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 제41장. 유유자적/ 8.한겨울의 방문자(訪問者)

작성일
2024-01-20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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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41. 유유자적(悠悠自適)

 

8. 한겨울의 방문자(訪問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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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蘇州)의 오행원(五行院)은 아무리 날씨가 춥고 매서워도 학구(學究)의 열정을 누그러트리지는 못하는 듯했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밖으로 잠시 나가서 산책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강당이나 각자의 방에서 오행의 이치를 탐구하고 토론하느라고 열기를 더해갔다.

우창은 항상 제자들의 공부를 점검하면서 궁금해하는 것은 성심(誠心)으로 답을 찾아서 함께 궁리하고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까닭에 오행원에서 수학(修學)하는 제자들의 안목(眼目)도 나날이 넓어지고 또 그만큼 지혜는 높아져 갔다. 언제나 대화의 상대로는 채운(彩雲)과 수경(水鏡)이 나서서 제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세월이 흐르는 만큼 서옥의 배도 눈에 띄게 부풀어 올랐다. 서옥의 몸이 무거워지면서 우창도 서옥의 건강에 대해서도 마음이 쓰였으나 다행히 연화(緣和)가 옆에서 항상 보살펴주고 있었다.

동지(冬至)도 지나고 맹추위는 점점 누그러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절기도 입춘(立春)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아직도 새벽의 바람은 여전히 칼날이 느껴졌으나 마음으로는 벌써 봄이 된 듯한 기분이 든 우창도 모처럼 이른 아침에 강변의 풍경을 보면서 한 바퀴 돌자 기분이 상쾌해졌다. 역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아침은 목기(木氣)가 많아서 그런가 싶은 생각을 하면서 돌아와서 서재에 앉았다. 요즘 제자들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을 느끼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가르치는 사도(師道)의 보람을 만끽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그때 오광이 자원과 함께 작은 종이쪽지를 들고 우창을 찾아와서 말했다.

스승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 뵈었습니다.”

그래 잘 왔네. 무슨 일이지?”

실은 태사님께서 떠나신 듯합니다. 이렇게 문서를 남기셨습니다.”

우창이 깜짝 놀라서 단양이 남겼다는 문서를 들여다봤다. 문서에는 간단하게 「후일재봉(後日再逢)」이라고 쓴 네 글자가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서 오광에게 물었다. 

단양 스승님께서 남기신 글이 후일재봉(後日再逢)’이라니..... 다음에 다시 보자는 의미가 아닌가? 혹 무슨 말씀은 없으셨던가?”

우창은 갑자기 당한 일이라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내색이 없었는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스승님, 실은 어제저녁을 드시고 상을 가지러 갔을 적에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약간 이상하다고는 여겼습니다만, 예사로 흘려들었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까 의미심장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뭐라고 하셨기에?”

태사님께서 오광을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춘풍자래(春風自來)하니, 동객출유(冬客出遊)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입춘이 곧 다가오는 것에 대한 소감이라고만 생각했지요. ‘봄바람이 저절로 불어오니 겨울의 나그네는 유람을 떠나네라는 의미를 봄이 왔으니 겨울이 물러가는구나라고 하는 것으로만 여긴 것이 제자의 불찰이었습니다. 스승님께 말씀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으니 말입니다.”

오광이 자책하듯이 하는 말을 듣고서 우창은 뭔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아마도 인연에 따라서 오가는 것이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신 것으로 여겼다. 문득 태사당을 향해서 합장하고 배례(拜禮)했다. 겨우내 가르침을 받았던 것에 대한 감사의 인사였다.

아하~ 과연 내 생각으로는 미칠 수가 없는 오고 감의 이치를 자유롭게 바람결에 구름이 움직이듯 하시는구나....’

우창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본 오광이 말했다.

스승님, 혹 제자가 무슨 잘못을 한 것은 없는가 싶은 생각에 마음이 불편합니다.”

