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창랑적벽(滄浪赤壁)

작성일
2023-10-27 08:00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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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 창랑적벽(滄浪赤壁) 

 

(2023년 10월 21일 방문)

 


물염적벽에서 한구비를 돌아가면 만나게 되는 것이 창랑적벽이다. 이름이 그럴싸 하다. 물염(勿染)은 인위적(人爲的)이라면 창랑(창滄浪)은 자연적(自然的)이다. 그래서 또 맘에 든다. 시인 묵객들이 자주 찾았다고 하더니 이름도 매력적이구나. '짙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적벽'이라니 세외(世外)의 풍경이다. 바닷가를 거닐면서 무수히 많은 창랑을 만났지만 이곳은 깊숙한 산 속인데 이름이 창랑이다. 이것은 작명가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기도 할 게다. 문득 파랑(波浪)이 몰아치는 풍경이기를 바랬다는 의미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염적벽을 떠나서 물염교를 건너면 산 모퉁이를 돌아서 창랑적벽전망대를 만나게 된다. 8년 전에는 찾아보지 않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때는 김삿갓에 대해서 관심을 뒀기 때문에 물염적벽에서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창랑은 첫 걸음인 셈이기도 하다. 아마 그때도 동행이 없었더라면 여하튼 들리기는 했을 테지만 그때는 조금도 미련없이 물염적벽에서 놀다가 걸음을 돌렸었다.

 


전망대에서 바라다보기만 하면 되는 창랑적벽이다. 무슨 방법으로도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다만 놀이도 환경따라서 놀아야지. 여기에 고무보트라도 띄웠다가는 경찰이 출동하고 난리를 칠 것이 뻔하지 않으냔 말이지. 그러니까 내심은 그렇게 하고 싶었더라는 마음이었다. ㅋㅋ

 


 

 

 


안내판을 둘러보고 바로 전망대로 향하기 전에 화살표부터 찾았다. 이름표 앞으로 길이 나 있어서 기대감이 1만큼 추가되었다.

 


오호~! 호옥시.....? 옆에 난 길을 봐하니 어쩌면 좀더 아래로 내려가서 보는 길이라도 있으려나 싶어서 전망대에 오르기 전에 먼저 산소가 있는 옆으로 내려가 봤다. 

 


결과는 역시나...... 길은 없었다. 산소를 관리하는 길이었을 따름이다. 다시 걸음을 돌려서 전망대로.

 


전망대도 잘 만들었구나. 

 


단풍은 아직 물들지 않았으나 풍경은 멋지다. 

 


아쉬운 점은 오전이어서 적벽(赤壁)이 회벽(灰壁)으로 보이는 것이었지만 자세히 보니 색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오후가 되었다고 해도 희게 보일 것으로 짐작이 되어서다. 지질은 아마도 물염적벽과 같겠지.....?

 


생각한 대로 창랑적벽도 중생대(中生代) 백악기(白堊紀)의 경상계(慶尙系) 장동응회암(壯洞凝灰巖)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기본적으로 같은 지질이라고 보면 되겠다. 장동의 한자가 보이지 않아서 '화순군 장동'으로 구글링해서 발견한 글자이다. 화순의 동면에 있는 마을이름이구나. 광주에도 장동(長洞)이 있는데 현재의 충장동이라고도 한다. 이것일 수도 있지 싶다. 진위는 알 수가 없으니까 길다란 마을의 장동(長洞)보다는 웅장한 마을의 장동(壯洞)이 맘에 들어서 그걸로 했다. 그러니까 장동응회암은 장동응회암(長洞凝灰巖)일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지층의 경사도까지도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 대략 10도쯤 기울어진 것으로 보면 되려나? 그냥 대충 짐작이다.

 


적벽에 바위이끼들이 덮여서 옥벽(玉璧)이 되었구나. 그러고 보니 이것도 창랑과 잘 어울린다. 흡사 동벽(銅壁)으로도 보인다. 원래 구리가 산화(酸化)되면 청록색(靑綠色)으로 변하니까. 아마도 오후의 햇살을 받게 된다면 더 밝게 보이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 바라보는 느낌은 회백색이다.

 


이끼가 떨어져 나간 곳에서는 붉은 색이 드러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촉각(觸覺)을 얻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하는 것만으로는 눈으로만 푸짐하고 촉감을 느낄 수가 없으니까 해안의 바위를 누비면서 느꼈던 그 묵직하게 매끈한, 혹은 깔깔한 느낌들도 결코 작은 체험이 아니었겠다는 것을 이렇게 한편의 허전함에서 느끼기도 한다. 다만 암질이 물염적벽과 같은 것이라니까 그 느낌으로 연장해서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겠다.

