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3] 지동설을 알면서도 천동설로 살아간다.

작성일
2016-10-12 08:11
조회
4471

[703] 지동설(地動說)을 알면서도 천동설(天動說)로 살아간다.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이미 싸늘한 느낌이 계룡산을 감싸고 있습니다. 더 없이 맑은 가을하늘을 보면서 문득 천동설 지동설이 떠올라서 한 생각을 따라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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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빡이는 밤하늘의 별빛을 보노라면 참으로 광활한 우주라는 느낌이 저절로 들지요. 그 빛들은 이미 오래 전에 반사된 과거의 빛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라는 상식은 말끔히 잊어버리고 그냥 영롱한 별빛만 바라볼 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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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한 바퀴 돌아가는 사진을 찍으려면 아무래도 하룻밤을 세워야만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낭월의 능력으로는 부족하여 남의 수고로움을 빌려옵니다. 하늘에 별무늬가 무지개로 천을 짜 놓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늘을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이 천동설 지동설입니다. 천문학자들이 분명히 지동설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모두가 그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의 정서에서는 여전히 천동설로 세상을 보고 있을까요? 벗님께서는 혹 그런 생각을 해 보셨는지요?

만약에 생각해 보지 않으셨다면 낭월의 생각과 동행을 해 보시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관심이 없으시다면 지루한 이야기에 불과하긴 하겠습니다만, 그래도 잠시 마음을 모아서 생각을 해 보는 것은 권해도 되지 싶습니다.

예전에 모든 세상이 지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로만 알고 있을 적에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명명백백하게 세상이 태양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천동설의 개념으로 하루 하루를 맞이하게 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벗님은 지동설로 세상을 바라보시는지요? 아마도 거의 99%는 그럴리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지동설에 입각해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살아간다면 소통의 혼란을 바로 맞이하게 될 것이 너무도 빤하기 때문입니다. 천동설은 과학적이지 않다고요? 그렇습니다.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이지 않다고 해서 틀렸다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것도 또한 여전히 하나의 관점이고 현상이니까 말이지요.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면, 사주팔자가 과학적이라고 자꾸만 주장하는 학자들을 보면서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입니다. 사주가 어떻게 과학적이냔 말이지요. 낭월도 한 때는 과학적으로 증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언제부턴가 그러한 생각을 접었습니다. 왜냐하면 거의 절대적으로 재연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은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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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물론 '비슷하다'와 '똑같다'의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을 전제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슷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그래서 이 공부가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판박이로 똑같이만 나온다면 참 쉬운 공부일텐데 그게 그렇지 못한 고로 어렵다고 생각하는 공부일 수 있습니다. 비행기는 과학입니다. 틀림없습니다. 똑같은 기계에서 똑같은 규격으로 만들어져 나왔으니까요.

인생의 살아가는 모습이 단지 공식대로 맞느냐는 점에 대해서만 논하는 것입니다. 지동설로 논하는 것은 객관적이고 공식적인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개개인의 특징과 생각을 여기에다가 겹쳐 놓으면 예상외로 신통방통한 일들이 그 안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천동설로 개인의 운명을 논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로 사주공부는 과학이 아니라 비과학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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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부모에서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도 똑 같지 않음을 보면서 생각하기도 하네요. 이게 어떻게 과학일 수가 있겠느냔 말이지요. 태어남이 비과학인데 살아감도 당연히 비과학이 되어야 그것이 오히려 정상이겠지요? 태어남도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이뤄지는 과학적인 공식으로 설명을 할 수가 있다고요? 세포분열과 염색체의 논리로 증명이 된다고요? 하하~ 글쎄요...