, 전혀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네. 원래 달인(達人)은 한마음이 일어나는 대로 움직이는 것임을 나도 알고 있으니까 말이지. 그간 열심히 잘 시봉(侍奉)을 한 줄을 내가 잘 알고 있는걸. 하하~!”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그래도 위로가 됩니다. 그러면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시 오시면 뵙는 걸로 하고 방은 잘 보존하도록 하겠습니다. 오광은 이만 물러갑니다.”

그래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네.”

, 알겠습니다.”

오광이 대답하고는 돌아가자 우창도 말은 그렇게 했으나 갑자기 생긴 일이라서 내심 얼떨떨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인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내 정리하고는 백차방에 가서 연화에게 차를 부탁했다. 연화는 조용히 향을 피우고 명상에 잠겨 있다가 우창을 보고는 반기면서 얼른 차를 만들어서 앞에 따라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차를 말씀하셔서 아침의 상쾌한 기분을 살리시라고 벽라춘(碧螺春)을 준비했어요. 서산도에 있으면서 심심해서 벽라춘을 만드는 방법을 배워서 서툰 솜씨로나마 만들어 봤었거든요.”

벽라춘이라면 나도 들어봤는데 태호(太湖)의 명차(名茶)던가?”

맞아요! 스승님도 들어 보셨군요. 워낙 품질이 좋은 차라서 없는 솜씨에 대충 만들어도 향이 그윽해서 좋아요. 드셔보세요.”

과연 연화의 말대로 차향이 은은하게 풍겨 나와서 심란했던 마음을 말끔하게 정리해 주는 듯했다. 그때 자원이 백차방으로 들어오다가 우창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말했다.

싸부, 혼자서 차를 들고 계셨어요? 그런데 무엇을 그렇게 깊이 생각하세요? 단양 태사님이 떠나셔서 그러시는 건가요? 말씀이라도 하고 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서운하셨던 것은 없는가 싶어서 온갖 생각이 다 들죠?”

자원도 이미 들었는지 이렇게 말하면서 우창의 맞은편에 앉자 연화가 자원에게도 차를 따라줬다.

어머! 언니, 이건 무슨 차예요? 향이 그윽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네요.”

벽라춘이라는데 들어봤어?”

그 유명한 벽라춘이었구나. 어쩐지 향이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차의 탕색이 벽록(碧綠)이었구나. 맛있어요. 호호~!”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진명이 와서 손님이 찾아왔다는 말에 접객실로 갔다. 자원도 호기심으로 따라나섰다. 접객실에는 중년(中年)의 남자가 앉아있다가 우창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일어나서 합장하는데 남자의 몸이 호리호리해서 바람이 불면 흔들릴 것만 같았는데 예리한 안광(眼光)이 느껴져서 우창도 정신이 퍼뜩 들었다. 진명이 차를 앞에 놓자 우창이 먼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잘 오셨습니다. 진하경(陳河鏡)입니다.”

우창이 이렇게 인사를 하자 남자도 통성명했다.

소생은 정지운(程芝雲)이라고 하오. 운남(雲南)에서 왔는데 천하를 유람하다가 소주에 들렸던 길에 지인에게 수소문(搜所聞)했더니 오행원에 젊은 학자가 제자들을 모아서 학문을 펼치고 있다면서 가보라고 하기에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소개하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는 말에 우창도 약간은 긴장이 되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무래도 정() 선생님께서는 헛된 소문을 들으시고 잘못 찾아오신 듯합니다. 실망하실까 염려됩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이렇게 누추한 곳을 사양치 않으신다면 영광입니다. 우창(友暢)이라 불러 주시기 바랍니다.”

, 아호(雅號)가 우창이십니까? 밝아서 좋습니다. 소생은 현담(玄潭)입니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자신의 아호를 말하는 모습에서 우창도 약간은 긴장이 되는 것을 느꼈다. 보통의 방문자와는 사뭇 다른 기운이 느껴져서였다. 다만 적의(敵意)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왠지 모를 무게가 실려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걸음에 헛된 소문을 듣고 찾아주셔서 송구합니다만 이렇게 왕림해 주신 것은 하늘의 도우심인가 싶습니다. 여기 차를 드시면서 천천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진명이 앞에 가져다 놓은 차를 우창이 권하자 사양하지 않고 차를 마시고는 바로 우창에게 물었다.

