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제26장. 음양타령/ 3.일음일양지위도
작성일
2020-12-10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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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3] 제26장. 음양타령
3.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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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재의 표정을 보면서 한바탕 웃은 다음에 우창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관리가 없으면 우리가 마음 놓고 편히 살아갈 수도 없으니 항상 고마워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되겠지?”
염재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스승님의 말씀으로는 줄타기하는 광대도 줄의 한중간에서 음과 양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균형의 이치를 습득했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음양은 만나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되겠습니다. 서로 분리된다면 영원히 돌아올 수가 없는 길로 가버리게 되고 그것은 이미 음양의 궤(軌)를 벗어난 것이니 이미 도가 아니라는 이치입니다. 어쩌면 음양의 중간이고, 상봉이고, 순간이 바로 그곳이 아닐까요?”
“그렇다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그 중심에서 이쪽과 저쪽을 넘나들기 때문이라네. 그것을 인간미(人間美)라고도 하지.”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우창이 붓을 놓고 두 사람을 바라보자 춘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와~! 여기에도 도가 있잖아. 광대는 양(丨)이 되고 막대기는 음(一)이 되어서 균형을 이뤘네~!”
춘매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짓자 잠시 그림을 들여다보던 염재가 말했다.
“조금 전에 본 줄타는 광대는 부채를 들었는데 이 광대는 막대기를 들고 있는 것이 다릅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부채를 들고서 흔들면서 균형을 잡는 것과 긴 장대를 들고 흔들면서 균형을 잡는 것이 다를까?”
“아, 같겠습니다. 그렇다면 그 중심에만 머물러서 고정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인간미가 없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물론이지. 인간미란 그렇게 비틀거리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에게 있는 거야. 완벽해 보이는 사람은 그것을 지키느라고 애를 쓸 테니 얼마나 긴장이 되어있겠느냔 말이네. 그래서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대직약굴(大直若屈)하고 대교약졸(大巧若拙)하며 대변약눌(大辯若訥)이니라」라고 했다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춘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오빠는 그렇게 말하면 더 있어보이나?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말을 해 줘야지 누구 들으라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그런가? 염재가 들으라고 그렇게 말하지. 그리고 누이를 위해서는 이렇게 말을 해야 하겠지? ‘크게 곧은 것은 굽어져 보이고, 재능이 참으로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졸렬(拙劣)해 보이고, 말을 참으로 잘하는 사람은 오히려 어눌(語訥)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야.”
우창이 이렇게 풀이를 해 주자 비로소 춘매의 얼굴이 밝아졌다.
“맞아~! 오빠가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공감이 되고도 남네. 호호호~!”
“누이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응, 안마하러 와서도 안마복으로 갈아입으라고 해도 자기 옷을 벗지 않고, 그냥 앉아서 안마를 받겠다고 한 사람이 생각나네. 남녀가 유별하다면서 말이야. 그래서 참 특이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오늘 오빠의 말을 듣고서 생각해 보니까 그 사람이야말로 중심에서 좌우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 사람에게 가운데에 고정된 사람이라고 해도 되겠지? 내 생각에 참 인간미가 없다고 하는 느낌이 들었었거든. 그래서 나도 편안하게 말하지도 못하고 긴장된 채로 안마를 해 주면서 다시는 오지 말기를 기도했었어. 호호호~!”
“그랬구나. 그 분위기가 어땠을지 대략 짐작이 되네. 하하하~!”
“그 선비는 아마도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드러내면 속물(俗物)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던가 싶어. 어쩌다가 친구에게 이끌려서 오기는 했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절개를 지키는 것으로 자기만족(自己滿足)으로 삼았던가 봐. 세상은 참 넓고 재미있는 사람도 많더라. 호호호~!”
우창도 춘매의 말에 같이 웃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나도 아마 10년 전이었더라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걸. 남의 일 같지 않단 말이지. 하하하~!”
그러자 춘매도 정색을 하고는 우창에게 물었다.
“그래서 혼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서 함께 산다는 거야?”
“옳지~!”
