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 교학상장(敎學相長)

작성일
2016-03-06 20:29
조회
4632
 

[686] 교학상장(敎學相長)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경칩이 지나고 나니 기온이 한결 부드러워 진것 같네요. 상큼한 공기가 볼을 간지릅니다. 그래서 봄의 느낌을 봄처녀라고 했나 싶기도 합니다. 상쾌한 봄을 삶에서 즐거운 한 순간으로 간직하실 수 있으시기를 기원드립니다.

 

1. 도올 선생의 《중국일기》를 보다가...


늘 그렇듯이 낭월의 시야에 들어오는 선생님 들 중에 한 분이 도올 선생입니다. 때론 인간적으로, 또 때론 오만무례한 불한당 같은 모습으로 느껴지는, 그야말로 다이나믹한 사나이의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는 선생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선생이 연길에서 머무르면서 기록한 일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고 하기에 구해서 읽어 볼 요량으로 주문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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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네 권이 나왔네요. 말씀으로 봐서는 앞으로도 세 권 정도는 더 나올 것도 같습니다만 우선 모처럼 여유를 갖고 잠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1권의 앞 부분을 보고 있는데 과거에 스승으로 삼았던 분들에 대한 소개의 글이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교학상장(敎學相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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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 네 글자가 마음을 건드립니다. 타심금(打心琴) 명심금(鳴心琴)이었던 게지요. 그래서 부랴부랴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분명히 이 글귀는 고전의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겨우 그 끝자락을 잡았습니다. 벗님께서 읽으시거나 말거나 전문을 옮깁니다. 물론 이야기의 맨 끝에 붙일 요량입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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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출처를 수소문하다가 보니까 그 시발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예기(禮記)》라는 책에 닿았던 것이지요. 다행히 도올 선생의 힌트가 있어서 헛고생은 면했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상장이라는 말은 예기에서 나온 글이었습니다. 사서삼경이라고는 들어봤지만, 그 안에도 포함되지 않은 책이네요. 예기 중에서 「학기(學記)」편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학기(學記)라고 하면 '배움에 대한 기록'일까요? 그 정도로 해석을 할 수가 있겠네요.


2. 교학상장(敎學相長)의 뜻


교학상장의 의미를 풀어보면 '가르치는[敎] 이나, 배우는 이[學]가 서로 같이[相] 성장한다[長]'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다. 크게 어려운 글귀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의미는 자못 심중(深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며 배우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을 해 보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읽던 책을 덮어놓고 한담으로 생각나는 대로 정리를 해 볼 마음을 일으킵니다. 벗님과 같이 생각해 보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하~

가르치는 자는 선생이 되어서 열심히 아는 것을 가르치게 되고, 배우는 자는 학생이 되어서 또 열심히 가르쳐 주는 것을 흡수하면 되는 것이 학문의 거래(去來)라고 할 수 있지 싶습니다. 옛 스승들께서도 이러한 마음으로 후학을 지도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면서 잠시 숙연해 지는 마음을 가져 보기도 합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스승의 그림자도 감히 밟지 못할 만큼의 존중심이 나올 것이기 때문이겠습니다.

교육자의 위상이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학생이 선생을 고발하고 선생이 학생을 폭행하는 이야기도 가끔은 들려 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현실이라니 또한 그렇겠거니 해야 하겠지요.....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생기게 되었을까요? 일이 이 지경에 까지 도래하게 되었을 것인지에 대한 원인의 분석이라도 좀 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스승은 성심을 다 해서 가르칩니다. 아, 분별심을 조금 일으켜 보겠습니다. 스승과 선생에 대한 차이점이 문득 떠오르네요. 스승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선생은 맡은 것만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교재를 읽어주는 선생일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네요. 설마.... 그럴리는 없겠습니다만 혹여라도 그러한 스승이 있다면 그 스승은 스승이 아니라 선생인 것으로 보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스승과 선생의 차이는 가르치는 마음에서 구분이 될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가르치느냐는 것의 결과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스스로 사도(師道)에 충실했다면 그를 일러서 선생이라고 하면 안 되겠습니다. 스승이라고 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은 스승이라 할만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스승을 많이 만나셨기 바랍니다. 그리고 낭월의 소망이기도 합니다. 낭월은 항상 스승에 목마른 학인인 까닭입니다.

