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장항적벽(獐項赤壁)

작성일
2023-10-30 07:32
조회
611

화순 장항(노루목)적벽(獐項赤壁) 

 

(2023년 10월 21일 탐방)

 


개인적으로는 찾아갈 방법이 없는 장항적벽이라서 예약을 한 후에 자리를 배정받고서 오후 2시에 출발하는 2차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점심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낯선 화순바닥에서 어디에 무엇을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나겠느냐만 애초에 먹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라 일단 차를 이용대체육관 주변에 세워놓고 찾아보기로 했다.

 


이용대체육관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를 기념해서 붙인 이름인 모양이다. 그러니까 화순의 자랑이라는 의미로구나. 이런 이름을 보면 뒤따르는 걱정도 있다. 부디 이름을 바꾸는 불상사는 생기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가끔 개인적인 일탈로 인해서 주민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왕왕 있기 때문이다. 

 

차를 대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하늘도 캄캄했다. 이건 또 무슨 조짐이냐? 오전 내내 맑은 가을하늘이었는데 말이지. 그래서 일기예보 어플을 보니까 지렁이 만한 구름 한 가닥이 화순땅에 걸쳐있다. 이것은 잠시 후면 지나가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일정은 그대로 유지했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곳에 어쩌면 유일한 식당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칡냉면 식당이 있어서 찾아갔다. 그런데 대리석불입상이 있다는 화살표가 그 옆에 있어서 연지님에게 비빔냉면으로 주문하라고 해 놓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따지고 보면 마당 끝에 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지척이었다. 

 


처음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불상이라는 뜻인가 싶었다. 대리석은 석회암(石灰巖)이 변성(變姓)을 받은 암석이다. 화순에 대리석이라니 무슨 뜻인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대리석(大理石)이다. 글자가 다르니 의미도 다를 밖에. 아마도 여기 지명이 대리(大里), 그러니까 큰 마을인 모양이다. 돌쟁이에게는 비슷한 이름만 봐도 돌 이름으로 보이기도 하는 일종의 취미병이랄까? ㅋㅋ

 


국보도 보물도 아닌 문화재 자료인 것으로 봐서 크게 보호하는 의미는 아닌 모양이구나. 그래도 관리한다는 말이니까 지나는 길에 둘러볼 정도는 되는 것으로 봐도 되겠다.

 


참 소박하다. 불상에 맞춘 것이 아니라 돌에 맞춰서 조각을 했던 모양이다. 촌색시 마냥 미소를 짓고 있는 불상이 정겹다. 희미한 옷의 주름에 비해서 얼굴은 뚜렷하게 정성을 들인 흔적이 느껴진다.

 


어디선가 만났음직한 화순댁의 미소를 접하니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도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눈의 윤곽이 좀 어색하지만 뭐 괜찮다. 오른손을 스쳐서 지나가는 흰 가는 선은 관입(貫入)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는데 흡사 연꽃을 들고 있는 줄기처럼 보이도록 안배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친절하게 설명문이 준비 되어 있구나.

 


석장승 기법이라는 설명에도 끄덕끄덕... 그렇게 보면 그것도 일리가 있어 보이는구나. 기왕 장승을 조각하는 김에 보살상으로 표현한 것은 석공의 불심이겠거니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때 '국수 나왔다'는 연지님 전화가 울린다.

 


냉면을 시킬 때는 거의 99% 물냉면이지만 오늘 점심에는 비냉이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서 뜨끈한 국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체육관 주변에는 마땅한 국물집이 보이지 않아서 냉면을 먹어야 할 판이면 그래도 덜 차가운 것으로 하는 것이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해야 할 따름이다. 워낙 좋아하니까. 

 


정확히 13시 40분에 투어 대합실로 찾아갔다. 오늘 타고 가야 할 버스로구나. 1인당 1만원이다. 경로할인도 없다. 야박하군. 이런 법이 어딧어. ㅋㅋ

 

 

큼직하게 예약명단이 있구나. 최대 예약인원이 8명이라서 8명이상은 없는 모양이다. 맨 앞자리에 번호가 배정되어 있는 것은 예약을 하면서 가장 먼저 한 공덕이다. 중간에 앉으면 바깥이 절반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지. 

