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팔괘를 두 번 겹쳐 64괘를 만들어서 배열했다.

작성일
2013-07-11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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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팔괘를 두 번 겹쳐 64괘를 만들어서 배열했다.
 
 
 
 
 
 
  여덟 가지의 괘상만으로는 인간사의 복잡다단한 상황들을 모두 나타내가 어려웠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것을 겹쳐서 64괘로 만들 생각을 했는데 이것은 복희씨가 생각한 것이 아니고 문왕의 발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복희씨의 시대에는 단순하게 여덟 가지의 조짐만 알 수가 있어도 살아가는데 별 불편함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점차로 문명이 발달하면서 훨씬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 조짐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확장성이 요구되었을 것으로 짐작을 해 본다.
 
  그리고 가장 간단한 방법을 찾았으니 위아래로 겹치게 되면 상당히 다양한 상황을 읽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이렇게 겹치는 기술은 사주학에서도 그대로 응용이 된다. 처음에는 띠로만 운명을 읽다가 점차로 삶이 복잡해 지면서 계절을 추가하게 되고 다시 날짜까지도 고려하게 되어가면서 급기야는 태어난 시간까지도 감안하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인해서 60갑자는 네 번의 겹침이 생긴 것과 서로 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60갑자는 네 번을 겹치게 되면서 28만여 가지의 형태를 만들었는데 팔괘는 두 번을 겹치면서 64괘로 만들었으니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면 네 번을 겹친 것이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64괘를 그냥 대입하는 것이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지 이것을 다시 64번 겹치는 방법을 생각한 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초씨역림(焦氏易林)을 창안한 한대(漢代) 초연수(焦延壽) 선생이다. 그러고 보면 한대에는 주역의 상당히 다양한 관점으로 재해석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양웅(楊雄)의 태현경(太玄經)이 탄생하게 된 것도 한대이기 때문이다. 초씨역림으로 인해서 64괘에서 4096가지로 늘어나게 되었다.
 
  한나라에서는 문자도 다양하게 만들어졌던가 보다. 그래서 오죽하면 중국의 문자 이름이 한자(漢字)이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능히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렇게 한대(漢代)에 대한 우월감으로 인해서인지 중국의 주류는 한족(漢族)이고 중국의 중심 언어는 한어(漢語)가 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한(漢)이 대단했으면 우리나라에서도 중심을 타고 흐르는 강의 이름조차도 한강(漢江)이었겠는가 싶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한반도에서도 한의 그림자는 피할 수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수도(首都) 이름도 한양(漢陽)이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한강의 양지쪽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대단한 '한(漢 )'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겠다는 짐작을 해 보는 것이다.
 
                                                                           
 
  이렇게 건괘(乾卦)를 겹쳐놓았다. 그리고 건괘를 두 번 겹쳤으므로 이름은 중천건(重天乾)이다. 의미를 생각해 보면 '겹쳐진 건괘'라는 뜻으로 이해를 하면 되지 싶다. 그렇다면 곤괘를 겹치면 그 이름은 중지곤(重地坤)이 될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가 있겠는데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부른다. 그러니까 적어도 64괘 중에서 여덟 개의 괘상은 거저먹기로 외울 수가 있겠다.
 
  쉽게 생각하면 하늘이 겹쳐 있으니까 그 의미를 생각한다면 '매우 높은 하늘'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실상 그러한 이야기는 없다. 주역에서 해석을 보면 하늘이 겹쳤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니까 겹쳐서 나온 결과물은 겹치기 이전의 의미에서 벗어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마치, 팔괘가 탄생한 것은 사상(四象)이지만 실제로는 팔괘의 해석에서 그러한 과정의 의미는 사라지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니까 64괘는 팔괘에서 나왔지만 실제로 해석을 하는 과정에서는 삼효(三爻)의 팔괘 의미보다는 육효(六爻)로 된 새로운 관점을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건괘를 겹쳐서 중천건이라고 했듯이 곤괘를 겹쳐서 중지곤(重地坤)이라고 한다. 그런데 해설서에 따라서는 중곤지(重坤地)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뭔가 착오로 써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64괘의 명칭을 보면 건괘나 곤괘는 있어도 천괘나 지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없이 무심코 써놓은 것으로 인해서 후학은 또 혼란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낭월도 아직 무심코 중곤지라고 하는 말이 튀어나오니 직접적인 피해자이기도 한 셈이군.