제자는요? 제자는 스승이 가르치는 것을 모조리 흡수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스승에게 은혜를 갚은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자가 입을 벌리고 있으면 회초리를 들어야 합니다. 귀를 열어야 하는데 퍼 넣어 달라고 입만 벌리고 있다면 이미 배움의 기본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이지요. 여기에 아무리 노력을 해 봐도 제자의 입에 감로수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스승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초리를 들면 고소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수업료를 냈으니 원하는 답을 퍼 넣어 달라는 제자에게 스승은 비참한 마음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귀를 활짝 열고 전력을 다 하지 않으면 결코 스승의 자리에 도달할 수가 없음을 알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스승의 슬픔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스승도 불행하고 학생도 불행합니다. 모두가 불행한 것은 교학상장이 이뤄지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 교육의 현실은 어떠할까요.....?

 

3. 배울 일보다 가르칠 일이 더 많은 낭월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늘 두리번 거리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침을 얻기 보다는 배움을 구하는 사람과 만날 일이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월을 먹어가고 있음인가 싶기도 합니다. 얻은 것도 없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분명 주제넘은 일이기에 항상 긴장하게 됩니다. 상담을 하러 오시는 분도 마찬가지로 잠시의 사제인연이 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낭월은 그러한 마음으로 방문객을 맞이합니다.

어제도 제자를 맞이 했습니다. 이번에는 《적천수(滴天髓》입니다. 이것을 공부해 보겠다고 야무지게 달려 든 제자가 생겼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낭월이 가장 큰 스승으로 삼고 공부하고 있는 경도(京圖) 선생의 가르침인데 그것을 자신에게도 좀 알려 달라고 먼 길을 달려 왔습니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냔 말이지요.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조만간에 적천수에 좁은 소견머리를 보탠 《적천수이해(滴天髓理解》가 출간 될 예정입니다. 그것을 정리하면서 다시 새로운 관점으로 적천수를 바라보게 되었고, 다시 경도 선생의 마음을 읽어 볼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온기가 가시기도 전에 공부를 하겠다고 찾아온 제자가 생겼으니 그야말로 기뻐서 펄쩍 뛸 일이 된 셈입니다.

사실, 자평명리학을 강의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많은 엇길로 미래를 헤매이다 답을 찾지 못해서 방황하던 인연을 만나 나름 깨달은 만큼의 바른 길로 안내하는 즐거움도 무엇보다 크다고 생각이 되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긴 공부 시간을 마치고 감사한 말을 남기며 마무리를 짓게 될 적에 느끼는 보람은 가르친 자의 행복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르치는 자도 엄청나게 많은 수확을 거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가르쳐 보지 않은 자는 물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체험으로 알다 보니까 '교학상장'의 구절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던 게지요.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은 늘 느끼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항상 새로운 관점으로 다음 번의 제자를 기다리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오랜만에 제자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 해서 낭월이 알고 있는 것과 깨달은 것을 아낌없이 퍼부어 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비록 책으로 쓸 적에도 최선을 다 해서 썼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또 어제는 어제일 뿐이고 오늘의 일은 오늘의 생각과 더불어 진행하는 것이기에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가 없는 것처럼, 같은 글을 두 번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 이 학문의 오묘함이란~~!!!

적천수의 제1장 [天道]편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설명을 하면서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예전에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이지요. 왜 어제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그 제자와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하면서 떠오르는 것일까요? 곧 책이 나오게 될 것이지만 그 책에서조차 이렇게 설명하지 못했던 것을 술술 막힘없이 설명하고 있는 자신을 느낄 적에 묘한 희열감에 젖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니  '교학상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냔 말이지요.