 


1호차는 핑크핑크한 표찰이고 2호차는 보라보라한 표찰을 나눠준다. 인증샷을 하나 남기고 지정된 차의 문이 열리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둑거리려서 여행객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카메라는 비를 싫어하기 때문에 준비한 우비대용 파카를 걸치고 일단 카메라를 숨겼다.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다. 이런 때는 하늘과의 시간싸움이다. 아직도 구름이 지나가지 않고 머뭇머뭇하는 모양이구나. 뭐 벗어지겠지..... (조마조마~)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장항적벽까지의 거리는 대략 30분이 걸린다는 점이다. 그 정도의 시간이면 하늘도 바뀔테니까. (과연?)

 


예약없이 버스를 타는 곳은 이서인데 예약을 하면 화순읍에서 출발한다.그래서 시간이 좀 걸린다. 그리고 지금은 그 시간이 걸리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그 사이에 운사(雲師)께서 얼른 일 보시고 어서 지나가시기만을~ 

 

 


버스의 유리 닦개가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중에 적벽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이다. 아직도 빗방울은 들이치고 있지만 그래도 예정대로 정해진 길을 간다. 

 


예약조건에 비가 많이 내리면 취소될 수가 있다는 항목이 붙었던 것도 생각난다. 연지님은 혹시 모른다면서 우산을 챙긴다. 그러면서 삿갓우산도 챙겼다고 건네 준다. 그것을 받아 들었으나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일 따름이다.

 


여하튼, 해설사의 설명은 시작 되었고, 여행은 계속 이어진다. 앞자리의 공덕은 이렇게 또 스치는 풍광을 놓치지 않는다.

 


상수원보호구역이며 통행제한도로이며 여러 가지 살벌한 경고문성 안내판도 오늘은 무용지물이다. ㅎㅎ

 


도보나 개인차량 진입금지의 문이 활짝 열렸다. 8년 전에는 굳게 닫혔던 그 문을 다시 만났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관리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안 되겠능교?' 라고 말하고 싶은 그 마음이 아직도 느껴진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뭘, 했던 그 다음이 지금이구나. 

 


구불구불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앞이 화들짝 열리면서 닫혔던 하늘도 활짝 개는 바람에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화순적벽전망대다. 길에 버스를 정차하고 관람객은 바로 위로 몇 계단 올라가면 전망대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여행자에겐 도로 복이 최고이고, 사진가에겐 하늘 복이 최고다. 오늘은 길복과 하늘복을 다 받았으니 당연히 기쁨이 두 배일 밖에. ㅎㅎ

 


생각으로는 보산적벽과 장항적벽을 따로 보는 것으로 여겼는데 현장에 딱 도착하니까 보산적벽은 여기에서 바라보는 것이 전부라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것도 실제로 끝에 표시되어 있는 보산적벽을 볼 수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망향정 아래의 절벽밖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본다면 실은 장항적벽만 보는 셈인가 싶었다. 이미 안내를 통해서 창랑과 물염은 가지 않는다는 것도 듣고 보니까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구역인 이곳을 둘러보고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 여행코스라는 것을 알고 잘 접수했다. 주어진 만큼만 누리는 것도 여행객의 필수조건이니까.

 


그러니까 앞에 있는 석벽이 보산적벽인 셈이고, 저 건너편에 있는 것이 장항적벽이며 이서적벽이며 화순적벽이란 말이구나. 어림짐작으로 전망대에서 둘러본다. 보산적벽의 한자는 못 찾아서 나중에 채워넣기로 한다.

 


하긴 막상 적벽을 둘러보니까 어디라도 형태는 비슷비슷해서 크게 억울할 것까지는 없었다. 오후의 빛을 받아서 밝게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았다. 지질노두의 재미는 역시 해안(해海岸)이다. 천변만화하는 재미는 해안으로 가야지. 다음에 가볼 목록으로는 여수의 낭도와 사도가 새로 추가 되었고, 갈까말까한 고군산군도의 말도도 후보로 넣었다. 그리고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장봉도도 최근에 넣었다. 결국은 모두가 바닷가의 노두들이구나. 볼 곳이 많아서 즐겁고 지질변화가 많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이 행복할 따름이다.

