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滴天髓 저자 劉伯溫 선생님에 대해서

작성일
2007-09-11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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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기(劉基)

생몰 - 1311~1375.

중국 元나라 말기에서 明나라 초기의 유학자이며 정치가이기도 하다. 자는 伯溫, 시호는 문성공(文成公) 청전(靑田) 출생. 천문과 병법에 정통하며 명나라 태조를 도와서 중원을 얻고 성의백(誠意伯)이 되었다.




이상이 사전에 나타난 전부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688년 전에 태어나서, 624년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나라로 친다면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웠으니까 대략 그 무렵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니까 고려의 말기라고 보면 되겠는데,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이 정도로 그친다. 다만 유백온 님의 의미는 ‘기문둔갑비급대전’ 이라는 긴 이름의 책을 지었다는 것으로 오히려 유명하다. 그리고 소강절 선생이 지으셨다는 ‘皇極策數祖數’를 기록했다고 하는 곳에서도 유백온의 이름 석자는 등장한다.

당시 명태조인 주원장(朱元璋)을 도와서 제갈공명처럼 기문둔갑을 운용했을 가능성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가 기문둔갑은 그렇게 활용했을 적에 진가를 발휘하는 것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능히 짐작이 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렇게 기문둔갑에 대해 정통한 유백온 님이 어째서 명리학에 연관된 滴天髓를 지으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냉큼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다. 왜냐면 보통 기문둔갑을 하게 되면 개인적인 운명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고 들었기 때문이다. 항상 천하의 일을 논하다가 개인적인 길흉화복에 대해서 언급하게 되는 것은 다소 외도를 하신 것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다시 생각 해보면 적천수는 말년에 작성하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처음에는 부귀공명에 마음을 기울이기 위해서 밖으로만 달렸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젊은 사람의 손으로는 이렇게 치밀하고 은밀하면서 심오하고, 함축성이 강한 적천수를 쓰기는 극히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결국 말년에야 가능하다는 이야기인데, 더구나 젊어서 공부한 다음에 주원장을 도와서 천하를 통일시켰던 시기가 1368년이다. 그때 나이는 57세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대충 7년 정도 지난 다음에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어느 세월에 이렇게 한가한 명리서를 지었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혹 어쩌면 다른 사람이 지어서 가탁(假託)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봤다. 기문학자가 명리서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명리학자가 심오한 의미를 넣어서 명리서를 지은 다음에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책의 내용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유백온 선생의 이름을 빌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면 하나의 나라를 통일시키고 건국한다는 것이 그렇게 한가한 일이 아닌데, 어느 사이에 이러한 글을 지었겠느냐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이런 생각도 문득 든다.

그리고 사실 그대로 유백온 님께서 지으신 것으로 받아 들였을 경우에는 일단 천하를 통일시킨 다음에 천천히 세월을 보내면서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 연구를 하다가 천하의 명작인 적천수를 남겼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만한 동기가 있었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왜냐면 모든 것에는 심리적으로 동기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는 상식이다. 사람을 때려 죽여도 동기가 있게 마련이어서 실제로 그만한 동기를 찾지 못한다면 살인의 혐의가 있더라도 좀더 연구를 해봐야 하는 것과도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




1) 왕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천하를 통일시키고 나면 다시 통일을 시킬 곳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면 심심하게 되고, 왕을 도와서 일을 할 것도 없다. 그리고 자칫하면 왕으로부터 의심을 사기가 십상이다. 오죽하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가 나오겠는가. 이 의미는 바로 천하를 얻은 왕이 충신을 죽여버린다는 것과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년의 유백온은 왕을 떠나서 조용하게 연구실에서 책이나 보면서 세월을 보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2) 또 하나는 세상이 무상했을 것이다.




천하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도 많은 시간을 말안장에서 헤매었지만, 결과적으로 얻어진 것은 무수히 많은 원혼들과 또 과부들, 그리고 왕의 의심에 찬 눈초리, 또 자신의 허옇게 되어버린 백발....

이러한 것을 보면서 심리적으로 착찹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스스로의 운명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고, 밖으로 달리면서 관심을 갖던 기문둔갑과는 달리 구체적인 개인의 운세가 더욱 크게 클로즈업되어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운명도 결국은 벗어나지 못하고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면서 국가적인 경영에서 개인적인 관심으로 방향전환이 되었을 가능성도 상당히 많겠다.

이렇게 해서 점차로 명리학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얻어진 것을 표현한 것이 滴天髓라고 이해 해볼 수도 있겠다. 원래가 젊어서는 공명을 쫓고 늙어서는 자신을 돌아다본다는 말도 있는 것을 생각 해본다면 크게 틀렸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러한 심경이 헤아려 지는 것이다. 여하튼 일단 유백온 님이 적천수를 지었다고 전제하고서 이렇게 생각을 해봤다.




3) 유백온 님의 명식




기왕지사 사주를 공부하는 책이니까 그 책을 지으신 작자의 사주를 여기에서 감상 해보고 넘어가는 것도 의미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적어보도록 한다. 이 사주는 여기저기에서 중국의 명인들을 모아놓은 사주첩에서 등장하게 된다. 유명인이다 보니까 자료가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時 日 月 年

壬 乙 乙 辛

午 卯 未 亥

71 61 51 41 31 21 11 01

丁 戊 己 庚 辛 壬 癸 甲

亥 子 丑 寅 卯 辰 巳 午




이 명조를 보면 未月의 乙卯일주이다. 壬水와 亥水가 있어서 수분을 공급하고, 卯木과 未土는 뿌리가 되니 상당히 신왕한 사주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年干의 偏官을 용신으로 삼아야 할지, 時支의 食神을 용신으로 삼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게 되는데, 일단 金水木으로 흐름이 있는 것으로 봐서 무력한 편관보다는 유력한 식신을 쓰는 것이 좋아 보인다.