 

낭월: 예를 들면, 낭월은 어미 소와 같습니다.
제자: 그럼 제자는 송아지와 같겠네요?
낭월: 그렇습니다. 혹 송아지가 어미 젖을 먹는 장면을 보셨는지요?
제자: 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상상만 해 봅니다.
낭월: 송아지가 젖을 빨다가 한 번씩 어미의 젖통을 들이 받습니다.
제자: 아니,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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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 젖이 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면 받습니다.
제자: 받는다고 해서 젖이 더 나오나요?
낭월: 그러면 젖이 더 나옵니다. 다시 열심히 먹습니다.
제자: 아, 그런 것이군요.
낭월: 제자가 찾아오면 배가 고픈 송아지와 같이 생각합니다.
제자: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낭월: 젖을 빨아 먹다가 양에 차지 않으면 들이 받기도 해야 합니다.
제자: 뭘 알아야 들이 받던가 말던가 하지요.
낭월: 열심히 하게 되면 그럴 날도 온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제자: 어서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낭월: 가장 안타까울 때가 언제인지 아시겠습니까?
제자: 글쎄.....요......?
낭월: 젖이 팅팅 불었는데 송아지가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 입니다.
제자: 그럴리가요? 왜 공부하러 와서 노력을 하지 않겠어요?
낭월: 그니깐요. 그런데 실제로 그냥 입만 벌리고 있는 제자도 있답니다.
제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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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 그러고 있으면 어미는 짜증이 납니다.
제자: 그렇겠네요. 저도 아이를 키워봐서 압니다.
낭월: 아, 그러셨군요. 그럼 생각해 볼 수 있겠네요.
제자: 그럼요~! 젖이 불었는데 먹지 않으면 젖이 아프거든요.
낭월: 바로 그겁니다. 스승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제자도 있더란 것이지요.
제자: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러지 않도록 분발하겠습니다.

낭월: 또 공부 하십시다. 제재(帝載)가 무슨 뜻일까요?
제자: 임금제, 실을재입니다.
낭월: 그렇군요. 글자 공부는 잘 하셨네요. 그럼 뜻 공부를 해 보십시다.
제자: 근데 뜻이 너무 어렵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낭월: 제자가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배우러 온 것이지요.
제자: 그래도 너무 모르니 부끄럽습니다.
낭월: 그러니까 아는대로만 답을 하시면 됩니다.
제자: 알겠습니다. 임금을 실었습니다. 라고 해석을 하겠습니다.

낭월: 아주 좋습니다. 임금을 실었구먼요. 왜요?
제자: 예?
낭월: 그러니까, 왜 임금을 실었느냔 말이지요.
제자: 그러게요..... 왜 임금을 실었을까요? 알려 주세요.
낭월: 욕식삼원만법종커던, 그러니까 삼원이 만법의 근원임을 알고자 커든.
제자: 만법의 근원임을 알고자 하려면 먼저.... 제재와 신공을 보라.. 입니다.
낭월: 참 좋습니다. 그렇다면 임금을 실은 것을 보라는 말이네요.
제자: 그러게요.... 임금을 실은 뜻은 참 생뚱맞아 보여요....
낭월: 그렇다면 경도 선생이 뭔가 하고 싶었던 말과 코드가 닿지 않았나 봅니다.
제자: 경도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요?

낭월: 임금을 태운 수레를 오행(五行)에 비유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제자: 어머~! 정말요? 왜 요?
낭월: 임금의 수레는 절대적인가요 상대적인가요?
제자: 그야 절대적이지요. 절대적 군주(君主)니까요.
낭월: 그렇다면 임금을 실은 수레는 절대적인 의미를 말한다고 해도 되겠네요?
제자: 아하~! 그래서 오행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네요. 멋져요~!
낭월: 이것을 수작이라고 합니다. 수작이 무슨 뜻일까요?
제자: 수작은 빼어난 작품.... 을 수작이라고 합니다.

