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물질적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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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물질적인 관점에서 무토의 성분을 찾아보자. 우선 토 중에서도 陽土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높은 산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접근방법이겠다. 그렇다면 일단 산을 올라가봐야 하겠는데, 산도 막상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 모양이 각양각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선 높은 태산도 있고, 낮은 언덕도 있다. 그런가 하면 평평한 운동장도 무토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메마른 땅도 있고, 습기가 많은 땅도 있다. 산이라고는 하지만 각기 처해있는 환경은 다 다르다고 봐야 하겠다. 이러한 형태를 모두 무토라는 범위에 집어 넣어본다.




산이라고 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것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서 사물을 살핀다는 의미가 된다. 즉 나무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산보다 높지는 못하고, 불이 아무리 이글거린다고 해도 산을 태워버리지는 못한다. 여기에서 ‘산불은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말을 할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신 벗님은 약간 관찰력이 부족하다고 하겠다. ‘산 불’은 실은 줄어진 말이다. 그 원래의 말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산의 나무에 불이 붙음’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산불은 나무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일 뿐 산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산불이 남으로서 토양에는 대단한 거름이 되는 셈이기도 하고, 토에게 생기운을 불어 넣어주는 작용도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즉 숲 속에 나무들이 빡빡하게 엉겨 있으면 속으로 공기가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토는 생기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의 본래 사명인 중화의 작용, 또는 조절하는 작용이 억압을 당하게 될것이고 이렇게 되는 것은 토의 사명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산불이 일어남으로써 목질을 불태워서 토양에 거름도 만들고 공기도 통하게 하는 일석이조의 역할을 수행하게끔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를 생각해 봤다.

이렇게 목이 과다하면 자연발생적으로 불이 생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흔히 불이 나면 등산꾼들을 의심에 찬 눈초리로 감시하고, 기도정성을 올리는 할머니에게 시비를 건다. 불씨를 남기지 않았느냐는 뜻일게다. 그렇지만 그 원인은 불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너무 왕성한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무가 없다면 불이 날래야 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토에는 불을 붙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불이 붙는 것은 나무이기 때문이니까 수시로 나무를 손질해줘야 하는데, 날이 갈수록 숲은 우거지고 사람도 들어가지 않으니까 불이 일어날 원인은 이미 무르녹아 있다고 봐야 정상일런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 ‘물이 고이면 고기가 생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약간만 수정을 하면 ‘숲이 우거지면 산불이 발생한다.’로 바뀐다. 그리고 자연이치에 가장 어울린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크게 높은 지능지수를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생각하면 알수 있는 일이겠기 때문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이 木生火의 이치이다. 그렇다면 나무가 우거지면 불이 발생하게 되는 간단한 이치가 있는 것처럼 불이 발생하면 토기운도 왕성해 진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생각을 해보자. 산이라고 하는 것에서 무토를 이해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간단할 것이지만, 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은 것이 늘상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다. 무토를 이해하면서 놓치기 쉬운 것은 土氣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이다. 토는 중화의 작용을 해주는 성분이 강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토가 양토일 경우라면 아마도 木氣나 화광(火光)처럼 토기의 작용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것은 형이상학적으로 관찰을 해보자는 이야기도 된다.

戊土의 본질을 ‘중화지기(中和之氣)로 생각해본다. 중화의 기운이라는 것은 모든 삼라만상이 한 곳으로 치우치는 것을 방지하고 균형을 이루게 하는 작용을 말하려는 것이다. 오상(五常)28)에서는 이를 일러서 신(信)으로 표하기도 하는데,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중화기운을 띨적에 가능하다고 본다. 어느 한쪽으로 지우쳐 있다면 아무도 그의 말을 믿지 않으려고 하겠기 때문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그렇고 학생운동에 가담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대체로 중용의 기운이 고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어느 한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개개인의 내면세계를 살펴본다면 또다른 중용성이 보일런지도 모르지만, 메스컴으로 보도되는 것만으로 참고를 삼아서 관찰한다면 전혀 중용의 개념이 없다. 그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스스로도 한 곳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같다. 아무렴 이 산골의 낭월이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배울만큼 배우고 생각할만큼 생각한 사람들이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째서 중용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점이 관심사인데, 이것도 조금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는 점이다.

