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6) 태백산 정암사

작성일
2016-08-06 11:18
조회
1893

강원도(6) 태백산(太白山) 정암사(淨岩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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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랜드에서 혹시라도 오염된 것이 있으면 깨끗한 바위에서 정화를 시켜야 한다. 그래서 바로 옆에 정암사가 있는 건가? ㅋㅋㅋ

정암사지도 9키로

20여리만 이동하면 깨끗한 바위 절이다. 절 이름도 참 묘하다. 깨끗한 물이던지 묘한 바위던지 하지 않고서 깨끗한 바위라니.... 이건 또 무슨 의미가 깃들어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정암사 입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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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뭐 한글이라고 해서 안 될 것은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표시에는 한자로 해도 좋을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슬쩍 스쳐간다. 그래도 태백산이 아닌 것을 태백산이라고 써야 하려니 그건 내키지 않으셨던갑구나. 그냥 적멸보궁이라고만 쓴 것으로 봐서.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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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라, 일주문에는 그냥 태백산이라고 척 하니 써 놓은 것을.... 왜 거짓 이름을 사용했을까? 그러고 싶었을까?

태백산지도

아무리 봐도 함백산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할 것인데 구태여 저~ 멀리 떨어진 태백산의 이름을 끌어다가 붙였느냐는 생각을 해 본 것이다. 혹시 또 사재산처럼 거슬리는 것이라도 있어서 궂이 태백산을 썼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자료를 찾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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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변사인방안지도(삼척)』의 함백산(대박산) 일대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과 정선군 고한읍 경계에 위치한 산이다(고도:1,573m).

황지의 진산()이다. 『척주지』에 "대박산 서쪽은 정암() 육천인데,

육천의 물은 영월에 이르러 큰 강에 흘러들어 간다.

대박산은 태백산 동쪽에 있는데,

아래 위로 본적() • 심적() • 묘적() • 은적() 등의 암자가 있다.

대박산에는 만생백()과 오엽송()이 많이 자란다.

대박산 동쪽은 황지이고, 황지 동쪽에는 연화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서 대박산의 위치는 물론 그것이 지금의 함백산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 척주부에 "근대봉 남쪽에 상함백산(지금의 은대봉)

• 중함백산(본적산) • 하함백산(지금의 함백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

함백산은 세 산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유사』에 "자장법사는 처음 오대산에 이르러 진신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을 짓고 살았으나 7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으로 가서 정암사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묘범산은 함백산을 지칭한다.

이러한 고문헌을 통해서 산 이름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태백의 지명유래』에 의하면 묘범산은 묘고산()과 같은 말로

대산()이자 신산()이며 세계의 중심이 되는 산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대박산이 '크게 밝은 산'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도 대박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지형도』에는 함백산이라고 적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함백산 [咸白山, Hambaeksan]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12., 국토지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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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태백산이라고 할만한 이유는 있었구먼. 대박산은 태백산과도 어원이 통한다고 봐서 생떼를 쓴다고 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을 이해는 하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이면 함백산이 더 크잖여? 함백(咸白)은 태백도 다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까지 있으니깐 말이지. 여하튼 백(白)은 왜들 그렇게 좋아했댜......

묘범산이라고 했던 명칭이 묘고산으로도 불렸던 것을 보면 자장율사의 역사는 오래도 된 인연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법흥사에서 본 자장율사를 여기에서도 보게 되는 구나. 하긴.... 부처님 사리를 모신 곳이니 당연히 그렇겠지만서도.

내친 김에 자장율사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까?

http://uriul.or.kr/board/15337

위의 링크에서 만난 자장율사에 대한 내용인데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퍼다가 붙여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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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무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 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 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 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 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 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 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 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 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 일 1, 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가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여 왕은 자장의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만에 귀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 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 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위해서였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 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 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 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1 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갈磨私記)>1 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1권, <관행법(觀行法)>1권 등이 있다. 