낭월: 그런 뜻도 되겠네요. 근데 빼어난 작품과 지금 우리의 대화가 통할까요?
제자: 그렇네요. 뭔가 이상합니다.
낭월: 스승과 제자가 주고 받는 것, 주인과 손님이 주고 받는 것
제자: 아하~! 건달이 아가씨를 희롱하면 하는 말이기도 해요.
낭월: "어따 대고 하는 수작이야~!!"라고 하는 말이 떠오르셨군요.
제자: 그러니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것도 수작이었군요. 또 하나 배웠습니다.

낭월: 그렇다면 신공(神功)은 무슨 뜻일까요?
제자: 그냥 떠오른 대로 말을 하겠습니다. 그건 음양입니다.
낭월: 옳거니~! 잘 하고 계십니다. 설명만 잘 하면 합격입니다.
제자: 그러니까, 왕이 수레를 타고 가면서 부자는 감세하고 빈자는 면세하는....
낭월: 빙고~!
제자: 깊은 곳은 다리를 놓고, 높은 곳은 터널을 뚫고....
낭월: 통(通)~!!

제자: 정말, 공부하는 즐거움은 이런 것이로군요. 황홀해요~!
낭월: 그러한 것은 절대적인가요? 아니면 상대적인가요?
제자: 물론 상대적이지요. 높은 데는 낮추고 낮은 데는 높이니까요.
낭월: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다시 정리를 해 보시지요.
제자: 삼원이 만법의 핵심임을 알고자 하거든 오행과 그 변화를 먼저 보라.
낭월: 기가 막힙니다. 경도 선생과 통하셨습니다.
제자: 아니, 제가 지금 제 입으로 이렇게 멋진 말을 했단 말이예요? 어머~!

 

예, 이렇게 수다를 섞어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 후로도 신공(神功)에 대해서 30분 가까이 수다를 떨었습니다만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거니와, 그 분위기를 조금 전해 드려보고 싶어서 이렇게 호들갑을 떨어 봤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면서 깨닫는 즐거움은 또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가 없는 짜릿함이 있음을 알기에 제자가 찾아온다는 날은 문밖을 내다 보면서 기다리곤 한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경을 담은 글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글을 도올 선생의 책에서 접하고는 갑자기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하하~

 

4. 옥불탁 불성기 인불학 부지도


아마도 책을 좀 보신 벗님이라면, 이러한 구절은 접해 보셨으리라고 생각을 해도 되지 싶습니다. 여기 저기에서 만나게 되는 글귀이니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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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도 공부를 시작하면서 바로 외웠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억을 할 것도 없이 바로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하네요. 이 책은 절에 가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책입니다. 이름은 《치문경훈(緇門警訓)》입니다만 보통은 그냥 '치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뜻은 '절집에서 수행 잘 하는 방법' 정도일까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이야기 정도로 봐도 되겠습니다. 여하튼 여기에서 읽은 글귀입니다.

다만 출처도 모르고 그냥 좋은 말이라는 것만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글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히도 바로 '교학상장'의 내용이 있는 예기의 학기에서 였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렇게도 수다를 떱니다. 하하~

이 부분의 원문을 구경하시라고 살며시 끼워넣습니다. 이것이 글쓴이의 음모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한 번 봐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경험에 의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禮記》 學記편


發慮憲.求善良.足以諛聞.不足以動眾.就賢體遠.足以動眾.未足以化民.君子如欲化民成俗.其必由學乎


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是故古之王者.建國君民.教學為先.兌命曰.念終始典於學.其此之謂乎.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是故學然後知不足.教然後知困.知不足.然後能自反也知困.然後能自強也.故曰.教學相長也.兌命曰.斅學半.其此之謂乎.


여기 까지만 보겠습니다. 더 궁금하신 벗님은 끝에 붙이는 전문을 보시도록 하면 되겠습니다. 특별히 빨간 색으로 했으니 눈에 잘 띄이실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같은 글에서 옥불탁과 교학상장이 같이 있는 것을 발견하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5.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가르칩시다.


