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안면도 삼봉 태안층

작성일
2023-10-08 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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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안면도 삼봉 태안층(泰安層)

 

(2023년 10월 1일 탐방) (음력 8월 17일 8물 조수 최대)

 


갑자기 안면도 일정이 잡혔다. 연지님의 동생 부부들이 간월도에 차박을 하고 있으니 놀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서 가보자는 말에 긴급 동의했다. 이런 경우를 두고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한다던가? 물때가 기가 막혀서 그냥 흘려 보내기가 너무도 아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간월도를 가자고 하니 이렇게 일이 되어가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아도 삼봉과 할매바위를 둘러보고 싶던 차에 잘 되었다 싶어서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오늘 백사장항의 간조는 11시 18분이다. 그러니까 늦어도 10시에만 삼봉에 도착한다면 꽃지와 쌀썩은여까지는 둘러볼 수가 있겠고, 여유가 되면 고남의 해안노두까지 둘러볼 수가 있겠다는 넉넉한 일정을 세워놓았다. 조류세기가 최대라는 표시는 어제(9월 30일)와 동일하다. 어제는 변산반도(邊山半島)를 누비고 다녔는데 오늘은 태안반도(泰安半島)로구나. 여하튼 잘 따라다녀 주는 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다만 하늘이 너무 맑은 것이 조금은 아쉬운 것은 아무래도 구름이 있는 것이 노두탐사에는 훨씬 좋기 때문이지만 그래도 주어진 만큼만 즐기면 되는 것이니까. ㅎㅎ

 


7시에 출발하면 대략 9시에는 간월도에 도착할 것이라는 예정을 하고 달렸다. 당진공주 고속도로를 가는데 아침 안개가 분위기를 돋군다. 운전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어서 다행이다. 예전에는 운해(雲海)를 찍겠다고 꼭두새벽에 공주의 연미산도 올라가고 천안의 흑성산도 올라갔는데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졸업을 했다. 뭐든 겪어 보면 졸업이 된다. 그때는 운해의 시간이었고, 지금은 노두의 시간이니까.

 


간월도에 도착해서 맛있는 아침을 얻어먹었다. 낚시로 잡았다는 민어와 조기를 튀기고 어젯밤에 해루질로 잡은 박하지와 소라들을 삶아서 푸짐하게 먹고는 9시 반에 출발해야 한다고 미리 언급을 해 뒀기 때문에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새로 만든 4차선의 다리를 피해서 일부러 옛날에 건설한 첫 연육교를 건너고 싶었다. 아마 이 다리는 1970년대 초에 개통했을 다리다. 당시 백사장을 통해서 육지 나들이를 하면서 다리가 완성되기만을 바랬던 그 다리인데 이제는 더 넓은 4차선의 다리가 놓여서 기념품으로만 남게 된 그 다리를 오랜만에 건너 봤다.

 


조류가 급해서 공사에 어려움이 많았고, 급기야 둑을 막아서 그 속을 파고 기둥을 세우는 공사를 하는 바람에 시간이 더 오래 걸렸는데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개통을 한 안면연육교다. 예전에는 안면곶(安眠串)이었던 그야말로 반도(半島)였는데, 조선 인조(仁祖:1623~1649)때 세곡선의 안전운반을 위해서 운하로 만든 것을 대략 300여 년만에 다시 연결시켜놓은 셈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안면도쪽 이름이 판목이고 한자로는 굴항(掘項)이다. 목을 팠다는 이야기이고 이 공사를 하기 이전에는 굴포운하(掘浦運河)를 만들다가 포기하고 대안으로 굴항운하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래의 세곡운반선이 운항하던 뱃길은 풍랑으로 인해서 많은 곡물이 바다에 빠지게 되었더란다. 그래서 오죽하면 세곡선이 가라앉아서 쌀들이 썩은 곳의 이름이 쌀썩은여겠느냔 말이지.

 


안면도 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다만 이상한 것은 여(礖)는 바다에 있어야 하는데 지명이 되었다는 것이긴 하지만 의미가 중요하니까 그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여하튼 오늘 시간이 되면 여기까지 가보는 것으로 하고.

