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 사필귀정(事必歸正)

작성일
2016-02-28 09:0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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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5] 사필귀정(事必歸正)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봄비와 가을비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봄비는 한 번 내릴 적마다 산천 초목이 깨어나고, 가을비는 한 번 내릴 적마다 하나씩 죽어가는 차이라고 이해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은 즐겁습니다. 이 비를 맞으면서 어딘가에서 봄을 장식할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기는 까닭이지요.

 

1. 인생의 봄과 가을


인생은 어떤가요? 당연히 또 인생 이야기입니다. 철학은 인문이니까요. 사람의 모습에서 봄비와 가을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요. 봄비는 어린 소년에게 내리는 비가 되겠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비'는 시련(試鍊)을 의미합니다. 역경을 통해서 내면의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니 추운 겨울의 찬 바람을 뚫고 꽃을 피우는 일에 동참하고 있는 것과 비유가 되네요.

비가 한 번 내릴 때마다 내면은 성장을 하게 됩니다. 영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우리 할머니들은 '알음짱'이라고 하셨지요. 알음짱이란 '알음증'의 방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알음증이란 '智症'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아기가 열이 한 번 나고 나면 다시 영리해 지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아프고 나면 더 지혜로워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쩌면 뇌의 세포들이 잠에서 깨어나느라고 열이 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을의 노년이 되면 비를 맞기가 두려워지는 계절입니다. 가을의 비는 찬 비거든요. 찬 비를 맞으면 그 냉기가 뼛골에 사무친다고도 합니다. 뼈가 시리다고 하잖아요.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하라고 말씀하시는 철학자도 늙어서 고생도 사서 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늙어서 만나는 가을비는 아무래도 좋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이에 대해서 동의 하시는지요?

그래서 주변의 인연들로부터 듣게 되는 '건강하시지요?'라는 말은 더욱 귀중한 덕담이 되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언제부턴가 벗님들로부터 건강하시라는 염원을 얻고 있는 낭월입니다. 이러한 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연의 계절이 봄 일까요? 아니면 가을 일까요? 뭐 말을 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가을이 깊어가고 있음입니다. 그러니 가을 비는 맞으면 안 되지만 자연의 이치는 냉정한, 아니 무심한 것이기 때문에 흐름을 따라서 흘러 갈 뿐입니다. 벗님의 나이도 60년 언저리에 머물러 계신다면 모쪼록 찬 비를 맞지 않으시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또한 자연의 이치인 것을


우리는 자연입니다. 自然이란 무엇인가..... '저절로 그렇게'입니다. 새삼스럽게 자연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모든 것은 저절로 그렇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같은 공간에 계속해서 새로운 시간들이 스쳐가고 있습니다. 지금 막 태어난 아기에게 분명한 예언을 한 마디만 할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일까요? 대통령이 된다. 선생이 된다. 부모가 된다. 뭐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빗나갈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빗나가는 것은 가능성은 될 지 몰라도 예언이라고 하기는 좀 멋적은 일이네요. 그렇다면 확실한 예언을 하란 말이네요. 틀림없는 예언을 한 마디 합니다.

"넌 반드시 죽을 것이다."
뭐 안 되었네요. 이제 막 태어난 아기에게 넌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악담을 하다니 말이지요. 하하~

그러나 이것이 자연입니다. 철학자의 바탕에는 자연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재앙이 자신만 비껴서 가기를 바라는 사업가의 생각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겠네요. 이것을 받으면 저것도 받아야 하고 저것을 거부하면 이것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자연이거든요. 뭐 당연한 이야기를 호들갑스럽게 떠벌이고 있는 낭월입니다.

