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3] 모호함과 명료함

작성일
2016-01-20 17:01
조회
4306

[683] 모호(糊)함과 명료(明瞭)함


 

 

날씨가 무척 차갑네요. 내일이 대한(大寒)이라 추위가 절정이라서 그런지 어지간히 맵습니다. 그래서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질 않아서 방 안에서 인터넷으로 놀잇감을 찾고 있는 낭월입니다. 아마도 이번 주는 계속 이렇게 추울 모양이네요. 남녘에는 폭설도 내린 모양인데 다행히 계룡산 자락은 눈이 없어서 빗자루를 찾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요즘 공부하고 있는 제자가 있는데, 용신단계까지 공부가 진행되고 보니까 여간 머리가 아픈 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뭔가 공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안개 속을 헤매는 것 같다나 뭐라나 그러는군요. 왜 사람들이 이현령비현령 하는지도 알 것 같다는 둥, 낭월에게 속았다는 생각조차 든다나 어쩐다나~~ 반발이 여간 심한게 아닙니다. 하하~

웃음이 나오느냐고요? 당연하지요. 그게 모두 발전해 가는 과정이니까 당연히 기특하여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되는 것은 가본 자의 여유랄까요? 알고 있는 자의 반응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이 제자를 위해서 모호한 것에 대한 이야기나 해 줄까 하고 마음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벗님께서도 자평명리학의 모호한 구석에 대해서 맘에 들지 않으신다면 또한 인연이 되신 것을 봐도 됩니다. 왜냐하면, 원래 명료한 이론으로 시작한 공부이지만 점점 공부가 깊어지게 되면 그 속에서는 자연히 모호함이 드러나게 되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공부는 잘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하~

아니, 그래서 공부를 그만둘까 싶으시다고요? 에구~ 그것은 조금만 참으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원래 인문(人文)이란 그런 세계거든요. 정히나 재미가 없으시면 과학으로 가시라고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기왕 인연이 되셨으면 조금만 더 참아보시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안개가 낀 듯이 모호~해 보여도 또 어느 순간엔가 그 모호함에서 명료함이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잠시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 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하하~

 

1. 교육은 명료하고 현실은 모호하다.


명료와 모호의 차이를 생각해 봤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은 명료하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생각되네요. 국어, 산수, 수학, 도덕까지 모두가 명료한 기승전결로 설명하고 있으니까 말이지요. 또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으로 봅니다. 왜냐하면 어린 학생들에게 모호한 것을 알려줬다가는 교육에 대한 불신은 말도 할 것도 없고,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도 있을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래서 최대한 명료하게 교육을 시킨다고 보면 적당할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그러한 교육을 받고 세상을 나와서 현실에 부딪치게 되면 한바탕 엄청난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된다는 것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 또한 정해진 코스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한바탕 혼란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의 성인(成人)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배운 것이 세상에서도 그대로 시행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믿었다가, 막상 세상에서 배우는 것은 눈치와 교활함과 능소능대(能小能大)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가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은 당연하니까 말이지요. 경제논리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산다는 명료한 공식을 배우고 나와서 죽도록 일만 하다가 한 평생을 곤궁하게 마무리 하는 모습인들 발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실은, 교육의 울타리 안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상황에서 문득 모호함과 명료함을 떠올릴 수가 있다면 세상은 명료함도 있고 모호함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일단 여기에 대해서 합의를 본다면 다음 이야기는 훨씬 더 수월하겠습니다. 동의 하시죠? 예, 그러시다면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하~

근데, 모호의 출처를 보면 또 재미있습니다. 숫자에서 나온 이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1모호(模糊)는 0.00000000000001이랍니다. 이만큼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구분이 되시는지요? 그러니까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로 모호가 쓰였다는 것에 대해서 공감이 되네요. 먼지도 숫자에 나오는 이름이라는 것을 아실랑가요?

먼지[埃] 한 알의 크기는 0.00000000001이라네요. 먼지보다 큰 것이 티끌[塵]인데  진의 크기는 0.0000000001입니다. 그러니까 먼지의 열 배라는 말이군요. 먼지는 모호의 1천배가 되는 건가요? 참 머리 아픕니다. 중요한 것은 먼지보다 훨씬 적은 것이 모호라는 것만 알면 되겠습니다. 하하~

 

2. 모호함과 명료함도 또한 음양이다.


실로 세상은 명료함과 모호함이 뒤범벅이 되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지금이 겨울이라는 명료함과, 폭설이 내릴지, 아니면 그냥 춥기만 할 것인지의 모호함으로 섞여있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지요. 일기예보가 명료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같겠습니다만 실은 명료할 수가 없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예측은 하지만 그것대로 진행이 될지 말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벗님은 알 수 있으신가요? 물론 알 수 있다고 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의미를 다 알고 있으니깐요. "뻥쟁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하하~

결코 단언하건대, 오늘 저녁의 기온이 정확히 몇 도가 될 것인지는 알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짐작은 명료한 것인가요? 아니면 모호한 것인가요? 물론 모호한 명료함입니다. 이게 무슨 글장난이냐고 하셔도 할 수가 없네요. 오늘 저녁에는 한파가 이어져서 영하 15℃가 될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다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대략~~'이라고만 믿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것이 명료한 것인데, '그 정도라면 적어도 영상이 되긴 어렵겠군....'이라고 하는 정도라야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최첨단의 위성통신 정보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조차도 명료하게 오늘 저녁에 눈이 몇cm가 올 것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우리는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모호한 명료함'의 의미를 말이지요. 그러니까 확률로 빠져 나갈 구멍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강수확률이나 강설량의 확률을 말할 수는 있습니다만 똑 떨어지게 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낭월의 이야기가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씀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이러한 상황을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뭐, 할 수 없지요.