 


태안과 서산의 경계선이 된 곳을 파서 운하로 만들면 풍랑으로 잃은 많은 곡식들을 안전하게 한양까지 운반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은 해볼 수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공사를 했다는데 오랜 세월을 두고 했으나 실패했다고 전한다. 당시의 기술만으로 탓을 하기에는 사람들이 공사를 할 마음이 없었다는 풀이도 있는데 아마도 지맥(地脈)을 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해석도 그럴싸~하다. 그런데 선원들이 쌀을 빼돌리고는 풍랑에 가라앉았다고 하고 고의로 빠트렸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안비밀인 걸로. ㅋㅋ

 


여차저차해서 섬이 되었던 안면도는 다시 육지와 이어지게 되었고 그 다리여서 낭월도 특별히 마음에 남다른 느낌이 있다. 그건그렇고. 

 


백사장길로 들어서면 해안관광로가 나온다. 그리고 이내 삼봉해수욕장이다.

 


썰물놀이에 빠진 사람들이 한가득이다. 그것도 참 재미있지. 돌을 하나 살며시 뒤집으면 박하지 한 마리가 집게발을 치켜들고 파닥거리는 맛이야 왜 몰라. 다만 지금은 관심이 없을 따름이다. 어려서 많이 해 본 일이기도 했지만 삼봉을 둘러보고 싶었던 내면에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도 한몫을 했으려니 싶기도 하다.

 


그래서 말이다..... 노두탐사에는 햇살이 전혀 반갑지 않은 이유가 이런 점으로 인해서다. 명암대비가 너무 커서 제대로 바위를 보는데 장애물이 되는 까닭이다. 물론 라이트룸의 신세를 최대한 진다고는 해도 그래도 자연적으로 형태가 보이는 것만이야 하겠느냔 말이지. 그래도 어쩔 수는 없다.

 


 

 

 


어차피 사진은 사진일 뿐 실물은 아니니까 너무 안타까워할 필요도 없다. 사진이 있다고 해서 다시 찾아가지 않을 것도 아니고 사진은 하나의 안내이고 기억 소환용의 코드일 뿐이니까. 이렇게라도 생각하고 나면 그래도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그래, 태안층(泰安層)이구나. 태안에 와서 태안층을 보니 제대로네. 별다른 특색이 없는 노두가 태안층인 걸로 정리했다. 특히 암석들이 잘잘하게 부서져 있는 것도 특색인 모양이다. 온전히 큰 암석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생긴 고생꽃이려니 한다.

 


상봉? 삼봉의 오타겠지? 어디에서 만든 지도기에 지명조차도 교정이 안 된 것인지 모르겠군. 

 


그래 바로 그 지질층이구나. 메추리섬에서부터 익숙한 태안층이다. 원래는 선캄브리아 시대라고 했었다는데 근래에 다시 연대를 측정해 본 결과 그보다는 좀 늦은 시기인 고생대(古生代)라는 것이 밝혀 졌더란다. 아무튼 연두색의 바탕에 있는 갈색 점은 암석들이 부서져서 잘잘하게 되어있다는 뜻이려니 싶다. 자세히 보면 그냥 점이 아니라 동그라미 네모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형태를 파쇄대(破碎帶)라고 하는가 싶다. 한자를 임의대로 적어본다. 그러니까 어제 봤던 적벽강과 채석강의 풍경을 생각해 보면 참 볼품이 없는 태안층이라고나 할까? ㅎㅎ

 


혹시라도 메추리섬의 지질도에서도 태안층을 고생대라고 하는가 싶어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선캄브리아 시대로 되어 있다. 같은 지층인데 시대는 다를 수도 있고, 태안은 고쳤지만 그 외의 지역은 그대로 뒀을 수도 있지 싶기도 하다. 여하튼 지도는 참고자료일 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니까. 선캄브리아 시대나 고생대나 실은 이웃에 있으니까 그리 큰 차이는 아니라고 봐도 되지 싶기는 하다.

 

태안층이라고만 하고 구체적인 암상(巖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서 다른 곳에서 찾아본다. 사암(沙巖) 이질암(泥質巖)이 뒤섞인 퇴적암(堆積巖)의 구조로 선상지환경(扇狀地環境)의 저탁암(底濁巖)이라고 되어 있는데 한자는 대략 알고 있는 선에서 적당히 찾아서 넣었다. 그래 이 정도는 해 놔야 대략 무슨 암석인지 짐작이라고 한단 말이지. 적어도 퇴적암이라는 것을 알겠구나. 저탁암은 십리포노두에서도 봤던 이름인데 선상지(扇狀地)는 처음 보는 용어라서 또 찾아본다. 해저협곡의 부채골 모양으로 생긴 것을 말한단다. 그러니까 태안층은 깊은 바다의 퇴적암인 걸로.

