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 제41장. 유유자적/ 9.봄이 오는 소리

작성일
2024-01-25 05:07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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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7] 41. 유유자적(悠悠自適)

 

9. 봄이 오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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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담이 오행원의 문을 나가다가 염재가 바깥일을 보고 들어와서 마차를 대고 있는 것을 만났다. 염재는 오행원에 방문한 손님인가 싶어서 인사를 하자 염재에게 대뜸 물었다.

()?”

난데없이 처음 보는 사람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듣자 얼떨해진 염재가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 명이라고 하시면 수명도 있고 운명도 있는데 어느 명을 말씀하시는지요?”

염재가 이렇게 되묻자 다시 물었다.

()?”

운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명운(命運)에 대한 가르침이신가 싶습니다. ()이 마차라면 운은 마차가 가는 길과 같습니다.”

염재가 대답하자마자 다시 세 번째 관문을 던졌다.

()?”

, . 생에는 생생(生生)이 있고 극생(剋生)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도 생이고 극도 생인 것이지요. 그런데 왜 난데없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초면에 말이지요.”

염재는 난데없는 질문을 받고서 시험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는지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현담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그대 스승에게 물어보면 알 일이거니와 그대의 이름은?”

, 이름은 도대림(陶大臨)이고 아호는 염재(念齋)라고 합니다.”

오행원에서 무슨 일을 맡고 있나?”

외호(外護)를 맡아서 바깥의 일을 봅니다.”

과연! 성실한 학인이로구나. 네 스승의 안목을 알겠네. 또 보세. 하하~!”

이렇게 말하고는 휘적휘적 오행원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염재는 황당한 마음을 추스르려고 백차방으로 향했다. 백차방에는 현담을 보내고 나서 우창을 비롯한 제자들이 모여서 담소하는 중이었다.

스승님 다녀왔습니다.”

염재가 우창을 보고 인사하자 자원이 반갑게 맞았다.

, 염재구나. 어서 와! 추운데 일 보고 오는구나.”

진명은 연화가 따라주는 찻잔을 염재에게 가져다주며 말했다.

따끈한 차를 마셔 몸이 녹게.”

그런데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염재가 진명에게 묻자 진명이 되물었다.

?”

뭔가 공기가 이상합니다. 들어오다가 이상한 사람도 만났고요.”

이상한 사람?”

염재가 현담을 만나서 나눈 것을 말하자 모두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자원이 말했다.

염재가 현담삼관(玄潭三關)을 만나서 고생했구나. 호호호~!”

? 현담삼관이라고 하시면.....?”

그래 싸부와 고월싸부도 당했지 뭐야. 그래도 염재에게는 상대라도 해 주셨다는 것이 어디야? 우리는 상대도 해 주지 않으셨으니 말이야.”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진명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소상히 설명해 줬다. 그 말을 듣고서야 염재가 우창에게 물었다.

이미 두 스승님께서는 모두 해답을 알고 계신 듯합니다. 제자를 위해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고월이 염재에게 말했다.

설명은 무슨 설명. 내가 답한 것은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에 감동이 일어나지 않아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지 뭐긴 뭐겠어? 하하~!”

고월의 말에 우창도 웃으며 말했다.

고월도 지난겨울의 수행이 짭짤하셨구나. 아무래도 우창만 빈둥대면서 소일(消日)했나 싶어서 괜히 마음이 조여드는군. 하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만히 있던 춘매가 말했다.

춘매가 생각하기에는 단양 태사님께서 오늘의 일을 미리 알고 떠나셨나 싶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도 절묘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어요? 방은 태사님이 머무시던 여여실(如如室)을 드리면 되겠고, 우리는 꿀물을 받아먹을 준비만 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잖아요? 살다가 또 이런 복이 쏟아지기도 하네요. 정말 무엇인지는 몰라도 큰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마음이 벌써 부풀어 올라요. 호호~!”

춘매의 말을 듣고 있던 오광이 우창에게 물었다.

현담 스승님은 젊으셔서 시봉(侍奉)이 필요치 않아 보이는데 그대로 소임(所任)을 맡아도 되겠습니까?”

그렇지, 오광의 보필이 필요 없겠군. 그간 단양 스승님을 모시느라고 애 많이 썼네. 하하~!”

