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 제43장. 여로(旅路)
10. 강서반점(江西飯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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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곱게 물들 무렵에 일행이 다다른 곳은 ‘가흥현(嘉興縣)’이라고 하는 제법 큰 고을인데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가기로 하고 객잔을 찾아서 여정이 말을 세운 곳을 내다보니 그곳에 있는 객잔은 상호가 강서반점(江西飯店)이었다. 번화한 거리를 비켜나서 조용해 보이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규모도 크고 화려해 보였다. 마차에 내려서 점원에게 깨끗한 숙소를 부탁하자 3층의 객실로 안내받았다. 여장(旅裝)을 풀고는 시장하던 김에 저녁을 푸짐하게 시켜놓고 천천히 담소하면서 즐겼다.
우창이 밥을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자 마침 계산대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서 차를 앞에 놓고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대략 60대 중반의 초로(初老)였는데 손에 들고 있는 책의 표지를 보니 이름이 『삼명통회(三命通會)』였다. 개 눈에도 먹을 것은 잘 보이듯이 학자의 눈에는 문자(文字)가 보이기 마련인데 하물며 그 책의 이름이 삼명통회라니 우창이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넓은 객청에는 저녁밥을 먹는 사람들로 제법 북적였다. 그래서 점원에게 맛있는 음식을 물어서 주문하고는 먼저 가져온 차를 마시면서 잠시 쉬었다. 자원이 한 바퀴 둘러보고는 분위기가 꽤 차분하고 고상한 느낌이어서 좋았던지 맘에 들어 하면서 말했다.
“싸부, 객잔이 꽤 괜찮아 보이잖아요? 기품이 느껴져요. 주인장이 장사만 하는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여요.”
“자원도 그렇게 보았구나. 내가 봐도 분위기가 좋아서인지 독서를 즐기는 사람도 보이는군. 무슨 책을 보고 있는지 알게 된다면 아마도 더욱 감탄할 것이네만. 하하하~!”
우창의 말에 자원이 찬찬히 둘러보다가 계산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자에게 눈길이 머무르자 문득 일어나서 호기심으로 다가갔다가 삼명통회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아니, 삼명통회를 읽고 계신 거예요? 귀한 책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명학(命學)을 연구하시나요? 반가워요. 호호~!”
남자는 자원의 말에 깜짝 놀라면서 책에서 눈을 떼면서 말했다.
“아니, 낭자가 이 책을 어떻게 알아본단 말이오? 혹 팔자를 공부하셨소?”
“맞아요. 스승님을 모시고 유람을 나왔는데 객잔의 분위기가 그윽해서 들어왔잖아요. 호호호~!”
그 사람이 응대해 주자 자원도 신나서 자랑삼아 말했다. 자원의 말에 그도 우창의 일행을 보면서 목례(目禮)했다. 나중에 조용하면 이야기를 나누자는 듯이 손을 흔들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줬다. 자원도 더 말을 시킬 상황이 아니어서 얼른 돌아와서 우창에게 말했다.
“싸부, 삼명통회를 보신 적이 있어요? 나는 이름만 들었고 책을 본 것은 처음이네요.”
“응, 태산(泰山)에는 천하의 진귀한 책들이 다 있거든. 그래서 그때 책들을 살펴볼 적에 삼명통회도 있어서 뒤적여 봤었지. 다만 깊이 연구하지는 않았어. 그러기에는 책이 너무 많고 또 당시에는 나도 아는 것이 없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보게 되겠거니 했었지. 하하~!”
“그래요? 그럼 잘 되었네. 며칠 묵으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어요. 그렇죠?”
자원이 우창에게 동의를 구하듯이 말하자 우창도 구태여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말했다.