♤ 자장율사와 여러 가지 이야기

    ▷ 자장율사와 통도사

신라 때 자장율사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이 스님은 당나라에 건너가 수도를 하고 부처의 숭고한 가르침을 세상에 널리 전파하고자 부처의 가사와 사리를 받들고 신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문수보살께 절을 세우기에 적당한 곳을 물었다. 그랬더니 어느날 밤 꿈에 훌륭하게 차려 입은 동자가 나타나서 부처님 모실 곳을 일러 주었다. 
"동국에 부처를 모시도록 하라"
자장율사는 동국이 신라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하나 넓은 신라의 어느곳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나무로 오리를 만들어 동쪽으로 날려 보냈더니 얼마 후 오리는 한 송이 칡꽃을 물고 돌아왔다.
때 마침 엄동설한이어서 산과 들에는 흰눈이 쌓였는데 꽃이 핀 곳이 어디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절을 세우라는 것이 부처님의 뜻임을 깨닫고 흰 눈이 쌓여 있는 한 겨울에 칡꽃을 찾아 나섰다. 몇 일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양산읍에서 좀 더 들어가는 영취산에 이르러 보니 큰 못이 있었는데 그 못 주변에 신기하게도 두 송이의 칡꽃이 피어 있었다.

자장율사가 인근의 경치를 살펴보니 송림이 울창하고 산봉우리들이 열을 지어 둘러쳐져 있으며 검푸른 못물은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는 듯 했다. 율사는 세상에서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은 다시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곳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유명한 통도사였다.


    ▷ 법흥사(法興寺)

요선정이 있는 곳에서 북쪽으로 약10km정도 떨어진 법흥리 사자산 기슭에는 법흥사라는 사찰이 있다. 
처음에는 사자산사라 불리던 곳이었으나, 1939년 중수 시에 사자산적멸보궁이라 개칭되었다. 사찰로 들어가는 오솔길의 소나무숲이 장관이고 사찰 앞에 줄줄이 이어진 아기자기한 아홉개의 봉우리(구봉대) 역시 일품인 곳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영월의 법흥사가 유명한 것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의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오대산 중대, 설악산 봉정암, 정선 정암사와 이곳 영월의 법흥사다. 

신라 진덕왕 647년경 자장율사에 의해 창간된 법흥사에는 자장이 643년 당나라 청량사에서 가지고 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 진신사리를 모신 국내의 모든 절들이 그렇듯이 이곳 법흥사 역시 불상이 없다. 신라말 징효대사 때 가장 번창했던 법흥사에는 고려초에 건립한 징효대사 보안탑비와 적멸보궁 진신사리탑이 있으며 사리탑 옆에는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이 남아 있다.

    ▷ 원효성사의 열반지 분황사(芬皇寺)