현담의 외람됨을 용서 바랍니다. 선생에게 여쭙고자 합니다.”

무엇이든 말씀해 주시면 알고 있는 만큼이나마 졸견(拙見)을 올리겠습니다.”

우창보다 연배가 한참 위라는 것을 알고는 공손한 말투로 응대하고 손님에게 할 수가 있는 최대한의 예를 갖춰서 말했다. 그러자 현담이 단호하게 물었다.

우창 선생, ()이 무엇입니까?”

우창은 질문한다기에 무엇이든 물으라고는 했지만 어떤 것을 물어줄 것인지에 대해서 저절로 긴장되는 우창이었다. 현담의 말투에서 상당히 강경한 느낌이 들어서 자칫하면 밑천이 다 털리고 말겠다는 불안감이 일어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상상외로 명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을 듣자 내심 매우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 이렇게 묻는 것은 우창의 역량(力量)을 시험코자 하는 것임을 짐작하고는 느낀 대로 답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는 평소에 생각한 대로 말했다.

()은 숙업(宿業)입니다.”

일문일답(一問一答)을 들으며 진명이 옆에서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이미 진명의 눈에는 현담에게서 강력한 광채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연을 그냥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과연 우창이 어떻게 답을 해서 어려운 관문(關門)을 통과하게 될 것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우창이 답을 하자마자 현담의 두 번째 질문이 떨어졌다.

()은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는 현담의 표정이 묘했다. 전혀 감정(感情)이 실리지 않은 채로 그야말로 맹물이나 허공과 같아서 무슨 뜻으로 묻는지를 가늠할 수도 없었다. 진명이 다시 우창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우창도 이번에는 잠시 생각하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번뇌(煩惱)입니다.”

진명은 우창의 답을 듣고는 내심으로 깜짝 놀랐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답을 하는 우창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명이 이해하기에 운()은 길흉화복(吉凶禍福)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얼토당토않은 번뇌라는 말을 하다니, 무슨 뜻인지는 알겠지만 이렇게 답을 하는 것은 실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복잡한 머릿속으로 조바심을 내면서 현담을 바라봤다. 그러자 현담도 무표정하게 우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주객 간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우창은 이 짧은 물음에 잠시 생각했다. 지금 현담이 묻고자 하는 뜻은 삶의 생존(生存)을 말하는 것인지, 생극(生剋)의 생을 말하는 것인지 판단이 얼른 서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흐름으로 봐서는 난데없이 생극을 물었을 까닭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확신(確信)하고 말했다.

춘풍이 일어나니 버들가지에도 꽃이 핍니다.”

우창의 말에 두 사람의 표정이 서로 달라졌다. 진명은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왜 그렇게 엉뚱한 답을 하느냐는 듯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우창을 바라봤고, 현담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우창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진명도 현담의 표정을 보면서 더욱 혼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서 멍하게 돌아가는 것만 지켜볼 뿐이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현담이 우창에게 말했다.

현담이 드디어 삼관(三關)을 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선생을 만났구료. 하하하~!”

현담의 웃음소리에 누구보다도 진명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나중에 우창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거니와 일단 날카로운 빛이 뿜어져 나오는 현담의 질문을 잘 받아서 답했다는 생각이 들자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우창을 바라봤다.

현담 선생의 가르침에 정신이 아득합니다. 하하~!”

통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은 통하지 못했다는 의미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한 우창이 멋쩍게 웃으며 말하자 현담이 미소를 짓고서 보퉁이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책의 겉면에는 얼마나 많은 손때가 묻었는지 너덜너덜해서 다시 종이로 배접(褙接)을 한 흔적이 가득했다. 현담이 꺼낸 책을 보자 우창의 눈이 커졌다. 습관적으로 문자를 보면 자동적인 반응을 하는 우창이었기 때문이었다. 진명도 무엇인지를 보느라고 눈을 모았다.