그런데 식신은 있으나 財星과 연결되지 않으므로 아쉬운 구조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年干의 辛金을 용신으로 삼을 수도 있겠는데, 이 금은 더욱 무력해서 아쉬운 대로 時支의 午火를 용신으로 삼게 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중요한 것은 남방운으로 시작해서 초운에 발하게 되고, 중운도 동방의 목운으로서 힘을 발하게 되는 것이 자랑이라고 하겠다. 금이 용신이었더라면 동방의 운에서 순탄하게 진행하기가 어렵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용신이야 어떻게 되었던 간에 일단 주체성은 대단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乙卯일주의 특성 그야말로 2대 주체성에 들어간다고 봐야 할 정도로 강력한 성품이라고 하겠다. 더구나 時干에 있는 印星은 직관력도 강력하게 발생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적천수는 상당한 부분에서 직관력으로 생각했다는 느낌이 든다. 간결하게 정리하는 성분은 직관력이라고 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만약에 재성이 강했다면 좀더 긴 이야기를 쓰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도로 사주를 감상하겠다. 개인적으로 더욱 관심이 가신다면 살펴보시기 바란다.




4) 위작(僞作)의 가능성 제시




이러한 의심을 해보는 것은 적천수의 원문에 ‘원주(原註)’라고 하는 주가 붙어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 해 본다면 자신이 책을 쓰고 다시 주를 단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그렇게 된 이면에는 혹 자신의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을 자신이 적으면서 주를 넣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면서 혹 적천수가 유백온님의 글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을 하는 배경에서는 진소암(陳素庵) 선생님의 적천수집요(滴天髓輯要)에서 언급한 말이 있어서이다.




“적천수는 어느 사주팔자를 아는 사람이 지었는데, 유백온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 책의 간지에 대한 뜻을 보면 음양의 변화에 통하고 격국에 구애받지 않으며 신살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생극제화(生剋制化)의 이치로써만 추구하여 그 깊이가 더욱 정밀하다. 그래서 매우 미세하게 깊이 관찰하였는데, 실로 명리학의 핵심을 전한다고 할만 하다. 역학 책 중에서도 단연 뛰어나다고 해야 하겠다. 그야말로 옛부터 전해지고 있는 세속적인 잡다한 자평학의 아류들을 일시에 쓸어버리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혹은 너무 깊고 심오해서 황당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서 팔자간지를 모르고서는 (접근하기가)어렵다고 본다. 공부하는 사람은 이 책을 얻어서 오랫동안 상세히 공부한다면 명리의 이치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미 이치를 알고 해석을 한다면 어찌 하나를 갖고 설명을 해도 완전하지 않겠는가 경험을 해보고 쓴 글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러한 언급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후세의 사람이 책을 지어서는 유백온 님의 이름을 빌어서 출판했다고 하는 의심도 가능하다는 판단이 예리한 지적이라고 해야 하겠다. 물론 누가 지었는지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것은 명리의 이치를 바로 전달하는 것인데, 기왕이면 지나는 길에 유백온 님의 글이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은 참으로 심오하다고 해야 하겠고, 유백온 님의 시대에서는 이렇게 격국론을 부정하고 신살도 불용하고, 오로지 생극제화로만 사주를 감정하는 탁월한 이론이 발생하기 어려웠다는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일고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하겠기에 여기에 언급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적천수의 원저자도 난강망을 지으신 것으로 알려진 여춘대(余春臺) 선생님처럼 무명인사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대단히 놀라운 이론으로 전개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거론함으로써 혹 홀대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야말로 명성이 쟁쟁한 유백온 이라는 이름을 빌어옴으로써 졸지에 대단한 관심을 끌게 된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누구나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정도의 탈속한 도인이라는 점은 이미 내용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가능성이 있겠는데, 과연 그렇다면 소강절이라고 하지 않고 유백온이라고 한 것은 무슨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아직은 이러한 문제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유백온님의 책으로 알고 있으면 그만이다. 이러한 내용이 역사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로 역사적인 상황에서 그의 작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도만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하리라고 본다. 그리고 실은 유백온님을 존경한다기 보다는 적천수를 존경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가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은 당연하지만, 시대에 대해서는 고려를 해봐야 하겠다.

또 강희황제 시절에 천경당(千頃堂)에서 발행한 것으로 전해지는 명리수지적천수(命理須知滴天髓)라고 하는 책에서는 지은이가 경도(京圖)이고 주해를 한 사람이 유기(劉基) 즉 유백온으로 되어있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원래 지은 사람이 경도라고 하는 사람이라는 말인가? 물론 경도라고 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으니 자신이 지었다고 말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러한 문헌을 뒤지다가 발견하고서 이렇게 솔직하게 지었는데, 후대에 출판하는 사람이 경도라고 하는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고 봐서 삭제하고 유백온만 남겨뒀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 해봐야 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시 정리한다면, 책의 내용에 전개되는 이론을 봐서는 유백온 이후에 지어진 책일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하겠고, 유백온 선생님이 개입되었다고 한다는 상황을 봐서는 이미 누군가가 지어놓은 책을 유백온 님이 발견하고 주해를 첨가해서 발행한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야 항상 있는 것이니까 이 정도로 언급하고 줄인다. 각자 후일에 관련 자료를 보시고서 확인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