                                    
 
  이렇게 나머지의 여섯 괘도 서로 겹쳐서 나타게 되고 각각의 명칭은 앞에서와 같이 중뢰진, 중산간, 중수감, 중택태, 중풍손, 중화리로 이해하면 간단하게 정리가 된다. 이렇게 겹쳐서 완성이 된 64괘는 다음과 같다.
 

 
  이렇게 겹쳐서 64괘를 만든 다음에는 팔괘의 의미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관점으로 6효의 분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풀이해 놓은 것이 주역이 된다. 그래서 하늘 위에 연못이 있든 말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든 모양이다. 그것은 팔괘에서나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64괘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다. 배열을 한 것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훑어보면, 인생적(人生的)인 관점으로 배열했다는 것을 살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배열한 것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서괘전(序卦傳) 이다. 일반적으로는 서괘전을 공자가 지었다고 전한다. 아마도 공자가 지었다고 한다면 그의 생각대로 괘를 나열한 것이 맞을 것이다. 당연히 배열은 자신의 관점으로 정해지기 마련인 까닭이다.

 
  가령 가정에서도 서열이 있는데 딸이 생각하기에는 '엄마, 아빠, 나, 강아지'가 되겠지만 강아지의 생각에는 '아빠, 엄마, 강아지, 딸'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는 점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도 이러한 것으로 인해서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공자는 항상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의 생각은 《논어》를 통해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심지어 죽은 다음의 세계를 논하는 종교적인 관점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얼마나 인본주의(人本主義)였는지를 짐작하는데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한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하늘과 땅이 있고 나서 만물이 생겨나듯이, 부친과 모친이 있고 나서 자식이 태어난다는 관점으로 주역을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기에 최우선에다가 아버지인 건괘(乾卦)를 놓고 그 다음에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어머니인 곤괘(坤卦)를 놓았을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자식이 태어날 것이므로 준괘(屯卦)를 배열하고 자식이 태어나면 모르는 것이 많아서 어리석다고 봤기에 몽괘(蒙卦)를 배열하였으니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살펴보면 64괘를 모두 살펴보지 않아도 대략 편집한 사람의 관점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여권운동가(女權運動家)의 손에서 배열되었다면 두 번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곤괘가 맨 앞에 놓이고 그 다음에 건괘가 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이유도 분명히 설명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땅이 있고 만물이 존재하는 것이지 하늘의 의미가 그맇게 중요하냐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있어야 아버지가 씨를 뿌려서 자식이 태어날 수가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서로 소통이 되는 의미이다. 이렇게 여권주역(女權周易)을 쓴다고 해서 어느 누구라서 강력하게 아니라고 반박을 할 수가 있으랴..............
 
  그리고 낭월도 여권운동가의 주장에 한 표를 주고 싶은 것은, 충분히 배열에서 곤괘가 맨 앞에 나와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노자가 배열을 했다면 어떻게 했을런지도 궁금하고, 장자가 배열했다면 어떤 그림이 나오게 되었을지도 궁금하다. 어떻게 배열을 해도 주역이 되겠지만 인간적으로 배열하면 지금의 주역의 배열이 될 것이고, 철학적으로 배열하면 건괘가 맨 앞이 되고 곤괘가 맨 뒤가 될 것이다. 또는 곤괘가 맨 앞이 되고 건괘가 맨 뒤가 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배열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던 학자는 과거에도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송대의 소강절(蘇康節)도 순서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었다고 하고, 명말청초의 왕부지(王夫之)도 논리적으로 배열을 살펴봤을 적에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만든 것으로 봐서 공자의 저작이 아니라고 하는 의문을 강하게 제기했던 것을 보면 과연 이 배열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의문을 갖을 만큼의 문제점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 싶다.
 
