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인간적인 관점

작성일
2007-09-1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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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새로운 시작을 향한 준비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손자(孫子)가 떠오를상 싶다. 그렇게도 늙그막이 되면 손자가 그립다. 손자는 새로운 의미로써의 희망이다. 원래는 갑목이 희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갑목은 자신의 희망이었던 것이고, 손자는 다음세대로 이어지는 희망이 되는 것이다. 마치 고목의 싹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의미에서 손자는 대단히 중요한 희망이 되는 것이다.

원래 골목에 아이들 노는 소리가 들려야 그 동네는 생기가 있다는 말을 한다. 시골에서 살던 젊은이들이 모두 돈을 쫓아서 서울로 도시로 떠나버리고 시골에는 노인네들만 남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다시 도시에서 실망을 한 젊은이들이 시골로 농촌으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고 속속 찾아오고 있어서 어느사이 전설이 되어버렸지만(아마 머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에는 골목에서 아이들 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는 그야말로 절망이었다. 생기라고는 전혀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시절에 있어서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임수라고 할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러한 기운이라고 할수 있겠다. 이렇게 2차적인 희망으로써 뭔가 기대를 갖게 하는 손자는 늙그막에 있어서는 자신의 재생을 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미 자신은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에 희망이 없다. 그렇다고 그렇게 깜깜한 전망을 보면서 암울하게 죽어간다는 것은 생각도 하기싫다. 그렇다면 과연 기대를 해볼만 한 것은 없을까? 자식들도 이미 장성을 해서 각기 자신의 일에 몰두를 하고 있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는 이미 글러버렸다. 그래서 노인의 의식은 자연스럽게 뜨락에서 폴폴 뛰고 노는 손자에게 흐르기 마련이다. 손자녀석에게는 기대를 해보자. 내가 그 끝을 보게 될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손자녀석이 앞으로 나의 가문을 일으켜 세워줄런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 아닐까?

노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보통상식으로는 이해하기에 어려울 정도로 집착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그러한 심리의 바닥을 생각해본 결과, 이러한 추리를 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손자를 낳아준 며늘아이는 참으로 귀여운 존재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아들이 나이가 차면 이러한 희망으로 며느리를 맞아 들인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희망은 딸을 둔 노인들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희망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외손자를 귀여워하는 이면에는 약간 다른 심리가 흐르고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이쁘게 자란 딸이 시가댁에서 남편에게 미움을 받지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안도수표’ 내지는 ‘안전보험’ 정도의 의미가 추가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나서이다.




그렇다면 사회적으로는 어떤 분야에서 이러한 임수의 특성을 읽을 수가 있을까? 아무래도 사회적으로는 종교(宗敎) 분야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온갖 종교들은 항상 미래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희망적으로 때로는 절망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형태는 다르지만 결론은 모두 같다. 나의 종교를 의지하면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이야기가 끼어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미래의 희망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느 종교던지 한가지에 관심을 기울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것에 대해서 보증을 해주지는 않는다. 그냥 스스로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래서 늘상 하는 소리는 같다. ‘믿으세요~!’ 가 전부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스스로 믿어 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일까?

그리고 현실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일수록 더욱 이 종교에 대해서 기대를 걸게 된다. 현재의 삶이 행복한 사람은 종교에 대해서도 그렇게 열성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전혀 아니라고는 못할 것이 형편이 좋아지더라도 그냥 종교를 의지하고 믿음의 생활로 정진하는 사람도 의외로 더러 있어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곤란에 처했을 때 매달리는 마음이, 형편이 좋아지면 서서히 잊어버린다. 낭월이가 종교계에 종사를 하다보니까 이러한 관찰은 아마도 틀림없을 것이다.

운명감정을 받으러 오는 사람 중에서는 자신의 종교에서 가르치는 말로는 예언자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를 묻지말라고 되어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가 알고 싶어서 파계(破戒)를 하는 셈인데, 불교를 믿는 사람이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도 이러한 입장에 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일단 찾아올 적에는 그렇게 묘한 감정으로 오지만 낭월이와 더불어서 천지자연의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순한 점쟁이와 명리학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모양인데, 이것은 흔히 합리적인 내용으로 인해서 특이한 학문으로 인식을 하고 가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한 교단에 종사하는 지도자급의 사람들도 암암리에 이러한 질문을 하고 다닌다는 점이다. 물론 낭월이는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자신들은 보러 다니면서 자신의 신도에게는 물어보러 다니지 말라고 말하는 이중성이 더 큰 문제이다. 이렇게 자신은 필요로 하면서 신도들에게는 금하려니까 그 마음이 아무래도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고 이렇게되면 뭔가 꺼림찍 할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마음 한쪽에서는 왠지 개운하지만은 않은 것이 있어서 캥기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융통성이 있는 종교계의 지도자는 ‘방편(方便)52)이라는 말로 얼버무리면서 자신의 신도들에게 일종의 점술을 활용하고 있기도 하다고 들었다. 불교에 종사하는 스님들도 이러한 당당하지만은 않은 마음으로 슬쩍슬쩍 신도들의 운명을 봐주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이 현실이다. 왜냐면 그렇게 봐주지 않으면 이들은 철학원이나 무녀를 찾아서 의논을 하다가는 혹 심성이 불량한 사람을 만나게 되기라도 하면, 더욱 나쁜 구렁텅이로 빠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자신이 부처님의 말씀을 약간 벗어나더라도 근기가 약한 말세중생을 위해서 편법이나마 배워서 올바르게 인도를 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고육지책일 것이다.

그리고 스님들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계통에 종사하는 목사님이나 신부님도 이러한 것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甲子 乙丑을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던지 간에 운명의 미래에 대해서 점을 치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도 역시 앞의 예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이렇게 숨어서 음성적으로 연구를 할 것이 아니라, 기왕지사 버린 몸(?)이라면 당당하게 연구를 하고 올바르게 지도를 해서 보다 정확하고 희망있는 미래제시를 해주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떳떳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도 감을 잡아가면서 수행을 하고, 신도들의 고민도 보다 합리적으로 연구해서 도움을 줄 수가 있다면 부처님이나 예수님도 그리 탓만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문제는 여기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고 방편으로 활용을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잠시 현실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다.

결론은 이렇게 정신적인 방향에서 희망을 주는  것은 종교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명리학을 종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서 다시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을 줄 수가 있다면 구태어 종교가 아니라고 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상담을 하다보면 때로는 종교의 무력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사주팔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 더욱 현실감있게 다가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종교라는 말로 구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명리학도 壬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