아닙니다. 오히려 태사님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좀 서운하기는 하지만 또한 인연의 흐름이라고 생각하니 괜찮습니다.”

오호~! 오광의 공부도 나날이 깊어가는구나. 하하~!”

모두가 스승님의 덕분입니다.”

그러자 자원이 고월에게 물었다.

그런데 고월 싸부 그 답하신 내용의 의미를 모르겠어요. 설명해 주세요.”

자원(慈園)뿐만이 아니라 진명과 염재도 고월의 말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고월을 바라보면서 설명해 주기를 기다렸다. 고월이 우창을 바라보자 말없이 미소만 짓는 것을 보면서 말했다.

아마도 자원은 처음 듣는 말이어서 의아했겠지?”

물론이에요. ()은 부질없고, ()은 허깨비 놀음인 데다가 또 생()은 찰나라고 하시니 이것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도 혼란스럽던 차에 정작 현담 스승님은 오히려 그 말을 인정하시는 듯하니 당연히 무슨 뜻인가 싶을 밖에요. 예전의 고월 싸부는 안 그러셨잖아요?”

그랬나? 생각은 매순간(每瞬間)마다 바뀌고 달라지는 것이니까 당연히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밖에. 하하~!”

고월이 이렇게 말하면서 웃자 자원이 다시 물었다.

왜 명()이 부질없어요? 더구나 부질없다는 명을 부여잡고 연구하고 궁리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그런 것을 후학에게 강의하고 궁리하는 고월 싸부는 또 무슨 일을 하신 건가요? 여기에 대해서 소상하게 설명해 주세요.”

자원이 이렇게 묻자 고월이 추억에 잠긴듯이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문득 옛날에 노산에서 떠들었던 풍경이 떠올라서 잠시 생각해 봤네. 그 시절도 참 좋았었는데 말이지. 그때의 자원도 참 풋풋한 열정이 넘쳤었는데 한결같은 마음으로 학문에 정진하고 있으니 천생 학자로군. 하하~!”

그야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아직은 없으니까요. 어서 설명해 주세요. 왜 명학(命學)이 부질없다는 거예요?”

그야 현담 스승님이 물었으니 그렇게 답을 한 거지. 자원이 물었으면 숙업(宿業)이라고 하지 않았겠어?”

고월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진명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고월 스승님, 그 답은 우창 스승님께서 현담 스승님께 답을 한 것인데요? 그렇다면 고월 스승님이 한 수 위라는 뜻이잖아요?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우창과 고월이 마주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우창이 진명에게 말했다.

맞아, 진명이 잘 봤다네. 하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진명은 못 믿겠다는 듯이 우창을 바라보자 이번에는 고월이 웃으며 말했다.

? 우창의 내공이 나보다 낮을까 봐서 걱정스럽나? 하하하~!”

그게 아니라....”

이렇게 답하면서 진명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속내를 들켰다는 듯이 얼른 말하자 이번에는 우창이 다시 말했다.

같은 질문에 같은 답을 한 것이었다네. 나는 유위법(有爲法)으로 답을 했고, 고월은 무위법(無爲法)으로 말을 했을 뿐 결국은 같은 이야기라네. 하하하~!”

?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이미 우창에게도 그와 같이 물었을 것으로 생각했다네. 우창은 너무나 진솔(眞率)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으로 답을 했을 것으로 봐서 나는 또 무엇을 하더라도 결국은 도로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답을 했을 뿐이라네. 그러니까 질문은 한 가지라도 답은 열 가지, 백 가지가 되는 것이라네. 그래서 일병백약(一病百藥)이라고 하지 않던가? 이 말을 뒤집으면 일약백치(一藥百治)와도 같은 말이지. 관음보살은 감로병의 법수(法水) 하나만으로도 만 중생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겠나.”

고월이 자세하게 풀어서 설명해 주자 진명도 비로소 이해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그런 뜻이었네요. 병이 하나라도 치료하는 방법은 백 가지나 되듯이 약이 하나라도 백 가지의 병을 다스릴 수가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여태까지 질문 하나에 답도 하나인 줄로만 생각했지 뭐예요. 이제 고월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서야 그 이치를 깨달았어요. 그러니까 서로 다른 답이라도 핵심은 통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맞아, 깊은 이치를 모르면 서로 다른 답이라고 여겨서 누가 더 잘했느냐는 것으로 한나절을 보내기 마련이지만 의미를 알고 있는 현담 스승님은 미소만 지을 따름이라네. 하하~!”