염재가 다시 우창에게 물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참으로 깨달을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음양에 대한 이치가 이렇게 심오(深奧)하다는 것을 예전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음양에서 관리와 백성의 이치가 나오고, 청관과 현관(賢官)의 차이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셨으니 앞으로 제자의 지위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양극단(兩極端)에서 어리석은 삶을 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됐네. 깨달았으면 또한 고마울 따름이지. 하하하~!”
“음(陰)의 끝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보니 과연 지혜롭게 잘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많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관통(貫通)하고 있는 이치를 알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까?”
“물론이지.”
“스승님의 말씀을 이해하기에 지혜란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것이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산골의 농부는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하면 벼와 콩이 잘 자라는지를 알고 있는 이치와 같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지.”
비로소 염재는 궁금하던 것이 풀렸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음극즉양생(陰極卽陽生)’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단순하게 관념적(觀念的)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음극즉양생’이라는 말은 있어도 ‘양극즉음생(陽極卽陰生)’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그것조차도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호 그런가? 왜 그런지 어디 말을 해 볼 텐가?”
“예, 제자의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양의 극은 말하자면 지혜로움의 끝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도인이라고 하겠는데, 도인은 밝아도 백성이 반란을 일으킬 일이 없으니 그런 말은 애초에 필요치 않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그건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네. 여태 청관도 옳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지 않았나?”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처세하는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처세하는 방법이라고 해서 도(道)를 떠나 있는 것일까? 항상 도와 함께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란 것을 잊으면 안 되네.”
“아, 제자가 오해했습니다. 탐욕의 반대쪽에는 해탈(解脫)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탐욕의 상대는 해탈이 아니라 명예(名譽)였나 봅니다. 스스로 자신의 만족감으로 청관(淸官)이라는 생각에 빠지게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말씀을 드리면서 내심으로는 치우친 것인데 아무리 양극(陽極)이라고 해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기는 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주시니 그것도 집착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맞았네. 바로 그 찜찜한 것이 내면의 목소리라네. 하하하~!”
춘매가 염재에게 물었다.
“지금 말한 탐명은 무슨 뜻이야? 내가 알아듣게 설명을 해 줘봐.”
“아, 그것은 청백리(淸白吏)는 명예(名譽)를 탐한다는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본능적으로는 재물을 탐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한데 애초에 그러한 것이 있는 것조차도 모른다는 듯이 청렴(淸廉)을 추구한다는 것도 결국은 또 다른 양극단으로 향해서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으니 들려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춘매가 반색을 하면서 말했다.
“이야기라면 자다가도 일어나는 나야. 어서 해봐~!”
“옛날에 요(堯)라고 하는 임금이 있었답니다. 그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순시를 하다가 어느 변방(邊方)에 다다랐을 적에 관문을 지키던 문지기를 만났습니다. 문지기는 세상에서 성군(聖君)으로 칭송이 자자한 요임금을 보고는 반가워하면서 했습니다. ‘요임금이시여 성군이시여 만수(萬壽)를 누리소서~!’라고요. 그러자 요임금이 ‘난 원치 않네, 오래 살면 욕되는 일만 많아질 뿐이야.’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춘매가 장단을 맞추면서 말했다.
“맞는 말이야~! 그것도 일리가 있기는 하네. 적당히 살다가 죽어야지 예전에 105세를 살았던 노파를 봤는데 아들, 딸, 며느리, 손자까지 모두 죽고 없으니까 쓸쓸하게 만년을 보내더라. 그래서 오래 사는 것이 과연 좋기만 한 것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었지. 나도 요임금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호호호~!”
춘매가 말하는 것을 듣고는 염재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자 문지기가 다시 말했답니다. ‘그러시다면 부유(富裕)함을 누리소서~!’라고 말을 하자, 요임금은 또 손사래를 치면서 말했다네요. ‘그것도 싫네! 부자가 되면 귀찮은 일어 끝없이 일어난단 말이네.’라고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춘매가 또 참견(參見)했다.
“그 말도 맞잖아? 재물이 많으면 강도나 도둑이나 심지어는 마적들까지도 찾아와 약탈(掠奪)할 수가 있으니 귀찮은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겠네. 요임금은 과연 성군이라서 평민의 수준을 벗어났다고 봐야 하겠잖아?”