 


삼봉의 북쪽 해안에는 두 개의 바위가 노출되어 있구나. 이제 이러한 것을 보면 저절로 시스택이라고 생각이 난다. 자꾸 보다가 보면 또 기억에 각인이 되기도 한다. 이것을 학습효과라고 해야 하겠거니. 

 


안면도를 생각하면 두 개의 바위가 있는 풍경이 떠오른다. 꽃지해수욕장에 있는 할매바위 할배바위가 그것이다. 삼봉에서도 묘하게 두 개의 바위가 백사장항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신기하다. 물론 크기로 본다면 아기들이지만 세월로 본다면 동갑네들일게다. 안면도의 암석들은 대부분이 태안층이니까 그렇게 봐도 되지 싶다.

 


 

 

 


 

 

 


낭월이 열심히 바위들을 찍고 있어서였는지 무심고 산책하던 두 여인도 바위를 향해서 폰을 들고 사진을 찍는다. 아마도 그 사진에도 낭월이 찍혔지 싶다. 그러니까 사진의 교류가 말없이 진행되었다고 봐도 되지 싶다.

 


 

 

 


 

 

 

 

 

 

 


 

 

 


 

 

 


보정을 하다가 보면 약간의 색깔은 변화할 수도 있지만 형태는 그대로다. 색이야 하늘 사정에 따라서도 달라지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는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서도 달라 보이는 것이기도 하니까 형태에 대해서만 비중을 두면 좋을 게다. 그래도 실제의 느낌을 살려보려고 가능하면 최대한 그 풍경에서 봤던 방향으로 노력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사진은 사진일 뿐 실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전형적인 태안층이고 모진 풍파를 온몸으로 견디면서 갈라지고 깨지고 부서지고 그렇게 살아남은 파쇄암을 바라보는 낭월의 기억에 떠오르는 그 시절(1967년무렵)에 미역감고 노느라고 맨발로 해변을 오갈적에 이 날카로운 돌바닥으로 인해서 자동으로 발바닥마사지를 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바위벽을 보면서 50년 전으로 달려가는 기억의 조각이라니. 아무래도 시간은 공간을 간섭하지 못하는가 싶기도 하다.

 


 

 

 


 

 

 


태안층의 모습이 하도 짙은 갈색으로 보이는 풍경이 우중충해서인지 바위틈사이에 보이는 색다른 풍경에 눈길이 간다. 좀 부서지기는 했어도 주변의 풍경과는 많이 달리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파도에 씻긴 모습이 반갑다.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보랏빛의 암벽도 곱구나. 어쩌면 속살을 보는 듯하다. 그러니까 풍화작용(風化作用)과 자외선을 많이 받지 않아서 이런 풍경도 보여주는 것이 반갑다.

 


 

 

 


 

 

 


암석의 지층이 세로로 분리된 것은 단층작용의 영향일까? 아마도 그렇겠지? 

 


노두를 온전히 드러내고 있는 삼봉의 풍경은 처음 봤지 싶다. 채석강이나 적벽강에서도 그랬듯이 노두를 전체로 볼 수가 있으면 뭔가 전부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지. 

 


 

 

 

삼봉의 명물은 용굴(龍窟)이다. 용굴의 입구에서 두 여인을 봤다. 먼저 용굴로 향하는 것으로 봐서 해루질을 마치고 허리장화를 갈아입으려고 은신처를 찾는 것으로 보여서 잠시 머뭇거렸다. 어쩌면 민망한 장면과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퍼뜩 들었다. 바다를 누비고 다니다 보면 소변이 머렵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남녀가 유별한 것은 여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는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여인들이 환복하고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변을 서성인다. 

