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3] 운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작성일
2016-06-14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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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3] 운명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새벽에 차 한 잔과 더불어 책을 읽는 재미는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행복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책에서는 고인도 만나고 지식도 만나고 삶의 존재들의 흔적들을 만날 수가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은 언제 사 뒀는지도 모를 책으로 손이 갔습니다. 아마도 짐작컨대 대충 읽어보고는 꽂아 둔 책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 안에 무슨 이야기가 써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봐서 정독을 했다고 하긴 어렵지 않은가 싶기도 합니다. 나름 책을 읽으면 그 중에 한두 마디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니까 말이지요.
책 이름이 재미있나요? 승려가 철학자와 만나서 10일 간 대화를 나눈 이야기를 담아 놓은 것입니다. 물론 더 재미있는 것은 철학자는 아버지이고 승려는 그의 아들이라는 것이기도 합니다. 상당한 경지에 도달한 지성인 두 사람이 격 없이 전개하는 이야기들은 한 번 읽어보기에는 너무나 충분한 이야기들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을 읽다가 문득 운명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 맴돕니다. 그렇게 되면 책의 내용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낭월의 생각 꼬리를 따라가느라고 독서는 건성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책을 덮고는 생각을 쫓기로 했습니다. 항상 낭월의 독서는 그렇게 엇길로 나가서 방황하기 일쑤입니다. 하하~
1. 운명학은 결정론이다. - 숙명론(宿命論)
당연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전생의 업이라고 합니다만, 사주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태어날 적에 각인된 일생의 설계도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숙명론이란 말에는 불교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하겠네요. 숙명이란 과거세의 운명이라는 뜻이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콩을 심어 콩을 거두고 팥을 심어 팥을 거둔다."
인과론이라고 이름을 붙이지만 명리학자는 운명론이라고 해도 뜻은 같지 싶습니다. 이것이 운명을 결정하는 요인이라고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아버지 말씀이 그렇습니다. 프랑스에서 과학의 분야에서 박사까지 되었으니 그대로 머물면서 연구를 이어가는 것도 좋지 않았겠느냐는 이야기에서 그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도 일종의 운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면 한국에서 살다가 떠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 숙명론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우리의 운명론에는 이런 것도 있었군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누에는 뽕잎을 먹는다."
맞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것을 정명론(定命論)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모든 것은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궤도를 달려야 하며 벗어날 수가 없다는 논리가 그 바닥에 깔려 있다고 하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삶을 본다면 또한 매우 타당성이 높아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경우는 주어진 여건대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특별히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는 그냥 그대로 어제의 삶처럼 오늘을 살게 되고, 그것이 내일이 되어도 또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한 번뇌없이 살아가는 지혜로운 방법 중에 하나라고 봐도 되지 싶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이것이 숙명론입니다. 운명학은 그것을 읽어 내려고 공부하는 분야라고 보면 되겠네요.
2. 운명론은 개선시킬 적에 의미가 있다. - 개명론(改命論)
척명(拓命)이라는 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네이버에서는 검색이 되지 않는군요. 여하튼 '운명개척론'을 줄여서 써 봤다가 어색해서 개명으로 고쳤습니다. 의미가 중요할 뿐이니까요. 운명은 개척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것에 대해서 거부하는 마음이 자리를잡고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낭월도 이러한 분야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이 정해진 것임을 알아내는 것이 목적인 학문이라면 이것은 의미가 반감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정해진 것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개선을 할 방법이 있느냐는 것에 더 관심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개명론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것도 운명이고, 정해질 것도 운명입니다만, 전자는 숙명론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생명체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신의 이상이 현실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뚫고 나가려는 노력을 할 의사가 있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책에서 아들의 역할인 마티유의 모습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숙명론의 정해진 것에서 출발하고 아들은 정해질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두 사람의 관점 차이라고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낭월의 이해가 사실과 조금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에 그렇겠다는 정도이니까요.
운명의 개선(改善)은 숙명에 대응하는 의미로 이해를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개선이라는 것은 이미 있는 것을 좋게 바꾸는 것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헌집 수리'와 같은 개념일 수도 있겠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두 생각들이 겹치는 곳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두번 째 날의 대화를 보다가 이러한 생각을 정리해 보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벗님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정명론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개명론에 가깝습니까? 또는 정명개명공존론에 가깝습니까? 하하~
3. 방문자의 질문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방문자의 질문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담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축소판이라고 할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유형을 크게 분류해 본다면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나의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궁금하여 방문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운명에 나와있는 설계도를 좀 보고 싶다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궁금한 것입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의 내일이 궁금합니다....... 부처가 말합니다.
"내일의 당신이 궁금한가? 그렇다면 오늘 그대가 하고 있는 것을 보라~!"
참으로 지당하신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내가 한 것이 내일의 나일텐데 오늘 뭘 했는지를 생각하기 전에 내일의 내 모습은 어떨 것인지를 묻기도 합니다. 물론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대부분의 생각으로는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관념이 깊숙한 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까닭입니다.
