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 제44장. 소요원(逍遙園)
33. 오행과 성정(性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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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재미는 있어. 이런 형식의 성정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 본 기억이 없어서 말이야. 놀이라고 생각하니까 읽을 만한걸. 호호~!”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다음 구절도 읽어보시지요. 하하~!”
기현주는 또 다음 구절을 읽고 풀이했다.
목분남이연겁(木奔南而軟怯)
금견수이유통(金見水以流通)
‘목(木)이 화(火)를 만나면 연약(軟弱)하여 비겁(卑怯)하나
금(金)이 수(水)를 만나면 오히려 흘러서 통하게 되느니라’
글을 읽고 풀이한 기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우창에게 물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성정(性情)」편은 한 사람의 사족 선생이 쓴 것이 아닌 것으로 보여. 여러 사람이 한 마디씩 툭툭 던진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역시, 누님의 안목은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정도는 봐줄 만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모두 성정에 대해서 후학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애쓴 것이니 말이지요.”
“아, 그러한 것은 크게 신경을 쓸 일이 없단 말이지? 알았어. 이 대목을 보면 목화(木火)의 입장과 금수(金水)의 입장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하고 있잖아?”
“그렇게 봐야 하겠습니다.”
“아니, 내 말은 왜 이렇게 보는 것에 차이가 있느냐는 거야.”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족 선생의 안목이 거기밖에 도달하지 않은 까닭이지요. 다를 것이 뭐가 또 있겠습니까? 하하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줘봐, 아직도 무슨 뜻인지 확 와닿지 않네.”
“간단합니다. 우창은 정신적인 관점으로 간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사족 선생은 오행의 이치를 깊이 알지 못하고 목은 나무요, 화는 불이라는 정도로 이해하기에 목화(木火)와 금수(金水)가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금(金)을 바위라고 생각하니까 바위는 물이 있으면 유통(流通)을 생각하고 목화(木火)는 불타버려서 허약하다고 생각하는 것이겠거니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창의 설명을 듣고서야 기현주가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동생의 설명은 흡사, 펄펄 끓는 물에 찬물 한 바가지를 끼얹는 것이라니까. 복잡해진 머릿속이 순식간에 맑아지니 말이야. 이제야 왜 관점이 다른지를 확실하게 알겠어.”
“당연하지요. 심성(心性)을 살피려면 십성(十星)으로 도구를 삼아야 하는데 겨우 오행에만 머물러서 대입하고자 하니 이것이 어렵기만 하고 제대로 풀릴 까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행으로 살필 것은 오행으로 살피고 십성으로 살펴야 할 것은 또 십성으로 살펴야 하며, 용신으로 살펴야 할 것도 용신으로 살피는 것이 격(格)에 맞는 관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누님도 이점만 이해하고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하하~!”
“알았어, 다음 구절을 살펴봐야지.”
기현주는 다시 다음 구절을 읽고 풀이했다.
최요자서수환남(最拗者西水還南)
지강자동화전북(至剛者東火轉北)
‘가장 약한 것은 가을 물이 여름을 만나는 것이고
지극히 강한 것은 봄의 불이 겨울로 가는 것이니라’
“이제 풀이가 좀 수월해졌어. 성정(性情)을 말하는 것인지 오행의 강약을 말하는 것인지 혼동하면서 쓴 사족 선생의 마음이 보이는 것도 같아서 말이야.”
“다행입니다. 순간순간 발전하시는 누님의 안목이시니 당연하지요.”
“맞아, 동생의 설명을 듣고 있으면 그러한 지식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차곡차곡 쌓이는 것 같거든. 이 대목도 심성의 강약을 말하는 내용인데 실제로 성정을 보기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이 맞지?”
“애초에 오행으로 대입하는 것이 무리니까 당연합니다. 그 정도로 해도 충분히 대접했다고 하겠습니다. 하하~!”
기현주는 우창의 말에 다시 다음 대목을 읽었다.
순생지기 우격신이항(順生之機 遇擊神而抗)
역생지서 견한신이광(逆生之序 見閑神而狂)
글을 읽고 풀이하려던 기현주가 우창을 보며 물었다.
“게 무슨 말이지? 순생(順生)은 목생화(木生火)이고 역생(逆生)은 화생목(火生木)인가? 의미를 모르겠으니 풀이도 어렵잖아?”
“그 정도로 풀이되지 않는다면 그냥 소가 닭을 보듯이 무심코 지나가면 됩니다. 특별히 건질 만한 내용이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래도 풀이는 해봐야 하잖아?”
“아쉬운 마음이라면 대충 풀이하시면 되겠습니다. 하하~!”
우창의 말에 기현주가 글을 보다가 자신이 없는 말투로 풀이했다.