 

 

  

 


 

 

 


 

 

 

  

 

 


 

 

 


 

 

 


 

 

 


 

 

 


 

 

 


 

 

 


결이 다른 지층도 보인다. 아래쪽의 암벽은 퇴적층이 안 보이고 위쪽에서만 보이는 것이 특이하구나. 색깔로 봐서는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기는 한다. 찾아본 자료 중에서 가장 친절해 보이는 [지질대동여지도] 내용을 살펴본다.

 

무등산 남동쪽 동복호 주변에 분포하고 있는 능주분지는 중생대 백악기에 형성된 신장환경의 육상 퇴적 분지로 화산쇄설물을 포함하고 있다. 능주분지는 하위부터 오예리층, 만월산층, 연화리층(장동층), 연산층(적벽층) 무등산응회암층, 옹암 역암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능주분지 퇴적암의 퇴적환경은 호수, 충적평야, 중적선상지, 모래평원 등이며 분지는 남북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었고 동서방향으로 확장되었다. 장동층이 분보하고 있는 서우리 지역에는 공룡발자국화석과 많은 퇴적구조가 나타난다.

능주분지는 최근 연구결과에 의하면 화산쇄설암을 기준으로 크게 4개의 층서단위로 구분된다. 가장 하부의 층서단위1과 층서단위2는 만월산층 응회암에 의해 구분되는데 만월산층 응회암은 9600만년~9400만년 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층서단위2와 3의 경계는 장동층의 응회암이며 층서단위 3과 4의 경계는 무등산 응회암이며 경계에는 침식면이 존재한다. 무등산응회암의 형성 시기는 8700만년~8500만년 전으로 층서단위 4 하부에 두껍게 쌓여있다.

층서단위1은 주로 충적 평야환경에서 형성되었으며 층서단위2는 건조한 호수에서 형성된 퇴적물이 우세하다. 층서단위 4에서는 모래 평원과 선상지 환경이 우세하다.

또한 층서단위1의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퇴적물의 공급과 분지침강이 균형을 이뤄었으나, 층서단위2,3이 형성되는 시기에는 화산활동과 분지침강과 확장이 활발하게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역시~! 이 정도는 알아야 지질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설명을 봐하니 아랫쪽의 매우 두꺼운 지층은 층서단위4의 하부에 속한다는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육상(陸上)과 호상(湖上)이 서로 뒤섞여서 형성된 지질로 이해하면 되겠다. 층서라는 글을 보니 문득정선의 거북바위를 누비고 다니던 생각이 든다.

 


 

 

 


변화는 물염적벽보다 적어 보이는 모습이라서 카메라 렌즈도 더 훑을 것이 없단다. 그래서 이만하면 창랑적벽은 잘 본 것으로 하고 시간이 되면 방문하고 싶었던 곳으로 향했다. 시간적으로는 창랑적벽에서 공룡발자국으로 갔지만 이야기의 흐름상 도원서원으로 이어가는 것이 좋지 싶어서 여기에 이어간다.

 


 

 

 


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훑었으니 그만하면 다 본 셈이다. 적벽의 모습은 이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름을 적벽이라고 지었다던 학자를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걸음을 옮겼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살펴보는 것도 좋다. 이것은 아쉬움에 대한 위로라고 해도 되지 싶다.

 


창랑적벽에서 도원서원까지는 거의 반바퀴를 돌아가는 셈이구나. 대략 15km에 22분을 잡는다. 시간으로 봐서 충분히 둘러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계획을 실행했다.

 


적벽을 둘러보다가 말고 난데없이 찾은 곳은 도원서원(道源書院)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자료를 찾다가 발견하게 되었다. 이 서원의 주인이 적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이유뿐이지만 그의 행적이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화순 땅에서 선비 한 사람 정도는 사귀어도 좋지 싶은 생각도 든다. 김삿갓도 좋지만 암벽을 보면서 중국의 적벽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소동파의 적벅부(赤壁賦)를 본따서 이름을 붙었다니 그것도 공덕이라면 공덕일 게다. 그런데 더 났다면 승벽(勝壁)이라고 했어야 할 텐데 아무래도 삼국지의 적벽은 그 존재만으로 대단한 위력이 있는 것은 맞지 싶다. 이에 대해서 제대로 소개한 자료를 찾아봤다.