《삼국유사》 속에 나오는 가람(伽藍)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가람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佛國寺) 말사(末寺)인 분황사(芬皇寺)이다.
분황사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321번지에 위치하며 황룡사지(黃龍寺止)의 북쪽 약 40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아도전(阿道傳)에  의하면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인 분황사의 위치는 사찰이 세워지기 이전부터 주목받는 곳이었다.
분황사의 창건은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권 제5 신라본기(新羅本紀) 제5 선덕왕조(善德王條)를 보자면  다음과 같다. 선덕여왕  3년인 춘(春) 정월(正月) 634년에  자장 율사(慈藏律師)를 모시기  위해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하였으며, 여기서 용궁이란 황룡사(皇龍寺) 북쪽의 습지대가 원래는 연못이었고, 이 연못을 용궁(龍宮)이라 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있다.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제5 자장정률조(慈藏定律條)편을 보면 당(唐)에서 돌아온 자장 율사를 분황사에 머물게 하였고, 자장 율사는 이곳에서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상징인 황룡사 9층탑이 건립되는 것을 보았으며, 또한 지금의 국보 제30호인 모전석탑을 건립하였다. 이때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앞두고 있던 시기로 중앙 집권적 귀족국가의 역량에 힘입어 많은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는데, 특히 신라에 있어서 분황사는 황룡사와 더불어 용궁을  기점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었으며,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곳으로 여겨진다.
또한 분황사는 원효성사(元曉聖師)와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으로서 원효성사는 당(唐)나라로 의상(義湘) 스님과 함께 구법(求法)의 길을 가는 도중인 문무왕(文武王) 1년(661)에 당황성까지 갔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친 바가 있어, 당나라로 갈 것을 포기하고 그 뒤 자장 율사 이후 분황사에 주석하면서 통불교(通佛敎, 元曉宗·海東宗·芬皇宗이라고 한다)를 제창하고 99부 240여 권에 달하는 많은 저술과 강설(講說)로 불법(佛法)을 폈다. 《삼국유사》 제4권 의해(義解) 원효불기(元曉不기) 편을 보면, 원효성사는 분황사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   經)》 《화엄경소(華嚴經蔬)》를 지었으며, 《화엄경소》 제4권 십회향품(十回向品)에 이르러 절필(絶筆)하였다 한다. 이것은 이론적 저술에서 화엄회향(華嚴回向)의 실천을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원효성사는 불교사상을 통합시키고 분황사를  중심으로 정토교(淨土敎)를 제창하고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원효성사는 신라 제31대 신문왕(神文王)  6년(636) 3월 30일에 세수 70세로 분황사에서 입적한다. 원효성사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 설총이 유해(遺骸)를 갈아서 생전의 모습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奉安)하고 죽
을 때까지 경도하였다는데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던가, 언젠가는 설총이 절을 하니 동상(銅像)이 홀연히 돌아보아서 `고상(顧像)'이라고 불리었다 한다.

