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2] 제40장. 방랑객(放浪客)
1. 석양의 노인장(老人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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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이 저녁을 먹고 나서 서재로 돌아오는 길에 노을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는 강변으로 향했다. 한산사를 감돌아 흐르고 있는 강물에 노을빛이 반사되어서 주변도 온통 붉은 빛이 가득했다. 천천히 걸다가 보니 한산사까지 가게 되었는데 나한전 앞을 지나다가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춘불용금이요 추불용토니라.....”
가냘프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우창의 귀에는 흡사 우레의 소리처럼 들리는 것은 『적천수(滴天髓)』의 「갑목편(甲木篇)」이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모기의 소리만큼 작은 것이라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익숙한 구절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한전의 모퉁이에 한 노인이 앉아서 노을을 보면서 읊조리는 소리였다. 우창이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노인을 응시했다.
‘..... 날은 춥고.... 배는 고픈데.... 웅얼웅얼...’
귀를 기울여서야 겨우 들릴 듯한 말은 이렇게 들렸다. 지금 배가 고픈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우창이 앞에 가서 기척을 했다. 노인이 실눈을 뜨고 우창을 보고는 세상 귀찮다는 듯이 이내 눈을 감았다. 우창이 망설이듯이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어르신~! 실례합니다.”
우창이 말을 걸자 나한전의 기둥에 몸을 기댄 채로 다시 눈을 뜨고는 무슨 볼일이 있느냐는 듯이 바라보자 다시 말했다.
“혹 시장하신 듯한데 밥을 드시겠습니까?”
우창이 밥 이야기를 꺼내자, 몸을 세우고는 말했다.
“해가 저물어서 밥이라도 한 끼 얻어먹으려고 한산사을 찾았더니만 공양 시간을 못 맞췄다잖은가. 그대도 절에 살고 있나?”
“소생을 따라가시면 저녁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우창이 밥을 주겠다는 말에 정신이 드는지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봐하니.... 화상은 아닌 것같고.... 여하튼 고맙네. 실로 온종일 먹은 것이라고는 물뿐이로군. 허허허~!”
우창은 적천수의 구절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지금은 그것을 물어볼 상황이 아님을 생각하고는 노인의 걸음에 맞춰서 오행원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 벽에 기대어서 말하던 모습과는 다른 사람처럼 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성큼성큼 잘 따라왔다. 사방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춘매가 내일 먹을 음식의 재료를 손질하고 있다가 우창을 보고는 일어났다.
“아, 춘매가 있었구나! 잘 되었네, 노인장께 진지를 좀 차려 주시게.”
“스승님, 어쩐 일이에요? 어? 손님이 계셨네요. 이리 모시세요.”
춘매는 노인의 행색을 보고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 앉게 한 다음에 서둘러서 상을 차려서 내 왔다. 그 사이에 노인은 두리번거리면서 둘러보다가 춘매를 보고 말했다.
“낭자, 떠돌이 늙은이가 번거롭게 하는구려. 공덕이려니 하시오. 허허허~!”
“소찬(素饌)이나마 많이 드세요.”
이렇게 말하고서 물을 따라서 노인 앞으로 가져다 놓는데, 노인의 옷에서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땀에 절었는지 고약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으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노인이 밥을 먹는 것을 본 우창이 춘매를 살짝 당겼다. 춘매가 얼른 따라왔다. 내심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였다.
“춘매, 한산사에 산책을 나갔다가 노인이 계시기에 밥이라도 드시자고 모셔왔네. 바쁜 춘매를 귀찮게 했군. 하하하~!”
“스승님께서 하시는 일인데 귀찮을 까닭이 없죠. 그보다도 노인의 내력이 궁금하네요. 그동안 이렇게 하신 적은 없었거든요.”
“나도 그게 궁금하긴 하지만 차차로 두고 보기로 하지. 하하~!”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춘매도 더 묻지 않았다.
“그보다도 오랫동안 씻지도 못하신 것 같으니 깨끗한 옷을 준비해 주고 목욕물도 좀 마련해 주면 좋겠어. 좀 씻으면 훨씬 개운하실 것으로 보이지?”
“그렇네요. 알았어요. 밥을 잡수시는 동안에 준비해 놓을게요. 호호~!”
춘매는 우창이 노인을 모셔와서 이야기하자 내심 옛날 생각이 나면서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재빨리 물을 데워서 목욕하는 나무통에 채웠다. 노인은 천천히 두 그릇이나 먹었다. 온종일 못 먹은 것을 보충하려는 듯이 보였다.
