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목생화에서 화가 과다하다

작성일
2007-09-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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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생화가 과다하다



보통은 목이 불을 좋아한다. 산 나무는 꽃을 피우고 싶어하므로 불을 좋아한다. 죽은 나무는 감정이 없다고 봐서 좋아하는지 마는지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고 하겠다. 다만 오행의 순리로 봐서는 목은 불을 좋아한다. 특히 추운 계절에 태어난 나무라면 따뜻한 불기운을 매우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순리로 흐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과다하게 흐르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다. 사실 자식이 너무 많았던 예전의 어머니들은 하루도 편히 쉴 날이 없었다. 눈을 뜨면서 잠이 들때까지 항상 자식에 대한 걱정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식을 ‘애물단지’라고 하지 않는가.

자식이 어리면 어린대로, 자라면 자란대로 항상 걱정꺼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 우리네 어머니들의 마음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자식이 좀 적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 당연하다. 오죽 어머니들이 자식들에게 휩쌓여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판단을 했으면 요즘의 딸들은 아예 자식을 낳지 않을 궁리조차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우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필연적인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그러한 모델을 많이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다른 모든 오행의 경우에도 같은 입장이다. 그러면 과연 나무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특징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하겠다.




나무가 자식이 너무 많다는 것은 꽃이 많은 것으로 비유를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이미 죽은 나무는 감정이 없으므로 여기에서 이야기를 할꺼리로써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봄철에 만개한 벗나무를 생각해보자. 온 산천이 불을 밝힌 듯이 밝은 연분홍색으로 치장을 하게되는 것인 잠깐이지만 참으로 장관이라고 할만하다. 이것은 해마다 남해에서 열리는 군항제라던지 지리산에서 열리는 십리벗꽃의 축제가 있는데, 지금은 이것이 번져서는 전국 어느 동네던지 꽃잔치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꽃을 피우느라고 진기를 소모한 나무는 열매를 크게 키울 기운이 없어진 모양이다. 실제로 늦여름에 등장하는 버찌는 콩알 정도의 크기이다.

가령 사과나무나 복숭아 나무의 열매는 그렇게 크게 달리는 것과 비교를 해본다면 상당한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만약에 벚꽃 이 필적에 90%정도를 솎아버린다면 어떻게 될것인가를 생각해보자. 실제로 그 많은 꽃을 따낸다는 것은 어렵겠지만, 아마도 상당히 커지게 되는 버찌를 수확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은 농부가 과수원을 경영하면서 꽃이 지고 나면 신속하게 지나치게 많이 달린 열매를 솎아내는 것이 해마다 대단히 번거로운 그렇지만 생략할 수가 없는 중요한 행사로 등장을 하기 때문이다. 과수원을 하는 사람은 이 시기의 중요성이 일년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매달려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머니가 많은 자식을 키우려면 기운이 탈진한다는 이유를 알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렇게 자식이 많아서 문제가 발생하게 생긴 오행의 형상에서는 그 자식들을 냉정하게 잘라내는 것을 정법으로 삼고 있다. 실제로 과수(果樹)가 지나치게 많은 열매를 달고 난 다음해에는 힘이 없어서 열매가 신통치 않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해걸이’라는 말로 배운 기억이 나는데, 과수원에서는 이 해걸이를 없애기 위해서 과일의 개수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에 대한 처방으로써 우리 명리학에서 대입하는 것이다. 사주에서 나무로 태어난 사람이 불이 지나치게 많으면 물을 용신(用神)으로 삼게 되는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서대승님은 이것을 일러서 ‘화다목분(火多木焚)’이라고 이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