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1) 사자산 가는 길

작성일
2016-08-02 10:00
조회
1306
 

 

강원도 여행 - 1. 사자산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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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중의 여행이라니~~~

그래도
길을 떠난다. 2016년 7월 29일의 아침에 길을 나서기로 하고 목적지는 태백의 해바리를 보러 가는 것으로 연지님을 꼬드겨 놓고, 속셈은 옛 추억을 더듬어서 사자산 나들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어서이다.

법흥사지도

네이버 지도로 튕겨보니 대략 220km이다. 세 시간 반 잡는다. 순조롭게 진행했을 경우의 시간이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대략 길을 알아놓는 것으로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출발을 하려고 시동을 걸었는데 바퀴 한 쪽이 눈길을 끈다.

바람이 없다. 어제 화인이 바퀴에 구멍이 나서 때웠다고 했는데 그 바퀴가 바람이 빠졌던 모양이다. 그냥 끌고 나서면 타이어가 다 망가지게 생겨서 보험사에 전화했다. 그리고 20분 후에 논산에서 렉카가 날아왔다. 그리고는 바퀴의 상태가 무척 안 좋은데 그냥 지렁이땜빵을 할 건지 제대로 때울 건지를 묻는다.

그래서 먼 길을 가는데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므로 땜빵을 하겠다고 했더니 보조바퀴로 바꿔주고 가버렸다. 논산에서는 딱 한 군데가 옛날식으로 때워준다는 정보를 남겨 놓은 채로.

그래서 행선지는 갑자기 논산이 되었다. 원래 여행이란, 아니 인생이란 그런 것이잖여. 오늘은 동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또 내일은 서방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북으로 가야 할 여행길을 잠시 뒤로 미루고 남행을 해야 하는 것도 오늘의 운명이려니 하고 순간을 즐기는 것이 최선일진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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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번 게시글이 '사지산'이 아니고 사지산 가는 길이라고 했느냐면 이러한 이야기도 중언부언 하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자동차를 운행하시는 벗님들에게 참고도 하시라는 의미도 포함되었다. 여하튼 누군가에게 눈꼽찌꼽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는 것이고, 그냥 참고만 된다고 하더라도 또한 헛된 경험은 아닌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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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풍모가 풀풀 넘치는 기술자의 숙련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문득 포정해우가 떠오른다. 문혜군(文惠君)을 위해서 백정인 포정(庖丁)이 소를 잡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모습에 매료된 문혜군을 떠올린게다. 윤정(輪丁)을 바라보는 낭월이라고나 할까?

쓱쓱 드륵드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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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못에 찔려서 구멍이 난 부위를 그라인드로 갈아서 생고무가 나오게 한 다음의 장면을 한 장 찍었다. 이번 강원도 기행에 써먹으면 되겠다는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보겠느냐는 생각도 함께.

기회는 왔을 적에 잡는 것이고, 사진은 보일 적에 찍는 것이다. 겨울이 된 다음에야 녹음이 우거진 장면을 아무리 갈구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까닭이다. 그래서 순간순간의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장인의 절대적인 경고 내지는 주의말씀, "찔린 것을 뽑지 말고 오세요~! 억지로 뽑으니까 타이어가 더 상합니다. 다른 곳에 가면 때워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갈아야 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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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다른 곳에서 때웠다는 흔적이다. 소위 지렁이땜빵이라고 한다는 것도 첨 알았다. 바퀴의 틈에다가 이것을 밀어넣으면 공기의 압력으로 눌려서 바람이 새지 않는다는 논리인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 허망한 것인 줄은 미쳐 몰랐다.

나름 상상하기에 쑤셔서 접착제를 집어 넣는다고 하기에, 그래도 본드와 같은 것이 들어가서 순간접착을 시켜서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인줄만 알았던 것인데 막상 그 결과물의 흔적을 보니, 이건 절대로 사용해서 안 될 공법이라는 생각만 획실하게 들었다.

그래서 혹시라도 벗님의 자동차 바퀴에 구멍이 생겨서 바람이 빠진다면 응급조치야 해야 하겠지만 그걸 다 믿지 말고 반드시 제대로 된 곳에서 옛날 자전거 튜브 때우듯이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진다. 그렇게 해서 낭월의 말을 들은 벗님이 사고를 방지할 수가 있다면 이것만으로도 소개를 한 가치는 차고 넘치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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붙이는 접착물도 첨 봤다. 예전에 자전거는 많이 때워봐서 안다. 헌 튜브를 적당한 크기로 오린 다음에 함석에 못을 많이 박아서 오돌도돌하게 만든 것으로 박박 문질러서 고무본드 접착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붙였던 기억......