벗님께서도 아마 누군가에게는 학생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스승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學者)의 입장에서는 어미 소의 젖 한 방울까지도 남기지 말고 빨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교자(敎者)의 입장에서는 또한 최후의 한 방울까지도 다 퍼줘야 맑고 신선한 젖이 다시 고이게 되겠지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배움에 대해서 정리를 해 보게 되네요. 늘 그렇듯이 고인들은 항상 말씀하시지요. 게으르지 말라고.... 그런데도 늘 게으르기만 하니 스스로 생각해도 참 큰일입니다. 하하~

도올 선생 땜에 예기의 한 구절도 배우게 되었고, 겸해서 《예기(禮記)》에는 「학기(學記)」라는 한 편의 배움에 대한 가르침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또한 도올 선생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가르침과 배움은 전혀 엉뚱한 곳에서도 일어나는가 싶습니다. 참고로 중국일기에는 상당히 많은 사진이 함께 실려 있어서 현장감을 더해 주는 것 같습니다.

평생을 호학(好學)하며 살아온 노학자의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지 싶습니다. 이렇게 또 망중한을 즐길 수가 있는 삶에 감사를 드리게 되네요. 세상은 시끌시끌해도 마음 속은 잔잔한 호수 같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자신을 추스리기도 합니다. 밖을 바라보고 혼란스러우면 내면을 바라보면서 수행을 하면 되지 않겠느냔 말씀이지요.

내일은 2년 만에 공부하러 다시 오는 제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또 설레입니다. 그 짧지 않은 세월 속에서 뭘 보고 뭘 깨달았을지..... 얼마나 많은 견문이 쌓여서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되셨을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벗님의 오늘도 행복하신 마무리가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6년 3월 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


=====[禮記, 學記篇] =====================


 

發慮憲.求善良.足以諛聞.不足以動眾.就賢體遠.足以動眾.未足以化民.君子如欲化民成俗.其必由學乎

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是故古之王者.建國君民.教學為先.兌命曰.念終始典於學.其此之謂乎.

雖有嘉肴.弗食.不知其旨也.雖有至道.弗學.不知其善也.是故學然後知不足.教然後知困.知不足.然後能自反也知困.然後能自強也.故曰.教學相長也.兌命曰.學半.其此之謂乎.

古之教者.家有塾.黨有庠.術有序.國有學.比年入學.中年考校.一年視離經辨誌.三年視敬業樂群.五年視博習親師.七年視論學取友.謂之小成.九年知類通達.強立而不反.謂之大成.夫然後足以化民易俗.近者說服.而遠者懷之.此大學之道也.記曰.蛾子時術之.其此之謂乎.

大學始教.皮弁祭菜.示敬道也.宵雅肄三.官其始也.入學鼓篋.孫其業也.夏楚二物.收其威也.未卜診.不視學.游其誌也.時觀而弗語.存其心也.幼者聽而弗問.學不躐等也.此七者.教之大倫也.記曰.凡學.官先事.士先誌.其此之謂乎.

大學之教也.時教必有正業.退息必有居學.不學操縵.不能安弦.不學博依.不能安詩.不學雜服.不能安禮.不興其藝.不能樂學.故君子之於學也.藏焉修焉.息焉游焉.夫然故.安其學而親其師.樂其友而信其道.是以雖離師輔而不反.兌命曰.敬孫務時敏.厥修乃來.其此之謂乎.

今之教者.呻其佔畢.多其訊.言及於數.進而不顧其安.使人不由其誠.教人不盡其材.其施之也悖.其求之也佛.夫然故.隱其學而疾其師.苦其難而不知其益也.雖終其業.其去之必速.教之不刑.其此之由乎.

大學之法.禁於未發之謂豫.當其可之謂時.不陵節而施之謂孫.相觀而善之謂摩.此四者.教之所由興也.

發然後禁.則扞格而不勝.時過然後學.則勤苦而難成.雜施而不孫.則壞亂而不修.獨學而無友.則孤陋而寡聞.燕朋逆其師.燕闢廢其學.此六者.教之所由廢也.