눈이 내릴 확률이 90%라고 한다면, 언뜻 들으면 참 명료한 것 같습니다만, 실은 포장지만 명료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책임을 나머지 10%에게 떠넘기겠다는 속셈인 줄을 누가 모르겠느냔 말이지요. 그래서 음양학자는 또 생각을 합니다. 명료함은 양(陽)이고 모호함은 음(陰)인 줄을 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지게 되면 곤란해 진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가 100% 내린다고 해 버리면 그것을 신봉한 어느 상인이 장화랑 우산을 1백만 원어치를 구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가 오지 않고 지나가 버리거나 다른 마을에 내리게 된다면 낭패를 당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 상인이 손해배상을 기상청에 요구한다면 참 난감하겠군요.

그런 문제가 일어날 것을 빤히 알면서 감히 100%라는 말을 할 턱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빠져나가기 위한 뒷구멍 만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솔직한 해석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그보다 더 명료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늘 빠져나갈 10%를 만들어 둠으로 해서 무슨 문제가 생겨서 예측이 빗나가더라도 항의를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3. 피카소의 그림이 떠오를 때..


화가를 거론한다면 피카소가 등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보면 과연 명료한 것인지 모호한 것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기분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지나는 길에 피카소의 그림 좀 감상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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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그렸다는 그림 두 점입니다. 두 그림 중에 하나는 모호하고 하나는 명료합니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좋다고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낭월이 판단할 영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하튼 모호한 것에 대한 의미에 충실한 아랫 그림은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이게 뭘 그린 것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 특히 명료한 것은 말, 소, 사람 등입니다.

그런데 뭘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참으로 설명하기가 난해하네요. 그야말로 '줘도 갖지 않을 그림'이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해설을 붙이면 또 그럴싸 해 지기도 하네요. 여하튼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까지만 언급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괜히 조금 더 들어갔다가는 긁어부스럼을 만들 뿐이니까요. 후다닥~

 

4. 사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는 말.


사진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보면 늘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명료하게 찍으라'는 말과 함께 따라다니는 말이 '모호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명료한 것과 모호한 것이 같은 분야에 공존할 수가 있느냐고 따진다면 그는 아직도 책방 서생일 뿐입니다. 세상의 우여곡절과 만고풍상을 겪고 나면 절대로 그런 생각 속에 갖혀있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명료한 사진은 보도사진일 것입니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겠습니다.

그런가 하면, 모호하게 찍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사진의 전문가가 하는 말입니다. 명료하게 찍는 것은 증명 사진이라고 하고 모호하게 찍는 것은 예술 사진이라고도 합니다. 여하튼 뭔 말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렇게 어느 분야에서던지 음양의 이치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이러한 모순이 항상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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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잘 아는 물건입니다. 벽시계. 다른 것이 있다며 하나는 명료하고 하나는 모호하다는 것이네요. '어느 쪽이 맘에 드세요?' 아차~! 잘 못 물었습니다.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데 말이지요. '사진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시는지요?' 그래 훨씬 낫군요. 하하~

위쪽의 선명한 사진은 비교적 오류가 적은 전달을 할 것입니다. 그것은 명료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을 양적(陽的)인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있는 그대로를 사실적으로 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명료하고 오류가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되겠습니다. 다만, '절대로 없다'고 하지 못하고, '거의 없다'고 하는 것도 주의해서 읽으시는 벗님이라면 눈치를 챌 것입니다. 세상에 100%는 없으니까요.

'아니, 그 사진이 또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단 말인가?' 라고 하신다면, 그야 아무도 모를 일이라고 잡아 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시계를 가장한 감시카메라일 수도 있지 않겠느냔 말씀이지요. 어떤가요? 아차~! 싶으신가요? 맞습니다. 우리는 인식이 된 이미지를 너무 신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한 허점을 노리고 온갖 불법 장비들이 기승을 떨치고 있다잖아요. 그래서 절대로 라는 말 대신에 거의라고 하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하하~

그럼 아래쪽 사진은요? 뭔가 완전히 잘못 찍힌 것 같은 사진입니다. 그리고 이것조차도 '잘못 찍힌 것 같다'고 해야지 '잘못 찍었구먼'이라고 하는 것은 또 실수를 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 도망을 갈 뒷문은 열어놓으라는 이치를 위반하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사진은 뭔가 모호해서 왜 이렇게 찍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면 그냥 혼자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이건 누가 봐도 잘 못 찍힌 사진이다. 완전 실패다. 아마도 사진 초보자가 찍은 것이 분명하다. 이런 것을 사진이라고 올려놨다면 낭월의 사진 실력도 알만 하겠군.