 


여하튼 이렇게 보산적벽은 본 것으로 퉁 칠 수밖에 없다. 하긴 노루목적벽도 마찬가지고 창랑적벽도 마찬가지구나. 다가가서 살펴볼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는 이나저나 같은 조건인데 뭘 안타까워하느냔 말로 토닥토닥.....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통천문(通天門)이 나그네를 반긴다. 급한 마음에 휘적휘적 마음대로 가다가 해설사에게 딱 붙들렸다. 단체로 행동해야 한단다. 2호차와 뒤섞여도 안 되고 다른 버스들 그러니까 예약없이 운행하는 차량의 여행객들과도 분리를 해야 해서 안내원겸 해설사들(2명)이 정신없이 바쁜 것을 봤다. 단체가 되었으니 당연히 따라야지. 그들을 힘들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늘로 통한다니 선경(仙境)으로 간다는 의미겠구나. 여기에서 사진을 찍으면 집으로 보내 주는 서비스를 화순군에서 하고 있다면서 팀별로 사진을 찍으라기에 연지님이랑 둘이서 한 장 찍었다. 사진사가 대기하고 있다가 통천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관람객을 실은 버스들이 속속 들어온다. 예약팀과 즉석팀의 차량이다. 즉석차량은 셔틀버스로 이름이 되어 있고, 예약은 버스투어로 이름이 되어있다. 예약은 토,일요일에만 가능한데 평일에 왔다가 자리가 없으면 무조건 뒷차를 기다려야 한다는 조건이 맘에 안 들어서 토요일 차량을 이용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천하제일경(天下第一景) 화순적벽

조선마술사, 쌍화점, 근초고왕, 대왕의 꿈 등 영화아 드라마의 촬영지로 유명한 화순적벽은 동복댐 상류에서부터 7km 구간에 형성된 절벽 경관을 말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물염적벽, 창랑적벽, 보산적벽, 장항적벽(일명 노루목적벽)등 4개의 군으로 나뉘어 있다.

높이 80m 직각으로 깎아지른 듯 솟아있는 화순적벽은 예로부터 수려한 절경을 자랑하던 곳으로, 1519년 기묘사화 후 동복으로 유배왔던 신재 최산두 선생이 이 곳의 절경을 보고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하여 적벽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김싯갓이 3번이나 다녀갈 정도로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자랑한다.

 

그래 최산두 선생의 도원서원도 둘러봤고 김삿갓이 놀았다는 물염적벽도 둘러봤으니 대략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니까 최산두 선생 이전에는 뭐라고 불렀는지가 더 궁금하단 말이지. 

 

이동하도록 정해 놓은 도로를 따라서 움직이는 수밖에. 아마도 그게 최선이기도 할 테니까. 우선은 망미정(望美亭)이로구나.

 


우거진 대숲을 오른쪽으로 하고 걷는 중에 출입금지가 보이는데 그 안쪽에는 산소들이 있다. 옛날에 살았던 사람이 머무르고 있는 곳이라서 후손들만 출입하라는 의미인 모양이다.

 


화순적벽을 조망할 수가 있는 곳이 망미정이었다.

 


누구라도 이런 곳에 오면 정자 하나 지어놓고 며칠 푹 쉬고 싶겠다는 생각이 들만한 곳에 정자가 있구나. 이름도 '아름다운 곳을 바라보는 정자'다. 여기에서 바라보면 적벽의 하루가 얼마나 멋지겠느냔 말이지. 아니지 한 해의 변화까지도 바라볼 수가 있겠구나. 춘하추동의 풍경에 따라서 느낌은 또 다를테니까.

 


이 정자는 병자년에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킨 장군 정지준이 지은 정자라는 설명과 함께 글을 쓴 사람은 1986년 맹춘(孟春-1월)에 후광(後廣) 김대중이라, 그러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쓰셨네. 당시는 대통령이 아니었지만 뒤에 대통령이 되셨으니 이렇게 상대적으로 글 쓴 이의 지위가 변화한다. 아호가 후광이셨구나. 그윽하군. 뒤가 넓어야지. 앞만 넓으면 허세잖여? ㅎㅎ

 

연보를 대략 훑어보니 노태우와 김영삼 등의 인물들과 힘겨루기를 하면서 힘들었던 시절이었구나. 마음도 심란하고 해서 이곳을 찾으셨던 모양이다. 사람은 떠나고 흔적은 남아서 잠시 그의 열정어린 모습을 떠올려 본다. 편액을 보면 이름만 남아있는데 그래도 현대의 인물인지라 영상의 이미지도 추가되는 구나.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적송자(赤松子) 정지준(丁之雋) 선생(先生) 사적비(事蹟碑)가 우뚝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래의 무궁화는 쫌...... 