그런데 이것은 미리 다 만들어 놓은 것이다. 파스처럼 봉함지를 떼어내고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니 그것도 기술의 변화라고 보면 변화인 셈이다. 여하튼 그렇게 정확하게 제 자리에 갖다 붙이는 기술자의 손놀림을 베토벤의 합창을 듣는 기분으로 지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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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은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먼 길을 갈 여행객에게 한 시간은 또한 200여리를 달릴 수가 있는 시간을 지체한 셈이다. 그래도 출발의 점검으로 인해서 든든한 보험을 하나 들어놓은 듯한 안도감과 바꾼 요량을 한다. 그렇게 해서 10시가 다 되어서야 출발을 했다. 그것도 감로사가 아닌 논산에서.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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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IC를 타고 회덕을 거쳐서 중부로 진입을 할 요량이다. 도로의 상황판을 보니 노랑색과 빨강색의 조화가 퍽이나 거슬린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내가 갈 행선지인 대소 방향은 빨강색이 안 보인다는 것이고 초록색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이어서 주의문구가 운전자를 긴장시킨다. '절대감속!' 뭐 어쩌겠는가.... 조심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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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차가 보이지 않는다. 빗방울은 굵어져가고 하늘은 검어져가고 그렇게 중부고속도로는 비와의 동행이 시작되었다. 물론 그래도 즐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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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휴게소에 들렸더니 이번에는 아예 폭우로 변했다.

연지 : 이렇게 비가 오면 사진도 못 찍겠네?
낭월 : 그럴리가 있나! 몸우산이 있는걸 뭐.
연지 : 그렇네. 바람만 불지 않으면....
낭월 : 비가 오면 잠시 기다리면 되고...
연지 : 그래도 풍경이 날이 좋을 때만은 못할거 아녀....?
낭월 : 모르시는 말씀~! 구름이 싸악~ 피어나는 사이로 보궁이 보이면...
연지 : 그것도 괜찮겠네~~
낭월 : 당연하지~! 순간을 즐기는 방법만 있을 뿐, 그 나머지는 없는겨.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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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폭우가 시야를 방해하지만 그것은 운전자의 사정일 뿐이다. 낭월은 지나가는 풍경들이 즐겁기만 한 까닭이다. 앞차에서 흩뿌리는 물보라도 재미있고, 개울 건너의 날아가는 안개구름도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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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비가 그치기도 한다. 그렇게 평택과 제천간의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만나는 휴게소에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근데 이 고속도로는 왜 이름이 없지? 평제고속도로라고 하던가, 평울(나중에 울진까지 가기로 할 요량이라면..)고속도라라고 해야 부르기가 좋을텐데....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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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휴게소란다. 천등산은 많이 들어봐서 익숙하다. 박달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이 왜 천등일까.... 하늘로 오르는 산? 어디 지식인에게 알아봐야 겠군.... 그렇군. 천등산(天登山)이 맞구나. 겸해서 주변 지식도 살펴보자.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과 충주시 산척면 사이.





높이 807 m. 북동쪽에 시랑산(:691 m), 남쪽에 인등산(:667 m)이 솟아 있다. 북동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제천천()을 이루며 충주호()로 흘러들고, 서남쪽 비탈면을 흐르는 계류는 영덕천()을 이루며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남동쪽으로 충북선 철도가 가로지르고, 북서쪽으로 장호원~제천 간 국도가 지나며, 서쪽 기슭에 광덕사()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천등산 [天登山]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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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게소에서는 우동을 시켰다. 시원한 국물이 생각난다는 연지님의 희망대로 따라가면 만사가 편한 법이다. 그렇게 하고서 잠시 빗발이 가늘어진 틈에 주변을 스케치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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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고 즐거운 나들이를 나선 모양이다. 비가 오거나 말거나 모두들 즐거운 표정들이 싱그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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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의 넓은 공간에는 웬 조자룡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설마 조자룡은 아닐게고.... 뭔 소식인지 벽에 써놓은 글을 보면 되기는 할텐데 빗줄기가 굵어진다. 그래서 일단 네이버에게 물어보기로 하고 모습만 담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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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재에서 고려의 마지막 꺼져가는 등불을 지키기 위해서 용전분투하는 장군의 모습인 것으로 보인다. 박달재에 있는 장군을 휴게소에도 분신을 만들어 놓았으리라는 짐작을 하는 것은 과히 어렵지 않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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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서로 정위()가 되어 동궁위()에 배속되었다가, 이후 장군이 되어 동북계를 지켰고, 대장군에 발탁되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몽골이 금나라를 정벌했고, 금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거란이 대요수국()을 세웠다.