우창은 목욕탕으로 안내해서는 목욕하도록 하고 노인의 등도 밀어드렸다. 노쇠(老衰)한 몸이지만 떠돌이 생활로 다져진 강단이 느껴졌다. 적천수의 한 구절을 얻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이 정도의 접대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우창은 해묵은 때를 벗기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도록 하고 객사(客舍)에서 편히 쉬도록 한 다음에야 서재로 돌아왔다.
잠시 후에 춘매가 진명과 자원을 부추겨서 우창의 서재로 왔다.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 모두 궁금해서 못 견디고 내막을 들어보려고 찾아왔다. 우창이 차를 나눠주자 잔을 받은 진명이 먼저 물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저녁 잘 드시고 나가서는 난데없이 늙은 걸인을 데려오시다니 말이에요. 호호호~!”
“무슨 일인가 싶어서 궁금하셨구나.”
이번에는 춘매가 거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잖아요. 행색을 봐하니 아무리 봐도 오갈 곳이 없는 걸인인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모셔와서는 밥을 드렸을뿐더러 목욕에 옷까지 갈아입히셨으니 혹시라도 내일이라도 떠나지 않겠다고 엉겨 붙으면 어쩌실 것인지가 가장 큰 걱정되어서 언니들에게 이야기했죠. 호호~!”
춘매의 말에 우창이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겠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창이 모시고 나가서 세상을 떠돌면서 밥을 빌어다 공양해야지 어쩌겠는가. 하하~!”
그러자 춘매가 다시 우창에게 말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스승님은 걱정이 안 되세요? 도대체 어쩌려고 모시고 왔는지 전후의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여기에는 필시 무슨 곡절(曲折)이 있을 거잖아요.”
우창이 도대체 뭘 봤길래 이렇게 엉뚱한 일을 한 것인지가 더 궁금해진 자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스승님의 이번 처사(處事)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요령부득(要領不得)이네요. 그렇지만 분명히 뭔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요. 더 궁금하게 하시지 말고 어서 말씀해 주세요.”
우창은 저녁에 한산사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춘매가 말했다.
“춘매는 또 대단한 능력자를 만나신 줄 알았더니 결국은 오갈 곳도 없는 걸인을 모셔 온 셈이잖아요? 딱 봐도 헛된 일을 하신 것이 틀림없어요. 에구~!”
춘매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 무리가 아니었다. 굶은 노인에게 밥을 주자 허겁지겁 먹는 것을 보면서 달리 생각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창이 괜히 헛된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춘매의 말을 듣자 우창이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말했다.
“그럴 만도 하지? 춘매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비록 행색은 남루해도 그 안에 번쩍이는 지혜가 들어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행색은 비록 남루(襤褸)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지 않겠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냥 하룻밤 적선했다고 생각한다면 또 몰라도 말이에요. 호호호~!”
춘매의 말을 듣자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어서 들려줬다.
“예전에 길을 떠났던 사람이 밤이 깊어서 어둠에 잠기자 더 걸을 수가 없어서 길가에 있는 나무 아래에서 노숙(路宿)하려고 하던 차에 마침 횃불을 들고 오는 사람을 만났더라네. 그 사람이 날이 어두워졌으니 자신의 횃불을 주겠다고 했다는 거야. 그러자 문득 그가 죄수라는 것을 알고는 그가 주는 횃불을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더군. 죄수가 주는 횃불은 받기 싫다는 것이었지. 춘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행색은 죄인이지만 그의 횃불은 죄인의 불이라고 해서 거부할 일이 아니라는 뜻이잖아요?”
“옳지~! 잘 이해했네. 형색(形色)은 초라하나 그가 궁핍(窮乏)하다고 해서 머릿속에 든 지혜까지도 궁핍할 수가 있을까?”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춘매를 바라보자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스승님의 깊은 뜻을 이제야 알아들었어요. 그러니까 겉만 보고서 사람을 판단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시잖아요? 역시 춘매는 아직도 많이 부족하네요. 반성했어요. 호호~!”
우창이 춘매의 말에 미소를 짓자 진명이 말했다.
“어쩐지, 처음에는 스승님께서 괜한 동정심을 베푸셨나보다 했는데 말씀을 듣고 보니 이제야 이해되었어요. 적천수의 달인을 모셔 왔군요.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스승님의 소원을 이루게 되셨어요. 호호~!”