 


흔적은 꼼꼼하게 담아 놔야 나중에 다시 살펴보면서 복기를 한단 말이지. 무슨 일을 남기셨는지 읽어봐야지.

 


 

적송(赤松) 정선생(丁先生) 창의(倡義) 사적비(事蹟碑) 건립추진기(建立推進記) 

오호(嗚呼)라 인조(仁祖) 병자년(丙子年) 12월 우리 강토(疆土)를 침략(侵略)하는 호적(胡敵)들을 물리치려고 위국충절(爲國忠節)의 정열(精熱)을 불태우며 분연(奮然)히 일어선 적송공(赤松公)은 의병(義兵)을 모으고 격려(激勵)하며 구국일념(救國一念)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청주(淸州)에 이르렀건만 우리 임금이 청태종(淸太宗)에게 삼전도(三田渡)에서 치욕(恥辱)의 화의(和議)를 했다는 소식(消息)에 얼마나 통분(痛憤)하였겠습니까? 허탈(虛脫)과 통한(痛恨)의 가슴안고 이곳 적벽(赤壁)에 내려와 강안(江岸)에 정자(亭子)를 짓고 임금을 걱정하여 망미(望美)라 편액(扁額)하고 원한(怨恨)에 사무친 응어리진 마음을 저 유유(悠悠)히 흐르는 강(江)물에 씻고 달랬으리라. 희(噫)라 공(公)이 가신지도 어언(於焉) 340여년(餘年) 아직도 적벽강(赤壁江) 출렁이는 물결 속에 공(公)의 숨소리 들리는 듯 하다. 다행(多幸)히 유림제현(儒林諸賢)들의 발론(發論)이 제발(齊發)하여 사적비(事蹟碑)를 세우고자 함에 의연금(義捐金)이 답지(遝至)하여 수비(竪碑)하게 되니 이 거사(擧事)를 추진(推進)하는 추진위원(推進委員)들은 공(公)의 충의정신(忠義精神)을 공경(恭敬)과 앙모(仰慕)의 마음으로서 세교(世敎)와 사문(斯文)에 큰 보탬이 되리라 믿으며 또한 이곳을 찾는이들도 적송공(赤送公)의 애국혼(愛國魂)을귀감(龜鑑)삼아 나라사랑하는 마음 다시 한 번 가다듬기 바라노라.

서기2008년 무자(戊子) 대설절(대설大雪節) 이영복(李泳福) 식(識)

 

창의(倡義)가 무슨 뜻인가 싶어서 찾아보니 국난을 당했을 적에 나라를 위해서 의병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구나. 삼전도는 알지 예전에 잠실의 석촌호수 옆에 있는 그 치욕이라는 석비를 봤으니까. 의연금도 한자로 보니 새삼스럽고, 망미(望美)가 적벽을 보고서 지은 이름인가 했더니 왕을 바라보는 마음이었구나. 역시 짧으면 코앞의 풍경 밖에는 보이지 않는 법이다. 송강 정철선생이 《思美人曲》을 지었다는 생각이 겹이면서 끄덕끄덕..... 

 


천장 벽에는 싯귀가 붙어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더란 말이지. 이건 누가 무슨 의미를 쓴 것인지 궁금해서....

 

유망미정(遊望美亭)

연봉무수상청천(連峰無數上靑天) 무수한 연봉 위에는 푸른하늘

하유창랑일도천(下有滄浪一道川) 아래로 푸른물결 일렁이는 한줄기 하천

삭출층암유신귀(削出層岩有神鬼) 신과 귀신이 깎아 놓은 층암절벽

결위공취사운연(結爲空翠似雲烟) 허공에는 푸른 운무가 이어진다

송삼진향담중사(松杉盡向潭中瀉) 소나무 삼나무 못의 위에 그림자 짓고

일월의종석상현(日月疑從石上懸) 해와 달은 암석 위에 매달린 듯

견설음애유소학(見說陰崖有巢鶴) 옛말에 절벽 그늘진 곳에 학의 둥지가 있다더니

야심응몽우의선(夜深應夢羽衣仙) 오늘 밤 신선이 날아오르는 꿈 꿀듯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

 

농암 선생이 망미정에서 단애(斷崖)를 바라보면서 시심이 동하여 한 수 남기셨구나. 나름대로 풀이를 해 봤다. 그야말로 적벽예찬가(赤壁禮讚歌)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멋진 시 한 수다.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다 싶어서 자료를 찾아봤다.