“좋겠군. 나도 의외이기는 하네. 하하~!”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삼진이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 명서(命書)에는 어떤 것이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습니까? 주역(周易)에는 공자가 지었다는 십익(十翼)이 있습니다만, 명서는 겨우 오행원에서 알게 된 적천수(滴天髓)가 전부인지라 그것도 궁금합니다. 견문을 넓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삼진의 말에 우창이 답했다.
“아, 명서의 종류야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고 해야 하겠지. 그중에는 반짝이는 보석같은 것도 있고, 먼지를 뒤집어쓰고 학자의 소중한 시간만 죽이는 것들도 있다고 하겠는데, 안목(眼目)이 넓으면 알아서 판별할 것이고 좁으면 눈앞에 있는 것에 정신을 빼앗겨서 허망한 이론들에 파묻혀서 하염없는 시간을 허우적거리며 보낼 수도 있지.”
“참으로 안내자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새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삼명통회는 어떤 책입니까?”
“천천히 저 책을 읽고 있는 어르신과 대화를 나눠볼 수도 있을 테니 직접 들어보도록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나? 하하~!”
우창이 이렇게 대답하자 삼진도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직접 공부하는 사람에게 묻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우창은 저녁을 든든하게 먹고서 어둠이 내린 바깥의 풍경이 잘 내다보이는 객사(客舍)의 침상에 누워서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점괘가 잘 나와서 소주 자사인 최도융(崔道融)에게 서찰(書札)은 들려 보냈으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괜히 남의 일로 인해서 그렇지 않아도 공무를 처리하느라고 바쁠 텐데 일을 만들어서 번거롭게 하는 것이나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또 당장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서 도울 길이 있는데 그냥 모른척하기도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자,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나직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점원이 과일과 마실 술을 들고 나타났다. 그 뒤에는 저녁 먹으면서 봤던 남자가 서 있다가 우창을 보고는 포권(包拳)을 하고 말했다.
“손님께서 쉬시는데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소만, 괜찮으시면 다과(茶菓)를 드시면서 담소나 나눌까 싶어서 올라왔소이다.”
우창이 얼른 일어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객실은 넓어서 큼직한 탁자(卓子)에 의자도 8개나 놓여 있어서 일행을 불러 모아도 되지 싶어서 모두 오라고 한 다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소생의 이름은 왕회(王淮)라고 하는데 괜찮으시다면 문귀(文鬼)라고 불러주시겠소? 허허~!”
“아, 왕 선생이셨군요. 반갑습니다. 아호를 들으니 얼마나 서책을 좋아하시는지 저절로 알겠습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야 뭐 항상 하는 일이 책이나 읽으면서 소일하는 것이니 힘든 것도 없소이다. 그보다도 젊은 나그네가 오행을 공부하신다니 그것이 반가웠는데 어떤 공부를 하는지 몰라도 깊어 보이는 표정에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에 잠이 오질 않아서 이렇게 결례를 무릅썼소이다. 허허~!”
주객이 자리에 앉자, 자원과 삼진도 들어와서는 차를 갖다가 따라줬다. 삼진도 궁금한 것이 많았던 참인지라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는 옆에 앉아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문귀는 이 고을에서 작은 관직을 맡아서 일하는 틈에 시간이 나면 독서를 즐기고 있다오.”
“아, 그러시다면 현령(縣令)이시군요. 왕 현령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소생은 소주에 은거하고 있다가 바람이라도 쐬려고 나들이를 나섰습니다. 마침 항주로 가는 길에 주변 풍경이 좋아서 하루 쉬어가려고 들렸는데 귀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큰 복인가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우창의 말에 문귀는 밖을 향해서 말했다.
“여보게~!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되었으니 술이라도 대접해야 하겠네. 주안상을 차려오도록 해라~!”
우창은 자원이 큰 객실을 빌리게 된 선견지명에 내심 감탄했다. 마치 준비라도 해 놓았었다는 듯이 얼마지 않아서 거하게 한 상이 차려진 채로 두 사람이 들고 들어와서는 방의 한가운데에 차려놓고는 물러갔다.