    ▷ 자장율사의 열반지 적멸보궁 정암사

삼국유사 속의 가람인 정암사(淨岩寺)로 향한다. 차창 밖으로 폐광지와 그 속에서 붉게 자리잡고 있는 교회 건물들을 바라보며 한때 탄을 캐던 사람들의 애환과 삶의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폐허가 된 폐광지를 지나오면 마치 험난한 중생계의 고통스러운 삶에서 극락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듯한 착각이 드는 정암사 길목에서 어느새 저녁 노을과 함께 공양을 알리는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자장 율사(慈藏律師)의 열반지인 정암사는 또한 부처님의 영원한 열반을 상징하는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기도 하다. 적멸보궁에 모셔진 사리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신라 진흥왕(眞興王) 10년(549)이었는데 사리신앙(舍利信仰)과 불교 발전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은 자장 율사였다. 
《삼국유사》제4권 의해(義解)편 자장정률(慈藏定律)을 보면 율사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진한(辰韓)의 진골(眞骨) 소판(3급 벼슬)인 김무림(金茂林)은 늙도록 아들이 없자 부인과 함께 삼보에 귀의하고 천부관음탱화(天部觀音撑畵)를 조성하여 발원하기를 `만일 아들을 낳으면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낳은 아들이  석존(釋尊)과 한날이라 선종랑(善宗郞)이라 하였으며, 양친을 일찍 여읜  선종랑은 출가하여  전원(全院)을 희사하여 원영사(元寧寺)를 세우고, 홀로 깊고  험한 곳에서 백골관(白骨觀)을 관(觀)하였다. 조정에서 자장 율사에게 벼슬을 내려도 "내 차라리 하루동안 계율(戒律)을 지키고 죽을지라도 백년 동안 계율을 어기며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자장 율사는 인평 3년(선덕왕 즉위 3년, 636)에 중국으로 건너갔다가 선덕왕(善德王) 12년에 귀국하여 나라의  최고 고문인 대국통(大國統)에 임명되었고, 불교교단의 기강(紀綱)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하였으며, 신라에서 자장 율사에게 계(戒)를 받은 이가 10명 중 9명이 되었다고 한다. 자장 율사는 중국에서 사리(舍利), 불경(佛經), 번당화개(幡幢花蓋) 등 많은 것을 가져왔는데, 이때 자장 율사에 의해 모셔진 사리는 경남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그리고 태백산 정암사이며, 이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이 가운데 자장 율사의 열반지(跡槃地)가 된 정암사(淨岩寺)는 자장 율사가 말년에 강릉군(지금의 명주)에  수다사(水多寺)를 세우고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어느 날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꿈에 본 이승(異僧)이 다시 나타나 "내일 대송정에서 그대를 만날 것이다" 하였다. 놀라서 일어난 자장 율사는 일찍 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감응하여  와서 "태백산 갈반지에서 다시 만나자" 하고는 자취를 감추었다. 자장 율사는 태백산 탑동에서 하룻밤 자고 사리(舍利)를 모시려 하자 하룻밤새 칡넝쿨이 세 갈래로 뻗어 와 있어 기이하게 여기고 칡넝쿨을 따라갔다. 그런데 그곳에 큰 구렁이가 나무 밑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율사는 "이곳이 바로 `갈반지'이다" 하며 갈래사(葛來寺, 지금의 정암사)를 세우니 지금도 인근 마을 주민들은 정암사를 갈래사라 부른다. 
율사는 그곳에서 대성(大聖)을 친견하기를 기다렸는데 이것이 정암사와 자장 율사와의 인연의 시작이며, 그리고 열반지(跡槃地)가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죽은 강아지를 망태기에 메고 거지 차림으로 온 대성문수보살(大聖文殊菩薩)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자장 율사는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만나지 않았다. 그러자 거지는 문수보살로 화(化)하여 말하기를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으리요?" 하면서 망태기를 뒤집자 강아지가 푸른 사자보좌로 변하였고, 문수보살은 그 보좌에 앉아 빛을 발하면서 사라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자장 율사는 급히 따라갔지만, 이미 문수보살은 사라진 뒤였다. 이에 율사는 몸을 던져 목숨을 마치니 이것은 유사(遺事)가 우리에게 자만심(自慢心)을 경계(境界)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하겠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4교구 월정사의 말사인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15번지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정암사(淨岩寺)는 본래는 함백산인데 태백산 줄기에 있다 하여 태백산 정암사라 한다. 정암사의 첫 관문인 일주문(一柱門)을 들어서면, 왼편으로는 육화정사(六和精舍), 오른편으로 낮은 담장을 꺾어 돌면 범종각(梵種閣)이 보이고, 계류 너머로 적멸보궁이 있다.
이렇게 정암사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수마노보탑과 천연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된 열목어 서식지로서  유명하다. 열목어는 실제 토종 고기가 아니며, 열목어가 천연기념물이 아닌 남방한계선이라는 서식지가 천연기념물이라 한다. 이 열목어는 북방계의 어종으로 한여름에도 수온이 섭씨 20도 이하를 유지하는 곳이 아니면 살지 못하고, 물이 얕으면서도 월동할 수 있는 깊은 소가 있어야  하며, 유속이 완만하고 바닥에 자갈이 깔리어 산란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조건으로 정암사 일대는 열목어 서식 요건을 아주 적절하게 갖춘 세계 최남단에 속한 곳이다.
수마노보탑은 보물 제410호로 지정되어 있고, 분황사 모전탑과 같은 양식으로 자장 율사가 당(唐)나라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龍王)에게 하사받은 돌로서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神力)으로 갈래산(葛來山)에 비장(秘藏)하여 두었다가 자장 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마노석으로 탑(塔)을 건조하였다 한다. 정암사 주지스님은 이 마노석은 준보석으로서 지구표면상에는 없는 돌로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바다가 육지로 되었을 때 지각변동으로 생긴 돌로 추정한다고 말씀하셨다. 세계에서 중국의 어느 한 지역에서만 나는 이  마노석은 바다 밑 3,000미터 이상 들어가야 있기 때문에 용왕이 자장 율사에게 마노석을 주었다는 설과 일치한다.
또한 수마노보탑은 물길에 따라 마노석을 반입하여 만든 탑이라 하여 `물 수(水)'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 탑은 전체 높이 9미터, 상륜 높이 1.7미터인 모전석탑으로 7층석탑인데, 적멸보궁 뒤쪽의 급경사진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마련하고 그 위에 모를 죽인 화강석으로 6단을 쌓아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다시 2단의 굄을 마련하여 탑신부를 받치게 하였다. 탑신을 이룬 모전석은 회록색을 띤 석회암의 재질을 가진 마노석으로 그 형태가 정제되고 수법이 정교하다. 정암사 수마노탑 안내문에는 고려시대의 양식이라고 되어 있는데, 문화재관리국에서 잘못 기술하여 이를 시정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한다. 
1972년에 수마노탑을 보수할 때 문화공보부(文化公報部)에서 탑 아래 암반 밑에서 사리함을 꺼냈는데 사리함 뚜껑을 여는 순간 방광(放光)하면서 오색찬란한 빛이 수마노탑에까지 비쳤다고 한다. 사리함 안에 있던 것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는데 자장 율사가 모시고 온 사리 100과, 패엽경, 부처님의 염주와 부처님 손가락뼈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수마노탑 밑으로 15미터쯤 내려오다가 오른쪽에서 마노석이 발견되었고, 수마노탑에서 법당 밑까지 인위적으로 굴이  뚫려 있다고 전해오는 속설도 있다. 이 수마노탑은 1995년도에 다시 해체 복원했는데 그때는 사리함을 열지 않았다 한다.
자장 율사는 수마노탑을 세우고 금탑과 은탑도 같이 세웠다 한다. 그러나 후세에 중생들의 욕심으로 신심(信心)이 약해진다고 숨겼다고 하는데, 그렇지만 지금도 기도(祈禱)를 열심히 한 사람에게는 금탑(金塔)과  은탑(銀塔)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정암사는 여느 사찰과는 다르게 `지심귀명례 불타야중 산갈반지, 금탑, 은탑, 수마노탑'이라고 예불(禮佛)한다. 
자장 율사가 사리를 수마노보탑에 봉안(奉安)하고 건립한 적멸보궁에는 선덕여왕(善德女王)이 하사(下賜)하였다는 금(金) 가사(袈裟)가 보관되어 있었으나 1975년 11월에 도난 당하였다. 그 금란가사는 많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마치 가는 금 철사 같은 것이 얽혀 있었다고 한다. 누런 봉투에 넣어 보궁(寶宮)에다가 보관해 놓은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는데, 도난당한 것은 아마도 관리 소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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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여지없이 자장율사와 정암사에 얽힌 이야기가 등장 하는 구나. 원래 낭월도 통도사 출신인지라 자장율사에 대해서는 특별한 인연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이제 그 흔적이 여기에서도 역력하게 남겨 있다는 것을 보면서 새삼 생전의 노력들의 가치를 떠올려 본다.