이렇게도 현저히 다른 것을 자꾸만 과학이라고 우긴다고 해서 과학이 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렇게 과학의 울타리에 우겨 넣지 못해서 안타까워 할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학이라고 해 봐야 뭐 얼마 되지 않거든요. 뉴턴 이후로 물질세계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뤄 졌다면 기껏 30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과학이 손도 대지 못하는 세상은 바닷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지천으로 깔려 있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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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딘가 닮은듯, 어딘가 안 닮은 듯 합니다. 일란성 네 쌍둥이들이 재미나게 살아가는 모습이네요. 같은 것은 부모라는 것이고, 다른 것은 저마다의 개성과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도 모습이 뭔가는 다르고 이것이 마음으로 들어가게 되면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동차가 한날에 공장에서 만들어 진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살아가는 모습이 같다고 하기는 어려울 진대, 하물며 인간이 한날 한시에 태어났다고 해서 어찌 삶이 똑같이 재연될 수가 있겠느냔 말이지요.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려고 한다면 이미 그 순간부터 꼬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침대는 과학이겠지만 사주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그리고 과학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맘 상하고 우울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하하~

과학의 기준이 뭔가요? 동일한 조건에서 그대로 재연될 수가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연이 되면 과학이고 아니면 비과학이라는 것이잖아요? 다만 우리의 교육에 대한 오류로 인해서 『비과학=미신』의 공식이 생겼다는 것이 미신이라면 미신입니다. 미신(迷信)이 뭔가요? 잘 못 믿는 것을 미신이라고 하잖아요?

자,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 모두는 미신에 빠져있다는 것을 얼마나 명백하게 알려 주는 것인지를 떠올려 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낭월이 그것을 증명할 수가 있습니다. 미신[ 물론 비과학과 동일시 된다는 의미의] 속에 살면서 자신은 미신을 말하지도 믿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미신입니다. 아무래도 낭월이 뭔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는 것 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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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사진일까요?

물론 어떤 답변이 나올지를 낭월도 알고 벗님도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매우 특별한 생각의 관점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사진을 보고 '일출(日出) 사진'이라고 말을 할 것입니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일몰(日沒) 사진'으로 보일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냥 일출사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미신의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출사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봤을 적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떠세요? 느낌이 팍~! 오셨는지요? 그렇다면 눈치가 많이 빠르시다고 하겠습니다. 하하~

12월 31일에는 어디로 가나요?
마음으로든 몸으로든 동해로 갑니다. 왜요?
내일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기 위해서지요. 왜요?
한 해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기도하려고요.

자, 이 글에 대해서 무슨 문제가 있나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평소 생각하는 모습과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글이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분히 거의 명확하게 100% 미신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미신의 의미는 본래의 뜻인 '미혹하게 믿는 것'입니다. 미신이 비과학이라는 의미에서 논하는 것이고 부처나 십자가에 기도하는 것은 논외로 합니다.

첫째로. 위의 글귀는 매우 비과학적인 이야기입니다. 혹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대상에게 기도를 한다는 것 때문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그게 뭔 상관이겠어요. 물론 그것도 비과학적이긴 합니다만, 그것이 제일주제는 아닌 까닭에 거론하지 않습니다. 매우 과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완전히 미친 사람의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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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과학적입니다. 명료하게 나름의 법칙을 갖고 회전하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니까요. 이것은 증명이 되었고, 예측도 가능한 천문학의 보증수표입니다. 가끔은 뜬금없이 혜성(彗星)이 나타나기도 합니다만 여하튼 대부분의 이치는 이 법칙 안에 있습니다. 교육을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상관없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일반인의 과학상식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새해 첫날부터 비과학적인 생각으로 한해를 시작하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아무도 그러한 것에 대해서 반발하지도 않고 의문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야말로 낭월처럼 일할머리가 없는 산골 촌부나 가끔 멍때리면서 생각해 보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벗님도 생각해 보셨다고요? 그렇다면 낭월과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하하~

