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주역이 거의 절대적인 존중을 받고 있는 이유?

작성일
2013-06-10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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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주역이 거의 절대적인 존중을 받고 있는 이유?
 
 
 
 
 

 
  이런저런 의문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볍게 범접을 할 수가 없는 것은 수천 년의 세월동안 거의 절대적인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 같은 생각조차 들기도 하는 것같다. 이렇게 거룩하고 위대한 동양철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주역이 그렇게 존중을 받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해서 다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보게 된다.
 
 
1. 인간적인 관점에서 본 이유
  
  만약에 주역의 내부적인 구조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감히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라고 한다면 중국의 지배철학이 된 유교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진시황의 분서(焚書)에서 살아남은 것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철학적인 관점에서 보기보다는 점술서의 관점으로 봤을 가능성이 더 많았을 것으로 봐도 될 것인데, 그 후로 수 없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다듬어지고 재해석이 되면서 어느 사이에 제왕의 자리에 앉게 된 것이었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니까 유교의 석학(碩學)들은 하나같이 주역은 최상위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에 대해서 망설임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교주라고 할 수 있는 대성공자께서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하고 날개를 달았다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의 생각은 누구라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불교인이 자신의 깨달음이 부처보다 더 높다고 해 버리면 그 순간에 외도처럼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떠올려본 것이다.
 
  감히~~!
 
  이러한 분위기가 있는 환경에서라고 한다면 나름대로 약간의 의문점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자신의 생각을 밝혔을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은 유교의 경전에 목숨을 걸고 있는 추종자들의 시선에서 찍힐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러한 풍조는 지금에 와서도 그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당시의 분위기로 봐서는 역경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생각도 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낭월의 짧은 소견으로는 주역의 원래 뜻에 충실했던 학자는 소강절(蘇康節)이 아니었나 싶다. 그는 오로지 주역을 점술의 도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대에 서로 가까이 살았던 송대의 사대 현인으로 손꼽는 정이천(程伊川)은 이학(理學)의 관점으로 주역을 바라봤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간에 묘한 간극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소강절이 본 주역은 역경이 아니라 점술도구였을 것으로 생각해 본다.
 
  맹자(孟子)와 같은 철인(哲人)도 감히 성인(聖人)이라고 못하고 아성(亞聖)이라고 하는 분위기에서 본다면 공자의 권위에 대드는 듯한 언행은 쉽사리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정도는 누구라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본다면 공자의 권위가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본다.   
 
 
 2. 사유적인 관점에서 본 이유
 
   철학적으로거나 도학적으로거나 간에 주역을 놓고 명상하면서 자연의 이치를 궁리했던 학자들에게 기초적인 문제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본다. 사실 하나의 괘를 얻었다면 그 괘가 갖고 있는 의미를 생각하면 되지 기본적인 판을 뒤흔들어 놓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해 본다.

 
  건괘가 맨 앞에 놓였던 것도 남성우월의 전쟁과 핍박의 환경에서라면 당연시 되었을 것이고 부부가 결합하여 자손이 태어나므로 두 번째의 괘에 곤괘가 놓이는 것도 거부감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괘의 하나하나에 깃든 의미를 생각하다가 보면 어느 사이에 기본적인 구조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을 한 것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구구절절이 진리의 앙금이 가득 포함되어 있으니 기본적인 의미는 오히려 논하는 것이 거추장스러웠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사람이 어느 상황에 처해있을 적에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64가지의 묘수로 해답을 얻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역에 능통한 사람은 점을 치지 않는다는 말도 나왔을 것이다. 초보자는 주사위를 던지고 책을 펼쳐서 찾아 읽어야 하지만 이미 64괘의 의미를 모두 파악한 고수는 점괘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처한 환경에서 딱 어울리는 점괘는 하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령 부인을 맞이할까 싶은 생각을 했다면 가인(家人)괘를 떠올리면 될 것이고, 누가 주는 것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생각한다면 이번에는 이(頤)괘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낭월의 짧은 지식으로 예를 든 것이니 약간 어색하더라도 양해 바란다.
 
  이렇게 해당하는 상황에서 그 사람의 급수에 따라서 다시 6단계로 나눠서 적용시키면 되는 것이니 그렇게 해서 변화한 괘를 다시 생각할 수가 있을 정도가 된다면 번거롭게게 점대를 가리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해 본다. 그러한 수준에서는 또한 기본적인 의미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므로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체계를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서 뛰어난 대학자들도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논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가령 맹자는 그렇게 뛰어난 철학적 관점으로 인해서 작은 성인이라는 칭호를 얻었지만 주역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싶다. 물론 스스로 책을 쓴 것도 없기는 하지만 맹자를 언뜻 봐서는 주역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렇게 위대한 학자가 왜 주역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았는지는 다시 생각을 해 봐야 할 점일 수도 있지 않을까?
 
