의 결합력에 의한 작용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잘했던 잘못했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연 그동안 작은 자신에게 갖혀 있었다면 뭔가 통일을 이루고 나름대로 이 땅에서 할 일을 찾아간다는 의미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아마도 운동을 하는 학생들은 이러한 사명감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순수한 무토의 마음을 악용하는 못된 어른들이 가끔은 있는 모양이다. 그러한 신선감을 부추겨서는 자신들의 이익에 활용하려고 하는 마음도 있고, 정책적으로 이용하려는 흑심을 품고서는 약간의 돈을 들고서 접근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이제 겨우 뭔가를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학생들에게는 그러한 농락에서 벗어나기가 약간은 어려울 것이다. 다만 그렇게 이용을 당하고 나서라도 바로 판단을 하게 된다면 많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반드시 시행착오를 범하지 않아야만 좋은 삶이라고 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은 수없이 많은 실책을 겪으면서 비로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문득 이런 이야기가 생각난다.

바둑을 배울적에 처음에는 많은 악수들을 배운다고 하는 말이 있다. 주로 동네의 상수들에게 배우게 되는데, 그들에게서 배우는 수들이 대개가 악수31)일 가능성이 많다고 하는 말을 생각해 보면서 인생살이도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인생의 선배들도 자신이 배운 악수를 후배에게 가르쳐 가면서 성숙해 갈 뿐인데, 처음부터 완벽한 답안지를 요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겁이 많은 마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어쨌던 세상을 두려워만 해서는 진화를 이룰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되는대로 살아가노라면 그 중에서는 고칠 것도 보이고, 감칠맛이 나는 재미도 때때로 끼어들어 있어서 그냥저냥 살아갈만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대학시절이면서 무토에 해당하는 인생에서는 주로 이러한 과정을 거쳐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