어젯밤에는 문득 화분에서 시들어 있는 꽃을 봤습니다. 아마릴리스입니다. 이름은 알았는데 기억은 잘 되지 않네요. 역시... 가을비를 많이 맞아서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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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습니까? 아름답지 않습니까? 쳐다도 보기 싫다고요? 뭐,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든 꽃에서 자신의 노후를 떠올렸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만 보는 시야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아마릴리스 꽃도 원래는 이러지 않았겠지요? 원래는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렇게 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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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파릇파릇한 청춘의 시절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에너지가 넘쳐 보입니까? 그야말로 뭔가 희망에 부풀어 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꾸만 보고 싶어하고 봐도 즐거운 것입니다. 불과 열흘 전의 모습입니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의 진리가 그대로 먹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근래에 손자를 얻은 이웃이 있습니다. 그 손자도 그냥 평범한 아기일 뿐입니다. 특별한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의 마음에는 여느 꽃들과는, 아니 여느 손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양입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배어 나온다고 하네요. 과연 그러한 모양입니다. 숨길 수가 없는 표정에서 충분히 공감이 되니 말이지요.

아들보다 손자가 더 예쁘답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에는 부합하지 않습니다. 어찌 자식이 더 예쁘지 손자이겠느냐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상은 왜 생기는것일까요?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라는 다음 단계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지 싶습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심리현상이라고 봐야 이해가 되는 대목이겠습니다.

자연은 무심(無心)합니다. 그냥 때가 되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꽃이 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한 현상에 우리의 마음이 발동을 합니다. 그래서 꽃이 피면 아름답다고 하고 꽃이 지면 슬프다고 하는 것은 자연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감정일 뿐이라고 하면 너무 냉정한 판단이라고 할 수도 있긴 하겠습니다만.... 이렇게 시든 꽃을 보면서 또 생각을 해 봅니다. 철학자는 생각을 해야 존재하니깐요. ㅋㅋ

 

3.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자연


자연은 말이 없으면서 진리를 보여주는 현장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옹 화상의 시 한 수가 전해지는 것이기도 하겠습니다. 이 노래의 제목을 지어본다면 뭐라고 할까 싶은생각을 해 봅니다. 다들 알고 계시는 노래입니다만 다시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간단히 옮겨 봅니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兮要我以無垢
聊無愛而無憎兮
如水如風而終我


멋진 시 한 수입니다. 아, 한문으로 되어 있다고요? 그렇구먼요. 그러나 걱정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친절한 낭월은 절대로 한문이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서 벗님들로 하여금 멀뚱멀뚱 보기만 하도록 두진 않으니까요. 하하~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아~ 그 글이 이 뜻이었던겨? 라는 생각이 드셨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많이 보신 글귀지요? 워낙 유명하니까요. 여하튼, 이것은 나옹 화상의 시입니다. 나옹 스님도 자연에서 지혜를 배웠던 것으로 봐야 할 움직일 수가 없는 증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의 일이란 그렇게 흐름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오류를 최소화 하는 진리라는 것을 과거의 철인들도 모두 알고 계셨던 게지요. 그래서 꽃이 시들면 시드는 대로 즐깁니다.

 

드디어 너의 한 가지 단계를 마쳤구나.
이제 다음 단계로 진행이 되겠구나.
꽃을 피운 목적은 수분(收粉)을 위한 것이었을 게고,
수분은 결실을 위한 것이었을테니
이제 인간의 기쁨은 사그라 들었을지라도
너의 기쁨은 이제부터로구나....


예? 누구의 시냐고요? 시는 무슨.. 그냥 낭월의 넋두리입니다. ㅎㅎㅎ

문득 꽃이 시들은 것을 아쉬워하다가 꽃의 마음에 초점을 맞춰본 것일 뿐이지요. 그랬더니 이러한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자연은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습니다만, 그 안에서 돌아가는 모든 생명들은 희노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변화하고 있는 자연을 느끼면서 즐거워하는 낭월입니다.

 

4. 겨울을 막으려는 노력?