 

적벽의 아름다움은 알아도 최산두(崔山斗)는 모른다. 적벽 이야기는 대개 김삿갓으로 시작한다. 방랑 생활로 바쁜 와중에도 세 번이나 찾았단다. “무등산이 높다 하되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를 흐르더라.“​는 시구(詩句)는 귀에 딱지가 않을 정도다. 아름답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라지만 최산두가 훨씬 더 낫다. 솔직히 김삿갓이 화순 인심이 좋아서 온 김에 들른 것인지, 정말 풍광 자체가 좋아서 온 것인지 그건 알 수 없지 않은가.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화순 능주로, 최산두는 동복으로 귀양 왔다. 최산두도 천리 밖으로 쫒겨 났으니 조광조와 무게감은 그리 다르지 않았나 보다. 조광조는 한 달을 못 채우고 사약 마시고 죽었지만 최산두는 적벽 바라보며 10년 넘게 유배생활을 했다.

​ 이곳 풍광이 꽤 위로가 되었나 보다. 적벽이라 이름 붙이고 정(情) 붙이며 살았다. 소식[소동파, 중국 북송시대 시인]의 적벽부에서 이름을 따와 노루목[장항(獐項)] 적벽 또는 망미 적벽이라 하였다. 삼국지에 나오는, 주유 제갈량 방통이 한편 먹고 조조와 삼 대 일로 박 터지게 쌈박질했던 그 적벽과 닮았다 한다.

 국가 명승 112호로 지정되었고, 화순 8경 중 제1경이며, 그리고 천하제일경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는 적벽은 순전히 최산두 덕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금방 죽어 큰 인연을 맺지 못한 조광조는 화순을 대표하는 인물로 널리 알려진 반면, 화순제일경을 만든 일등공신 최산두는 화순 분들조차도 생소하다. 문장에 뛰어나 윤구(尹衢) ·유성춘(柳成春) 등과 함께 호남의 3걸(傑)로 알려졌으니 그는 당시의 적벽 홍보대사였던 셈이다. 그에게 큰 빚을 졌다.

출처 : 한국시민기자협회(http://www.civilreporter.co.kr)
 

 

 

 외양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초상화가 있었구나. 그래서 첨부한다. 귀양살이를 왔다가 아예 벼슬을 내던지고 눌러앉았다는 일화를 봐하니 물염 선생 못지 않은 기개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호는 신재(新齋) 선생이다. 묘지는 광양에 있다는데 서원은 동복에 있으니 귀양을 살면서 지역에 교육사업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살아서는 동복에서 적벽과 더불어 삶을 즐기다가 사후에 고향땅으로 돌아갔던 모양인데 그래서 찾아가 보는 것이기도 하다.(뭐하러? ㅋㅋ)

 


산 기슭에 조용히 자리한 도원서원이다. 문은 열려 있으면 들어가서 참례하는 것이고 잠겨 있으면 밖에서 배례하면 그만이다. 일부러 관리인을 찾아서 문을 열어 달라는 번거로움은 싫어서다.

 


도원서원(道源書院)이다. 이러한 이름으로 봐서 평소 신재 선생의 생각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지 싶다. 

 

*향토문화유산명 : 도원서원(道源書院)

*지정번호 : 향토문화유산 제 4호(2001. 7. 22 지정)

*소재지 : 화순군 동복면 연월리 산 915

*시대 : 1668년


도원서원은 호남 사람의 태두라 할 신재 최산두(1483~1536)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는 서원이다.

신재 최산두는 기묘사화(1519년)로 동복에서 14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고 유배가 풀린 후에도 계속 이곳에 머물며 여생을 마쳤다.

그가 사망한 후 135년 만인 1668년(헌종 9년)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그러다 1688년 (숙종 14년)에 사액되었으며 1697년 (숙종 23년). 1739년(영조 15년) 중수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77년 초계최씨 문중과 유림들이 신실을 건립하였다.

그 후 1991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한강(寒岡) 정구(鄭逑),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4분을 향사하고 있다.

신재 선생은 16년간 동복 땅에 머물면서 이 고장에 유학을 뿌리 내렸고, 많은 유림들을 배출시켰으며, 하서 김인후, 석천 임억령, 미안 유희춘 등의 쟁쟁한 학자 문인 등과 교우하며 길러냈던 산실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은 모르겠지만 김인후(金麟厚)는 낯설지가 않아서 찾아보니 예전에 2015년에 장성에 있는 박수량(朴守良)의 백비(白碑)를 찾아갔을 적에 묘비명을 지은 사람으로 인연이 닿았던 모양이다. 그런가 하면, 2016년에 제자들과 찾았던 담양 소쇄원(瀟灑園)에서도 김인후를 만났구나.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임억령(林億齡)과 기대승(奇大升)도 만났으니까 임억령도 초면은 아닌 것으로 쳐도 되겠다. 호남의 인물들로 화순 장성, 담양을 주름잡았던 것으로 봐도 되지 싶다. 지나는 길에 이름 한 번 적어 놓는 곳도 인연이 되는 것은 당연하구나. 

