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三合의 원리

작성일
2007-09-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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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처음 삼합이 등장하게 된 것은 언제인지 알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五行學의 초창기에 벌써 발생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삼합은 생각보다 그 작용력이 상당히 크다고 봐서, 예로부터 중요하게 그 인식해 왔던 것 같다. 그런만큼 삼합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이 파생이 되었고, 이것을 의지해서 또 새로운 학설이 나오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다가는 급기야 삼합을 바탕으로 해서 각종신살까지도 등장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三合과 沖의 관계로 생각되는데, 그 중에서도 沖은 비교적 간단하게 나타나지만, 삼합은 대단히 복잡해서 결국은 삼합에 대해서만 잘 이해를 한다면 변화의 80%는 손아귀에 거머쥔 것으로 생각을 해도 되겠다는 정도이다. 그러면 하나하나 분석을 해보도록 하자.




1) 亥卯未의 이치와 작용




우선 자평명리의 책을 뒤적이면 거의 앞부분에는 이 삼합의 공식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눈에 익숙한 글자의 결합이 되는데, 이들이 서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이유라든지 그런 것에 대해서 좀더 상세하게 이해를 했으면 좋겠는데, 문헌적인 자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서 연구와 추리를 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亥(生) - 나무가 생을 받는 위치에 해당하여 木生地가 된다.

卯(旺) - 이미 왕성해지니 천하를 얻어서 木旺地라고 부른다.

未(庫) - 성한 후에는 쇠하는 이치로써 木庫地라고 부른다.




이러한 인과의 관계에 의해서 목국(木局)이라고 이해를 하면 된다. 그러니까 木이 생조(生助-亥)를 받아서 왕성(旺盛-卯)해 졌다가 기운이 쇠해져서는 창고(倉庫-未)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고서는 다시 다음번 生助를 받아서 등장을 하게 되고... 이렇게 돌고 돌아가는 것이 木의 리듬이라고 이해를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합을 한다는 이야기가 등장을 하게 되는데, 이렇게 목의 일생이 그 자리에 모여있게 되면 그대로 목의 기운이 강화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되면 화학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그래서 이 셋이 모두 모여 있어야 성립되는 이야기인 것으로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원래는 목의 一生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것이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한 자리에 모인다면 이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을 해볼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봤다.

보통의 문제가 아니라면 특별한 문제일 것이고, 그것을 표현한 것이 바로 삼합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이서 단단하게 뭉치면 비로소 하나의 목국(木國)을 만드는 셈이 되는데, 이것을 사주적인 테두리 내에서만 활용한다는 의미로 다소 적은 의미가 되는 목국(木局)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주 원국(原局)에 형성되어있는 木局의 상황과 大運13)에서 끼어들어서 형성되는 목국의 상황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도 함께 생각을 해볼 일이다. 특히 원국의 地支배합이 일정하게 배치되어 있지 않으면 원칙적으로는 삼합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이 분분한 입장이다. 참고표를 보면서 이해해보자.









① 時日月年   ②  時日月年   ③ 時日月年   ④ 時日月年

   己丁辛己      癸乙己乙      丁己乙癸     己辛辛己

   酉卯未亥      未亥卯丑      卯未卯亥     亥卯未未








다시 앞에서 처럼 상황의 설명을 해보도록 하겠다. 벗님이 생각하시는 것과 일치가 되는지, 아니면 많은 차이가 나는지 비교를 해가면서 이해를 하는게 좋겠다. 그냥 따라서 읽기만 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①번 사주의 경우에는 亥卯未가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글자인 가운데 卯木이 酉金과 충돌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경우가 되면 일단 목으로 합하는 이치는 상당부분 소멸된다. 비록 酉金이 약하다고는 하지만, 卯酉沖으로 인해서 완전하게 亥卯未가 되기에는 상당한 결함이 발생한 모습이다. 旺이 깨어지고 있는 마당에 무슨 화합이 되겠느냐는 것으로 이해를 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卯未의 작용는 논할 수 있겠지만, 木局으로 논하기는 조건이 원만치 않다고 이해를 해본다. 거의 합하는 작용도 무력하고, 化하는 성분은 더욱 약하다고 봐야 하겠다. 그래서 글자로는 亥卯未가 갖춰져 있지만 작용력은 그냥 기본적인 타고난 글자의 의미대로만 보면 되겠다.