뭐, 아시는 대로 요즘 국회방송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난데없이 등장을 한 매우 이례적인 경우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국회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기 바빴다면 요즘은 채널을 찾아서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로 작업을 하면서도 현장중계를 하고 있는 페이지를 열어놓고 있기도 합니다. 소리만 들어봐도 대략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기 때문이지요.

듣도 보도 못한, 용어를 하나 알게 되기도 합니다. '필리버스터'라나요? 혀에 붙지 않는 것으로 봐서 전혀 들어 본 적이 없었던 단어라는 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낭월만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실은 엑소에 대한 노래만 열심히 찾아보는 금휘가 계속해서 국회방송을 켜놓고 있어서 눈여겨 보게 되었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략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이미 알고 계신 것을 다시 중언부언 할 필요도 없겠고, 혹 벗님이 관심없는 입장이시라면 더욱 시끄러운 이야기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러한 노력에서 겨울을 막으려는 노력이 살짝 보였습니다. 왜냐하면 낭월의 삶에서도 맹농아(盲聾啞)의 여정들이 있었으니까요.

보고서도 못 본 체를 해야 할 때도 있었고, 들어도 못 들은 체를 해야 할 때도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체를 했어야 하는 시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마도 세상을 60여년 살아오신 벗님이시라면 특별히 금수저를 물고 나오신 벗님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공감을 하실 것입니다. 부모님은 늘 말 조심 하라고 하셨지요. 그 말 조심이 뭔 뜻이겠남요? 물론 구시화문(口是禍門)의 심오한 철학적인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당연합니다.

그냥 정권을 비판하고, 통치자를 비난하는 불만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던 게지요. 왜냐하면 벽에도 귀가 있어서 그러한 말들이 누군가에게 전해 진다면 감옥을 갈 수도 있거나 심하면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모님의 세대들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학습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칠까봐서 늘 가르치고 주의시켰던 것이려니.... 합니다. 그런 시대를 살아 왔었군요......

문득, 10시간을 한 자리에 서서 가냘픈 몸으로 가을 비를 맞지 않아야 한다는 한 마디를 전달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다시 그 차가운 비를 맞으면서 뼛골이 시리게 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들입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실로 낭월도 내심 놀랐습니다. "5분 발언 하세요~!"라는 말만 하던 국회에서 이렇게 긴 시간을 두고 무제한 토론을 한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 이야기는 낱낱이 과거의 정권들에서 저질러진 긴가만가 하던 이야기들이 소상히 드러난다는 것이지요.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만 특히 보안정국에서 절집에 불어닥쳤던 태풍인 삼청교육대가 떠올랐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하지 않네요. 그것은 국정원과는 무관했던가 봅니다. 여하튼 낭월의 기억으로는 그것이 그것이라고 생각이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국정원과 정권은 서로 나무와 껍질처럼 밀착이 되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까닭이겠습니다.

또, 우리 명리학계의 하늘 같은 선배님에 대한 이야기도 떠오릅니다. 담배 갑에다가 「幽神[귀신놀음]」이라는 두 글자를 썼다는 이유로 남한산성에 끌려가서 죽지 않을 만큼 고통을 겪은 다음에 낙향을 했던 박도사 님도 떠오릅니다. 아마도 관심이 있으신 벗님들은 대부분 알고 계신 이야기려니 싶습니다만 문득 생각이 나서 떠 올려 봤습니다.

가을이 오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이려니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만 문득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부정적인 생각과 긍정적인 생각의 차이를 읽을 수도 있겠네요. 즉 지금이 여름이냐 겨울이냐를 인식하는 정도에 따라서 작금(昨今)의 상황들을 인식하는 것에서도 차이가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전국시대에 진왕을 위해서 법을 만들었던 상앙(商鞅)이 떠오릅니다. 혹독한 법으로 정치의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성공했겠지만 결국 자기가 만든 법에 걸려서 참형을 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지요. 자기가 만든 법이 결국은 자기를 죽이는 결과가 되었을 적에 떠오르는 역사의 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독한 법을 만들게 되면 그 독에 자신도 상할 수가 있음을 생각하라는 가르침이겠거니... 싶습니다.