문귀는 손님을 청한 입장이 되어서 여정에게까지 술을 따라주고는 각자 알아서 마시도록 하고 첫 잔은 건배했다.
“이렇게 생면부지(生面不知)로 만났으나 순식간에 지기(知己)가 되었으니 어찌 축하하지 않을 수가 있겠소. 자 우선 한 잔 듭시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환대를 해주시니 염치없지만 받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한 순배(巡杯)가 돌아가고 나자, 문귀는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이 우창에게 물었다.
“그래, 풍모만 봐도 첫눈에 학자의 자태임은 알겠소이다. 그래 소주에서는 무슨 학문을 펼치고 계시오?”
“아직 견문이 부족하여 깊은 깨달음은 얻지 못하고 단지 간지(干支)의 이치를 살피다가 근래에는 이에 관심있는 몇몇 사람들을 모아놓고 노닥거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문귀 선생께서는 공무를 보시면서도 명학에 심취하고 계신 듯하여 감탄했습니다. 그 책은 어떻게 보게 되셨는지요?”
우창은 자기 이야기보다 문귀의 내력이 궁금해서 질문을 돌려서 되물었다. 문귀도 그렇게 물을 것을 예상했다는 듯이 손에 들었던 술잔을 비우며 말했다.
“아, 삼명통회 말이오? 허허허~!”
“예, 그렇습니다. 연해자평(淵海子平)을 읽는 학자는 가끔 뵈었습니다만, 삼명통회를 읽는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무척이나 귀한 책을 보고 계시기에 내심으로 귀한 가르침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미 책의 표지는 검게 변한 것으로 봐서 얼마나 열심히 읽으셨는지 능히 짐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과연 안목이 예리하시오. 허허허~!”
문귀는 가볍게 받아주고는 우창에게 물었다.
“같은 학문을 추구하는 동도(同道)이니 허심탄회하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소이다. 답이 가능하면 주시고 아니면 불가하다고 해도 그만이니 편하게 들어주셨으면 좋겠소이다.”
“무슨 말씀이든 편하게 하십시오. 소생도 지견이 부족하여 미처 모르는 것이야 당연히 모른다고 말씀 올리겠습니다. 우창이라 불리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여쭙겠소. 실은 내가 흉운을 타고 있음에도 이렇게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마 지키고 있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오. 생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은 것이야 다행이라는 생각도 없진 않소만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은 까닭에 그 연유를 찾아보려고 책을 뒤적이고 있었소이다. 그런데 이것이 화두가 되어서 책을 읽어도 머리에 들어가질 않는구려.”
이렇게 말을 마친 왕 현령은 종이에 자신의 명식을 적었다.
“못난 명식은 이렇소이다. 올해 회갑(回甲)이니 61세이고, 대운(大運)은 육운(六運)이니 갑인(甲寅)대운의 인목(寅木)에 머물러 있는 것이오. 아무래도 일간이 허약(虛弱)하니 용신은 연지(年支)의 편인(偏印)에 있는 것이 틀림이 없잖소?”
“맞습니다. 우창이 보기에도 그렇게 살펴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시오. 대운이 이렇게 상관(傷官)운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고서의 내용이 틀리지 않았다면 관재구설이 생기든지 상부(上府)로부터 질책당하거나 뭔가 불미(不美)스러운 일이 발생해야 할 텐데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으니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납득이 되지 않더란 말이오.”