君子既知教之所由興.又知教之所由廢.然後可以為人師也.故君子之教喻也.道而弗牽.強而弗抑.開而弗達.道而弗牽則和.強而弗抑則易.開而弗達則思.和易以思.可謂善喻矣.

學者有四失.教者必知之.人之學也.或失則多.或失則寡.或失則易.或失則止.此四者.心之莫同也.知其心.然後能救其失也.教也者.長善而救其失者也.

善歌者.使人繼其聲.善教者.使人繼其誌.其言也約而達.微而臧.罕譬而喻.可謂繼誌矣.

君子知至學之難易.而知其美惡.然後能博喻.能博喻.然後能為師.能為師.然後能為長.能為長.然後能為君.故師也者.所以學為君也.是故擇師不可不慎也.記曰.三王四代唯其師.此之謂乎.

凡學之道.嚴師為難.師嚴然後道尊.道尊.然後民知敬學.是故君之所不臣於其臣者二.當其為尸.則弗臣也.當其為師.則弗臣也.大學之禮.雖詔於天子.無北面.所以尊師也.

善學者.師逸而功倍.又從而庸之.不善學者.師勤而功半.又從而怨之.善問者如攻堅木.先其易者.後其節目.及其久也.相說以解.不善問者反此.善待問者如撞鐘.叩之以小者則小鳴.叩之以大者則大鳴.待其從容.然後盡其聲.不善荅問者反此.此皆進學之道也.

記問之學.不足以為人師.必也其聽語乎.力不能問.然後語之.語之而不知.雖舍之可也.良冶之子.必學為裘.良弓之子.必學為箕.始駕馬者反之.車在馬前.君子察於此三者.可以有誌於學矣.

古之學者.比物丑類.鼓無當於五聲.五聲弗得不和.水無當於五色.五色弗得不章.學無當於五官.五官弗得不治.師無當於五服.五服弗得不親.

君子曰.大德不官.大道不器.大信不約.大時不齊.察於此四者.可以有誌於學矣.三王之祭川也.皆先河而後海.或源也.或委也.此之謂務本.

=======[일부분 해석]==========


[퍼옴] 풀이를 잘 해 놓은 선생이 계셔서 가져 왔습니다.


http://blog.naver.com/moo12wool/220314058301


  우리는 왜 배워야 하는가? 1




     -『예기(禮記)』「학기(學記)」 그 배움의 까닭 ​


   예기(禮記)의 학기(學記)는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모든 것을 나타낸 것이다. 일천 이백여 글자에 불과하지만, 깊이와 폭넓은 그 내용은 둘째치고라도 그 표현의 비유법은 글이란 모름지기 이렇게 써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글이다. 더불어 단락 단락의 어어 지는 어울림 또한 리듬이 경쾌한 노랫가락의 다름 아니다. 하여 그 문장력 또한 배울 수 있어 즐거움이 배가(倍加)되는 기쁨도 얻을 수 있다.


   왜 교기(敎記)가 아닌 학기(學記)인가? 배움에는 가르침이 필요하고, 가르침은 또한 배움이 필요하다. 가르침 없이 배움 없고, 배움 없이 가르침도 없는 것이다. 가르침은 태어남의 양(陽)이고, 배움은 잉태의 음(陰)이다. 그리고 음양 그 창조는 음(陰) 곧 잉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하여 교기가 아닌 학기인 것이다. 달리 앎은 가르침이 아닌 배움인 것이다. 앎은 모름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름을 아는 것 그 배움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모름이 어찌 가르칠 수 있겠는가? 하여 앎은 배움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름은 앎이 잉태되어 깨어지며/태어나며 모름도 깨어지고 앎도 덩달아 밝아지는 것이다.


