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미(己未) 〔正印→比肩+偏印+偏官〕
온후(溫厚)한 기토(己土)가 비견(比肩)인 기토(己土)와 편인(偏印) 정화(丁火), 편관(偏官) 을목(乙木)을 만난 형태이다. 겉으로 나타난 모습은 기축(己丑)과 닮았고 속으로 편관(偏官)을 본 것은 기묘(己卯)와 닮았다. 이러한 형태는‘무척 보수적(保守的)인 관점으로 고정되어 있는 주체(主體)를 갖고 있는 어머니’라고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기준을 강경하게 지키고자 노력하는 면도 나타나게 된다. 스스로를 밖으로 노출시키는 것이 기축(己丑)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기미(己未)는 내면으로 있는 것을 규격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된다.
기미(己未)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덕성(德性)을 갖고 행동을 한다. 또한 육안(肉眼)으로 보이지 않는 신비한 세계나 영혼(靈魂)의 세계, 혹은 불계(佛界)에 대해서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인지(認知)를 하는 반면에,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인지도가 떨어진다. 전해지는 전설에 대한 믿음도 있으며, 직관력(直觀力)을 요하는 참선(參禪)의 깨우침에 대한 영역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게 된다. 모든 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지 않은데, 이것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능력을 개발하게 되면 한 분야에서 특별한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기미(己未)는 물질의 세계에는 인지도가 떨어진다. 현실감(現實感)도 약하다. 지나치게 정신적(精神的)인 세계에 관심을 두게 되므로 세상에서 적응하는 능력이 약화될 수가 있다. 이러한 적성은 직장의 경쟁(競爭)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일은 무척 힘이 든다. 그래서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 좋은데, 그 중에서도 교육자(敎育者)와 같은 형태의 직업은 비교적 적응하기에 좋은 분야로 분류가 된다. 그러나 홍보(弘報)와 연관된 업종이나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하는 벤처와 같은 미래첨단형의 일들에 대해서는 개념이 잡히지 않아서 적응하기 어렵다.
기미(己未)는 뛰어난 모성적(母性的) 감성(感性)이 있기 때문에 시인(詩人)이나 작가(作家)의 영역에서 좋은 적성을 발휘할 수도 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도 잘 할 수가 있는데, 능동적(能動的)이기보다는 수동적(受動的)이기 때문에 앞에서 끌고 가는 선구자(先驅者)의 역할보다는 뒤에서 밀어주는 후원자(後援者)의 적성이 더욱 편안하고 잘 어울린다. 이것은 마치 우는 아이이게 젖을 더 주게 되는 현상과 일치하는 장면이다. 울지 않으면 젖을 주지 않으므로 얻어먹으려면 울어야 하고 도움을 받으려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이러한 것은 경쟁적인 사회의 구조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형태의 적성이다. 그래서 세상에 적응을 하기 위해서는 교육자(敎育者)나 종교인(宗敎人), 혹은 카운슬러 등에서 일을 하는 것이 좋으며 복지사업(福祉事業)이나 그러한 기관에서 일하는 것도 좋은 적성이 된다. 복지사업은 우는 아이에게 젖을 주는 것과 유사한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기미(己未)의 신비(神秘)한 영역에 대한 직관력은 편인(偏印) 정화(丁火)의 영향이다. 일지(日支)에 정화(丁火)를 본 기토(己土)는 기미(己未) 뿐이다. 이러한 특성으로 신비한 영역에 대해서 상당히 깊이있게 수용하게 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신비의 세계를 객관적(客觀的)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다각적으로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것은 편인인 정화(丁火)의 본질이 정관(正官)이기 때문에, 신비한 세계의 특이한 현상도 객관적으로 이해를 해서 남들에게 설명을 하게 되면 모두 타당성이 있다고 여겨 동조를 얻기가 쉽다. 그리고 이해가 되지 않고 객관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보류하게 된다.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이야기를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일주(日柱)가 기미(己未)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스스로 자신을 살핀다는 것이 자칫하면 주관에 치우칠 수가 있지만 있는 그대로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생각을 해보면 선사(禪師)의 화두(話頭)를 타파(打破)하는 대목에 대해서 나름대로 합리적인 해석을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냥 그러한 것이 있으니 그런 줄 알라는 말은 도저히 수용불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어느 선사가‘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는데 고승이 답하기를‘죽은 먹었나?’하고 물은 다음에‘예’라고 답을 하니까 㰡그럼 밥그릇을 씻게’라고 말했으니 이것이 무슨 소식인가?”하는 화두에 대해서 생각하기를‘부처는 그렇게 물어서 답을 얻을 것이 아니고, 스스로 밥그릇을 닦는 그것이 부처라는 것을 알기 바라는 마음으로 가르침을 내린 것㰡인데 그 말을 들은 수행자는 글자에만 매달려서 궁리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되면 비로소 난관(難關)이 타파(打破)가 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이라는 해석을 하는 식이다. 있는 그대로를 놓고 수용하면 되는데, 괜스레 신비한 것인 양 수용을 하게 되면 말에 매여서 실체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기미(己未)이다.
또 “조주선사를 찾아 온 객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지나가는 개를 발견하고는‘스님 저 개는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질문을 하니까 조주스님이‘없지’라고 했는데, 왜 그랬겠느냐?”는 말을 듣고 나서는‘무(無)!’ ‘무!’하고 일생을 외우고 다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시간낭비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미 그 방문자가‘만상(萬象)은 불성(佛性)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질문을 한 것도 당연히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으니 이것은 조주스님을 약 올리려고 한 결과일 뿐인데 여기에서 만약 조주스님이‘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객(客)과의 기(氣) 싸움에서 말려드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객의 논리에 걸려든 셈이 되고, 사람이 자존심이 없지 않은 다음에야 심사가 비비 꼬여서 꼬집고 싶을 따름이다. 여기에 대응해서‘불성이 없다’고 한 것을 갖고 너무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화두수행법이라고 하는 최고 정점에 올려놓고 있으니, 불법이 날이 갈수록 쇠퇴(衰退)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신비한 깨달음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수용하는 형태라고 이해를 한다.
물론 불가에서는 이러한 식으로 해석하는 것을 크게 꺼리는데 그 이유를 모를 일이다. 어쩌면 권위에 도전을 받아서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공부는 도마에 올려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젊고 지혜로운 수행자들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필자가 기미(己未)여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렇게 화두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관점을 갖고 있는 셈인데, 선사(禪師)가 들으시면 호통을 날릴 것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다. 다른 기미일주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나중에 알아봐야 할 일이다.
기미(己未)는 고지식하다. 편관(偏官)이 그렇고 편인(偏印)이 그렇다. 미래로 가는 혁신적인 생각을 하기 보다는 과거의 상황을 수용하고자 하는 성분이기 때문에 생각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 다시 내성적(內省的)이면서도 감정적(感情的)이다. 그래서 자신의 표현력은 서투르고 대신에 사유력(思惟力)은 풍부하여 많은 시간을 생각으로 보낸다. 과거의 지식(知識)인 상식(相識)이 풍부하고 그러한 것을 저장하여 놓고 활용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기억력에 해당하는 편관(偏官)은 을목(乙木)이기 때문에 정재(正財)가 된다. 그래서 기억을 하되 정리를 해서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아무거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기억하는데, 한 예로 본다면 어떤 사람은 쓴 글을 읽으면 글 속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현장에서의 내용과 사건들에 대해서만 기억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