음.. 태어나신 날이 4월 초8일 이라구...? 그렇다면... 심심한데 자장스님 삼주(三柱)나 찾아볼까? 얼마나 기구한 팔자를 타고 나셨길래 그렇게 편안히 쉬지를 못하고 천하를 누비면서 공덕의 터전을 일구셨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서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대한 사주도 뽑을 수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셨다면 이미 벗님도 상당한 수준과 관심이라고 할만 하지 싶다. 여하튼 방법은 있다. 그래서 아는 만큼 활용할 수가 있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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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적에 써 먹으라고 만들어 놓은 만세력이 있으니 이름하여 『고대만년력(古代萬年曆)』이다. 이 만세력에는 기원전 2070년 부터 1864년까지 수록이 되어 있다. 그러니까 생일만 정확히 알 수 있으면 연월일의 간지를 뽑는 것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보자..... 590년 생이라고.... 그럼 경술생(庚戌生)이시구먼. 어떻게 아느냐고? 그야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깐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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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떡 하니 나와 있잖여~! 수문제개황십년(경술)이라고, 그러니까 알지 어떻게 알겠느냔 말이지. 그리고... 음력으로 4월 8일 이라고 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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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사월의 항목을 보면 월간지는 신사(辛巳)로구먼. 그러니까 그 달의 절기인 입하(立夏)라는 이야기인데..... 양력으로 환원해야 절기가 신사월인지 경진월인지를 구분할 수가 있단 말이지.....