“문지기는 두 번이나 요임금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이번에는 ‘그러시다면 요임금이시여 백자천손(百子千孫)을 누리소서~!’라고 했답니다.”
“아 그것도 좋은 말이네. 문지기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 이루시라고 덕담을 했으니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전했다고 봐도 되겠네.”
“그 말을 들은 요임금은 그것조차도 거부했답니다. ‘그것도 싫네, 자식이 많아 봐야 머리만 아프고 얼마나 복잡한지를 생각해 보면 아무런 쓸모가 없단 말이야.’라고 했답니다.”
“우와~! 그 말도 맞잖아. 자식이 많으면 서로 자기가 더 좋은 것을 차지하겠다고 싸우고, 심지어는 재산을 더 갖겠다고 서로 죽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요임금이 그렇게 말하자, 변방의 하급관리인 국경지기가 말했답니다. ‘나는 처음에 당신이 성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만나보니까 그저 군자(君子)정도 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하늘은 모든 생명들에게 저마다의 맞는 일거리를 주는 법이거늘 아들이 많은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또 재물이 많으면 사람들에게 나눠줘 버리면 편안할 것이고, 이렇게 해서 천하가 편안해져서 다스림이 없이도 잘 다스려진다면 천년을 산다고 한들 골치 아플 일이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잘 가라는 말도 하지 않고 휭~하니 자리를 떠나버렸답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을 끝내고는 우창을 바라봤다. 우창의 의견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춘매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염재의 눈길이 우창에게로 향하자 자신도 자연스럽게 우창의 말을 들어보자는 생각에 우창의 말을 기다렸다.
“아, 요임금은 훌륭한 성군이었다고 들었는데 변방의 문지기에게 오히려 가르침을 받은 꼴이지 않은가? 과연 염재가 청렴(淸廉)하고 결백(潔白)하다는 것의 끝에 대해서 잘 설명했네. 그렇다면 음양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요ㆍ순ㆍ우(堯舜禹)의 황제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백성을 보살폈다는 것으로 유명한 인물들로 후대에 성인(聖人)으로 추대(推戴)를 받는 분들인데 그들조차도 문지기가 보기에는 하찮은 명예나 지키려고 애쓴 사람으로 봤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심지어는 나라를 아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현인을 찾아서 물려줬다는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헛된 청렴을 지키려고 자식을 굶어 죽게 했다고 비평하는 철학자도 있기는 합니다.”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자신의 자식을 돌보는 것은 작은 책임이고, 나라를 구하는 것은 큰 책임이니 소를 버리고 대를 취했다는 것으로 인해서 존중을 받는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지기와 같은 사람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입니다. 그야말로 허명(虛名)을 추구하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본 모양입니다. 스승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내가 감히 그 성인들의 깊은 뜻을 어찌 헤아리겠는가? 다만 음양의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또한 양(陽)에 기울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드네.”
“그렇다면 그것도 음양의 눈으로 보면 치우쳤다는 말씀이신지요?”
“물론이지. 다만, 모든 것을 음양으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하네. 그러니까 항상 무슨 기준인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법의 기준으로 보는 것과 가정사의 기준으로 보는 것의 차이에 의해서 제자도 항상 실제의 판단에 임하면 여간 어렵지 않은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가령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남의 돈을 빌려서 생업에 투자했는데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그것을 갚을 수가 없게 되자. 고발을 당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그 가정에는 또 가장이 없어서 나머지 식구들이 굶어서 죽게 생긴 경우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는데 항상 진땀을 흘리곤 합니다.”
염재의 경험담을 말하자 우창도 공감이 되었다.
“과연 그렇기도 하겠군. 그래도 오로지 법으로만 판결하지 않고 인정을 베풀어 가면서 판단하는 것이 음양의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라네. 가령 청렴한 판관으로 이름을 떨쳤던 송대(宋代)의 포증(包拯)은 냉엄한 국법을 추상(秋霜)같이 시행하더라도 항상 놓치는 것은 없는지도 살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습니다. 포청천(包靑天)은 제자와 같은 관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표(師表)지요. 스승님의 음양에 대한 가르침으로 인해서 조금은 더 자유로운 판단을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이지, 음양의 이치를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럴진대, 오행의 변화까지 알고 다면 아마도 누구에게도 원한을 사는 판단은 하지 않을 것이네. 그렇게 될 것으로 믿어지기도 하네. 하하하~!”