더구나, 운명을 풀이해 주는 선생님들도 숙명론자와 개명론자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숙명론자는 아무리 요동치고 발버둥을 쳐봐야 부처님 손바닥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설명하는 이야기지요. 이러한 선생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가는 사람은 그야말로 5분 뒤에 나오는 영화의 내용을 미리 훔쳐 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가 막힌 것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리얼하게 설명해 주는 소리를 듣다가 보면 자신도 모르게 최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랬구나.... 내가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한 것들도 결국은 운명에 의한 것이었을 뿐이고, 성공이든 실패든 모두 운명에 의해서 짜여진 각본을 그대로 삶에 구현했던 것이었구나.....
참 무기력해지는 이야기지요?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상담객의 뇌리에는 그러한 생각이 자리를 잡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추를 할 것이 별로 없는 20대는 상담하러 가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남친이나 여친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를 물어보는 정도일 수는 있겠네요. 그러나 50여 년을 살아 온 삶에서는 뒤돌아 볼 것이 적지 않지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신의 삶에서 예고하고 있는 내일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 것인지가 궁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상당히 많이 있다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뭔가 답답~한 느낌이 드는 것도 어쩔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자신은 운명대로 살아왔으리라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묻는데 지나간 모든 것도 다 운명이 정해준 대로 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떨까요? 정해진 것과 정해질 것이 서로 어우러져서 만들어 가는 것이 운명의 각본이라는 것을 미쳐 생각하지 못하게 되면 자신의 삶이 왜 운명대로 되지 않았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은 너무나 많은 요인들이 운명의 설계도에 간섭을 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여하튼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다 쓰기에는 한담이 너무 무거워질 것이므로 생략하거니와 중요한 것은, 스스로 운명은 정해졌지만 노력으로 개선을 할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는 경우에는 그만큼의 여지가 주어진다는 것만 분명히 알아두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 여기에서 오해를 할 수도 있음을 생각합니다. 개선을 한다고 한 것이 개악(改惡)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으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나름 개선한다고 한 것이 개악으로 갈 수도 있음을 생각하는 것은 사업을 한다고 일을 벌였다가 거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경우도 많이 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선인지 개악인지는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봐야 할 부분이라고 하겠네요.
그리고 개선을 할 수가 있는 방법을 조언하는 것이 낭월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해진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구태여 내일의 영화를 미리 볼 필요도 없다고 하겠지요. 뭔가 앞으로 진행이 될 원고가 문제점을 안고 있다면 그것을 지금이라도 고쳐서 수정판으로 영화를 찍으면 될 것이 아니냐는 정도의 생각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운명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적어도 그 길에 바윗덩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서 멈칫거리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바윗덩어리를 제거할 수가 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야만 삶의 질은 달라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위를 제거할 방법을 101가지나 알고 있는 바위 전문가에게 묻는다면 생각보다 훨씬 쉽게 장애물을 제거하고 계속해서 길을 갈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운명학의 본질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이 책의 대화에서 아들인 마티유는 바로 그 길을 택했던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주어진 것은 분자생물학의 전문가로써 박사로써 교수로써의 길을 가는 것이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버리고 마음이 이끄는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여 평안을 얻는 수행자의 길로 택했다는 것은 분명히 여간의 결심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어떻게 얻은 지위인데... 헌신짝처럼 버릴 수가 있느냐는 부친의 말씀에도 공감이 가는 것은 오다 가다 줍는 것이 박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 공감이 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명의 기술을 버리고 마음의 자연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그것도 대략 26세 무렵인가 봅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그것 조차도 운명에 나와 있는 거잖아~?"
하하~ 글쎄요.... 그야 모르지요만서도....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 자신을 이해하고 경영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에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본다면, 분명히 자신이 받아 든 대본이 맘에 안 들면 바꿔보려고 시도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대본을 읽어봐야 합니다. 만약 대본도 읽어보지 않고서 바꾸겠다고 달려드는 것만큼 돈키호테식 이론도 없다고 하겠네요.
그렇기 때문에 운명학을 배워야 한다는 이유같지 않은 이유도 힘을 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오행의 생극에 대한 이해 정도는 할 수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물론 불가능한 이야기네요. 그래서 최소한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개선할 의지가 있는 자'라면 그래야 한다는 조건부의 제한은 있겠습니다만....
물론 대본을 읽어보기 위해서 운명학을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도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닌 까닭이지요. 자칫하면 일생을 바쳐야 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전문가에게 의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을 잘 통찰했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물을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야말로 '내 자신을 안다.'는 관점이 되는 까닭이지요. 그 외에는 지나는 길에 진지하게 자신의 길을 물어야 이 분야의 전문가들도 존재감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하~
책을 읽다가 문득 한 생각이 들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생각은 낭월학당을 찾아 주시는 벗님들과 공유할 적에 그 의미가 더욱 커지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인해서이지요. 손가락에 힘이 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함께이고 싶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찾아주시고 읽어주시는 벗님들께 항상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기에 더욱 행복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무엇보다도 오늘이 어제처럼 즐거운 순간들로 가득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오늘이 안락하다면 내일은 생각할 겨를도 없기 때문이지요. 고맙습니다.
2016년 6월 14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