음력 4월 1일은 양력으로 5월 10일이구먼. 그러니까 대략 5월 5일이 입하니까 10일이면 입하가 지났을 가능성이 거의 틀림 없겠네.... 그럼 월주는 신사월로 정하면 되겠고....

다음은 일진(日辰)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하게 육갑을 따지면 나오는 것이다. 1일이 무오(戊午)라니까 2일은 기미, 3일-경신, 4-신유, 5-임술, 6-계해, 7-갑자, 8-을축, 그러니까 590년 음력 4월 8일은 을축일이 되는 구먼. 이제 조합하면 되겠네.

○乙辛庚
○丑巳戌


보자.... 사월의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의 을목으로 태어나셨구나. 목마른 나무가 물이 한 방울도 없으니 출가하기를 잘 했다고 해도 되지 싶다. 금이 첩첩하니 어찌 세상에서 살아갈꼬...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에다가 움막을 치고 물 소리 들으면서 독경하고 참선하는 것이 최상의 운명이로다.

그려, 이 정도나 되니까 온 천지로 돌아다니셨구먼. 아마도 시주에 물이 있었기를 바래보는 것은 죽어서라도 이름이 길이길이 남아있는 것으로 봐서 시를 잘 타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는 까닭이다. 팔자도 참..... 도인도 팔자 영향을 받느냐고 물으실 벗님도 계시지 싶다. 이에 대한 답변은 간단하다.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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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에서 사설이 길었다. 그또한 여행기에서의 다반사라고 우길 참이다. 기왕이면 이런저런 자료들을 한 곳에 모아서 오뉴월에 강아지풀에다가 메뚜기 뒷목아지를 꿰듯이, 한 줄에 엮어 놓으면 오가면서 읽으시는 벗님도 참고가 되시겠지만, 게으른 낭월도 여행기를 핑계삼아서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니 일거양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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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니 참 유서가 깊은 고찰이라는 것을 절로 알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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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원치 않는 땡볕이다~~!!!

저 멀리 산 중턱에 탑이 보이는 구먼. 이럴 경우에는 240mm로 좌악~~ 땡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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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궁의 보탑인 수마노탑()이다. 수마노가 무슨 뜻인가 찾아보니 물에서 나온 마노석으로 쌓은 탑이란다. 왜 마노석이 물에서 나왔는가를 또 찾아보니 당나라에서 부처님 사리를 모시고 귀국할 적에 서해의 용왕이 탑을 쌓으라고 준 것이라고 한다. 여하튼 전설은 참으로 황당하지만 또 그럴싸 하기도 하다.