우창은 현령의 말을 들으면서 오랫동안 그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고심했었다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었다. 말하는 모습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길흉(吉凶)을 예상했는데 그것이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 범인이라면 흉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버리겠지만 학자는 길하거나 흉하거나 상관없이 그 결과가 예측한 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가 없기에 이러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는 걸 알고는 내심 기뻤다. 학문을 진지하게 토론할 인연이 된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창은 말씀을 듣고서 실로 감탄했습니다. 현령 나리의 탐구심(探究心)에 대해서 말입니다. 과연 식신(食神)을 깔고 있는 사주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런 말씀 마시오. 게으르지 않고 연구했음에도 내 팔자에 대한 의문조차도 해소되지 않으니 어찌 공부가 되었다고 하겠소이까? 그냥 책을 덮어 버릴까도 생각했소만 그래도 무슨 미련인가 남아서 계속 들여다보기는 하나 의문은 장마철에 먹구름이 모이듯이 계속 쌓여가기만 하니 말이오.”
우창은 현령의 솔직한 고민에 공감했다. 그것은 우창도 항상 느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이도 많이 살아왔으나 학문에서는 세간의 나이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렇게 진지한 모습에 여정도 감동이 되었는지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자자~! 음식도 드시면서 이야기를 나눠야지. 허허허~!”
자신의 이야기에 다들 숙연해지자 분위기를 풀려는 듯이 웃으며 음식을 권했다. 우창은 문득 삼진에게 설명해 줄 적천수의 다음의 대목이 이와 유관(有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책을 믿는 사람에게는 책으로 답을 주는 것이 바로 최선인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우창이 적천수를 꺼냈다. 객잔 주인도 현령이 와서 손님과 담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지 차가 식지 않도록 배려해서 끓는 물을 준비해 줬다. 우창이 차를 마시고는 책을 펼쳤다.
“이 책의 내용은 현령 나리께서 열심히 읽고 계시는 삼명통회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대운이 맞지 않아서 고민하신다는 말씀을 들으니 문득 우창이 예전에 고민했던 것도 떠올라서 이 책을 꺼냈습니다. 우창은 이러한 내용을 보고 나서 대운의 존재에 대해 회의심을 갖게 되었지요. 부족하나마 내용을 살펴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창의 말에 현령은 소스라쳐 놀라는 표정이었다.
“아니, 뭐라고 하셨소? 대운의 존재라니? 지금 자평학(子平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맞소?”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대운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단 것이오?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뿐더러 무슨 공부를 하였기에 그런 사악(邪惡)한 글을 읽고 있단 말이오?”
현령이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자평학이 정립된 송대(宋代)부터 항상 명조(命造)에 붙어 다니는 대운이기 때문이었다. 마치 사주가 몸이라면 대운은 옷이라도 되는 듯이.
“난, 혹시 잘못 들었나 싶었소이다. 설마하니 이 늙은이를 놀리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오만 어찌 그런 말을 하는지 참으로 의아(疑訝)하구려.”
열정적으로 삼명통회를 하늘처럼 떠받들면서 오랜 세월을 연구한 현령은 꿈에서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말을 우창으로부터 듣고는 귀를 의심하는 듯이 말했다. 그 표정을 보면서 우창도 잠시 말을 멈추고 차를 다시 마셨다. 자칫하면 현령이 우창의 말을 수긍하지 않기라도 하고서 혹시라도 어떤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문득 진노(震怒)하여 위해(危害)를 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창도 처음에는 당연히 대운을 감안하여 길흉을 판단했습니다. 다만, 뭔가 남의 다리를 긁는다는 생각이 들면서 의심하게 되었고, 이러한 구절을 발견하고서 비로소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자원은 문득 노산에서 고월과 우창이 함께 공부할 적에 대운에 대해서 논의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에 스스로 놀랐던 감정을 지금 현령이 그대로 느끼고 있을 것이라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공감하게 되자 조용히 그 변화를 지켜보며 미소를 지었다. 책을 펴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본 주인이 등불을 세 개나 가져다가 밝혀놔서 방은 대낮처럼 밝았다. 우창이 책을 펼쳐서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대목은 적천수에 나오는 「간지총론(干支總論)」입니다. 원문(原文)과 주석(註釋)이 있으니 원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참, 그 전에 먼저 현령 나리께 여쭙고자 합니다.”