 
3. 세월이 흐르고 생각이 흐르고 관점도 흐른다.

   문득, 뉴튼과 아인슈타인을 생각해 본다. 뉴튼이 발견한 기계적인 우주가 아인슈타인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해석이 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제 누군가는 주역의 아인슈타인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변화하므로 영원토록 고정불변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제까지는 완벽했던 진리도 오늘 갑자기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고 새롭게 개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집도 오래 사용하다가 보면 불편한 구석이 생겨서 리모델링을 하고 학교의 교과서도 10년을 넘기지 않고 새로운 정의로 개정하게 되는 마당에 온전히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해 볼 수 있겠다. 진리란 진리이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라 오늘을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제의 진리를 쓸어버리는데 너무 인색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은 생각으로 이어지게 되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변화에 적응하면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은 자연의 진화법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물론 주역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해서 문제가 된다는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다만 혹시라도 어떤 외부의 영향력에 의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는 현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이제 서서히 죽어가게 될 것이라는 포괄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본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진리라도 그렇지 그래 3천여 년을 글자 하나 순서 하나 바뀌지 않고서 그대로 전승된다는 것이 오히려 기적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불교를 봐도 그렇다. 원시불교는 세월이 흘러가면서 중국으로 이동하여 변화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원래는 '부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생각했던 관점에서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부처가 한 말과 같다'는 관점이 생기게 되었던 것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공부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석가모니의 설법이 아니므로 외도(外道)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당연시 되었던 것이니 이렇게 함으로 해서 부처의 가르침은 3천여 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물론 부처의 말이 아니면 믿지 않는 남방불교도들은 이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무리는 부처의 행동에 관심을 두고 추종한다면, 또 다른 무리는 부처의 마음에 촛점을 맞추고 그 생각을 닮으려고 한다. 물론 속에 든 생각을 손바닥 보듯이 할 수는 없으므로 주사마적(蛛絲馬跡)을 따라서 유추하여 큰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이지만 그렇게 그린 그림에 다시 주석을 달고 설명을 붙이게 되면서 점차로 세세한 부분까지도 드러나게 되었으니 고금의 학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을 것이고 그렇게 전승이 되면서 여전히 이 시대에 맞는 형식으로 새로운 판을 짜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도 학자들의 사유가 진화함에 따라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할 것이고 누군가는 그러한 점에 대해서 놀라운 선언문을 발표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주역은 다시 새로운 생명력으로 힘차게 비상하지 않을까?
 
 
4. 이러한 주역의 권위에 도전장을 낸 학자가 있었다.
 
  이 글의 제목에서 '거의'라고 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거의'라는 말은 '모두'와는 약간의 풍기는 맛이 다르다. '모두'는 100%이지만, '거의'는 98%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많은 학자들이 주역에 대해서 칭송만 하고 있을 적에 누군가는 그것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손을 들었다는 것이 또한 놀라움이다. 그 과감한 사람은 조선시대의 말기에 살았던 일부(一夫) 선생이다. 왜 선생이라고 붙이느냐면 그 과감함에 존경심을 표하는 의미에서이다.
 
                                
                                            一夫 김항(金恒) 선생 초상

   초상을 봐서는 한 성품 하실 것같다. 이 어른께서 발견한 영상(影像)을 그림으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다음과 같은 그림이다.
 
                                                    
 
  이 팔괘도를 일러서 정역(正易)이라고 부른다. 주역(周易)에서 이미 벗어나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은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위와 아래를 보면 위는 곤괘이고 아래는 건괘이다. 이것만 언뜻 보면 복희팔괘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좌우의 다른 괘는 제외하고 해 보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주역의 배치에서 처음에 곤이 나오고 끝에 건이 나오는 것이 음양에 타당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겠다.
 
  다만, 아직은 비주류이다. 정통으로 주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같고 신흥종교에서만 거론을 하는 까닭에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거론하더라도 그 속에 진리가 있다면 언젠가는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을 해 본다. 
 
                               
 
  정역에 대한 이야기는 한동석 선생이 쓴 『宇宙變化의 原理』와 이정호 선생이 쓴 『正易과 一夫』가 있는데 우주변화의 원리를 이해해 보겠다고 들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으나 역에 대한 짧은 지식 때문이었겠지만 결국은 난해하다는 생각으로 연구를 나중으로 미뤄둔 책이다. 다만 읽으면서도 맘에 걸리는 것은 개벽(開闢)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새로운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철학이 종교적인 영역으로 흡수가 된다면 또 하나의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될 수도 있는 까닭이다.
 