우창의 칭찬을 듣자 염재도 기분이 좋았다. 춘매도 자신의 의문이 바로 해소되었는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없어서 다시 염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자의 생각으로는 음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에도 치우치지 않으며 그 중간의 마음으로 유연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참다운 음양의 속박을 벗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결국은 음양을 벗어난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사람이니 결국은 음양의 중간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혹 그렇게 살다가 떠난 고인도 있을까요?”
“어찌 그러한 고인이 한둘이겠는가? 다만 우리가 접할 수가 없을 따름이라네.”
“아니, 그렇게 훌륭한 성인이라면 만대(萬代)에 유전(流轉)하여 세인의 모범으로 삼아야 할 텐데 그러한 인물을 접할 수가 없다니 안타깝습니다.”
“그래? 왜 그럴까?”
“모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이미 음에도 머물지 않고, 양에도 머물지 않았다면 그가 머무른 곳은 어느 곳일까?”
우창의 말에 염재가 곰곰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그런가? 그는 순간(瞬間)에 머무르다가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것이네.”
“예? 순간이라면 매우 짧은 시간에 머무른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다네. 어제도 내일도, 심지어 오늘도 아닌 지금 이 찰나(刹那)에 머무르는 자만이 진정한 음양중(陰陽中)에 매이지 않은 자유인(自由人)이라고 할 것이네. 어떤가?”
“과연, 스승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것이 옳겠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순간에 머무르는 사람이 나중에 후세인들이 자신을 본받도록 할 마음이 있었을까?”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춘매가 얼른 말했다.
“눈꼽만큼도 그러한 생각이 없겠네~!”
우창은 춘매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시 염재를 향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공론(空論)에 가까울 수도 있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해를 하기 위해서 이러한 관점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이라서 말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내가 그리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네. 순간에 머무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항상 절감(切感)하니까 말이지.”
“치우침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치우치지 않은 것이니 온전히 음양 속에 있는 사람이 바로 도인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과연 염재는 현명하네. 음양의 이치가 이와 같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거나 어떤 일에 처하게 되더라도 마땅히 그 상대편의 상황까지도 손바닥을 보듯이 훤하게 꿰뚫게 될 것이니 매사에 경솔함이나 편중됨이 없이 올바르게 판단하여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게 될 것이네. 하하~!”
우창이 유쾌하게 웃었다. 음양의 논리를 통해서 자신이 관부(官府)에서 맡은 일을 행함에 있어서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깨달았다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고, 그러한 생각에 약간의 도움을 줬다는 것으로 인해서 뿌듯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창이 이렇게 생각하느라고 잠시 침묵이 흐르자 그 틈에 춘매가 말했다.
“정말 현명한 스승에 총명한 제자네. 나도 염재가 지혜로운 관리가 되어서 고을을 잘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믿어져. 호호호~!”
춘매의 말에 공수(拱手)하며 춘매에게 감사를 표한 염재가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물었다.
“스승님께 다시 여쭙겠습니다. 약간 미진한 것이 있습니다.”
“그래, 뭔가?”
“음양을 배우는 것인 줄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음도 아니고 양도 아닌 그 어떤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침을 주신 것이 맞습니까?”
“그 어떤 것이란 무엇인가?”
“말하자면, ‘균형(均衡)’이라고 하겠고, ‘치우치지 않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직접적(直接的)으로 균형과 치우치지 않음을 말한다고 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이렇게 탐관이나 결벽(潔癖)에 대해서 말씀을 하심으로써 저절로 그 중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옳지~! 제대로 이해를 했네.”
“그렇다면 이제야 비로소 균형에 대해서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제 염재도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의 이치를 깨달았군.”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일음(一陰)과 일양(一陽)을 도(道)라고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설명이 없이는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아, 그 말은 『역경(易經)』의 「계사전(繫辭傳)」에 나오는 말이라네. 예전에 어느 유학자(儒學者)를 만나서 내가 물었었지.”
춘매는 우창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없었던지 옛날 이야기를 해 준다는 말에 반기면서 말했다.
