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주적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45
조회
6330

사주를 갖고 태어날적에 丁火로 태어난 사람은 그 영향을 받아서 항상 남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의 편에 서서 살펴보려고 하는 포근한 마음씨를 소유하게 된다. 이러한 점은 기본적으로 태어나면서 그러한 기운을 받고 나기 때문에 보다 큰 국민성의 영향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특성에는 변함이 없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유럽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정화가 많을까? 그리고 한국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갑목이 많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주를 볼적에는 대체로 평균인 듯 싶다. 특히 갑목일주를 많이 만난다는 생각은 들지않는 것을 보면 아마도 골고루 섞여서 태어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성품은 그냥 감싸주기만 하는 것으로 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기도 한다. 정화도 역시 불은 불이다. 누군가가 건드리면 폭발을 하는 성분도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병화는 건드리지 않아도 폭발하는 것과 비교를 한다면 정화는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신사라는 말을 할수도 있겠다. 예의바르고 차분하다는 말도 가능하다. 남의 입장을 잘 고려해주는 성분으로 인해서 자신이 약간의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상대방이 즐거우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성분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성분이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다면 아마도 병화의 성분이라고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원래 열기가 과열되면 빛도 많이 발생하는 것이 원칙이다. 모닥불을 피우고 놀적에 장작을 듬뿍 집어넣고 불을 피우면 주변이 상당히 밝아진다. 이것을 보고서 느끼는 것은 정화도 세력이 강하면 빛이 많이 난다는 것을 알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사람은 성품도 괄괄해서 불의를 보고서는 참지 못하는 성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반면에 같은 정화라도 불이 약한 경우에는 늘상 마음만 있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겠다. 즉 남의 아픈 곳을 만져주고 싶지만, 그렇게 하려니까 피곤해서 나부터 지치게 되는 꼴이라고나 할까 싶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막상 행동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약한 불은 남의 가슴을 데워주기에 열기가 부족해서이다. 이렇게 되면 열기를 복돋아 줄 연료가 필요하게 되고, 그래서 나무가 있는가를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사람은 자칫 너무 나뭇단에 집착을 한 나머지 나무의 노예가 될 가능성도 많이 있다.

실제로 약한 정화 중에서는 접신(接神)25)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흔히 말하는 무당사주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연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도 되겠다.

뭐든지 약하면 남의 지배를 받게 된다. 사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렇게 불이 약하면 물을 만났을 적에 자칫 꺼져버리게 되므로 그 마음에는 늘상 근심이 도사리고 있게 되고, 이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약한 불은 나무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당이라고 하는 것도 생각해보면 남에게 따스한 말을 해주는 직업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요즘은 인식이 그렇게 되어서 돈만 알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을 많이 하기도 하는데, 원래의 무당은 동네에서 뭔가 잘 풀리지 않고, 꼬여드는 사람들이 하소연을 하러 찾아가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신은 마음이 추우면서도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주는 역할을 잘도 수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정화에게 가장 어울리는 일이겠는데, 문제는 정화가 약하므로 인해서 조상영혼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이 다르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고 해서 약한 정화는 모두 무당이라고 판단하면 곤란하다. 역시 등급에 따라서 자신이 종사하는 일은 분명 다르기 마련이다.




혹 벗님은 무당(巫堂)에 대해서 비난을 하실 마음이 드실런지도 모르겠다. ‘무당=사기꾼=혹세무민’으로 연결되어지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무당이라면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하고, 감싸줄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한마디 추가하고 싶어진다. 낭월이도 처음에는 그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이 드신다고 해도 탓을 하고 싶지는 않다. 특히 초등학교의 교과서에서 안향선생이라고 하는 분이 무당들을 꾸지람하는 대목을 배우고 나신 벗님들이라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드실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생각이 달라진다. 그결과 현재 낭월이가 생각하는 무당이라는 단어의 느낌은 ‘무당=딱한 운명=감싸주자’는 쪽으로 전개되고 있다. 명리학을 연구하다가 보면 세상의 모든 부류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점이 묘하다. 심지어는 사기를 치는 사람의 마음도 사주팔자에 나와있으니 이것을 보면서 그 사람을 비난할 수만도 없는 것이 아마도 연구하는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예전에는 올바른 사람과 바르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어떤 기준이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전혀 기준이 없다. 법관은 올바른 사람이고, 강도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도 바뀌는 것이다. 바뀐다고 해서 판사는 도둑이고, 강도는 임꺽정이라고 하는 점은 물론 더욱 아니다. 다만 그들도 나름대로 그들의 운명이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운명에 대해서 생각을 할 뿐이지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결과만을 놓고서 왈가왈부하는 것에는 반대를 하게된다. 즉 무슨 일이든지 사주를 놓고 생각해보면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가 있다는 이야기다. 특히 몸을 팔아서 먹고사는 여자들의 사주를 보면 더욱 그러한 생각이 든다. 너무나 세파에 시달리는 사주를 보면서 여기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숨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되면 부도덕한 여자들이라고 비난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더욱이 남의 두 번째 부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미녀를 봐도 역시 팔자의 사슬로 인해서 갈등을 겪으면서 살고 있다는 가련한 마음이 앞서게 될뿐, 못된 년이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있다는 비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역시 팔자에서 남의 후처가 되어야 하는 암시가 있다면 이점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되었던지 간에, 그 자신이 타고난 업력(業力)의 무게로 온 몸이 지쳐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되는 것이고, 이러한 생각이 들면 세상에서 비난을 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명리학을 공부한지 10여년 만에 겨우 생각을 하는 것이 이렇게 도덕(道德)에 대해서도 불분명해지고, 윤리(倫理)에 대해서도 애매해진다. 그리고 죄악(罪惡)에 대한 생각도 그렇게 협오스럽지 않아진다. 어쩌면 불감증이라고 해야 할런지도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게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 오로지 생각되는 한마디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는 한마디가 참으로 명언이라는 마음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