그러니까 문수보살은 사리를 주시고, 용왕님은 마노석을 주셨으니 구색이 척척 맞는다는 이야기인가? 여하튼 진실은 모르겠고, 그 당시에는 용왕님과 문수보살과 소통을 할 수 있는 대단한 자장율사였다는 것만 인정하면 될 일이므로 그 문제로 혈압을 올릴 생각은 전혀 없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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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이다. 「선불도량(選佛道場)」이다. 부처를 가려내는 수도장이라는 뜻이다. 원래 장(場)인데 절에서 도량이라고 할 적에는 량으로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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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도 선불도량이라고 붙어있는데 같은 글체인 것으로 봐서 바위에 있는 글자를 베껴다가 새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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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전을 짓는데 동참하라고 전시해 놨다. 그러니까 구리로 지붕을 덮는다는 이야기이다. 마침 그 옆에는 이미 외부가 완공된 건물이 동빛찬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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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 동으로 기와를 덮으면 세월이 흘러서 녹이 슬면 청록빛으로 변하여 멋지게 된다. 서양의 오랜 교회 지붕이 그런 빛을 띠고, 서울역의 지붕도 같은 의미일 것으로 짐작해 본다. 지금은 새 건물이라서 반짝반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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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궁의 탑에 대한 소개판은 입구에 세워뒀다. 지금은 읽어볼 시간은 없으므로 일단 사진 한 방으로 메모리에 저장했다가 나중에,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쓰면서 읽어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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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탑에 오르는 길은 적당하다. 무엇보다도 거리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아무리 폭염의 한 여름이라고 하더라도 나무 숲이 가려줘서 오를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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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0여 분 오르다 보면 장엄한 수마노탑이 나타난다. 폭염의 날씨에도 개의치 않고 열성적으로 보궁을 참배하러 계단을 오르는 불심들이 갸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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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구름도 두둥실 떠가는 풍경에 멋진 수마노탑이 우뚝하게 자리를 잡았다. 법흥사의 고색창연의 소박한 탑과는 큰 차이가 있음이다.

gss2016-07-30-001-17층의 탑에는 나무들이 자리를 잡고 이 더위에 녹음이 우거졌으니 이것을 사리탑의 기적이라고 우기면.... 안 되겠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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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석이 무엇이며, 수마노는 또 무엇인가 싶어서 야후를 뒤적여 봤다. 그런데 실상 마노와는 또 많이 달라 보이는 탑의 재료라서 과연 마노가 맞기는 한건가 싶기도 하다. 왜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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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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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보석 중에 하나인 마노라고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 그냥 벽돌처럼 다듬은 돌로 쌓은 탑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뭔가 진짜 마노가 왔다가 보고는 울고 가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든다. 그래서 수(水)가 붙어있다고? 뭐, 그렇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서도...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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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은 이미 달궈져서 불이 나게 생겼지만 신심이 돈독한 여인은 개의치 않고 넙죽 엎드려 3배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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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용궁으로 통할 것도 같다.

탑 모양이 왜 이러냐고 하신다면 어안렌즈의 장난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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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노 보탑에 절을 하던 남녀는 갑자기 하늘로 날아 올라가서 신선이 되었다나 뭐라나. 카메라를 바닥에 10초로 맞춰서 놨더니 이렇게 기발한 사진이 되었다. 그렇게 놀고 있는데 한 사내가 땀을 흘리며 올라오더니 3배를 하고는 폰을 내밀면서 사진을 눌러 달란다.