이것이 바로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지동설을 말하고 천동설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인 것이지요. 과학의 시대라고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더러는 과학적이고 대부분은 비과학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과학적으로만 생각하고 과학적인 것만 말한다고 주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아마도 이러한 차이는 인식(認識)과 지식(知識)의 간극이 만들어 내는 결과로 인해서가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니까 지식은 지동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식은 천동설로 모든 것을 수용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둘 중에 어느 것도 틀렸다고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식은 양(陽)이고, 지식은 음(陰)이 되어서 같은 궤도를 돌고 있는 사념(思念)의 두 별이니까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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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동설을 이야기 하면 원시인 취급을 하나요?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인식으로는 천동설로 사물의 현상을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갖고 살면서도 자신이 뭘 잘 모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반대로, 지동설을 이야기하면 유식해 보이나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생각은 자꾸만 천동설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혹 혼란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삶의 존재가 과학이 아니라 인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벗님의 생각은 과학적이신가요? 아니면 인식적이신가요? 분명히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인식은 과학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혹, 낭월이 지금 과학부정론을 펼치려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겠습니다. 낭월도 과학적인거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더구나 과학의 첨단으로 만들어진 카메라는 무지무지 좋아합니다. 믿을만한 수학적 공식에 의해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내가 찍은 사진의 결과물에 대해서도 신뢰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혼자서 푸실푸실 웃을 때가 있습니다. 자칭 '매우 과학적'인 사람이, 말을 할 적에는 매우 비과학적인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지요. 과학적이라고 하지를 말던가, 시종일관 과학적인 말만 하던가 해야 할 것이 아니냔 말입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말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1. 지식(知識) : 타자(他者) - 밖의 우주가 중심이다.[지동설]


우리의 우주천문학은 우주의 중심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한쪽 변두리에 태양계가 있고, 47억살이 된 태양이 이끄는 곳에는 아주아주 작은 46억살이 된 초록별인 지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우주론이지요. 화엄경에는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했대서 이미 2500년 전에 우주를 깨달은 부처였다고도 합니다만..... 글쎄요.... 갸웃 갸웃.... 왜냐하면 과연 그때에 본 우주가 지금 우리의 지식과 같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이곳에서 저곳의 모습을 알았다는 것은 대단한 천문학의 발전이라고 하겠습니다. 원래 사물은 다 볼 수가 있어도 자신의 눈썹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여하튼 우주가 중심이라는 것은 이제 모두가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천문과학의 상식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무식한 놈이 되어버릴 테니 부득불 알아야만 한다는 이야기도 되겠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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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도입니다. 태양계의 그림이로군요. 명왕성(冥王星)이 떨어져 나간 다음의 그림인 모양입니다. 그냥 두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걸 또 떼어 내느라고 고생들이 많네요. 여덟 개 보다는 아홉 개가 더 나은데... 하하~

인식의 전환은 지식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식이 아니면 인식은 전환이 되기 어렵고 자신의 세계에서 갖혀 살아가게 될 가능성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배우려고 애를 쓰잖아요. '배운 놈은 못 당한다'는 말도 해 가면서 말이지요. 근데 '배우신 분은 못 당한다'고 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 분명히 저 속담은 못 배운 사람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봅니다. 속담의 출처도 가끔은 궁금하거든요.

지식을 알게 됨으로써 남을 이해할 수가 있고, 남을 배려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가르치는 것이 이타심(利他心)이라고 하잖아요. 남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의 이타심은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그 정도의 문제에 따라서 차이는 난다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더러는 전혀 이타심이 없어 보이기도 하니까요.

의식을 밖에다 두고 있는 것은 보살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항상 우주적 마음으로 중생을 관하기 때문에 소아를 버리고 대아를 구한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동설을 이해한다는 것은 대단하고 획기적인 변화라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에서는 도무지 감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함정이라면 함정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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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칼 융이 말한 무아(無我)의 언저리가 이 부근과 만날 수 있는 지점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문득 해 봅니다. 앗, 그러고 보니까 지동설은 좁게 끌고 오면 남을 생각하는 것과도 서로 통한다고 하겠네요? 남을 인식한다는 것을 확대하면 결국은 우주를 인식한다는 것과도 서로 통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 그래야 한다고 배웠지요. 그래서 그래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결국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지요. 이것과 1월 1일 새벽에 동해로 가는 것과도 서로 맞닿아 있는 것이겠지요? 이러한 세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남을 생각하는 이치도 당연히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지식의 세계라고 정리를 해 봅니다.