우창이 펼쳐놓은 책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던 현령이 갑자기 묻는다는 우창의 말에 흠칫 놀라며 말했다.
“그야 무엇이든 물어보시오.”
“현령 나리께서는 포태법(胞胎法)을 알고 계시는지요?”
우창이 정중한 어조로 말하자 현령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데 현령 나리가 무엇이오. 지금은 동학(同學)으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냥 문귀로 불러주시구려. 허허허~!”
우창도 ‘현령 나리’라고 하는 것이 불편했는데 그것을 알았는지 호칭을 말하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문귀 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하하하~!”
이렇게 말하고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문귀 선생의 생각으로는 오행(五行)의 음양(陰陽)은 같이 생겨나고 또 같이 사라지는 의미의 동생동사(同生同死)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음생양사(陰生陽死)하고 양생음사(陽生陰死)하듯이 양이 생하면 음이 죽고 음이 생하면 이번에는 양이 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우창이 이렇게 묻자, ‘그것은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우창을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포태법의 이치가 바로 ‘음생양사’라는 것은 이 학문에 입문한 사람은 처음 입문자라도 다 알고 있는 것인데 새삼스럽게 무슨 말이오?”
“그렇습니다. 초보라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이 어떤 원리와 이치에 의해서 작용하는지는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창도 처음에는 그대로 적용하고 당연히 그렇겠거니 했습니다만 점차로 경험이 쌓이면서 적용할 필요가 없는 것과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포태법은 적용할 필요가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로 적용하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삭제해야 할 이론이라고 봐야 합니다.”
우창이 조용조용히 말하다가 갑자기 강경한 어조로 변해서는 버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현령은 내심 놀랐듯이 잠시 우창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그것을 본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그러한 허실(虛實)에 대해서 궁리하느라고 적지 않은 시간을 허비했습니다만 이제 명쾌하게 결론을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하하~!”
우창의 말을 듣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현령이 물었다.
“아니, 생(生)이 양(陽)이라면 사(死)는 음(陰)이잖소? 그러니까 양이 생하면 음이 사하는 양생음사(陽生陰死)의 이치가 왜 틀렸단 말이오?”
현령의 말투는 강경했지만 느낌은 올바른 이치를 추구하는 염원이 그 안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참으로 멋진 말씀이십니다. 다행히 후배가 그에 대해서 언급을 드릴 수가 있으므로 부족하나마 약간의 설명을 해 드리고자 합니다.”
“참으로 궁금하외다. 어디 귀를 기울여 보겠소.”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은 자평학의 핵심은 오행(五行)에 있는 것이지 음양(陰陽)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역경(易經)은 그 핵심이 음양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겠습니다만 자평은 오행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문귀 선생이 어찌 생각하십니까?”
“그것도 그렇소. 음양오행은 같은 집 안에서 나온 한 뿌리가 아니오? 그것을 구분해서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아닙니다. 가령 한 밥상에 고기와 나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같은 뿌리로 둘 수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음양과 오행은 서로 전혀 다른 곳에서 탄생해서 지금은 같은 집에서 머물게 되었으나 그 뿌리는 여전히 다른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족(漢族)과 묘족(苗族)이 같이 산다고 해도 묘족이 한족으로 변할 수가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그야 그렇겠소이다. 그렇다면......”
문귀가 말꼬리를 흐렸다. 듣고 보니 우창의 말도 일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우창은 잠시 틈을 두느라고 차를 한 잔 마셨다. 학문을 토론할 적에는 감정을 풀어놓는 술보다는 차분하게 만들어 주는 차가 더 좋았기 때문이다. 현령이 다시 물었다.
“듣고 보니 자평은 오행을 위주로 한다는 것에 동의해야 하겠소이다. 그렇다고는 하나 분명히 음양의 이치도 함께 적용하는 것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지 않소? 갑(甲)이 양이면 을(乙)은 음이듯이 말이오.”