 


아하, 그랬구나. 율곡 선생을 한 수 위로 놓았던 것은 낭월과 동감이로구나. 그래서 또 반갑고. 생몰은 1651~1708이니 김삿갓(1807~1863)이 태어나고 나서 세상을 떠나셨군.

 

 

아하! 적송자 선생의 시도 한 수 있었구나. 당연하겠거니 하면서도 반가워서 또 들여다 본다. 옆에는 창주 나무송 선생과 나란히 붙여 놓았던 것으로 봐서 매우 가까운 사이였나 싶기도 하다.  

 

白雲出峀鳥還飛(백운출수환조비) 흰 구름 솟아나면 날던 새는 돌아오고

玄鶴盤空弄夕暉(현학반공롱석휘) 검은 학은 공중에서 석양을 희롱하네

一赤中箭爭也畢(일적중전쟁야필) 붉은 한 점 맞추려고 활시위를 당기다가

天風來拂六銖衣(천풍래불육수의)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이 펄럭 

 

창주 나무송 선생은 물염정(勿染亭)을 지었던 물염 송정순의 외손자였구나. 이리저리 자료를 찾다가 보니 서로 간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흔적들이 흡사 주사마적(蛛絲馬跡)을 보는 것 같다.  

 

자연과 더불어 풍광을 즐긴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다. 적벽을 보면서 아호도 적송(赤松)으로 지었던가 보다. 적송자라고 했던 것을 보면 도가적(道家的) 느낌도 있어 보인다. 무위자연으로 더불어 살아가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방랑시인의 시 한 수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있을 소냐. 

 


 

將遊赤壁 歎有客 無酒(장유적벽 탄유객무주) 적벽에서 노는데 술이 없음이 안타깝구나

古跡回間簫歌夜(고적회간소가야) 고적을 돌아보는 사이 퉁소소리 들리는 밤이 되니

䲵飛烏去蒼茫洲(작비오거창망주) 참새날고 까마귀도 날아 가는데 검푸른 절벽에서

秋風岳陽上詩杜(추풍악양상시두) (내 모습이) 추풍에 악양루에서 시를 짓는 두보 같고

夕陽滁亭歸醉歐(석양저정귀취구) 석양에 저 정 에서 만취해 돌아가는 구양수 같네.

 

虛汀八月不見人(허정팔월불견인) 한가로운 팔월이건만 구경하는 사람은 안 보이고

露葭蒼蒼江水悠(로가창창강수유) 이슬 맞은 갈대만 푸르게 여유롭네

江山何處觀之無(강산하처관지무) 강산이야 어딘들 보이지 않는 곳이 없으련만

好酒嘉賓方勝遊(호주가빈방승유) 술과 손이 더불어 절경을 누리기 좋은 곳.

 

蕉臯酬句度陵閣(초고수구도능각) 파초 핀 언덕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능각을 거닐고

竹溪携樽采石舟(죽계휴준채석주) 죽계에 술통 들고 들어가 돌을 캐 배에 실었으면

如干知己不相待(여간지기불상대) 지기와 더불어 만나지 않아도 이미 서로 아는 것

跡盈湖南名勝州(적영호남명승주) 명승으로 가득 찬 호남의 이름 높은 고을 이니.

 

烟霞倘息問無處(연하당식문무처) 안개구름에 가려져 소식 물을 곳이 없으니

福州丹江各海陬(복주단강각해추) 복주고을 붉은 강물 각 해변의 모퉁이 같구나.

東坡以後北路仙(동파이후북로선) 소동파 이후 처음으로 북에서 내려 온 선비이니

壬戌之餘辛丑秋(임술지여신축추) 임술년이 얼마 남지 않은 신축년 가을 이구나

 

中央宛在好箇人(중앙완재호개인) 가운데는 굽어 있어 사람이 자세히 보기 좋고

庶哉良宵同唱酬(서재양소동창수) 서민이든 양반이든 함께 노래를 주고받으니

虛舟欲解滿江月(허주욕해만강월) 빈 배에 욕심없으니 강에 달이 가득하고

寂寞無人水渡頭(적막무인수도두) 적막하여 사람없이 물길만 흘러가네.