 

2. 인식(認識) : 자아(自我) - 내 주체가 중심이다.[천동설]


순서로 봐서는 천동설이 먼저 나오고 지동설이 뒤에 나와야 시간적인 순서가 맞지 싶습니다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바꿨습니다. 때론 순서대로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뒤집어서 하기도 합니다. 설명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안 될 것이 없는 까닭이지요. 이것은 글쓴이의 자유라고 우길랍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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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첨에는 자기만 생각하면서 성장을 하다가 점차로 이웃, 친구, 사회,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이 자연스러울테니까요. 다만 지금은 그러한 순서로 교육하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에 뒤집습니다. 이것이 낭월의 의도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인식의 다음에 지식이 들어오는 것을 뒤집어서 지식에 대해서 먼저 논하고 인식을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뭐 그래도 상관 없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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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이 그림은 지구에서 바라 본 우주입니다. 즉 우리가 인식하는 하늘의 모습이라는 것이지요. 보자..... 오늘이 10월 12일이니까.... 하늘에는 천평좌(天平座)가 나타났겠네요. 왜냐하면 하늘이 시시가각으로 절기에 따라서 이 땅의 하늘에 강림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낭월은 오히려 낭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의 별이 찾아오는 것이 재미있지, 인간이 로켓을 타고 별을 찾아 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엉 그 맛이 아니더란 말이지요. 뭔가 위험해 보이고, 돈도 많이 들겠고, 대기를 오염시키기까지 하잖아요. 그런데 소리소문도 없이 하늘의 별님들이 찾아 옵니다. 영롱한 빛을 발하면서 말이지요. 그 하늘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비는 겁니다. 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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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그림이 너무 환상적이라서 조금 더 현실감이 날랑가 싶어서 실제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낸 그림으로 살펴보기도 합니다. 아, 천평(天平)이나 천칭(天稱)이나 같은 것으로 보면 되겠습니다. 모두 하늘 저울이라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어디 별자리가 저울처럼 생기긴 했나요? 아무리 봐도 저울이 안 보여서 말이지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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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만 봐서는 못 알아 먹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 섞어서 나타냈던 모양입니다. 여하튼 고인들의 상상력도 엄청나네요. 뻥을 쳐도 이렇게 쳐야 그런가보다 하지요. 그래서 아무도 그냥 단순히 몇 개의 별로 보지 않고 저울대로 본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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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섯 개의 별로 줄만 그은 것이 아니라, 그림까지 그려서 하늘 저울이라고 명칭을 붙여 놨습니다. 물론 왜 하늘 저울이라고 했는지는 또 나름 의미가 있겠습니다만, 낭월의 소견으로는 가을의 별자리에게 천칭이라고 붙여 놓은 것으로 봐서 추수를 한 곡식을 저울로 달아서 거둬들인다는 의미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봄에는 황소자리(4월 21일~5월 20일) 잖아요. 그러니까 한참 일을 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말로만 해서는 모르니까 별자리 이름을 붙여놓으면 아무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력이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소설하면 한소설 하는 낭월이잖아요. 이리 저리 엮어서 이바구를 만들면 되니까요. 하하~

각설하고. 지구 중심은 자아중심이라는 말도 됩니다. '내가 느끼는 것이 나'라고 했잖아요. 데카르트 할배가 그랬나요? 데카르트의 말이나 자아(自我)라고 한 부처의 말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다고 봐도 되지 싶습니다. 아아~ 불교신자들께서는 어떻게 그게 같느냐고 핏대를 올리실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예~! 분명히 다릅니다. 암요~~

'나', '참나'가 뭐 다른 말이겠어요. 다 그말이 그 말인데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냥 인식하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인 겁니다. 야뢰야식, 말라야식, 백장식 하고 분류하는 것은 흡사 양파껍질을 벗겨서 실체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괜한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그러니깐요. 무지하게 복잡한 이야기를 해 놔서 머리가 빠개질 지경일 수도 있습니다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생각 속에 또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진짜 생각이 있고, 그 안에는 더 진짜 생각이 있다는 것이지요.