 

 

 

 

책의 표지(表紙)에는 비수명리수지적천수(秘授命理須知滴天髓)라고 쓰여 있었다. 책 이름을 본 우창이 깜짝 놀랐다. 마치 벼락을 맞은 듯이 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우창은 자기도 모르게 얼른 책을 당겨놓고 한 장을 넘겼다. 현담은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언젠가 마음을 모아서 다시 한번 적천수를 살펴봐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늘 참으로 귀인(貴人)이 누추한 곳을 찾아와 주셨으니 열 개의 태양이 동시에 떠오른 듯합니다.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말씀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우창이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 진명도 저절로 우창을 따라서 합장하고 배례(拜禮)했다. 현담이 합장으로 인사를 받고서 웃으며 말했다.

배움을 얻을 적에는 설렘으로 행복하고, 배움을 나눌 적에는 즐거움으로 행복한 법이오. 오늘 현담이 약간의 깨달음을 전해줄 그릇을 만났으니 또한 즐거운 인연일 따름이오. 하하~!”

우창은 그 순간 현담이 스승으로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直感)했다. 그래서 일어나 스승의 예로 삼배(三拜)를 했다.

우창이 스승님을 뵙습니다.”

현담은 묵묵히 절을 받음으로 제자로 거두겠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러자 진명도 일어나서 절을 하려고 하자 현담이 말렸다.

, 그럴 필요 없네. 그대를 보니 이미 영대(靈臺)가 맑아서 학문을 배우지 않아도 깊은 통찰을 하고 있으니 그대에게는 절을 받을 수가 없겠네. 우창에게는 이러한 복이 있었군. 하하~!”

진명은 다시 놀랐다. 현담은 예사로운 학자가 아닐뿐더러 이미 영안(靈眼)까지 열린 기인(奇人)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빛을 발산하는 것도 이해되었다. 그러한 귀인(貴人)이 오행원을 찾아준 것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말했다.

법력(法力)이 높으신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송구합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현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목탁소리가 들렸다. 점심을 먹으러 오리는 신호였다.

스승님, 점심 공양이 마련되었나 봅니다. 같이 가시지요.”

그럼세.”

진명이 앞서서 안내하자 우창과 현담이 같이 식당으로 갔다. 춘매가 보니까 우창이 낯선 남자를 공손히 모시고 나타나자 예사로운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는 얼른 별도의 상을 차려서 내어 왔다. 궁금해하는 춘매에게 우창이 간단히 말했다.

이따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말하려고 하네. 그 전에 고월(古越)을 봐야겠군.”

이렇게 말한 우창이 오광을 불렀다. 오광이 얼른 다가와서 합장했다.

스승님, 찾으셨습니까?”

그래. 잠시 후에 고월과 자원을 데리고 서재로 와 줘.”

, 알겠습니다.”

현담이 밥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가 같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스승님, 가시지요.”

그러지.”

현담도 우창을 따라서 서재로 향했다. 서재에서는 이미 진명이 물을 끓이고 있었다. 바깥의 차가운 기온을 느끼다가 방으로 들어오니 따뜻한 난로가 있어서 그 위에 쇠 주전자에서 물이 끓고 있어서 김이 새어 나왔다. 밥을 먹으러 가면서 진명이 물을 올려놨던 모양이다.

오행원에서 공부하는 대중들이 많구나. 모두 학문에 대한 열정들이 가득한 것을 보니 우창의 노력이 어땠는지를 짐작하고도 남겠군.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일세. 오랜만에 느껴보는 모습이로군. 하하~!”