  다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적어도 주역의 막강한 권위에 대해서 유학자가 저항을 했거나 새로운 관점의 해석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한국의 역학계는 물론이고 중국의 역학계에 정식으로 거론되어서 연구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으로 미비해서인지 아니면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아마도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려도 많이 건드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되지 않는 이유를 팔만사천(八萬四千)가지로 제시하게 될 수도 있겠다.
 
  정역에 대해서 좀 더 궁금한 점이 있어서 자료를 찾아봤지만 팔괘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이 되어 있고 64괘에 대한 재해석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이 아쉬운 마음이 든다. 기왕 팔괘를 다시 배치하였다면 전체적인 괘상에 대한 배치도 바꿔서 생각을 해 봤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아마도 이렇게 팔괘만 제시하는 것이 일부 선생의 몫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마치 복희씨가 선천팔괘만 그려놓고 해석은 하지 않았던 것과 비교가 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또 앞으로 1천 년이 지난 다음에 누군가에 의해서 해설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이러한 작은 변화가 언젠가 태풍을 일으켜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멋진 논문으로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리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에게 정역의 파괴력이 있기만 하다면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대만의 증사강 선생에게 정역팔괘도를 보여드리고 의견을 청해보면 어떨까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중의 일이다. 지금은 감히 내용을 거론할 주변머리가 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적어도 누군가 한 사람 정도는 주역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더 많은 학자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새로운 혁신적인 생각들이 속속 실체를 드러낸다면 그야말로 간방문화(艮方文化)가 세계에 꽃피울 날이 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해 본다. 간방은 중국에서 봐서 우리나라의 위치이고 단군계통의 역사관으로 생각하는 사람 들 중에서는 이러한 것을 거론하기에 문득 생각해 봤다.     
 
 
 
 

 
  
 [참고자료 : 일부 김항]  
 

1826(순조 26)∼1898. 조선 말기의 학자. 개설 자는 도심(道心), 호는 일부(一夫). ≪정역 正易≫의 저자이다. 충청남도 논산 출신. 어려서부터 덕기도골(德器道骨:어질고 너그러운 도량과 재능)로 모습이 비범하였고, 배우기를 좋아하여 성리학에 깊이 침잠하고 예문(禮文)에 조예가 깊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20세 때 민씨(閔氏)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몄으나 살림에는 뜻이 없어 독서만 하였으며, 영가(詠歌:창가)를 계속 불렀다. 일찍이 이운규(李雲圭) 밑에서 최제우(崔濟愚)·김광화(金光華)와 함께 공부하였는데, 특히 이운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운규는 어느날 최제우·김광화·김항 세 사람을 불러놓고, 최제우와 김광화는 선도(仙道)와 불도(佛道)를 대표하여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니 그 일을 잘 하라고 당부하고, 김항은 공자의 도를 이어받아 장차 크게 천시(天時: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를 받들 것이라고 하였다. 1879년(고종 16) 이운규가 전해준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의 뜻을 19년 동안의 노력 끝에 스스로 깨우쳤다. 그의 수양방법은 ≪서전 書傳≫의 정독과 다독, 그리고 영가와 무도(舞蹈:춤추는 것)로 인한 정신계발이었다. 그 뒤 그에게 이상한 괘획(卦劃:주역의 기본이 되는 그림)이 종종 나타나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기력이 쇠한 탓인가 생각하였으나 점점 뚜렷이 나타나므로 그것을 그렸는데, 그것이 곧 <정역팔괘도 正易八卦圖>였다. 팔괘의 명사(命寫)가 끝나자 공자의 영상이 나타나 “내가 일찍이 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그대가 이루었으니 이렇게 장할 데가 있나.”라고 하면서 무한히 찬양하고, 호를 ‘일부’로 하라고 하였다. 이 때가 1881년이었고, 그 해에 ≪대역서 大易序≫도 얻게 되었다. 1885년 ≪정역≫을 완성하였는데, 그 무렵 논산시 연산면 도곡리 국사봉(國師峯)으로 옮기자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정역≫을 공부하였고, 뒤에 이들이 일부계 신종교의 창시자들이 되었다. 공부를 가르치기보다는 제자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게 하였으며, 혹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기보다는 타일렀고, 틀렸다고 지적하기보다는 좀 덜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그로써 그의 천성이 온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평생 낮잠을 잔 일이 없고 밤에도 거의 앉아서 지냈으며, 마지막 순간에도 앉아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주역≫을 한국식으로 풀이하여 체계화한 한국역학의 대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항 [金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