  그런가하면 원대(元代)의 소한중(蕭漢中)도 괘의 배열에 대해서 살펴봐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이야기 한 것으로 봐서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들을 갖고 기본형의 배열에 대한 의문들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대해서 낭월이 어떤 소견을 첨부하는 것은 외람(猥濫)됨을 알겠으니 이렇게 선현들의 의견을 살펴보면서 생각을 해 보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학자들이 의문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주역상씨학》의 저자인 상병화(尙秉和)는 그의 서괘전 주석에서 '성인께서는 후세에 망녕되이 순서를 뒤섞어서 혼란스럽게 할 것을 염려하여 서괘전으로 꼭꼭 묶어 둔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이미 배열에 대해서 제각기 자신들의 의견을 첨부하여 함부로 해석하는 것이 만연해 있었다는 의미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모든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배열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본다.
 
  여기에 대해서 낭월의 소견으로는, 철학적으로 풀이를 하려면 서열에 비중을 두고 관찰을 할 필요가 있지만, 점괘에 비중을 두고 풀이한다면 서열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까 괘의 순서에 집착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철학적으로 주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 자신의 생각을 빌어서 괘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지 정작 괘 자신은 그러한 뜻이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바탕에 자리잡고 있다.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설명을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64괘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알아보면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즉 64의 본체는 팔괘이다. 우선적으로 팔괘에서 어떤 순서에 대한 의미가 없다면 64괘에서도 그러한 의미는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쥐띠 다음에 소띠가 되는 이유를 철학적으로 풀이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팔괘조차도 사상(四象)에서 음양으로 나뉜 것을 갖고 각기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 실제로 순서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아니므로 또한 배열법에 대해서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봐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다면 태괘(兌卦)가 연못이든 구름이든 하등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된다. 따지고 보면 태괘가 건괘에서 상효(上爻)가 변화했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리는 있지만 실제로는 건괘(☰)와 태괘()는 모두가 태양() 에서 분화(分化)한 음양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태괘가 연못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은 구름이라고 한다고 해도 안 될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자신의 생각에 자꾸만 이유를 붙이면서 타당함을 주장하는 것이 바로 학자의 옹졸한 관념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본다. 이러한 생각들이 사색의 길을 가로막기도 하겠지만 또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도 할 것이므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리고 더 소급해서 올라가면, 태양(⚌)은 소음(⚍)과 함께 양(⚊)에서 음양으로 분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내는 것도 과히 어렵지 않다. 이렇게 되면 애초에  서열의 의미가 없는데 공자가 서괘전을 지어서 철학적으로 의미를 부여한 것은 그의 관점으로 주역을 바라 본 것이지 절대적으로 그렇게 나열하여 해석을 해야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싶다. 혹시 탈레스에게 주역의 배열을 해보라고 한다면 맨 앞에 어떤 괘를 놓을까? 벗님의 생각에는 어떨 것 같은가?
 
                                                           
 
  그렇다. 이것이 탈레스의 답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만물은 물에서 나왔다고 생각을 했을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물이 맨 처음에 나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호~ 이렇게 생각하다가 보니까 주역을 배열하는 방법에 따라서 수백 가지의 해설서가 나올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부처에게 물어보면 무슨 괘를 앞에 놓을까?
 
                                                             

  낭월의 생각으로는 문득, 중풍손괘를 앞에 놓지 않았을까 싶다. 바람처럼 인연따라 생멸하는 존재를 자연의 모습으로 읽었다면 바람으로 시작해서 바람으로 끝나는 나그네 같은 인생의 의미를 이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해 보는 것도 주역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누군가 중풍손괘를 뽑았을 적에 그 괘를 보면서 '바람처럼 떠나고 싶구나~!'라고 해석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주역은 주역이고, 직관은 직관이다. 주역의 그림을 바탕으로 삼아서 풀이를 해야 하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해설자의 관점에서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에 의해서 풀이가 되는 것이 더욱 신묘(神妙)한 것을 많이 경험하다가 보면 기본적인 의미는 하나의 지도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 지도책을 놓고서 자신의 여행 일정과 경험을 포함시켜서 설명하는 것은 전적으로 해설자의 역량(力量)에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상식과 지혜와 경험이 있는 사람의 해설은, 책만 읽은 사람이나 삶에 부댓끼면서 생존을 위해서 힘쓴 사람의 관점과는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많이 배우고 많이 듣고 많이 느껴가면서 실제로 체험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낭월의 주역공부도 이러한 과정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