‘순생(順生)으로 되면 극하는 오행을 만나도 버티는데
역생(逆生)으로 되면 한신을 보면 미쳐버리게 되느니라’
이렇게 풀이하고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아니, 이것이 성정(性情)을 어떻게 한다는 거야? 응용해야 공부한 보람이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러한 사주를 만났을 적에 이 사람의 성정은 어떻다고 말해야 하는 거지?”
“누님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에겐 십성법이 있으니 말이지요. 하하하~!”
우창의 말에 기현주도 미소를 짓고는 다음 구절을 읽었다.
양명우금 울이번다(陽明遇金 鬱而多煩)
음탁장화 포이다체(陰濁藏火 包而多滯)
‘강한 화(火)가 금을 만나면 우울하고 번뇌가 많으며
과습한 사주에 화(火)가 암장되면 막힘이 많으니라’
“이 대목은 뭔가 좀 있어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지?”
“정말 누님의 안목은 대단하십니다. 앞의 내용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드셨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응, 맞아! 뭔가 의미심장해 보여. 병정사오(丙丁巳午)가 많은데 금(金)을 만난다면 당연히 우울하고 번뇌가 많을 것으로 보인단 말이야. 비겁이 많아서 약한 재를 쟁탈(爭奪)하려니까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잖아?”
“그렇다고는 해도 탐욕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성정에는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아, 듣고 보니 그게 오히려 느낌에 다가오네. 군겁쟁재(群劫爭財)를 말하는 거지? 역시 심성(心性)은 십성으로 풀이해야 공감이 되는 것은 분명하네. 참 재미있는 결과를 알게 되었어. 호호호~!”
“그래서 애초에 오행의 자를 들이댄 것은 방향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스쳐 지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알았어, 다음도 살펴봐야지.”
기현주는 다시 다음 구절을 읽고 풀이했다.
양인국(羊刃局)
전즉영위 약즉파사(戰則逞威 弱則怕事)
‘양인으로 국을 이뤘을 때
싸움에는 위협적으로 날뛰지만
약하면 모든 일을 두려워하느니라’
“양인으로 국을 이뤘는데 약할 수도 있어?”
글을 읽고서 기현주가 우창에게 물었다.
“아마도 월지(月支)의 양인을 두고 하는 말로 보면 되지 싶습니다. 지지가 전부 양인이라면 약하기도 어려울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양인은 십성도 아니면서 왜 특별하게 취급하는 거지?”
“이름은 이해되십니까? 염소의 칼날이라니 말이지요.”
“그런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어. 어떤 것이 양인이지?”
“구조는 간단합니다. 병(丙)이 오(午)를 보거나, 갑(甲)이 묘(卯)를 보거나, 경(庚)이 유(酉)를 보거나 임(壬)이 자(子)를 보면 양인이라고 하는데 다른 말로는 양인(陽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다만 이러한 것은 이름의 놀이일 따름이고 모두 겁재(劫財)로 대입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양인을 거론하는 것이 격국론(格局論)에서 월겁격(月劫格) 중에서 위의 네 간지(干支)에 해당하면 양인격(陽刃格)이라고도 하는 것인데 그렇게 나눌 필요는 없다고 하겠습니다. 내용도 별로 생각할 것이 없는데 양인은 성격도 흉포하거나 오히려 두려워한다는 뜻이지만 수화금목(水火金木)의 양간(陽干)은 월지(月支)에 겁재를 만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풀이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그것도 별다르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이네?”
“당연합니다. 십성에 양인은 없으니 말이지요. 다만 스스로 즐겨 사용하고 그것이 재미가 있다면 구태여 쓰지 말라고 할 필요는 없는 정도로 여기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되네. 다음 구절도 같은 선생의 글로 보여. 읽어볼게.”
기현주는 다음 구절을 이어서 풀이했다.
상관격(傷官格)
청즉겸화 탁즉강맹(清則謙和 濁則剛猛)
‘상관으로 격을 이루면
청한 사주는 겸손하고 화평하고
탁한 사주는 강렬하고 사나우니라’
“왜? 식신격(食神格)은 말하지 않고 상관격을 언급하는 걸까?”
기현주가 물었다.
“그야 상관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사족 선생의 견해이려니 싶습니다.”
“무슨 선입견이지?”
“상관은 나쁘고 식신은 좋다는 선입견이지 무엇이겠습니까? 이름부터가 그렇지 않습니까? 상관(傷官)은 관(官)을 손상(損傷)시킨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식신(食神)은 음식(飮食)의 신(神)이라고 했는데 이것을 봐서도 차별이 심해도 너무 심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하하하~!”
“맞아! 그런 이름을 보면서 좋은 감정을 갖기도 쉽지 않잖아.”