즉 이렇게 중용의 뜻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은 바로 상대방이 그렇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어떻게 하는 것이 치우지지않은 중립적인 방향에서 나라와 국민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점은 이미 모두 파악을 했다. 그런데에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은 상대방의 목적이 나를 꺼꾸러 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내가 어떤 목적하는 바를 얻은 다음에 비로소 중립적인 관점에서 원만한 정치를 하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방도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원칙은 보류를 하고서 상대방으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는데, 실은 이 목적이 바로 결과이니 참으로 딱한 문제이다. 무슨 말이냐면 영원히 그 목적하는 결과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戊土의 기운은 이미 증발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는 셈이다. 모두 자기만의 욕심을 양보하고서 순수하게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해서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여기에 반대를 하지 않으면서 또한 동의를 할 마음이 없다. 그렇게 하다가는 자칫 이나마도 상대방에게 빼앗길런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렇게 선뜻 자신의 얻은 바를 내어놓게 하지를 못하는 모양이다.

바로 여기에서 무토의 역할이 필요하게 되는 것인데, 만약 무토의 역할이 제대로 발휘된다고 하면, 이 나라도 상당히 살기가 좋은 나라가 될 것이다. 현재의 한국은 중화의 개념이 없어져 보인다. 물론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적어도 9일이 지나면 戊日이 다가오고, 아홉 달이 지나면 또한 戊月이 다가오기 마련이다. 물론 10년에 한번은 戊年도 있다. 이렇게 골고루 돌아가는 기운을 받고 있는 사람이기에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보다 큰 욕심으로 인해서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이런 이야기가 떠오른다.




같은 동네에 굉장히 미워하는 두 사람이 있더란다. 이들은 언제나 만나면 으르릉 거리고 마주 보지도 않았는데, 그날은 장보러 가느라고 배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재수가 없으려니까 그랬겠지만, 배가 가라앉게 되었다고 한다. 배 안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려고 앞과 뒤에 붙어 있었다. 앞에 있던 사람이 삿대를 든 선원에게 물었다.

“배가 가라앉으면 어디부터 가라앉는거유?”

“그야 기관이 뒤에 있으니까 무거운 곳에서부터 가라앉게 되겠지요. 그렇지만 죽는 것은 마찬가진데 그것을 가려서 뭘하겠소.”

“그래도 저녀석이 나보다 먼저 죽을거 아니요? 그게 보구 싶다는 겁니다.”

뒤에 앉은 사람도 키를 잡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다.

“보쇼, 배가 가라앉으면 어디부터 가라앉소?”

“그야 달리는 속도가 있으니까 앞부터 가라앉겠지요. 그치만 죽기는 매일반이라오.”

“그럼 다행이구랴. 저녀석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니 얼마나 고소할는지 생각만 해봐도 신이 절로 나는구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결국 이야기를 보건데 무토의 성분은 하나도 없었다는 결론이다. 우리는 이 두사람보고서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쉽게 말해버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과연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 잘 관찰을 해보기 바란다. 아마도 어느 구석엔가는 이 두사람의 어리석음 처럼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끝장인 죽음조차도 두려워 하지 않는 구석이 숨어 있을런지도 모른다.

실은 정치하는 분들이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으르릉 거리는 것을 보면서도 막상 내 자신에게도 그러한 일을 준다면 역시 같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전혀 비난을 할 마음이 없다. 다만 스스로 그러한 이기심을 버리고 무토의 중화지기를 얻을 수 있기를 생각해볼 뿐이지만, 막상 먹을 것이 눈앞에 나타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성분을 무토의 형태로 이해해 보도록 하는 것으로 우리의 공부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고고하게 우뚝 버티고 있는 태산의 위엄도 포함되고, 치우치지 않은 중화사상(中和思想)도 무토의 영역에 포함을 시켜본다. 그러나 한마디로 무토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아마도 이것이 토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