그러면서 새벽에 통도사를 참배하고 법흥사를 거쳐서 정암사에 온 것이란다. 그러니까 복중의 보궁순례인 셈이다. 다음 코스는 설악산 봉정암이란다. 자랑을 하는 것으로 봐서 그냥 기념사진을 찍으러 보궁을 찾아서 헐레벌떡이고 다니고 있음을 알겠다. 물론 순례길이라기 보다는 인증길이라고. 하자, 또한 자기 만족인 것을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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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님이시다. 현판에 태백산이라고 써 놓으면 이 자리에 계신 분은 태백산 산신님일까? 아마도 망설이셨지 싶다. 자신은 함백한 산신인데 문패를 태백산 산신님 오시오 라고 써 놨으니 들어오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머뭇거리는 모습.... 산신님 꼴이 말이 아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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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사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자장율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는 것은 당연하다. 앞의 자료를 봐서는 여기에서 마지막 삶을 보낸 것 같은데, 어떻게 자장율사 사리탑이나 부도가 없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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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오는 길에 계곡에서 흐르는 맑은 물을 만났다. 다람쥐가 뛰어 다녔지만 그 녀석을 잡아 보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어찌나 날래던지 맘대로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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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전에 들렸더니 자그마한 관음보살이 나그네를 반겨 준다. 인법당으로 꾸민 것으로 봐서 기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는 뜻이겠거니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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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멸궁이다. 수마노탑에 있는 부처님 사리로 인해서 여기에도 불상은 없고 대신에 자리만 고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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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보궁에서는 뒤에 창을 내어서 탑이 보이도록 한 것이 보통인데 여기에서는 창을 내봐야 산 위에 있는 보탑이 보일 턱이 없어서 아예 막아버렸나 싶다. 그러니까 보탑 앞에 법당이 있어야 하는데 바위 위에 있는 탑이라서 그 앞에 법당을 지을 방법이 없어서 부득이 산 이래에다가 적멸궁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적멸궁은 적멸보궁에서 보가 빠진 것이지 싶다. 있으나 없으나 뜻은 같으니까 상관 없는데 아무래도 법당이 작다 보니까 작게 네 글자를 쓰는 것보다 크게 세 글자를 쓰는 것이 나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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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은 적멸궁인데 안내판은 적멸보궁이다. 이것도 진실의 위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냥 상투적으로 그렇게 말을 하니까 현판과 상관없이 적멸보궁이라고 한 모양인데 그것은 설명으로 해도 될 것이라고 말하면 너무 깐깐하게 굴 것 있느냐고 하겠지...?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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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당 옆에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름하여 자장율사 지팡이 나무란다. 참 묘하다. 절에서 흔히 만날 수가 있는 지팡이 나무들.... 왜 고승들은 지팡이를 꽂아놓았는지.... 그 지팡이가 또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것인지.... 그냥 기념 식수 삼아 나무 한 그루 심었는데 그것을 자장율사가 심었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지팡이를 꽂았다고 뻥을 치게 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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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느낌이 이런 글귀를 보면 북조선에서 상투적으로 김부자의 우상화에 열을 올리는 모습과 겹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들어서이다. 왜 그래야 하느냔 말이지.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만들면 자장율사가 자장대율사라도 되는 건가?

그냥 재미있으면 좋잖아~ 뭐 그런 느낌이기도 하다. 그래, 재미있으면 되지 뭐, 그런데 그것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그 사람이 지팡이를 꽂아놓아 보라고 자기 스승님께 요구라도 한다면.... 그것도 "난~감~하겠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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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뭐지? 글자가 조금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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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원(佛粮願)..... 불전에 양식을 바치겠다는 원을 세운 비석이라고..... 참 희안한 비석도 있구나. 계룡 갑사 옆에는 우공탑(牛公塔)도 있는데 공양하겠다고 원을 세운 것을 비석으로 만들어 세웠다니.....

아, 우공탑이 뭐냐고요? 경을 실어 나르던 소가 죽어서 공덕탑을 세워준 것이랍디다. 비록 소로 태어났지만 불사에 동참을 한 공덕을 기려서 그랬던 모양인데 우공탑은 여기저기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스님들께서 비록 말을 못하는 짐승이지만 그 고마움을 기린다는 의미로 보면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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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말없이 잡초를 제거하면서 절을 가꾸는 처사(處士)가 보인다. 절에서 머물면서 잡초도 베고, 나무도 해 오고, 물도 깃고 하는 일을 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인데 이렇게 뜨거운 날이면 방문을 열어놓고 달콤하게 낮잠이라도 주무시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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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부처님 도량을 가꾸시느라고 애쓰는 것을 보니 또한 감사할 따름이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면서 감로사 절 마당에 풀이라도 뽑으면서 도나 닦을 일이지 뭐 할 일이 있다고 이리도 바쁘게 싸돌아 다니느냐는 무언의 법문을 하시는 것도 같다. ㅋㅋㅋ

그래도 간다. 다음의 코스는 조금 떨어진 이끼계곡이다. 폭포를 만나면 써 먹으려고 ND필터를 두 개나 사 뒀는데 이제서야 그것을 써먹어 보게 생겼다. 그나저나 시간을 보니 1시가 넘었다. 어디 가서 또 밥통을 채워줘야 나머지 한 나절을 버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