②번 사주는 또 어떤가 보자. 亥卯未가 있는 것은 동일한데, 이번에는 卯木이 충돌을 만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상당히 좋은 여건이라고 보겠는데, 이 경우에도 삼합이 완전하지는 않다고 봐야 하겠다. 다만 亥卯의 절반합은 유효할 것으로 본다. 즉 未土가 끝에 있고, 중간에 卯木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삼합이라고는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관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③번 사주는 가운데에 卯木을 두고서 양쪽에서 亥未가 사이좋게 연결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되어서 참으로 제대로 된 합이라고 본다. 이것은 전혀 하자가 없는 亥卯未의 木局이 되는데, 더구나 時支의 卯木까지 곁들어 있어서 탓을 할 곳이 없다고 해야 하겠다. 이러한 정도가 되어야 목국이라고 하지 그 나머지의 상황은 확실한 삼합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못하겠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卯木의 旺支가 월령(月令)에 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목으로 화하는 분위기가 된다고 이해를 해야 하겠다.




④번 사주도 亥卯未가 완전하게 되어있는 사주로써 삼합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아쉬운점은 卯木이 월령을 잡지 못하고 약간 벗어나서 日支에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의 3번 사주와 비교한다면 대단히 큰 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보면 삼합을 하는 데에도 월령의 상황은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주시해야 하겠다. 이렇게 月支가 未月인 경우에는 삼합이 되는 경우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고 봐야 하겠다. 그렇다면 같은 木局이라고 하더라도 그 순서는 뚜렸하게 나오기 마련인 셈이다. 가장 왕성한 목국은 卯月이 되고, 그 다음은 亥月,  그리고 마지막으로 未月의 亥卯未가 목의 기운이 왕성하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외의 亥卯未는 어떻게 되어있던지 반합(半合)이 되는 것으로 봐야하겠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다른 삼합의 경우에도 그대로 대입이 된다고 보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申子辰의 수국이 있을 경우에 子月이 으뜸이고, 다음이 申月이 되며, 가장 약한 것은 辰月이 된다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2) 地支에 두자, 天干에 한자가 있다면?




일설에는 地支에 두자만 있고, 천간에 그 기운이 변화한 글자가 있을 경우에도 삼합으로 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되어서는 올바른 합이 될 수 없다고 생각되어서 ‘거짓된 합’이라고 봐야 하겠다. 가령 地支에 있는 것이 卯未이고, 天干에 壬水가 있으면 이것은 壬水는 亥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겠다는 이야기인데, 地支의 입장을 약간 오해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즉 地支의 亥水와 天干의 壬水는 그 생긴 모양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亥水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甲木이 있는데, 壬水에는 갑목이 없다. 이러한 차이점을 관찰하지 않고서 그냥 단지 亥水의 본기(本氣)가 된다는 것 하나만으로 亥卯未가 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보면 웬만하면 삼합으로 만들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여간해서는 삼합의 조건을 찾기 어렵다고 봐야 정상인 것이다. 애초에 말씀 드렸듯이 삼합은 화학반응이다. 어느 하나라고 빠져서는 완전하게 화학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봐야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것을 확대해석해서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地支에 卯未가 있다고 전제를 하고, 天干에 있는 글자들이 甲木과 戊土와 壬水가 함께 있다면 과연 어떻게 보겠느냐는 생각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이것도 무효이다. 지장간의 글자는 같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그 함량이 다르다. 아시겠지만, 실험실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적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공식이 있는 것이다. 즉 亥水에 있는 ‘壬水 16, 甲木 7, 戊土 7’의 비율이 되었을 적에, 비로소 합목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지간히 까다롭게 따진다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이 문제는 까다롭게 생각을 해야 한다. 가령 밥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밥을 하는데에는 가장 먼저 쌀이 필요하다. 이 쌀은 卯木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없다면 밥은 애초에 생각을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잘 이해한다면 地支에서도 卯木이 없는 합은 애초에 합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것도 합이라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원칙적으로 잘못된 이야기라고 본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물이다. 이 물이 없으면 밥이 되기에는 곤란한 문제가 된다. 물론 물 중에서도 매우 깨끗한 물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필요하다. 구정물이나 바닷물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상태의 물이라고 하는 조건이 필요하다. 어쨌건 물이 필요한 것은 틀림이 없다. 이 물은 亥水라고 보자. 壬水는 짠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계수는 빗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어쨌던 밥을 하기에 적절한 亥水는 아닌 셈이다.