뭐 생각이라는 어휘가 틀렸다고 호통을 치실 불교학자도 계시지 싶습니다. 그냥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여하튼~~ '시비로 시비하면 시비가 끊이지 않으니 시비를 그만둘까 하노라' 입니다. 하하~

그러니까, 낭월의 말씀은 천동설이 왜 나쁘냐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남들이 그런다고 해서 지동설을 받아 놓고 어쩌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냥 다 잊어버리고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모습을 보면서 내 중심으로 우주가 돌아간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종말이 올 것도 아닌 바에야 말이지요.

자신을 잘 알아야, 남도 잘 이해한다잖아요? 즉, 도를 알아야 도를 잘 행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괜히 어설프게 도인지 똥인지도 모르면서 흉내만 내기 보다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라도 좀더 깊이 이해하려는 노력이 오히려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더랬습니다.

그것을 일러서 '자존감(自尊感)'이라고 합니다. 벗님의 자존감 수치는 얼마나 되시는지요? 그냥 임의로 최고의 자존감인 부처를 100으로 놓았을 적에, 그리고 지렁이와 같은 상태를 1로 놓았을 적에 필시 그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임을 전제로 생각해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위로 갈수록 남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본다면 80점은 되어야 하지 싶습니다. 웬만해서는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지요. 이놈을 편하게 하려니 저놈이 불편하고, 아내를 편하게 하려니 자식이 불편하고, 자식을 편하게 하려니 아내가 불편하다면 아예 내나 편하자는 것이 되는 셈이지요. 아마도 현명하지요? 하하~

그래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잖아요. 이것이 뭐겠어요? '천동이든 지동이든 내사 모른다. 그냥 내 맘대로 내가 하고 싶은대로 살다 갈란다.'라고 할 수가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존재감은 확실하다고 해도 되지 싶습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이 팔만사천 불보살을 믿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못 믿으면 세상 천지에 무엇을 믿은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공부하러 오는 제자도 그렇고 상담하러 오는 방문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낭월의 목적은 '너는 너'라는 것을 알려 주는데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거든요.

낭월의 우주에는 지동설이 없습니다. 그냥 천동설만 존재합니다. 내가 인식하고, 내가 보고, 내가 느끼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전부인 까닭입니다. 벗님은 어떠세요? 아무런 눈치도 안 보고 내 멋대로, 다만 남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자유롭게 살고 싶지 않으세요? 그러시다면 낭월과 같은 부류인 것입니다. 충분히 자유로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오행(五行)의 이해는 그만큼 나를 자유롭게 해 주는 연장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과 알고 있는 사람의 삶은 같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 보기도 하네요. 아니, 오행도 우주론이라고요? 에구~ 그럴리가요. 오행은 나를 위해서 봉사하는 우주의 머슴일 따름이랍니다. 괜히 어줍잖은 지식에 매이기 보다는 스스로 인식한 것에 의지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가을이 왔습니다. 이것은 천동설입니다. 상쾌한 아침이 되었습니다. 이것도 천동설입니다. 그런데 지동설로 인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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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태양이네요. 그 밖을 돌아가는 것이 지구인 모양입니다. 천칭좌를 지나칠 적에는 그림 위주로 남쪽의 사자좌를 거쳐, 처녀좌를 지난 지구가 천칭좌로 들어가고 있는 위치에 있네요. 그래서 가을이 되었습니다. 해를 바라보고 돌아가는 지구의 대한민국의 시간선이 아침 7시를 가리키고 있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떠세요? 재미있으신가요? 낭월은 억수로 재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천동설로 살랍니다.

지독히도 더운 여름이 가고 나니 상쾌하고 서늘한 가을이 되어서 오곡 백과는 결실을 바로보고 있는 이 계절의 싸늘한 새벽 공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것이라고 인식하고 그렇게 살랍니다. 벗님도 밖의 인연들을 담담히 관조하면서 내면의 자아를 만나는 행복한 순간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명료하다는 과학보다 직관의 인식으로 살아 보십시다. 아름다운 이 땅에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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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 스승님...

스승 : 뭐냐?

제자 : 스승님, 이 우주는 몇 살입니까?

스승 : 뭐? 넌 몇 살이냐?

제자 : 제자는 올해 스물 다섯입니다만....

스승 : 우주의 나이는 25년 되었느니라~

제자 : 예?

 

2016년 10월 13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