“그래서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관이라고 하더라도 사주가 청(淸)하면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혼자 나대지 않고 온화(溫和)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니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동생이 모처럼 칭찬도 하는구나. 호호호~!”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하하~! 다만 칭찬한다고 해도 모두 칭찬인 것도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칭찬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런 것이었어? 왜 비아냥거리고 싶은 거야?”
“청탁(淸濁)에 대해서 이미 말했는데 특별히 상관만 콕 집어서 이렇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도 이렇게 썼다는 것은 앞의 내용을 제대로 숙지(熟知)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기의 생각을 적었다고 보여서입니다.”
“듣고 보니 그렇구나. 쓸데없이 한 말이 된 셈이네.”
“그러면서 여전히 상관은 바탕이 나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구절이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은 상관을 어떻게 설명할 거야?”
기현주가 궁금하다는 듣이 우창에게 물었다.
“상관은 자기 내면의 소리를 남에게 보여주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짓자면 ‘표현(表現)’이라고 하지 싶습니다. 상관이 있는 사람은 옆에서 봤을 적에 대체로 답답하지 않습니다. 활발하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식신은 생각을 먼저 하다 보니까 답답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관은 식신을 구박(驅迫)하고 식신은 상관을 불신(不信)하는 것이지요. 하하~!”
“정말 똑 부러지는 설명이구나. 그렇게 설명해 주니까 상관도 꽤 쓸모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당연하지요. 상관(傷官)이든 편관(偏官)이든 겁재(劫財)든 이름에 길흉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선입견(先入見)으로 정관(正官)을 기준으로 명명(命名)이 된 것으로 짐작해 볼 따름입니다. 하하하~!”
“알았어. 나도 동생의 말에 동감이야. 그럼 또 다음 구절을 살펴봐야지.”
기현주는 다시 글을 읽고 풀이했다.
용신다자 성정불상(用神多者 性情不常)
시지고자 호두사미(時支枯者 虎頭蛇尾)
‘용신이 많은 자는 마음이 한결같지 않고
시지가 메마른 자는 호랑이 머리에 뱀의 꼬리니라’
“아니, 용신이 많을 수도 있는 거야?”
내용을 읽고서 기현주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꼭 그렇게 설명하고자 한다면 종격(從格)은 용신이 많은 것으로 봐도 될 것이고 그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지는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종격이 마음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닌 것으로 보이네? 왜 이렇게 풀이했을까?”
“억지로 그 의미를 부여해 본다면, 결국은 종격이 좋은 것일 수가 없다고 끌어다 붙여도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꼭 종격이 아니더라도 용신이 많을 수는 없나?”
“누님, 이 구절 자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으니 이러한 것에 생각하는 시간조차도 아까울 따름입니다. 용신이 많은 자는 성격도 변덕이 많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용신이 많은 사람도 없는데 하나마나한 말을 또 하는 셈이지요. 하하~!”
“고인들이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누덕누덕 기운 듯한 주석을 붙이기도 했습니다만 막상 뜯어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내용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럼 시지(時支)가 메마른 것은 뭘 의미할까?”
“이 대목을 구태여 말이 되도록 풀이한다면 ‘시주(時柱)에 기구신이 있어서 용신을 돕지 않는 경우’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또한 군더더기일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쓸만한 말은 별로 없잖아? 이름은 성정(性情)인데도 막상 내용을 살펴보니 그냥 허접한 넋두리로 보이는 것은 뭘까?”
“그야 내용이 이미 핵심을 벗어난 까닭입니다. 만약에 십성으로 대입했더라면 명료하게 답이 되었을 텐데 자꾸만 오행으로 논하다 보니 위를 맞추면 아래가 어긋나는 난감한 상황이 되는 것이지요.”
“아니, 그런데 오행의 성격도 없다고는 못하잖아? 목일간(木日干)은 인자(仁慈)하고, 화일간(火日干)은 예절(禮節)이고, 토일간(土日干)은 신실(信實)하며, 금일간(金日干)은 의기(義氣)하고, 수일간(水日干)은 지혜(智慧)라고 하잖아?”
“맞습니다. 그런 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답변이 시큰둥하지? 그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말이야?”
“혹은 맞기도 하고 혹은 틀리기도 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이 나온 거지?”
기현주는 참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우창에게 물었다.
“그 출처를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출처라니? 아, 오상(五常)을 말하는 거야? 그건 당연히 알지.”
“이 성정(性情)을 쓴 사족 선생도 그 오상을 바탕에 두고서 생각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까? 오상은 유가(儒家)의 규범(規範)에 오행을 끼워서 나열해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아, 그런가? 난 꼭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잖아.”
“오상론(五常論)을 팔자에 끼워놓음으로 인해서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착각(錯覺)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맞아! 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야. 어서 설명해 줘봐.”
기현주는 비로소 우창이 가려운 곳을 긁어 줬다는 듯이 반갑게 말했다. 우창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기현주에게 설명했다.