역시 진명은 이야기의 흐름을 잘 파악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지금 노인장과 도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승패를 가름할 패를 하나 뽑으신 거죠. 호호호~!”
“어? 도박이라니? 그건 더 알쏭달쏭한걸.”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진명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스승님~!”
진명의 반응에 우창이 오히려 놀랄 지경이었다. 순간적으로 뭔가를 봤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진명이 설명했다.
“잠시 노인장을 관하는데 후광이 보였어요. 진명은 숙명통으로 관해서 안다고 하지만 스승님은 숙명통도 하지 못하셨는데도 그것을 보셨단 말이에요? 그분의 후광에서는 청광(淸光)이 보여요. 혹시 스승님께서도 그런 빛을 보신 것은 아닌가요?”
우창이 진명의 말을 듣고서 다시 생각해 봤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군. 그냥 헛소리처럼 들린 한 구절에서 마음에 확신이 들었던 거야. 그런 상황에서도 적천수의 구절이 나왔다는 것은 예사로운 어른이 아니라는 생각만 했을 따름이지. 그런데 진명이 후광을 봤다면 내 생각이 맞았을 수도 있단 말인가?”
“그럼요. 당연하죠. 아마도 그 노인장은 과거세에서도 오행지리(五行之理)에 골몰(汨沒)하셨을 수도 있겠어요.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스승님께서 그렇게도 깊이 알고 싶어 하는 적천수를 지었거나 그 정도의 수준에 도달한 선지식(善知識)으로 봐도 될 거예요. 축하드려요~! 호호~!”
자원과 춘매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는 듯이 진명을 바라보자 두 사람을 향해서 웃으며 설명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에게서는 후광(後光)이 보여. 우리 스승님은 투명한 후광이야 이것은 두루 원만한 정신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지. 금기(金氣)는 투명하다는 이치에 그대로 부합한다고 봐도 될거야.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검은빛이 나기도 해. 그것은 수기(水氣)가 풍겨 나오는 것이지. 물론 이런 후광을 갖는 사람은 음침(陰沈)한 느낌이 들어서 좀 예민한 사람이라면 경계(警戒)하는 마음이 들면서 저절로 싫어하는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피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야. 호호호~!”
진명이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처음 듣는다는 듯이 말했다.
“와우~! 그것참 신기하고도 탁월한 능력이구나. 그러니까 토기(土氣)가 풍겨 나오는 사람은 원만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겠구나. 그래서 불화(佛畵)를 보면 후광이 황금빛이었던 거야?”
“맞아, 가장 얻기 어려운 후광이기도 하지. 호호호~!”
“그렇다면 화기(火氣)를 후광으로 띠는 사람은 분노(忿怒)가 많은 사람일까? 그런 사람은 그냥 봐도 얼굴에 붉은 기운을 띠고 있잖아?”
자원이 이렇게 묻자 진명도 웃으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화기(火氣)와 수기(水氣)를 띠는 사람은 양극단(兩極端)에 머무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거야. 음침하거나 반대로 성질을 부려서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지. 이러한 사람은 피하는 것이 상책(上策)인데 놀랍게도 오행 공부를 하면서 수화(水火)는 무도(無道)하다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듣고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잖아. 참으로 오묘한 오행의 이치를 가르쳐 주신 거니까. 호호호~!”
진명의 말에 춘매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와우~! 언제 들어도 재미있는 오행 이야기네. 그렇다면 목기(木氣)를 띤 사람은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일까?”
춘매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진명이 대답했다.
“스승님이 들었다는 구절이 뭐라고 하셨지?”
“아, ‘춘불용금(春不容金)이요 추불용토(秋不容土)니라’라고 하셨다잖아. 봄에는 금을 용납하지 않고, 가을에는 토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하나? 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호호~!”
“그 대목이 어디에 나오는지는 혹시 알아?”
“잘 모르겠는데? 그게 적천수에 나온다는 것도 난 잘 모르잖아.”
춘매가 이렇게 말하면서 우창을 바라봤다. 진명도 실은 적천수라는 말만 들어봤을 뿐 내용에 대해서는 배울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몰랐다. 우창이 이러한 정황을 듣고서 말했다.