  


해안을 돌아가면서 살펴보는 암벽에도 비스듬하게 암벽에 기대고 있는 바위의 지층들이 닮은 꼴로 있는 것도 재미있다. 예전에 어느 영상에서 본 고구려의 장수왕릉에 기대어 있는 바위들이 떠오른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석벽이 무너지지 말라고 세워 놨는가 싶은데 그 용도인지는 모르겠고 삼봉의 바위를 보면서 장수왕릉까지 소환한다는 호들갑이다. ㅎㅎ

 


바위는 파도에 깎여나가기 마련이다. 이것을 해식(海蝕)이라고 하니 그 뜻은 '바다가 좀 먹었다'는 의미이다. 식(蝕)이 좀먹을 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장롱에 넣어 놓은 옷을 좀벌레가 파먹듯이 해안의 암벽은 파도가 들락이면서 좀 먹어었다는 표현이다. 그렇게 깎아서 없어진 것은 파식대(波蝕帶)라고 하는구나.

 


봐하니 여기도 원래는 암벽들이 우뚝하게 솟아있었겠거니, 오는 파도도 때리고 가는 파도에게도 맞으면서 5억여 년을 부대끼다 보니 이렇게 바닥만 남았구나. 적벽강의 바닥에 비하면 볼품은 없지만, 그래도 삼봉의 바닥은 삼봉답다. 저마다 생긴 것이 달라야 재미있지 가는 곳마다 모두가 적벽강의 파식대와 같다면 그건 또 무슨 재미겠냔 말이지. 조각조각 부서져서 다시 바위로 응결된 모습이 과연 삼봉노두의 태안층이다. (용굴로 들어가신 두 분은 아직도 안 나오시는구나..... ㅎㅎ)

 


불과 5분이 다섯 시간처럼 길었다. 왜냐하면 삼봉은 오늘 일정에서 겨우 시작이고 밀물이 들어차기 전에 가야 할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덜 끝났느냐고 소리를 쳐 볼 수도 없지 않으냔 말이지. 또 떠오르는 생각 '매화틀은 아직도 덜 완성되었느냐~!'는 왕의 성화다. ㅎㅎ

 


드디어! 용굴을 차지했다. 용굴은 판목과 연결된 고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앞서 판목에 대해서 설명한 이유도 용굴을 생각해서다. 판목의 운하를 개통하려고 파내려 가는데 암벽에서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더라는 이야기는 아마도 야담(野談)이겠거니 싶긴 하다. 근거는 없지만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거짓말은 근거를 만들어야 그럴싸 해진다. 그리고 그 실물이 여기 삼봉의 용굴을 슬쩍 등에 업고서 고사와 현실이 연결되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이 된다.

 


판목에 붉은 피가 허공으로 흩뿌려지는 순간에 삼봉에서 청룡이 뛰쳐 나와서 하늘을 향해 크게 울부짖고는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창기국민학고 3학년때 봄소풍으로 왔던 첫 삼봉의 나들이에서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리고 얼마나 순진한 낭월이었던지 그 말을 믿기도 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정도였을 수는 있겠지만 여하튼 삼봉의 전설은 그렇게 선생에서 학생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여하튼 창기국민학교에서는 항상 봄소풍은 고정적으로 삼봉이었다.

 


 

 

 


 

 

 


 

 

 


 

 

 


 

 

 


 

 

 


동굴 바닥에는 고운 모래가 깔려 있어서 한숨 자도 되겠다. 물론 물이 들어오게 되면 도망갈 곳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삼봉의 동굴은 해식동굴(海蝕洞窟)이다. 바닷가의 암벽이 사라지는 과정은 해식와(海蝕窪)→해식동굴→시스택→파식대(波蝕帶)로 이어지는 과정의 반복이라고 보면 되겠다. 동굴이 옆으로 뚫리면 아치가 추가되겠는데 삼봉은 정면으로 뚫려 있어서 아치를 보려면 세월이 무척 많이 흘러야 하지 싶다.  

 


엇? 응회암? 퇴적암의 역암질(礫巖質)이 보이는데? 이것은 여기에서도 화산이 폭발했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냥 물에 의해서 퇴적이 되었을 수도 있을텐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지층이 안 보이네. 그러고 보니까 황도의 지질이 응회암으로 되어 있는 것을 봐서는 당연히 그 화산재가 삼봉에도 날아와서 쌓였을 가능성이 있을 테니까 이래저래 엮으면 이해가 되기도 하는 장면이다.