그런데 거란 또한 몽골의 공격을 받아 1216년(고종 3)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오는 상황이었다. 이때 그는 대장군으로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또, 연주()에서는 거란 군사가 강성해 모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장군 기존정()과 함께 앞장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하였다.


이에 힘입은 군사들이 적군을 무찔러 목베고 사로잡은 군사들이 2천 4백명이나 되었고, 거란은 드디어 청새진()을 넘어서 퇴거하였다. 이 전투에서 맏아들이 전사하였다.


1217년 거란군 5천여 명이 다시 남으로 내려오자, 금교역(: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서 5군을 재편성해 상장군 오응부()를 중군병마사, 상장군 최원세()를 전군병마사, 차상장군() 공천원()을 좌군병마사 등으로 삼았다. 그러나 5군이 출발을 지체하는 동안 동주(: 지금의 강원도 철원)가 함락되었다.


이에 당시의 집정자 최충헌()에 의해 상장군으로 전군병마사에 임명되어, 거란군을 명주( : 지금의 강원도 강릉) 방면으로 패주시켰다. 그 해 다시 거란이 여진족과 연합해 침입하자, 예주(: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에서 교전했으나 병으로 돌아왔다.


1218년 병마사가 되어 서북면원수 조충()과 함께 거란적을 강동성()으로 쫓아냈다. 이 때 동진국()을 쳐서 신하로 따를 것을 맹세하게 하였다. 또한 거란을 토멸하겠다는 명분으로 동북면 지방으로 들어와 공동작전을 제의한 몽골군 및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시켰다.


1219년 의주별장 한순()과 낭장 다지() 등의 반란을 이극서()·이적유()와 함께 평정해 북방을 편안하게 하였다. 1221년 추밀원사 병부상서 판삼사사(使)를 거쳐, 참지정사 판호부사()가 되었다.


1228년 수태위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가 되었으며, 그 뒤 시중에 제수되었다.


사람됨이 정직·검약했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해 사졸들이 조금도 범함이 없었고, 존경하였다.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했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취려 [金就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단한 무신이었다는 것으로 역사에 기록이 되었던 모양이다. 더욱 상세한 이야기는 국역 고려사에 있었는데 너무 길어서 생략하니 혹 관심이 있으시다면 찾아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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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강원도 하면 강냉이지....

국도변에 길쭉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는 옥수수들이 강원도에 들어왔음을 인지시켜 준다. 여기 저기에서 옥수수들이 영글어가고 있는 풍경들이 예뻐서 길을 멈추고 풍경을 담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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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미 수확하는 것도 있고, 앞으로 수확을 할 것도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차이를 두고 수확할 요량으로 준비하는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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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한 켠에는 탐스러운 수수이삭이 나오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이건 조금 자라면 산새들이 너무도 좋아하는 먹거리이다. 그래서 아마도 수확을 거두려면 이삭마다 그물자루를 하니씩 씌워놔야 할텐데 어쩔 것인지 괜히 걱정해 보는 행인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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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러운 고추를 보니, 여름 방학 내내 고추 따느라고 변변히 놀지도 못했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그러다가 장마라도 질 무렵이면 부뚜막으로 방바닥으로 온통 고추 마르는 냄새로 진동을 했었는데....

부모님의 마음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그렇잖아도 좁은 방구석이 더욱 좁아진다고 투덜댔을 어린 마음에 미소를 짓는다. 장벌에 밀물이 찰랑이면 다 집어 치우고 갯바닥으로 내달렸던 그 시절의 안면도가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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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무렵이 되어서야 사자산문에 도착을 했다. 그러고 보면 그럭저럭 충거리면서 오느라고 대략 네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가늘게 내리는 빗사이로 무사히 첫 목적지에 도착을 했으니 또한 다행스럽다.

예전에..... 그러니까 조금 오래 된 옛날에 사자산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나이는 불과 20여세.... 전국유람의 목표를 세우고, 한 절에서 두 밤을 자지 않기 운동으로 2년여를 쏘다니던 청춘의 풋풋한 시절이었다고 기억에 남아 있는 조각들이다.

당시에 법흥사까지 버스를 타고 왔지만, 하루를 묵고는 다른 곳으로 향해서 길을 나서는데 밤 사이에 폭우가 내려서 길이 위험한 바람에 버스가 못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바랑을 짊어지고 터벅터벅 50리 길을 걸어서 주천면까지 갔던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도중에 하도 배가 고파서 빵 한 조각을 사 먹으면서 걸었던 기억은 나름 세월을 머금고 향수로 변했나 보다. 그야말로, '오라는 이는 없어도 갈 곳은 많았던 시절'의 한 풍경이다. 그러한 길을 편안하게 나들이를 하고 보니 감회랄 것도 없지만 추억들이 교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