이렇게 말을 한 고월은 잠자코 현담이 두고 간 책을 펼쳐서 들여다보는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원이 웃으며 말했다.

옛날에 어느 객이 선사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그렇다네.’라고 대답하셨는데 손님이 가고 나서 옆에서 모시고 있던 시자가 다시 똑같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없다네라고 했더라지. 그러자 옆에서 차를 마시던 제자가 아니 스승님, 손님이 물었을 적에는 그렇다고 하고, 시자가 물었을 적에는 아니라고 하십니까?’라고 하자, 다시 선사가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차나 들게라고 했다더니 이제야 그 의미를 명료하게 알 것 같아요. 호호호~!”

자원의 이야기를 듣고서 진명이 말했다.

아니, 어디에서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던 거야? 정말 오늘 많은 것을 배우네. 호호~!”

진명이 재미있어하자 자원도 웃으면서 다시 고월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왜 허깨비 놀음이라고 하셨어요? 운이 그렇게 허망한 것이었단 말인가요?”

당연하지, ()조차도 부질없다고 했는데 하물며 그 명이 그려내는 운인들 허깨비가 아니고 또 무엇이겠어? 있는 듯하다가도 또다시 살펴보면 없는 것도 같은 것이 허깨비와 흡사하지 않은가?”

아까 말씀을 들으면서는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싶었는데 지금 다시 곰곰 생각하면서 설명을 들으니까 과연 그럴 법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면 생()이 찰나(刹那)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집착할만한 것도 그럴 시간도 없다는 것으로 보면 되는 거죠? 정말 다시 생각해 보니까 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일관성(一貫性)이 있네요. 고월 스승님이 멋져 보이기도 하고요. 호호호~!”

그런가? 우창은 뭐라고 답을 했지?”

고월이 궁금해하자 이번에는 진명이 말했다.

현담 스승님께서 운()이 무엇이냐고 하자, 스승님께서는 번뇌라고 답을 하셨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이 무엇이냐고 하신 물음에는 춘풍이 일어나니 버들가지에도 꽃이 핍니다라고 답을 하셨는데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지금 설명해 주세요.”

진명이 우창에게 묻자 우창이 간단히 답했다.

자연(自然)을 말한 것일 따름이지. 그러고 보니까 나는 시종 현담 스승님의 물음에 유위법(有爲法)으로 설명했다는 것을 알겠고, 비로소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구분이 되는군. 그것도 인연법(因緣法)이려니 싶은걸. 하하하~!”

우창의 말에 고월이 맞장구를 쳤다.

그렇다니까, 그래서 우창은 오행원을 꾸려가고 고월은 이렇게 얹혀서 무위도식(無爲徒食)하고 있지 않으냔 말이지. 하하하~!”

고월이 유쾌하게 웃으며 말하자 모두 한바탕 웃었다. 그러자 염재가 자신이 답한 것에 대해서 의견을 듣고 싶어서 고월에게 청했다.

고월 스승님, 염재가 대답했던 것에 대해서도 의미를 풀이해 주셨으면 합니다. 문득 대답한 것이 너무 미흡했다고 생각하니까 여태까지 공부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스승님을 욕되게 한것은 아닌가 싶은 자책(自責)도 되고 말입니다.”

염재의 말에 자원이 대답했다.

아니, 여태까지 이야기를 듣고서도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야? 그래도 당당하게 대답을 했잖아. 내가 보기에 염재는 열심히 공부하는 안회(顔回)와 같다고 보지 않으셨을까 싶어. 오행의 이치를 궁구하면서 눈을 뜨고 잠이 들기를 지칠 줄도 모르고 반복하고 있는 열혈남아(熱血男兒)니까 말이야. 호호~!”

괜히 위로하느라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줄은 알겠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염재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욱 열심히 정진해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때 채운과 수경이 지나가다가 백차방에서 모두 즐겁게 담소하는 것을 듣고는 들어와서 한쪽의 자리에 앉으면서 채운이 말했다.