현담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하자 우창도 내심으로 기뻤다. 항상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려니 싶으면서도 그 보람에 대해서는 아직 깊이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밝은 스승이 나타나서 인가(認可)해 주니 무엇보다도 기뻤다. 우창의 표정을 보면서 진명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스승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自負心)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진명이 차를 따르고 있는데 오광이 들어왔다. 고월과 자원을 데리고 오자 우창은 흐뭇한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오광이 알아서 잘 데려왔구나. , 인사부터 드리지. 이쪽은 새로 찾아주신 현담 스승님이시네.”

우창의 말에 모두 배례하자 현담은 미소로 인사를 받았다. 고월은 우창의 태도를 보면서 흥미가 동했다. 오행원에 단양으로 인해서 묵직하게 흘러온 분위기가 좋았는데 단양이 가고 나자 이번에는 또 어떤 인연이 찾아왔는지 궁금해서 진명이 따라주는 찻잔을 앞에 놓고서 우창과 현담을 번갈아 봤다. 이러한 마음은 자원과 춘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우창이 손때가 묻어서 겉장이 시커멓게 된 책을 꺼내서 가운데 놓았다. 모두의 이목이 책의 제목으로 쏠리자 우창이 말했다.

고월, 그리고 자원, 오늘 천지신명께서 우리의 공부를 마무리시켜 주시고자 큰 스승님을 보내 주셨지 싶네. 이 책을 품고 오신 현담 스승님을 뵙고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네.”

우창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현담은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대중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창의 말에 힘을 실어주려는 듯이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우창의 말을 들은 고월이 말했다.

책의 이름이 비수명리수지적천수(秘授命理須知滴天髓)인 것으로 봐서 필시 적천수에 대한 내용이지 싶은데 맞는가?”

그렇다네. 놀랍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노산에서 공부한 것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가 무엇보다도 궁금한걸. 우리가 공부했던 책보다 훨씬 두꺼운 것으로 봐서 내용도 다를 것으로 짐작이 되는데 드디어 오행의 심오(深奧)한 영역으로 진입하게 될 때가 이르렀다는 것이 아닌가?”

왜 아니겠나. 그래서 이렇게 고월을 불렀다네. 너무 기뻐서 얼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지 않았겠나. 하하하~!”

고월은 말없이 현담을 바라봤다. 자원도 같은 마음이었다. 다만 춘매와 염재는 뭔가 깊은 가르침을 얻게 되겠다는 기대감으로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미소만 짓고 있던 현담이 고월에게 물었다.

()이 무엇이오?”

고월은 난데없는 현담의 질문에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자신의 공부를 파악하고자 한다는 것을 바로 알고는 답했다.

부질없는 것입니다.”

오호, ()은 무엇이오?”

허깨비 놀음이지요.”

그렇다면 생()은 무엇이오?”

찰나(刹那)입니다.”

고월의 말에 모두가 놀랐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현담이 고월의 답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일순간 서재는 침묵이 흘렀다.

우창은 고월의 답에 대해서 현담이 어떻게 평을 해 줄 것인지가 궁금했다. 잠시 기다리자 현담이 다시 고월에게 물었다.

오행원에서 뭘 하시오?”

보임(保任)합니다. 습관이 자꾸 영겨 붙습니다.”

오호~! 과연, 하하하~!”

현담이 통쾌하게 웃자 모두 현담을 바라보면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기다렸다. 웃음을 멈춘 현담이 고월을 보면서 말했다.

고월(古越)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이름은 임원보(林元甫)입니다.”

화룡(畵龍)에 점정(點睛)이 필요하셨군.”

, 의식(意識)은 깨달았는데 습관(習慣)조차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담이 보따리 풀 곳을 찾은 듯하군. 하하하~!”

깨우쳐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3일 후에 올 테니까 조촐한 방이나 한 칸 마련해 주시게. 그럼~!”

 

 

이렇게 말 한마디를 남기고는 훌쩍 일어나서는 떠나버렸다. 순식간의 일이라 모두 얼떨떨했으나 얼른 일어나서 배웅했다. 밖으로 나갈 사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