 

漁鹽囂市往來者(어염효시왕래자) 소금에 절인 물고기로 시장이 소란하고

樵牧荒村生長儔(초목황촌생장주) 황촌에는 초동이 오래도록 살아가네.

文章浪遊視餘事(문장낭유시여사) 물놀이와 시를 지으며 세상사를 빗겨보니

與誰吾歸江自流(여수오귀강자류) 강물은 흘러가는데 누구와 같이 돌아가나.

 

蘭槳己斷望美歌(난장기단망미가) 배 젓는 노도 이미 멈추니 임 그리는 노래도 그쳤고

斗酒全空歸婦謀(두주전공귀부모) 술통은 비었으니 돌아가 여인네를 품어볼까

江亭勿染亦無聯(강정물염역무연) 강과 정자는 물들 일이 없으니 무관하고

主去多年花木幽(주거다년화목유) 주인 떠난지 오래이니 꽃나무만 그윽하네.

 

浮雲萬里浪跡通(부운만리낭적통) 만리하늘에 뜬구름만 흘러가는데

明月千年虛影留(명월천년허영류) 명월은 천년 세월 빈 그림자만 드리우네.

길게 쓴 싯귀의 내용을 대충 풀이해 본다. 임술년(壬戌年)이 되기 전 신축년(辛丑年1841)을 언급한 것으로 봐서 이 시를 지은 때는 35세의 늦은 가을이었던 모양이구나. 한창 혈기 왕성할 젊은 나이에 삿갓에 얼굴을 묻고 천하를 유람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적막한 적벽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심경을 노래한 느낌이 절절히 묻어나는 것 같다. 옆구리가 시릴 쌀쌀한 기온에 변변치 못한 의복으로 덜덜 떨다가 보니 한 말(一斗)짜리 술통도 이내 비어 버리고, 해는 저물어가니 포근한 여인의 따뜻한 수다가 그리웠을 게다. 주막거리의 여인을 찾아서 수작(酬酌)을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 싯귀에 녹아든 것으로 느껴서 참 인간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 번째 방문은 1850년이고 마지막 방문은 다시 7년 후인 1857년이니 사망한 연대가 1863인 것을 보면 6년 여를 머무르다가 삶을 마무리 했구나. 

 


김삿갓이 동복에 왔을 때도 이미 망미정은 있었겠고 여기에 앉아서 술이 없는 나그네의 느낌을 그대로 시에 담았던가 싶은 생각도 든다. 와서 절경을 둘러보니까 술 한 항아리 들고 왔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 나중에는 그 한을 풀기 위해서 틀림없이 한상 차려서 웬수를 갚았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그런데 일두주(一斗酒)라는 구절도 있는 것으로 봐서 술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부족했던 것으로 봐야 하지 싶기도 하다.

 


장항적벽(獐項赤壁)은 원래 노루목이었는데 한자로 바꿔서 장항이 된 모양이다. 그리고 뒤의 산악도 적벽과 흡사한 풍경을 하고 있는 옹성산(甕城山)이다. 어느 지인이 군대 시절에 유격훈련을 받던 산이라고 전하는데 그럴 정도로 암벽이 군인이 훈련을 받기 좋을 정도로 험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명색이 지질탐사를 하러 왔는데 풍경과 정자만 보고 갈 수는 없어서 나름 100-400mm렌즈를 당겨서 풍경을 최대한 자세히 담았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는 썼지만 그래도 삼각대에 얹은 것 만큼이야 할 까닭이 없으니 그냥 아쉬운 대로 분위기나 파악하는 용도에 만족할 요량이다. 그래도 다가갈 수가 없는 대신 보이는 것이라도 이런 기회에 다시 보기 쉽지 않은 풍광을 가능하면 자세히 담아 놓고 싶었던 것이야 당연하다.

 


전체적인 풍경도 살펴보고....

 


지질이 물염이나 창랑과 다른 모습이구나. 그래서 또 살펴본다.

 


중생대 백악기 경상계 적벽응회암이다. 그러니까 장동응회암과 다른 암질이라는 의미구나. 그러니까 장동응회암과 조금 다른 성분이라는 의미일 텐데 그 차이가 무엇인지는 단지 적벽응회암(赤壁凝灰巖)으로만 되어 있어서 궁금할 따름이다. 어딘가에 언급이 있는지 발견이 되면 추가하는 것으로 하고.