의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지금이 결코 여름이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겨울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5. 봄을 재촉하는 흐름.


아무래도 겨울을 막는 소극적인 노력이 아니라 봄을 부르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왜 첨에는 겨울을 막아보려는 노력으로 보였을까요? 아마도 더 과거에는 더욱 추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마치 지금이 여름이었을 것이라는 착각을 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시 생각을 해 보니 지금도 여전히 겨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정권에 대한 생각을 글로 남기려면 자신도 모르게 검열을 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이것은 분명히 미국과 다른, 한국인에게 습관적으로 주어진 학습효과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어쩌면 너무 소심해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라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은 마음대로 글을 쓰면 누군가에게 검열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막연하게 심저(心低)에 깔려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름 인 줄 알았던 지금의 계절은 겨울이었다고 하는 생각이 엄습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화들짝~ 놀랐습니다.

겨울이라면, 지금의 상황이 기온차이는 옛날과 다를지언정 여전히 겨울이라면, 다음에 다가올 것은 분명히 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흐름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연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도록 되어 있음이지요. 그러한 시대에 살아볼 날이 오기는 할까요?

아이폰에 있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 미국의 수사당국이 온갖 애를 써봐도 결국은 애플에서 거부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삼성폰을 쓰면서, 카카오톡을 사용하면서 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직 봄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라고 하는 점만 명료해 진다고 하겠습니다.

낭월이 바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냥 자유롭게 남들 눈치 안 보고 내 삶을 살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크게 부자가 되려는 생각도 없습니다. 꽃이 피면 꽃을 보고, 바람이 불면 여행을 가는 것으로 삶의 희망이 전부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날이 새면 컴퓨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워하고 배가 고프면 따뜻한 밥이 있어 행복할 따름입니다. 그러다가 가끔 방문하거나 전화하는 인연들이 있어 함께 삶의 애환을 나누는 것으로도 너무나 행복하거든요.

'아직도 겨울이었구나.....'

문득 그것을 생각하게 되면서 스스로 화들짝 놀라게 됩니다. 이렇게도 익숙하게 자신을 검열하면서 살아온 세월들.... 이것을 노예근성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래야 하니까 그래야 하는.....

 

6. 사필귀정을 믿습니까?


물론 모든 일이 다 순리대로 풀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인과를 믿으신다면 당연히 사필귀정을 믿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 잠깐은 사필귀사(事必歸邪)일 수는 있을 지라도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역사는 자연을 학습했듯이 그렇게 자연의 흐름대로 진행이 되겠지요. 이것은 자연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진행이 되는 것이야말로 일이 올바르게 진행되는 것일테니 또한 사필귀정(事必歸正)이겠습니다. 그렇기에 이제부터는 자신의 글이 자연의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검열하는 것으로 충분한 나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기는 것은 오늘이 2월 28일의 봄날이기 때문일까요?

이런.....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빤한 이야기를 괜히 거론했습니다. 그래도 왠지 속 마음 한 켠이 시원해서 꼭 요만큼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나름 1갑자(甲子)를 살아오면서 생각해 온 한 촌로(村老)의 소감이라는 정도로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렇게 봄이 찾아오는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직도 봄이 찾아오기에는 많은 곡절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낭월이 애국열사도 아니고, 우국충정이 사무치는 의협지사도 아닙니다. 그냥 산골에서 자연을 벗삼아서 오늘을 즐기는 한낱 촌부(村夫)의 모습으로도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그만 희망사항조차도 남의 침해로 망가지지 않기만을 희망한다는 것 뿐입니다. 벗님의 오늘에서도 희망과 기쁨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문득, 경봉 스님의 한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 바탕 멋지게 하고 가거라~!


 

2016년 2월 28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