   유교는 소인이 아닌 대인 곧 군자가 되는 길의 배움이고 가르침이다. 군자는 큰사람으로 오늘날의 직업적인 전문가와 개인적인 된사람(성인)이 되기 위해 배우는 학생이기도 하다. 직업적인 전문가로서 가르치는 스승의 입장과 개인적으로는 배우는 학생의 입장이기도 하다. 배움은 가르침의 이면이듯, 군자는 스승과 학생의 이면이다. 하여 학기(學記)는 음양 양면 그 가르침과 배움의 상대성으로 해석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


   發慮憲(발려헌), 求善良(구선량), 足以謏聞(족이소문), 不足以動眾(부족이동중).[사려 깊은 법을 제정하고 선량한 선비를 구하여 다스리면, 어느 정도 명성을 얻기에는 족하지만, 민중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


   이상적인 생각을 일으키고 진실된 참을 구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논하기에는(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에는) 충분하지만,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부족하다 -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는 있지만, 사람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


   就賢體遠(취현체원), 足以動眾(족이동중), 未足以化民(미족이화민).[몸소 멀리까지 다니며 어짐을 실천한다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어짐을 취하여 멀리 폭넓게 체득하는 것은(폭넓게 어짐을 이루는 것은), 민중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아직도 백성의 마음을 바꾸기에는 부족하다. - 자족할 수는 있지만, 거듭날 수는 없다.


   君子如欲化民成俗(군자여욕화민성속), 其必由學乎(기필유학호)![군자는 모든 백성이 거듭나고 싶어 하는 습속/풍속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다. - 백성들이 스스로 바뀌기를 바라는 방향대로 풍속을 이루어 백성들을 거듭나게 이끈다. - 그것은 반드시 배움에서만 비롯될 수 있지 않겠는가?]


   군자 또한 백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군자는 보편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하여 백성의 풍속은 또한 군자의 보편적 진리를 추구하는 풍속이기도 하다. 그러한 풍속을 이루는 것이 유교 대동사회의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배움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는 배워야만 알 수 있다. 그 보편적 진리는 '發慮憲(발려헌), 求善良(구선량)'을 하지 않으면, 또한 배움이 필요 없다는 역설이기도 하다. 그냥 동물처럼 본능대로 살려면 그냥 그대로 살아도 무방하다는 역설이다. 하여 우리는 왜 배워야 하는 지를 밝히는 배움의 까닭을 나타냈다. 그 구체적인 비유를 나타낸 것이 다음 구절이다.


   玉不琢(옥불탁) 不成器(불성기), 人不學(인불학) 不知道(부지도).[옥돌은 깨고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도(道)를 알지 못한다. - 천명을 실현하도록 가르치는 것이고, 천명을 알기 위해 배우는 것이다. 천명은 다듬지 않으면 실현할 수 없고, 천명은 배우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가르침과 배움의 차이이다.]


   옥돌을 다듬어 그릇을 만드는 것은 가르침의 일이다. 더불어 가르침은 다듬어 그릇을 만드는 것이고, 다듬어 그릇을 만듦은 또한 앎의 잉태됨이다. 잉태는 배움이고, 배움은 가르침을 낳는다. 옥돌을 낳아 깨어지는 아픔을 알아야 하는 것이 또한 가르침이다. 배움이 없으면, 달리 그 도(道)를 잉태하지 못하면, 가르침 그 도(道)를 깨치어 싹틔우지 못한다. 사람이 도(道)를 잉태하지 못하면 아무런 쓸모없는 옥돌로 남게 될 것이라는 경계를 담은 비유이다. 즉, 옥돌과 그릇을 사람과 도(道)로 대응시켜 가르침과 배움을 비유하고, 더불어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가지도 함축하여 배움의 까닭을 나타냈다. 곧 도(道)를 깨치기 위해 우리는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是故(시고) 古之王者建國(고지왕자건국) 君民敎學爲先(군민교학위선).[이런 까닭으로 옛날에 나라를 세우려는 왕은 군민(君民)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학(敎學)을 최우선으로 하였다.] 맨 먼저 군민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부터 시작했다.