마지막으로 불과 그릇이 필요하다. 이것을 전기밥솥이라고 보자. 이 전기밥솥의 역할은 未土라고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필요한 요구조건이 충족되면 일단 밥을 먹을 희망을 가져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렇게 세가지만 갖춰졌다고 해서 그대로 밥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생각이 짧은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또 뭐가 남았느냐고 반문을 하시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게 되면 그윽한 진리는 눈에 나타나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갈 런지도 모른다. 세심하게 주의깊게 관찰을 할 때만이 시야에 이러한 이치들이 나타나 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말이다.

이러한 것이 갖춰지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밥물의 양(量)을 조절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리고 밥이 되고 말고는 여기에 달려있다고 봐야 한다.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서 어떤 사람은 술밥을 만들고, 어떤 사람은 죽을 만든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뿐이다. 서로의 양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쌀은 주체가 되므로 양이 필요없다. 쌀이 많으면 남을 것이고 적으면 나눠 먹기가 부족할 뿐이다. 그러니까 쌀은 아무리 많아도 문제가 될 것이 없고, 이것은 亥卯未에서 묘목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단지 몇 식구의 적은 용량이던 수백명이 먹을 많은 용량이든 그에 상응하는 분량에 따르는 양이 있기 마련이다. 일단 밥을 먹어야 할 사람의 머릿수가 결정이 되면 쌀은 정해지기 마련이다. 다음으로 쌀을 씻어서 솥에 넣는 문제는 당연하고, 두 번째로 적당량의 물을 부어야 한다. 그런데 이 물의 양은 밥의 품질을 결정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대충 붓기만 하면 밥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는 영원히 푸욱 퍼지면서 고슬고슬한 멋진 작품(?)을 기대하기는 애초에 글러버린 셈이다.

물까지도 잘 조절을 했으면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불이다. 불의 역할까지도 매우 치밀한 계산이 있어야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가 있다고 말씀드리면 너무 밥하기가 까다롭다고 생각할런지도 모르겠으나, 비단 밥 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든지 간에 이러한 정도의 주의력은 필요한 것이다. 건성으로 대충대충 관찰을 해서는 그 방면의 일인자는 고사하고 뒤따라 다니기에도 숨이 턱에 닿을 것이다.




밥을 하기도 어렵고, 합이 되기도 어렵다. 이렇게 세밀하게 관찰을 하는 것이 학자의 안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것이든지 유심히 관찰을 하면 그 속에는 언제나 살아서 생기가 넘치는 道가 들어있다고 믿는 낭월이다. 특히 모든 사물의 실체를 예리하게 통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장자(莊子) 어르신은 존경하는 인물에 속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리고 밥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지만 낭월이의 행자시절14)의 별명이 ‘밥잘하는 공양주’였다. 다른 것은 항상 자신이 없었지만 밥을 하는 것 만큼은 뭔가 감이 잡히는 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는 밥에 관해서는 남에게 묻지 않았다. 그 시절을 잠시 회상하면서 이야기 해보겠다. 과연 그 곳에서도 ‘도(道)’가 있겠는지 없겠는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란다.




★ 밥을 하는 데에도 道는 있다. (作食之道)




처음에 양산의 통도사로 입산을 했는데, 극락호국선원이라고 하는 특별수련원에 소속이 되었다. 당시의 조실(祖室)스님이셨던 경봉(鏡峰) 노사님 아래로 자신의 본래 면목을 찾아보려는 운수납자(雲水衲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곳이다. 그곳에서 일단 노사님을 친견했다.

“그래 집이 어데고?”

“예, 경북 청도입니다.”

“그런데 왜 중이 될라카노?”

“도를 닦으려고 그럽니다.”