 

산두(山斗)라는 이름은 모친의 꿈에 북두칠성의 광채가 백운산으로 내렸다고 해서 백운산의 산(山)과 북두칠성의 두(斗)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이렇게 멋진 태몽을 꾸고 태어났건만 세상의 환경이 돕지 않으니 조광조 등과 큰 뜻을 펼치고자 하였건만 결국은 크게 펴지도 못하고 유배생활로 많은 세월을 보내다가 5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니 안타까움이 들기도 한다. 유배가 50세에 풀렸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까 이미 마음에는 나비의 꿈이나 꾸면서 자유롭게 지내고자 하는 세월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고향인 광양에 있다고 하니 또 언제 광양에 가는 길이 되면 인연을 다시 이어가지 싶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김삿갓 선생도 적벽에서 생을 마감하고, 최산두 선생도 적벽에서 삶을 마감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겠구나. 살아서 들어와 죽어서 나가니 과연 적벽이 절경이기는 했던 모양이다.

 


외삼문의 편액에는 건공문(虔恭門)이라는 글이 쓰였다.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 있구나.

 


글을 쓴 사람은 제자인 박종범(朴鍾凡) 선생이다. 후학이라고 한 것으로 봐서 그렇게 짐작해도 되지 싶다. 다행히 문은 걸개로 걸어 놔서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있겠다.

 


전면에 재실이 있고 좌우로 건물이 있다. 우선 재실부터 가봐야지.

 

 

도원서원묘정비구나. 서원을 나타내는 의미로 묘정비(廟庭碑)라고도 한다는 것은 이로 인해서 또 하나 배운다.

 

 

 


 

 

 

 

 


 

 

 

 

 

언젠가 누군가 혹시라도 필요할 수도 있을지 몰라서 4면을 모두 사진으로나마 담았다. 읽어보기에는 쉽지 않아 보여서 나중으로 미루는 것으로 해야 할 모양이다. ㅎㅎ

 

세월이 흘러서 글자는 희미하게 사라지고 흰 판만 남았으니 이것도 백비라고 해도 되려나 모르겠군. 보수가 되지 않았다고 해야 할 모양이지만 여기까지 손길이 미치려면 세월이 더 많이 흘러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짐짓 든다.

 

내삼문의 편액은 규일문(揆一門)이라..... 여기에도 무슨 뜻이 있지 싶어서 찾아보니 척도(尺度)나 표준)標準), 통일(統一), 일치(一致)의 뜻이구나. 그러니까 신재 선생은 시종일관 자신의 기준을 지켜서 일관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기리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글씨는 박종범 선생이 썼으니 같은 사람의 것으로 보면 되겠다. 이 문은 잠겨있구나. 열리지 않으면 옆으로 가서 넘겨다 보면 된다.

 

 

 문이 잠겨 있으니 위패를 뵙고 절을 할 인연은 닿지 않은 것으로 하고 담장 밖에서 합장배례로 인사를 드렸다.

 


도원사(道源祠)구나. 도(道)의 근원(根源)을 밝히고자 노력한 고인의 흔적으로 이해하면 되지 싶다. 

 

 뒤돌아서 전경도 한 번 살펴보고....

 

입구에서 봐서 오른쪽은 숭의재(崇義齋)구나.

 

서체가 왠지 플라스틱같은 느낌이 나는 것은 왜일까? 비백이 안 보여서인가?

 

 

맞은편의 건물도 5칸이구나.

 

여기는 도원서원이다. 이름은 잘 안 보이지만 안중동(安重東)으로 읽으면 되지 않을까 싶다.

 


가을걷이를 하고 있던 노인이 바삐 움직이는 낭월을 지그시 바라본다. 아마도 뭔 볼꺼리가 있다고 이런 산꼴짝까지 쑤시고 돌아다니는가 싶은 생각인 걸로 대충 읽었다. 이렇게 해서 점심을 먹기 전에 예정했던 곳의 하나를 둘러 볼 수가 있어서 자료창고가 빵빵해진 느낌이 든다. 최산두에 대한 나머지 자료는 광양에 갈 일이 생기면 또 살펴보는 것으로 하고 이 편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