아니, 무슨 이야기로 그렇게 꽃을 피우고 계신 건가요? 함께 즐기도록 채운도 끼워주세요.”

채운이 이렇게 말하자 옆에 앉은 수경도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해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자원이 장난삼아서 채운에게 물었다.

채운에게 삼관(三關)을 물어볼 테니까 답을 해봐.”

언니, 밑도 끝도 없이 삼관이 뭐예요? 여하튼 물어보겠다는 거죠? 궁금해요. 어서 말씀해 봐요. 재미있겠다. 호호호~!”

그럼 내가 물을 테니까 생각이 나는 대로 답하면 되는 거야.”

알았어요. 어서요~!”

()이란 무엇이지?”

.... 명은 천명(天命)이죠.”

()은 또 뭘까?”

길흉이 반복되는 것이고요.”

()?”

생은.... 기왕에 태어났으니 잘 살아야죠.”

채운의 답을 듣고서 미소를 짓는 자원에게 채운이 말했다.

언니가 삼관(三關)이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전부네요? 채운이 답을 잘한 건가요? 궁금해요.”

자원이 채운의 답을 듣고서 우창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의미이며 같이 들었으니까 풀이해 달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자 우창이 말했다.

항상 열렬한 채운의 열정이 느껴지는 답이로군. 하하하~!”

어머, 그렇다면 답을 잘한 것이라는 말씀이죠? 다행이에요. 괜히 쫄았어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답을 하셨는데요?”

채운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말을 했는지도 궁금해서 자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자원이 우창이 말한 것과 고월이 말한 것을 들려줬다. 자원의 이야기를 듣고서 채운이 감탄한 듯이 말했다.

아니, 뭐에요.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채운은 아직도 가야 할 길이 아득하네요.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어요. 호호~!”

정말이네. 삼관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공부가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채운의 답도 맞잖아? 다만 너무 멋진 말들이 있어서 부족해 보일 따름인걸? 그래서 밝은 스승을 만나야 의식(意識)의 세계가 높아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깊어지는 것은 분명한가 봐. 호호~!”

채운의 말을 듣고서 우창이 말했다.

그건 맞는 말이지. 항상 등불로 삼고 공부할 스승이 있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길 수가 없는 큰 복인 것은 맞아. 그렇지 않아도 새로 맞이하게 된 현담 스승님께 적천수를 깊이 파고들 수가 있겠다고 생각하니까 이미 속마음이 설레는 것을 보면 말이지.”

그때까지 잠자코 책을 보고 있던 고월이 우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봐, 책의 위와 아래에 깨알같이 써놓은 주석(註釋)을 보니까 과연 현담 스승님의 깊이가 느껴지는걸. 그냥 적천수의 내용을 읽으면서도 그렇겠거니 싶었는데 이것은 위아래로 뒤집어 놓고, 좌우로도 파고 들어가서 완전히 벌집을 만들듯이 하셨지 않은가? 참으로 놀라운 일인데 이러한 스승님께서 우창에게 가르침을 주시러 출현하셨으니 과연 스승의 복을 논한다면 세상에서 우창을 능가(凌駕)할 사람은 없을 것이네.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고월의 호들갑에 우창도 펼쳐놓은 책을 넘겨다 봤다. 과연 글의 위와 아래에 빼곡하게 쓴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본 우창도 감탄했다.

아무래도 이제야 명학의 마침표를 찍을 때가 다가온다는 생각이 드는걸. 감사할 따름이라네. 아마도 천지신명께서 아직도 더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밝은 종사(宗師)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나 보네. 하하하~!”

 

오행원은 현담의 등장으로 술렁였다. 채운이 공부 시간에 제자들에게 한바탕 명학삼관(命學三關)을 펼쳐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바람에 모두 공부에 대한 열정이 고취(鼓吹)되었음은 물론이고, 언제부터 가르침을 듣게 될 것인지를 기대하면서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 나누는 바람에 봄바람이 눈이 녹듯이 모두 마음에는 이미 봄이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저녁에 모두 저마다의 처소로 돌아간 다음에 우창은 서재에서 적천수를 펼쳐보고 있는데 서옥이 인삼차를 들고 들어왔다.