“그래? 도를 어떻게 닦는기고?”

“.........”

“그래 인연이 있구나, 공양주를 좀 하거라.”

당시가 열 일곱 살이었다. 사실은 도를 닦으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김삿갓처럼 자유롭게 돌아다닐 목적으로 입산을 한 것인데, 도인 스님이신 분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그냥 돌아가라고 하실런지도 몰라서 얼렁뚱땅 둘러붙인 것이다. 그런데 도를 어떻게 닦느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혀서 더 이상 답변을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때 당시에 아마도 이미 인간 박주현이의 공부역량을 파악해 버리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도를 통할  그릇은 틀렸고, 종구락 정도가 되어서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한숨이나 쉬어줄 정도’로 파악을 하셨을런지도 모르겠다. 주로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알아버리는데 이골이 나있던 노사님이셨으니까 능히 짐작을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인연이 있다고 하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 곳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출가에 뜻을 두고 왔었지만 인연이 없다면서 가라고 한 사람도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던 쫒겨가지만 않으면 중이 될 것으로 생각한 상황에서 공양주라고 하는 중책이 떨어졌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그날로 전공은 밥을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어려서 어머님이 자주 출타를 하는 이유로 해서 간단하게나마 밥이 되는 원리는 알고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그것과는 전혀 상황이 다른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그냥 누구나처럼 쌀을 넣고 물을 부은 다음에 불을 때다가 끓으면 불 빼고 뜸들이면 밥이 되는 것으로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밥을 조금 할적에는 통하는 이야기인데, 이미 한끼의 쌀이 50kg에서 100kg를 넘을 때에는 어림도 없는 상식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밥을 하기 위해서 온갖 연구를 다 했다. 벗님이 낭월이의 강의록을 읽어보면서 그래도 약간은 치밀하다는 생각을 하셨다면 당시로써도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실제로 온 신경은 오로지 밥다운 밥을 해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7~8개월간 연구와 실험을 거듭하면서 서서히 뭔가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던지간에, 아무리 빨라도 1년은 투자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발생하게 된다. 이제부터 밥도사(?)가 어떻게 한 끼의 밥을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 참이다. 실제상황이라고 상상을 하고 함께 느껴보시면서 잠시 산사(山寺)의 한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보시기 바란다.




우선 맨처음 하는 일은 쌀을 씻어서 조랭이로 돌을 골라내는 작업이다. 이일을 하는데에도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조심해서 조리질을 하지 않으면 밥에 돌이 들어가게 된다. 요즘은 석발기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쌀을 일지않고 그냥 밥을 해도 되지만, 당시에는 조리질을 하고나면 한 주먹씩의 돌이 나오는 때도 있었다. 그런때에는 다시 일어야 한다.

이렇게 쌀을 씻어서 돌이 들어가지 않도록 깨끗하게 일어서 소쿠리에 담아 놓으면 일차적인 작업이 끝난다. 그리고 다음에는 나무를 준비하는데, 당시에는 아름드리 거목의 죽은 장작을 사용했었다. 그래서 나무하는 불목 처사15)와 신경전이 벌이진다. 물론 언제나 누룽지의 위력을 발휘하지만, 가끔은 직접 장작을 구하기 위해서 도끼질을 해야 할 경우도 있다. 여기서부터 전쟁은 시작된다고 봐도 되겠다. 어쨌던 내가 맘에 드는 나무를 마련하지 않으면 왠지 불안해서 밥을 시작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무를 마련했으면 준비완료이다.




다음은 솥에다가 물을 붙고 장작을 차곡차곡 쌓게 된다. 마치 성냥개피를 가지고 우물정자로 쌓는 것처럼 공기가 적당량 잘 들어가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화력을 발생하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장작의 속성을 이해하다 보니까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가 가마에서 불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이 이해가 되는 것이다. 솔가루를 맨 아래에 놓고서 불을 당기면 서서히 피어오르면서 불이 번진다. 아궁이에 들어가는 나무의 양은 보통 장정의 짐으로 한짐이 더 들어간다. 그렇게 쌓을 적에는 불꽃이 어떻게 해서 골고루 퍼질 것인가도 고려가 되어야 한다.