“누님이 생각하기에 과연 갑을목(甲乙木)으로 태어난 사람은 인자(仁慈)하다고 하는 것을 확신(確信)하십니까? 만약에 그것을 확신하신다면 목일간이면서도 인자하지 않고 각박(刻薄)한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어? 동생의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것도 같애.”
“어쩌면 근거도 없는 것으로 연결을 시켜서 경신금(庚辛金)으로 태어난 사람은 의리(義理)가 두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정작 사기꾼도 있으니 이렇게 오행과 오상으로 연결을 시켜서 풀이하는 성정론(性情論)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괜한 묵수(墨水)의 오행 놀이일 따름이지요. 하하~!”
“어? 묵수라니? 검은 물? 그건 또 뭐야? 처음 들어봐.”
“예? 아, 하하하~! 먹물 말입니다. 흑두(黑豆)라고도 하지요. 검은콩을 너무 주워 먹다가 보면 체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오행론이야말로 어설프기 짝이 없는 허망한 논리인데도 깊은 이치를 파고들기가 어려우니까 기웃거리다가 오상으로 연결을 시켜놓고 보니 그럴싸해 보였던 것이지요.”
“아, 난 또, 먹물이라고도 하고 검은콩이라고도 하는 것은 글자깨나 읽었다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잖아. 호호호~!”
“맞습니다. 누님. 잘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인데 그렇게 말하면 제자들에게 창피스러우니까 대충 둘러대기 좋은 오상(五常)으로 얼버무렸다고 봅니다. 유가의 학문에서는 그렇게 말해도 그만입니다. 다만 명가(命家)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즉시로 오류가 생긴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것이지요. 비록 그렇더라도, 스스로 미련인지 아니면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니 자신도 그렇게 말한다는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태연스럽게 목일간은 인자하고 금일간은 의리가 있다고 하지요. 하하하~!”
“정말 그렇구나. 오상의 심성을 믿었었는데 동생의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화일간도 지혜(智慧)롭고 수일간도 우치(愚癡)한 경우도 수두룩했다는 것이 기억나네.”
“누님은 그래도 객관적인 분별력이 있으셔서 바로 알아들으십니다만 또 어떤 사람은 자기의 견해를 꺾는 것이 자존심(自尊心) 상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끝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부여안고 있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하하하~!”
“맞아!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을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서 바로 미련없이 내려놓는다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호호~!”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갈만이 말했다.
“과연 스승님께서 볼품없는 글에 멋진 풀이를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문득 떠오른 생각입니다.”
갈만의 말에 우창이 물었다.
“무슨 생각인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네.”
“불가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떠올랐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마음의 지음’이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항상 생각하곤 했었습니다. 앞서 이야기를 나눴던 제칠식(第七識)과 제팔식(第八識)의 토론을 생각하다가 이 성정(性情)을 살펴보면서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깨달을 수가 있겠습니다.”
“어디, 광덕의 설명이 기대되네.”
“워낙 졸견(拙見)이라 기대하실 정도는 아닙니다. 작은 생각의 정리라고 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자의 생각으로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체유심조’가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내심으로 매우 기뻤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을 먹기에 달렸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마음을 먹게 하는 원인(原因)이 여기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마치 아지랑이를 보면서 뭔가 있기는 한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가 뚜렷하게 실물을 보게 된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 그렇다면 참 다행일세. 하하~!”
갈만의 말에 우창도 기뻐서 말했다. 갈만의 말이 이어졌다.
“스승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마다의 생각이 다른 이유를 크게는 열 가지로 볼 수가 있겠는데 이것도 기본형일 따름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섯 가지로 더 압축(壓縮)한다는 것이 상징적인 것으로는 몰라도 실제의 상황에 적용하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넓혀서 일천(一千) 가지의 다양성으로 확장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속 시원하게 그 부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갈만의 말에 기현주가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일천 가지의 마음이 있단 말이야?”
“예, 일간의 열 가지에 월간을 곱하니 일백(一百)이 되고, 여기에 다시 시간을 곱하니 일천(一千)이 되는 것이지요. 여기에 일지까지 곱하면 일만(壹萬)도 넘겠지만 말입니다.”
“아! 그 말이었어? 난 또 뭔가 싶어서 깜짝 놀랐지 뭐야. 호호호~!”
“이렇게 확장을 할 것은 확장해서 설명해야 하는데 오행으로 뭘 해보려고 시도한 점은 특별하다고 하더라도 그 결과는 부실(不實)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오늘 스승님의 설명을 통해서 명쾌하게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오상으로 사람의 마음을 논할 일은 없겠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우창과 기현주는 갈만의 말에 더욱 보람이 느껴져서 조용히 합장했다. 갈만도 합장하고 허리를 굽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