 


 

 

 


 

 

 


 

 

 


흔치 않은 관입한 암맥이 수직으로 되어 있는 것도 보인다. 색이 흰 것으로 봐서 석영암맥이겠거니 싶다. 반짝이지 않으면 장석(長石)이라고 했는데? 장석이냐 석영이냐는 아직 명확하게 모르겠구나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세월이 흐른 다음에 마그마가 끓어오르다가 갈라진 틈을 비집고 솟아오른 흔적일 게다.

 


단층은 부정합으로 보인다. 위와 아래의 암석의 사이에는 또 많은 세월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럭저럭 약간의 바위 공부가 쌓이긴 한 모양인가? ㅋㅋ

 


 

 

 


 

 

 


 

 

 


삼봉의 볼만한 노두는 용굴의 주변이다. 무슨 사연이 그 안에 깃들어 있는지, 무슨 암석으로 되어 있는지는 잘 몰라도 변화가 많았고 사연도 많았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기에는 어렵지 않은 모습들을 보면서 삼봉의 끝에 서서 전경을 바라본다.

 


사진만 본다면 하나의 바위가 서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삼봉의 남과 북을 나누는 모퉁이라고 하면 되겠다.

 


햇살을 정면으로 받은 삼봉의 풍경은 이렇게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으로 삼봉해수욕장을 끼고 암벽을 따라서 이동하면 이내 입구에 다다른다. 암벽위의 무덤은 삼봉의 랜드마크다. 물론 낭월의 관점이다. ㅎㅎ

 


 

 

 


그 시절 여름에 해변에서 돌다가 헐출하면 모래언덕에 지천으로 달려있는 해당화 열매인 깽마람을 따서 껍질을 벗겨먹으며 추위를 녹이던 기억은 몰이 고인 곳에서 작은 물고기가 돌아다니는 것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면서 떠오른다. 

 

 


다시 봐도 참 묘하게 생겼다. 이렇게 세로로 서있는 바위들이라니 격변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예전에는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곳인데 다시 보니 또 새로운 것이 보인다.

 


풍수를 공부할 적에는 암벽 위의 무덤에 관심을 가졌는데 

 


2019년 가을에 들렸던 삼봉이다. 그 시절에는 암석에 대한 공부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시절이었던지라 이렇게 기묘한 곳에 자리잡은 음택에 대해서 살펴봤던 것인데 이번의 나들이는 또 다른 관점이었다는 것이 두드러진다.

 


위의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나들이에서는 위는 올라가 보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지만 관심이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 간 까닭일 게다.

 


 

 

 


 

 

 


 

 

 


 

 

 


이것은 건열구조로 볼까?

 


그런 것도 같고 안 그런 것도 같고..... 잘 모르겠다. ㅎㅎ

 


이제 삼봉을 한 바퀴 돌았으니 그만 다음 목적지로 향해도 되겠다. 

 


뒤다라 오던 연지님이 관심을 보이고 말을 건네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 봤다.

 


연지 : 그건 뭐하는 기계예요?

남자 : 금속탐지기입니다.

연지 : 아, 금을 찾는 것인가요?

남자 : 예 금도 있으면 찾아 줍니다.

연지 : 와~! 신기하네요.

 

낭월은 안다. 그것이 금속탐지기인 줄을. 예전에 그것도 하나 사볼까 싶어서 알아봤었기 때문이다.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까지 다양한 가격이 있는데 비싼 것일 수록 더 잘 찾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것을 들고 여기에 나타났을까? 아마도 여름 내내 해수욕을 하면서 빠트린 반지나 목걸이 등을 찾으러 온 것일까? 이것도 기발한 생각인 걸. 해수욕장이 폐장하고 나면 또 이삭을 줍는 사람들이 바빠진다는 것을 보니까 그것도 한 철의 사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낭월 : 우리도 저거 하나 살까?

연지 : 얼마나 하는 건지 알아?

낭월 : 대략 300만원 정도 주면 좋은 것을 사지.

연지 : 그것도 비싸구나.

낭월 : 뭘, 열 돈 짜리 목걸이 하나만 찾으면 본전이 빠지는데.

연지 : 아서요. 호호호

낭월 : 내가 돌을 보러 다닐 적에 당신은 저걸 들고 모래사장을 다녀.

연지 : 그것도 괜찮겠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