불이 너무 안쪽으로 들어가면 뒤쪽의 밥이 타게되고, 또 앞쪽으로 당기면 이번에는 뒤쪽 부분의 밥은 설익고 앞쪽은 타게된다. 이것을 조절하는데에는 그 시간의 바람 방향도 참고가 된다. 바람이 아궁이 쪽으로 역류하면 약간 안쪽으로 나무를 넣어야 하고, 아궁이에서 굴뚝 쪽으로 불때에는 반대로 약간 앞쪽에다가 장작의 탑을 쌓는 것이다. 타는 도중에 약간 조정을 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불이 붙으면서 솥바닥에 골고루 퍼지면 그 기분은 참으로 삼삼한 것이다.




그렇게 피어오르는 장작불을 보면서 잠시 황홀경을 즐긴다. 이때의 그 황금색으로 이글거리는 불꽃은 그대로 연화세계의 금련(金蓮)으로 착각이 들곤 했다. 그렇게 불에 취해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솥 안에서 물이 끓어오른다. 불이 거의 절정으로 피어 오를 즈음이 된다. 이때는 물이 골고루 끓는지를 확인하면서 불의 방향을 조절하는데, 처음에는 불을 많이 건드리게 되지만 나중에는 그냥 자동으로 뚜껑을 열면 골고루 끓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된다. 이 불의 절정과 물의 끓음이 일치하지 않으면 올바른 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이 정도가 되면 불에 대해서는 도가 트인(?) 셈이다. 완전히 끓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씻어서 건져놓은 쌀을 들어 붓는다. 이 작업을 하는 방법은 전문가에 따라서 쌀을 흩뿌리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도 있는데, 낭월이는 그 방식이 맘에 들지 않았다. 먼저 들어간 쌀과 나중에 들어간 쌀이 받는 열량이 다르다는 것이 못내 찜찜해서였다.

그렇게 쌀을 털어 넣고서는 커다란 나무 주걱으로 슬슬 젓기 시작한다. 이제는 물과 싸울 시간이 된 것이다. 빙빙 돌려가면서 젓는 이유는 아래는 빨리 뜨거워지고 위쪽은 늦게 뜨거워지는 헨디캡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물과 불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느껴질때는 ‘수화기제(水火旣濟)의 소식이 이런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십여분 정도 저으면 죽을 끌일때처럼 보글보글 하는 낌새가 나타난다. 이때에도 그 공기방울이 골고루 퍼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때가 가장 중요하다. 얼른 뚜껑을 덮고서 이제부터는 감으로 기술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략 한 5분 정도 계속 지켜보고 있으면 김이 한번 푸썩 나게된다. 그러면서 ‘쌔액-’ 하는 소리가 나려고 한다. 평소에 동작이 느린 낭월이도 이때에는 매우 민첩해진다. 여기에서 초를 다퉈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궁이의 불타는 시간이 조금만 더 길어지면 밥은 타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쇠스랑으로 장작을 마구 긁어 내야한다. 물론 타고 남은 숫덩이도 남기지 않는다. 모조리 긁어 내버리고 나면 이제는 작업 끝이다. 그러면 솥 안에서는 자체의 열로 인해서 밥이 뜸이 든다. 일단 이렇게 되면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는 것이다.

만약에 여기에서 불이 조금 지나쳤다 싶으면 아궁이의 불을 끌어낸 자리에다가 왕소금을 한주먹 갖다가 뿌린다. 그러면 소금이 터지느라고 ‘따다닥’ 거리는데 그 소리도 또한 일품이다. 소금을 뿌리면 열기가 빨리 식는다는 것을 선배로부터 배운 것이었는데, 여기에서도 水(소금)剋火(열기)의 소식이 숨쉬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다. 당시에야 오행에 대한 공부는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20분 정도 뜸들이는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온 절도량이 구수한 향기로 진동을 하게 된다. 그 냄새는 그때 이후로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이다. 이루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구수하면서도 향기로운 쌀 익는 냄새가 진동을 하면 참선(參禪)16)에 열중하던 스님들이 슬슬 시장기를 느끼기 시작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시간의 기쁨을 위해서 공양주(供養主)17)는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이다. 적어도 낭월이는 그랬다.