   《兌命》曰(열명왈) 念終始典於學(염종시전어학) 其此之謂乎(기차지위호)!['열명'에 이르길, '생각의 마침과 처음은 배움에 맡긴다' 하였는데, 그것이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든 생각은 마침이 있고 마치면 또한 새로운 시작이 있듯이, 모든 일에는 그 순서가 있는 것이다. 순서가 뒤틀리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 순서 중에도 처음이 없으면 시작도 없고, 마침이 없어도 처음은 없는 것이다. 하여 모든 일에는 종시가 중요한데, 그 종시를 알려면 배움이 필요한 것이다. 그 종시를 배움에 맡기는 것의 다름 아니다. 그리고 왜 시종(始終)이 아닌 종시(終始)이겠는가? 마침은 잉태이고 잉태는 시(始)의 처음이다. 시(始)는 잉태의 처음으로 잉태가 태어남이 또한 처음이고 시작이 비롯됨이기 때문이다. 잉태의 마침 없이 태어남도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배움 그 잉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작과 끝도 잉태 그 배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찌 배움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여 한시도 배움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의 뜻도 함축하고 있다. 더불어 배움은 끝없이 거듭나는 것임을 역설(力說)하고 있다.


   다시 구체적인 음식과 지극한 도(道)를 비유하여 그 양(陽)에 대한 음(陰)의 관계로 나타낸다. 즉, 그릇은 만드는 과정으로, 음식은 만들어 놓은 결과로 대응시켜 나타낸 이유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 그릇은 무엇을 담기 위해 만드는 것이고, 음식을 그 그릇에 담기 위함을 나타낸 것이다. 나아가 음식은 먹기 위해 만드는 것이고, 또한 그 음식을 씹어 먹음은 우리가 자라나기 위함임을 담고 있는 비유로서 가르침과 배움의 그 근본이 무엇인지를 나타낸 것이다. 더불어 가르침과 배움의 순환관계뿐만 아니라 그 배움과 가르침의 어려움도 함께 나타내는 비유구조이다.


   雖有嘉肴(수유가효) 弗食(불식) 不知其旨也(부지기지야), 雖有至道(수유지도) 弗學(불학) 不知其善也(부지기선야).[비록 전문가가 요리한 일품의 고기 안주라도 먹지 않으면 그 맛의 뜻 곧 그 맛의 수준/차별성을 알 수가 없고, 비록 지극한 도(道)가 있어도 배우지 않으면 그 참맛 곧 지극한 선(善) 그 지선(至善)의 경지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아무리 맛있는 고기 안주를 잘 만들어 주더라도 먹고 싶어 하지 않으면 그 맛의 수준이 알려질 수 없고 - 역설적으로 식욕을 돋울 실력에 아직 미치지 못했음을 알 수 있고, 비록 지극한 도(道)가 있더라도 배우지 않으면 그 지극한 참맛을 알 수가 없다 - 역설적으로 참맛의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달리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그 모른다는 사실을 배워서 깨달으면 나의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이었는지 나의 그 앎이 얼마나 부족한 앎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故 學然後知不足(고 학연후지부족), 敎然後知困(교연후지곤). 知不足然後能自反也(지부족연후능자반야), 知困然後能自強也(지곤연후능자강야).[그러므로 배우고 난 뒤에 부족함을 알고 - 배워 앎의 문을 열고 난 후에 그 배움의 깊이를 알 수 있고, 가르쳐 본 후에 그 곤궁함을 안다 - 가르친 뒤에 자신의 곤궁함 그 앎의 부족함을 볼 수 있다. 부족함을 알게 된 뒤에 능히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되고, 힘듦을 알고 난 후에 능히 스스로 강해질 수 있다 - 부족함을 알아야 스스로 그 부족함을 채우고, 힘듦을 알아야 스스로 그 역부족을 키워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故曰敎學相長也(고왈교학상장야). 《兌命》曰, 斅學半(열명왈교학반) 其此之謂乎(기차지위호)![하여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를 키운다고 말하는 까닭이다. '열명'에 말하길, '가르침이 배움의 반이다' 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서로는 서로에게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