둘째로, 사진이 잘 못 찍힌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혹 일부러 이렇게 찍었다면 무슨 의도가 있을런지도 모르긴 하겠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 있겠다.


셋째로, 흠.... 이건 철학자가 찍은 사진이로군. 그러니까 시간은 명료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명료한 것이 아니란 뜻이지! 어떤 사람에게는 잠깐이 한 시간이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겨울 만큼의 긴 시간이 실제로는 한 시간일 수도 있으니깐, 작가는 그것을 말하려고 이렇게 사진을 찍었구먼.


어떠신가요? 벗님의 생각에 부합되는 예문이 하나 있으신가요? 그리고 어느 생각을 하셨더라도 모두 정답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지에는 답이 하나만 나오지만 인생에서는 답이 여러 개가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생각도 자유이고 결론도 다양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고 봅니다. 이렇게 모호한 사진은 음적(陰的)인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속에 은유된 의미가 포함될 여지가 있다는 이야기도 되겠습니다.

 

5. 명료한 과학과 모호한 철학


운명철학인 자평명리학을 공부하겠다고 시작한 그 풋내기 제자의 질문에 답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운명학은 얼마나 명료할까요? 아니면 모호할까요? 당연히 모호한 명료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낭월의 관점입니다. 명료한 것은 기본적인 이론입니다. 간지의 22글자와 그 글자들이 갖고 있는 오행 등이 그것이지요. 이것은 그런대로 명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전혀 명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잡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네요. 하하~

그리고 이제서야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명료하지 않아야 그것이 진정한 운명학'이라는 말을 말이지요. 그렇다면 명료한 학문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수학, 과학, 건축학 등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공과의 계통은 대체로 명료한 분야로 봐도 되지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뭉뚱거려서 과학이라고 하지요.

문제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과학적(科學的)이라고 하는 한 쪽의 잣대로 저울질 하려는 어리석음이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과학적인 것의 상대쪽에는 분명히 철학적(哲學的)이라는 또 하나의 도도한 흐름이 있는데 왜 이것을 무시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더란 말이지요. 이과에서 생각하는 세계도 세계이고, 문과에서 생각하는 세계도 또한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제각기 자신의 영역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질문 : 사주는 과학적인가?
답변 : 아닙니다.
질문 : 운명은 과학적인가?
답변 : 아닙니다.
질문 : 삶은 과학적인가?
답변 :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러한 문답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동의 하시는 지요? 과학지향적인 사고력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철학적인 사고방식과 맞기는 힘듭니다. 당연히 철학적인 사고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과학적인 이야기를 듣노라면 머리가 띵~해 지는 것도 같은 의미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문제는 과학적인 사고를 배운 사람에게 철학적인 영역인 운명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이 낭월을 재미있게 만듭니다.

물론 처음에는 많이 피곤하기도 했습니다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즐거움으로 바뀌는 것은 오크 통에서 익어가는 위스키와 맛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모호함의 명료함으로 인한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희열감을 주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사유는 모호함으로 출발해서 명료함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다면 서양의 과학은 명료함으로 시작해서 모호함에서 끝이 될 것 같기도 하네요.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고요? 그니깐요... 절대로 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니까요. 하하~

근래 과학의 끝에 뭐가 있는지 들어 보셨지요? 놀랍게도 모호함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동양의 철학을 통해서 그 의미를 이해한 음양학자라면 대략 짐작을 할 수가 있었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모호한 운명론으로 방문자의 간담을 서늘케 했을 적에 상대방으로 부터 얻어지는 놀라움의 반응도 쏠쏠한 재미가 없다고는 못하겠습니다. 벗님은 어느 쪽의 성향이신지요?

때론 명료해야 하고, 또 때론 모호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삶을 엮어가는 것이겠지요. 거짓말은 절대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의 답답함도 또한 우리는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내의 사이에 있는 남자의 마음도 생각해 보지요. 그가 명료하게 대응하고 살아야 할 것인지, 아니면 모호하게 얼버무리면서 살아야 할 것인지를 말이지요. 하하~

중요한 것은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삶을 꾸려 간다면 그래도 웬만한 상황에서는 해답을 잘 찾아 갈 것으로 봐도 되지 싶습니다. 고래(古來)로 기록을 남긴 선사(禪師)들의 어록을 봐도, 명료함과 모호함이 뒤섞여서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거든요. 그러니 우리 범인들의 삶이야 그것을 벗어나서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렵지 싶습니다. 《장자(莊子)》도 모호함의 명료함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넘쳐납니다. 그러한 달변의 이야기 속에서 이치를 생각하다가 보면 삶의 모습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의 벗님은 어떤 생각이신지요? 여하튼 뭔가 생각은 하실 것이니, 너무 복잡하게 구분하는 흑백론은 대충 얼버무리고 흐리멍텅~하게 살아가는 여유로움도 가끔은 가져 보시라고 권합니다. 하하~

 

2016년 1월 20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