목이 마르실까 봐 마실 것을 챙겼어요. 뭘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책에 빠져있다가 고개를 든 우창이 말했다.

, 고마워. 여태까지도 많은 스승님을 만나서 소중한 가르침을 거저 줍듯이 배웠는데 이번에는 여느 스승님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들지 뭔가. 열심히 공부하면 스승이 찾아온다는 말이 맞는가 보네.”

우창이 책을 밀쳐놓으며 서옥을 보고 말하자 서옥도 옆에 앉아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야 스승님께서 학문에 바치는 열정이 하도 뜨거워서 호법신이 기특하게 여기셨나 보네요. 호호~!”

몸도 무거울 텐데 그냥 쉬지 않고 나왔구나. 출산의 예정은 언제쯤인가?”

연화(緣和) 선생이 낮에 보시고는 보름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가셨는데 그 말이 맞을 것 같아요. 얼른 몸을 풀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무거워요. 호호~!”

우창은 도드라진 서옥의 배를 쓰다듬었다.

서옥은 먼저 쉴게요. 봐하니 책을 더 보고 주무실 요량이죠?”

, 먼저 쉬어.”

우창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눈은 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옥도 우창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미소를 저절로 머금었다.

책이 그렇게 재미있어요? 눈을 떼질 못하시네요. 호호~!”

, 대략 살펴볼 따름이야. 자세한 것은 스승님과 이야기를 나눠가면서 깨달아야 하겠어. 글과 글 사이에 묻혀있는 의미들에 대해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헤아리기 어렵네. 내일 날이 밝으면 염재에게 책을 주고 모두 한 권씩을 필사(筆寫)하라고 해야 하겠군. 그래서 공부할 적에 펼쳐놓고서 읽기가 편리할 테니 말이지.”

아니, 스승님이 그 정도라면 참으로 대단한 가르침을 주시려나 봐요. 서옥도 아기를 낳고 몸이 가벼워지면 열심히 공부해야 하겠어요.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요.”

우리 둘만 있는데 무슨 스승님이야. 그러지 말고 여보 당신으로 하란 말이지. 그리고 공부라는 것이 반드시 문자를 읽으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자연의 이치에 따라서 아기를 잉태하고 낳고 키우면서 배우는 것도 얼마나 큰 공부인 줄은 아니까. 절대로 서두를 것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는 것이야.”

알았어요. 그런데 아기 이름은 지었어요? 이제 산월(産月)인데 이름은 지어놔야 하잖아요?”

그럴까? 뭐라고 부르고 싶은지 어디 말 해봐. 나는 무심한 아비인지 이름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네. 하하~!”

그야 당연하죠. 날마다 제자들을 걱정하시느라고 어디 아기 이름이라도 지을 여유가 있겠어요? 만약에 딸을 낳는다면 지연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어요. 어려서 이웃에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있었는데 이름이 지연이었거든요. 예쁘고 총명해서 항상 붙어 다녔는데 백부를 따라서 소주로 오는 바람에 아쉽게 헤어졌거든요.”

우창은 서옥의 말을 들으면서 지연의 한자를 생각해 봤다. 이것은 습관이었다. 어감은 괜찮아서 글자만 찾으면 좋은 이름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문득 서옥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그래? 듣기 좋은데? 글자는 무엇을 쓰고 싶은지도 말해 봐.”

그 언니는 뜻 지()에 넘칠 연()이었거든요. 이 글자들은 어떨까요?”

오호~! 사심수행(士心水行)이라~ 좋은걸.”

? 그건 무슨 뜻이에요? 지연이라고 하고 싶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야. ()는 선비의 마음이고, ()은 물이 흘러가는 형상이잖아? 이것이야말로 우창의 딸에게 썩 어울리는 이름이지 않은가? 나는 아들이면 오행(五行)이라고 하고 딸이면 음양(陰陽)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여하튼 지연에도 행()이 들어있으니 의견에 일치를 본 것으로 해도 되겠어. 하하~!”

뭐예요? 호호호~!”

우창의 너스레를 듣고 서옥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트렸다. 그것을 보면서 우창이 말했다.

그럼 아들의 이름도 지어놨겠구나? 어디 그것도 들어볼까?”