밥을 퍼야 할 시간이다. 몇 개의 양푼이를 준비한 후에 솥 뚜껑을 연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바탕의 김이 공양간에 퍼진다. 이때의 기분은 완전히 황홀한 상태라고 해야 하겠다. 그 희열감은 완벽한 작품이 되었다는 안도감과 섞여서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주걱을 밥 솥에 한번 지그시 찔러본다. 그러면 그 밥의 상태가 즉시로 감이 온다. 마치 노련한 한의사가 환자의 손목을 한번 지그시 만져보는 것 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의사는 이미 손목을 만져보기도 전에 대충의 상황을 짐작하게 된다. 손목을 만져보는 것은 최종적으로 확인을 하는 것 뿐이다. 그 주걱을 찔러보는 순간 그러한 생각을 했었다.

그 후에 밥을 퍼다가 스님들이 공양드실 큰방 앞에 대령하는 것은 기술이라고 할 것도 없으므로 생략을 하겠거니와, 이렇게 되면 그날은 성공을 한 것이다. 만약에 실패작을 했을 경우에는 물론 기분이 도무지 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두되도 아니고, 한가마나 되는 쌀을 가지고서 실패를 하면 참으로 의욕이 나지않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내기도 많이 한다. 그렇다고 해서 밥을 굶길 수는 없으므로 응급처지를 하는 기술도 필요하다. 한번 처리하는 기술을 배워보시기 바란다. 써먹을 기회는 없겠지만 한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먼저 망상을 피우면서 밥을 하면 밥이 잘될 턱이 없다. 쌀이 햅쌀인지, 묵은 쌀인지, 통일쌀인지, 일반미인지를 냉정하게 확인해야 하고, 또 통통하게 불은 쌀인지, 방금 씻은 쌀인지도 구분을 해야 한다. 이들의 경우에는 각기 물을 먹는 양이 다르기 때문이다. 겨울의 쌀과 여름의 쌀도 다르다 그리고 방아를 찧은지가 방금인지 오래 되어는지도 고려를 해야 한다. 이것도 쌀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찹쌀을 섞을 경우와 콩을 섞을 경우에 따라서도 물의 양은 달라진다. 이러한 것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데, 망상을 하게되면 정확해질 확율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어쨌던 마음이 항상 여여(如如)18)할 수는 없고, 가끔은 밥이 된밥으로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된밥이라는 판단도 신속하게 해야 한다. 늦으면 역시 기회를 놓치고 만다. 일단 생쌀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하는데, 생쌀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이 되면 잽싸게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을 골고루 뿌린다. 그리고서 뚜껑을 닫고서 불을 2~3분 정도 지체시킨다. 물론 바닥은 타게 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김이 한소꿈 푸썩하고 나면 성공이다. 약간의 탄냄새는 물론 2차적인 작업을 통해서 해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민을 할 필요는 없다.




불을 빼고서 비상시에 사용하는 광목천을 물에 적신다. 다시 뚜껑을 열고 밥 위에 천을 편 다음에 방금 아궁이에서 퍼낸 숯불 덩어리를 솥 안으로 집어 넣는다. 그리고 뚜껑을 덮어버린다. 그러면 수증기로 인해서 숱불은 이내 질식을 하게되고,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밥 속에 배어있던 불냄새를 흡수 해버린다. 이것은 정수기에 활성탄을 넣어서 냄새를 제거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원리이다.

선방 스님들이 밥타는 냄새를 맡고서 일단 실망을 하게 되는데, 막상 밥을 먹어보니까 불냄새가 나지 않으면 의아해한다.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양주 출신 스님들은 안다. 공양주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를... 참으로 경험은 무서운 안목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공양을 다 하고 나서 공양간을 지나가면서 한마디 한다.

“행자님, 오늘 숯을 퍼담느라고 바쁘셨더구먼. 하하하~!”