“와~! 이젠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빠의 옛날이야기네? 재미있겠다. 호호~!”
“당시에 나는 한참 음양관법(陰陽觀法)에 대해서 궁리를 하고 있던 차였네. 염재는 역경의 본론(本論)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겠지?”
“그야 당연히 음양(陰陽)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맞아, 그래서 소문에 학식이 높은 학자라고 해서 일부러 찾아가서 어렵게 만나는 기회를 얻었다네. 그래서 ‘일음일양을 도라고 하는 이치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지 않겠나.”
“오빠는 묻기도 잘하고, 답도 잘하니까. 그렇게 학식이 높은 분을 만나서 물었으니 당연히 멋진 답을 얻었겠구나. 그래서 이렇게 유식하게 되었다는 것도 알겠네. 그러니까 오가다가 길에서 주운게 아니었다는 말이야. 호호호~!”
춘매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자 그 학자께서 ‘한 번 낮이고, 다시 한번 밤이 되는 이치라오.’하고 답을 하지 않겠나.”
“그야 당연하잖아? 일음일양이 도라고 하기에 뭔가 새로운 말이 나오려나 했는데 그건 너무 쉬워서 누구라도 말을 할 수가 있겠네.”
춘매가 기대감에 미치지 못하는 답이었는지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원래 도(道)는 자연의 모습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 학자의 말이 맞는다고 봐야지. 다만 내가 얻고자 한 답에는 미흡해서 다시 물었지. ‘언제 만납니까?’라고.”
“아니, 오빠는 도대체 뭘 생각한 거야? 일음일양이 도라고 했다잖아? 그런데 또 무슨 말을 듣고자 했기에 그런 말을 한 거지? 내가 듣기에는 무례(無禮)하게 느껴지기조차 하는걸. 그 학자가 화를 내진 않았어?”
“내가 그분의 속마음까진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어쩌면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그래서? 무슨 답이 나왔어? 그게 궁금하네.”
“그 학자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 그래서 답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는 얼른 미안하다고 하고 그 자리를 떠났지. 괜히 우물쭈물해봐야 얻을 것이 없겠다는 것을 느꼈으니까.”
“아, 그랬구나. 오빠가 원한 답은 무엇이었길래?”
“누이가 대답해봐, 밤과 낮은 언제 만나?”
“밤과 낮이 만나는 것은 새벽이잖아?”
“옳지~!”
“낮과 밤이 만나는 것은?”
“그야 당연히 저녁노을이 질 때겠네. 그게 뭐라고 그걸 다 물어?”
“아, 내가 원한 답이 그거였는데 그 학자가 답을 몰랐던 모양이군. 그래서 공자님이 잘못한 것으로 판단했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공자님이 잘못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야 「계사전」에 글을 쓰시면서 두 글자를 빼먹었기 때문이지. 아니면 후에 누군가 옮겨 적으면서 빠트렸거나, 비록 그렇다고 해도 결국 그 책임은 공자님께로 돌리는 수밖에 없겠지. 하하~!”
그러나 이번에는 염재가 궁금해서 물었다.
“가르쳐 주십시오. 그 두 글자는 무엇입니까?”
“상봉(相逢)~!”
“음... 그러니까 일음일양지위도에 상봉의 두 글자를 넣었어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어디 염재가 상봉(相逢)의 두 글자를 넣어서 다시 만들어 보게.”
“그렇다면 ‘일음일양’과 ‘지위도’의 사이에 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일음일양상봉지위도(一陰一陽相逢之謂道)」가 되네요. 이것을 해석하면 ‘음 하나와 양 하나가 서로 만나는 것을 도라고 한다.’로 해석이 됩니다.”
염재가 이렇게 말하자 우창이 미소를 지으면서 종이에 글을 썼다.
그러나 춘매가 그림의 뜻을 알고서는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와~! 역시 오빠는 대단해~! 음과 양이 만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잖아? 멋져~!”
“스승님의 가르침이 항상 지혜의 문을 열게 만듭니다. 오늘도 참으로 많은 이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만 물러갔다가 내일 다시 오겠습니다.”
“그래, 염재가 있어서 나도 공부 많이 했어~! 내일 봐.”
염재는 춘매에게도 공수를 하고는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