 














암벽도 적벽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늘다리가 있어서 등산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이 편리하겠다만 거기까지 오를 생각은 아직 없어서. ㅎㅎ

 


오른쪽으로 흐르면 동복댐이 나온다. 동복천의 흐름을 보면.....

 


장항적벽인데 동네는 장학리구나. 둘 다 맞는 건지? 하나는 틀린 건지 그것이 또 궁금해진다. 참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도 병이라면 중병이지 싶다. ㅋㅋ

 






댐을 만들면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위해서 망향정을 지었다.

 






사진으로나마 당시의 흔적을 담았구나. 

 

 

수몰이 되기 전에 유람선을 타고 다니던 장면이구나. 부럽네. 댐이 1971년에 생겼으니까 이 풍경은 그 이전의 모습이겠다. 노를 젓는 사공의 모습이 낯설구나. 오랜만에 보니 그렇지 싶다. 안면도에서는 삿대질이 아니라 노를 저었는데 동복천에서는 얕아서 노를 저을 곳이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백산 정상에서나 봄직한 천제단인데 여기에서 만나게 되다니 좀 엉뚱해 보이기는 하지만 경치가 좋아서 천존(天尊)께서 왕림을 하실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만들었나 싶은 생각도 스쳐간다. ㅎㅎ

 


이렇게 해서 둘러보고 싶었던 적벽투어를 잘 마무리 했다. 예정대로의 소요시간이 3시간이면 5시에 끝이 난다고 봐서 고인돌유적지는 갈 수 있으려나 싶었는데 지금 시간이 3시 34분인 것으로 봐서 30분 후에 이용대체육관에 도착해도 4시 초반일테니까 다음 목적지는 화순고인돌로 확정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목적한 것은 다 돌아보는 셈이구나. 하늘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고인돌유적지를 둘러봤지만 별도로 소개할 정도로 흥미는 동하지 않아서 이야기는 생략할 요량이다.

 

【금산(錦山) 적벽강(赤壁江)까지】

  


앗참! 내친 김에 금산적벽까지 여기에 때려 넣으면 적벅삼부곡(赤壁三部曲)이 완성되지 싶다. 사진은 2016년 9월에 금산으로 인삼을 사러 간 김에 적벽이 있다는 말에 잠시 들려 봤었다. 물이 맑아서 발을 담가 봤으니 그 때는 그런 것에 마음이 가던 시절이었던 셈이구나.

 


그런가 하면 왜가리가 먹이사냥을 하고 있는 것에도 정신이 팔렸던 모양이다. 남은 사진에서 암벽은 없고 이런 것만 남아 있구나. 그래서 카카오맵의 캠에 찍한 사진을 찾아봤다.

 


장소는 대략 금산군과 무주군의 경계선 어디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금강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적벽강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부여 앞을 백마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면 되겠다.

 


지질도를 보면 석영반암(石英斑巖)으로 되어 있다. 석영은 유리체의 암석질에 얼룩덜룩한 반점이 섞여 있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지 싶다. 얼룩이 ㅇ씨어서 동그라미도 있고 네모도 있는 다양한 형태의 점들로 가득 채웠구나. 그리느라고도 애 많이 썼겠다. ㅎㅎ

 

 

두산백과에서 석영반암을 찾아보니까 유문암보다 아래에서 굳어진 반심성암(半深成巖)에 해당한다. 화강암과 유문암의 사이에 자리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구나. 언제 시간이 나면 다시 가봐도 좋겠다.

 

 


적벽을 바라보는 전망대도 만들었구나. 수영은 하지 말라고 했으니 들어가면 안 되겠다.

 


대략적으로 분위기를 봐서 적벽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러한 풍경도 아무 곳에서나 볼 수가 있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뭔가 공사를 하느라고 인부들이 분주한 모습이다. 주차시설을 만드나 싶기도 하고.....

 


나중에 금산에 갔다가 석영반암이 궁금해지면 잠시 들려봐도 되지 싶다. 노두가 잘 드러나 있으면 잠시 둘러봐도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적벽에 대한 구경은 이렇게 완벽하게 마친 걸로 하고 마무리를 한다. 남한에는 삼대 적벽이 있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모두 둘러 봤다고 하면 되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