아들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줘야 하지 싶어서 말하지 않을래요. 어디 어떤 이름을 붙여주고 싶은지 말해봐요.”

우선 서옥의 의견을 먼저 들어봐야지. 나는 이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거든. 내가 좀 무심한가?”

그렇잖고요. 호호호~!”

아들 이름은 뭐야?”

일석이라고 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듣고 웃으실까 봐 걱정스러워요. 호호~!”

? 일석이라니? 무슨 글자지?”

한 일()에 돌 석()이죠. 우습죠?”

서옥의 말을 듣고서 우창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아찔함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서옥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아마도 깊은 뜻이 있겠지 싶은데 그 말도 들어야 하겠구나.”

사실은 이렇게 생각했는데 혹시라도 물어주지도 않고 당신이 알아서 이름을 지으면 살짝은 서운하겠다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해 주니 너무 좋아요. 서옥이 생각한 이름이 하찮으면 다른 이름으로 멋지게 지어주셔도 되니까 괘념치 않아도 되거든요. 호호~!”

알았네. 여하튼 왜 일석인지 의미를 들어봐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 어서 말을 해 봐.”

옛말에 아이는 작게 낳아서 크게 키우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아들이라면 하나의 돌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돌을 잘 다듬으면 멋진 수석(壽石)이 될 수도 있고, 아무렇게나 둔다면 길가에 굴러다니면서 이리저리 발끝에 걷어채는 작은 돌멩이가 될 수도 있겠죠? 그리고 부모가 얼마나 정성들을 들이느냐에 따라서는 태호석(太湖石)과 같은 멋진 돌이 될 수도 있겠고요. 왕궁의 뜰에서 사랑받는 것도 결국은 돌 하나니까요.”

서옥의 말을 들은 우창은 말없이 서옥을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기조차 했다.

아니,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했었어? 물어보지 않았더라면 많이 섭섭할 뻔했구나. 듣고 보니 귀한 아들에게 그보다 더 좋은 이름도 없을 것으로 생각되는군.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지. 나도 맘에 들어. 일석이라.....”

우창이 너무 쉽게 말하자 서옥은 약간 걱정스러워서 다시 물었다.

아니에요. 그냥 생각이 얕은 여인네의 말일 따름이니까 학자이신 아버지가 더욱 깊은 뜻이 있는 이름을 지어주셔야죠. 안 그래요?”

아니야. 당신의 이름이 최은주(崔銀珠)이니 은구슬이잖아. 은구슬도 따지고 보면 돌 하나와 같잖아? 거기에다가 서옥(瑞玉)도 옥이니 또한 돌이구나. 이렇게 놓고 보니까 완전히 돌밭이로군. 하하~!”

어머, 그렇게 되나요? 호호~!”

오행으로 본다면 돌이나 은이나 옥이나 모두가 금()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당신이 낳은 아들의 이름이 돌 하나라고 하니까 얼마나 재미있고도 소박하냔 말이지. 그래서 맘에 들었던 거야. 이제 당신이 내 일을 하나 덜어 줬으니 그것은 덤으로 고마울 따름이네. 하하하~!”

이렇게 말하면서 서옥을 껴안았다. 우창의 말을 듣고서 감동을 한 듯이 서옥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렇게까지 말을 해 주니까 감동이에요. 그냥 아녀자가 무엇을 알고 나서느냐고 해도 그렇겠거니 할 텐데 귀한 자식의 이름조차도 서옥에게 지으라고 하고 그것을 흔쾌히 받아들이니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요. 이런 일도 아마 흔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죠?”

서옥이 기뻐하면서 우창에게 묻자 우창이 서옥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않아? 열 달이나 되도록 태중의 아기를 키우느라고 고생했는데 앞으로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모두가 당신의 일이니 그 수고로움이야 말을 해서 뭘 하겠느냔 말이지. 더구나 항상 옆에서 불러줘야 할 이름인데 당신이 부르고 싶은 이름이면 그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 또 있겠어.”

 

 

서옥은 우창이 자기의 입장을 잘 헤아려 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울컥했다. 우창의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아서 더 공부하라고 하고는 침소로 들어가자, 우창은 다시 책상에 앉아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