이렇게 말씀을 하면 그냥 마주 보면서 빙긋이 웃는다. 이것이야 말로 아는 사람만이 아는 것이고, 그야말로 목격도존(目擊道存)19)이 되는 것이다. 그냥 보면 아는 그런 것 말이다. 공양주를 해본 사람끼리 통하는 그 감정은 공양주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된밥이나 설익은 밥은 이렇게라도 응급처치가 가능한데 이미 진밥은 뚜껑을 열고 물을 퍼내봐도 퍼낼 물은 없기 때문에, 대책이 없다. 이러한 지경이 되면 공자님의 ‘과유불급(過由不及)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넘치는 것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도 꽉 끼게 들어맞는지 참으로 성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상이 밥을 하는 것에서 느끼는 낭월이의 소감이다. 그렇게 구수한 냄새를 맡으면서 희열에 젖어들던 기분은 공양주를 인계하면서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후로 극락선원에 들렀더니 마침 부산의 신도님들이 오셨다가는 낭월이를 발견하고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씀이

“어머, 밥 잘하는 스님 오셨네~!”







2) 寅午戌의 이치와 작용




亥卯未의 합 작용을 예로 들면서 합하고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봤다. 그러니까 공식의 형태는 어느 삼합에서나 서로 통한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겠다. 그러면 구태어 두 번다시 설명을 할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응용을 해보시기 바란다. 약간 염려가 되는 것은 벗님들 중에서는 간혹 응용력이 매우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아마도 그러한 벗님에게는 食神이나 傷官의 성분이 부족하겠지만, 그래서 반드시 그렇게 상황에 따라서 구체적으로 하나하나를 쥐어줘야 이해가 되는 경우라고 할까... 그런 경우에는 공부를 하기도 여간 어려울 것이다. 응용력이 없으면 나중에 이 공부를 다 하고 나서도 상황설명을 하는데 버벅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연습이라고 생각하고 확대해석을 하는 방법을 터득해 주시면 좋겠다.




寅(生) - 불이 생을 받는 자리이다. 地支편을 다시 읽어 보시는 것도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해가 되면 물론 다시 읽을 필요는 없다.

午(旺) - 불이 가장 왕성한 상황이다. 삼합에서 이 午火가 빠져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두말을 할 것도 없겠다.

戌(庫) - 불이 돌아가서 쉴 자리이다. 가장 편안한 곳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모여 있으면 火局이라고 말을 하게 되는데 地支의 배합에 의해서 반합이 되거나 무효가 되는 경우는 앞의 亥卯未의 항목에서 이해를 하셨으면 구태어 예를 들어볼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이 되어서 생략을 하겠다. 그 글자만 생왕고(生旺庫)에 의해서 바꿔놓으면 그대로 같은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고(庫)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관찰을 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할 참이다. 물론 이 이야기도 각기 해당 삼합의 辰戌丑未는 모두 해당이 된다는 점을 알고서 읽으시면 되겠다.




① 寅木과 午火의 관계




寅午合의 관계는 누가 봐도 시비가 없겠다. 그대로 木生火가 되면서 합이 되므로 단결력이 매우 뛰어난 합이라고 생각하면되겠다. 그리고 불이 寅木을 보면 대단히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짐작이 된다.




② 午火와 戌土의 관계




역시 火生土로서 서로 상생이 되면서 합이 된다. 그래서 인오술의 火局은 비교적 잘 이뤄진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술토는 매우 건조하다. 이것은 火의 에너지를 낭비 하지 않겠다는 자연의 각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戌土를 만난 午火는 매우 안정적으로 자신의 몫을 수행하게 된다.




③ 寅木과 戌土의 관계




여기에서는 木剋土의 이치만 존재한다. 합의 개념은 전혀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자칫 三合에서 두자가 있으니까 반합이 되는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1+1=2’ 라고 하는 것에만 집착을 하는 것과 똑 같다고 하겠다. 합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숫자개념으로 설명이 되지않는 분야라고 이해를 하도록 하자. 글자의 숫자와 변화되는 원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아무 문제도 없다. 그래서 合化의 부분에서는 ‘불확실의 원리’20)를 대입해야 할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3) 巳酉丑의 이치와 작용




사유축의 이야기는 삼합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삼합이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火生金에 대한 이야기도 바로 여기에서 등장을 하는 것이다. 이제 이 언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巳(生支) - 금이 생을 받는 곳이다. 과연 금이 생을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을 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