“당연합니다. 다만 우창이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갑양을음(甲陽乙陰)만 생각하느라고 갑을동목(甲乙同木)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기세가 등등하던 현령도 갑을동목이라는 우창의 말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현령이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는 것을 본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도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러니까 오행을 바탕으로 삼고 연구하는 자평의 이치에 음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역경의 논리가 끼어들어서 분탕질을 치고 있어도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하고 있으며 혹은 막을 생각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학문에 열중하시는 문귀 선생이 아니라면 누가 귀나 기울이겠으며 ‘무슨 헛소리로 망발(妄發)이냐!’고 힐난(詰難)하기가 십상이니 말입니다.”
“그건 그렇겠소.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오. 그렇다면 오늘 문귀가 제대로 가르침을 받겠소이다. 아니 지금 시간이 너무 늦은듯하니 내일 다시 찾아오는 것이 어떻겠소? 이렇게 귀한 가르침을 그냥 놓칠 수는 없으니 반드시 까막눈인 나를 개안(開眼)시켜 줘야 하겠소만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이 혹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그 점이 좀......”
문귀는 객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예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우창은 현령의 그러한 심중을 헤아리고도 남았다. 그래서 바로 흔쾌히 말했다.
“문귀 선생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창도 배우고자 하는 것이 많은 까닭에 반드시 가르침을 청하러 현청(縣廳)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공무에 분주하실 텐데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창이 이렇게 약속하자 현령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과연~!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대했소이다. 내일 진시(辰時)에 현청으로 방문해 주시오. 관사(官事)야 항상 있는 일이니 잠시 뒤로 미뤄도 큰 탈이 나지 않는 까닭에 그것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겠소. 허허허허~!”
현령은 흡족한 듯이 웃으며 내일 보자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여정이 문밖까지 배웅하고는 돌아와서 말했다.
“스승님, 문 앞에는 사륜마차(四輪馬車)가 대기하고 있으며 관원들이 창을 들고 경계하고 있는 것이 삼엄했습니다. 내일 동헌(東軒)에 가셨다가 혹시라도 현령의 심기를 건드려서 스승님께 불상사가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정의 말을 듣고서 자원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 여정은 그들을 보면서 걱정이 되었던 게로구나. 호호호~!”
“그게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의 맘에 안 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 관리(官吏)란 말이지요. 누님도 세상의 물정을 모르십니다.”
자원의 말에 도리어 핀잔하는 여정을 보며 우창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말없이 듣고 있던 삼진이 여정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네. 자고(自古)로 학문을 중히 여기는 사람은 자잘한 예의는 괘념(掛念)치 않으니 말이지. 더구나 현령의 인품은 이미 대화를 통해서 가늠할 수가 있지 않았나? 하하~!”
삼진의 말을 듣고서야 여정도 마음이 놓이는지 조용히 한쪽에 앉았다. 그것을 본 자원이 우창에게 말했다.
“그런데 싸부, 우리도 같이 간다는 말은 하지 않았는데 같이 가도 되겠죠?”
“당연한 이야기를 하시네. 무슨 사생결단을 내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토론인데 문귀 선생도 그것을 싫어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참 아호가 왜 그렇게 생겼을까요? 문귀(文鬼)라면 ‘글 귀신’이라는 뜻이잖아요? 아호라고 하지만 참 특이하네요. 호호~!”
자원이 웃으며 말하자 우창도 자원에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왜 그런 말이 있잖은가. 술이 너무 좋아서 술독에 빠져 죽어도 좋다는 말 말이네. 글이 너무 좋아서 죽어 귀신이 되어도 글과 함께 살아갈 수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봐야지. 그래서 나도 현령에게 한 수라도 가르쳐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기도 하고.”
“아하~! 그러셨구나. 역시 싸부는 사려가 깊으시니까. 호호호~!”
“자 그만 오늘은 쉬도록 하지. 내일 또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고 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