“그 구절은 적천수의 갑목(甲木)에 나오는 내용이라네. 놀랍게도 조각이 맞추지는 느낌인걸. 진명이 본 것이 청기(淸氣)라고 했잖은가? 그런데 노인장이 바로 갑목편(甲木篇)을 웅얼대고 있었다는 것이 소름 돋을 지경인걸.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듣고서 놀라기는 진명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이미 그 뜻을 알고 있는 자원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이 신기함이라니 말이다. 춘매도 그제야 우창이 벌인 일이 함부로 아녀자의 마음으로 베푼 선행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껴서 말했다.
“어머, 그렇게까지 이야기가 전개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잖아요. 그러니까 진명 언니가 봤다는 청광(淸光)과 스승님이 들었다는 갑목(甲木)과 절묘하게 연결이 되네요? 참 신기해요. 호호호~!”
모두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모두 돌아갔다. 혼자가 된 우창이 다시 생각해 봤다. 나한전 앞에서 지친 몸으로 반쯤은 누워있던 노인에게서 무엇을 봤던 것인지를 생각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문득 든 생각으로 실행에 옮겼을 따름이었다. 이 노인을 놓치면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진명의 말을 듣고 보니까 과연 뭔가를 느껴서 그렇게 해동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도 자꾸만 생각이 떠올랐다.
“왜 잠을 이루지 못하세요?”
침소(寢所)에서 뒤척이는 우창을 본 서옥이 묻자 저녁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듣고 난 서옥이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야 스승님의 영감(靈感)이 발동한 것이었다고 봐야 하겠어요. 서옥을 처음 만났을 적에도 가슴이 뛰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 노인을 만나는 순간에도 딱히 뭐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으나 몸이 스스로 움직이게 되었다는 것이죠? 참 인연의 이치란 오묘하다고 하겠어요. 호호~!”
“그랬나? 마음이 움직이기 전에 몸이 반응한다는 것인가?”
“당연하죠.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는 하지만 또 때로는 마음이 모르는 몸의 반응도 있단 말이에요. 어쩌면 여인은 몸의 반응에 민감하고 남자는 마음의 반응에 민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비록 심신일여(心身一如)라고 하지만 이것도 남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우창은 서옥의 말을 들으면서 ‘심신이 하나다’라는 말의 뜻은 결코 정신(精神)이 몸의 위에 있다는 의미가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마음은 몸의 주인이 아니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몸에 대해서도 생각이 바뀌는 것 같았다.
“내가 아무래도 몸보다 마음에 비중을 크게 뒀던가 보군. 서옥의 말을 듣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다니 말이네. 하하~!”
“그래요? 그렇다면 서옥도 스승님의 사유에 보탬이 된 건가요? 호호~!”
“당연하지, 이후로는 몸과 마음이 대등(對等)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으니 말이지. 이제야 오늘의 일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네. 그만 잘까?”
일찍 잠에서 깬 우창이 곤하게 자는 서옥이 푹 자도록 조용히 밖으로 나섰다. 이른 아침에 마당을 서성이던 고월을 발견하고서야 한동안 이야기도 나누지 못할 만큼 바빴다는 것을 느낀 우창이 말했다.
“잘 쉬었나? 한집에 살아도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다는 것이 말이 되는 건가? 하하하~!”
고월도 우창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게나 말이지. 나야 제자들을 가르치느라고 바쁘다지만 우창은 또 왜 그리 바쁜가 말이네. 하하하~!”
“내 말이 그 말이지 않은가. 일찌감치 만났으니 차라도 마시면서 담소하세.”
우창이 서재로 향하면서 말했다.
“어제저녁에는 재미있는 일이 있었네.”
우창이 이렇게 말하면서 노인장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우창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월은 벌써 흥분이 되는지 얼굴이 상기된 채로 말했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놀랍군. 나도 얼른 만나보고 싶은걸.”
우창이 찻물을 끓여서 녹차를 우리면서 말했다.
“우리가 옛날에 노산에 머물면서 열광(熱狂)했던 적천수의 이야기를 다시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으로 잠도 쉽사리 이루지 못했다네. 하하~!”
우창의 말에 고월도 그 시절의 풍경이 떠오르는지 찻잔을 들고 잠시 상념에 빠져드는 표정이었다. 잠시 후에 고월이 말했다.
“아니, 그런데 적천수에 대해서 또 궁리할 것이 있었던가? 나는 모두 정리했다고 생각했네만 우창은 여전히 미심쩍은 것이 남아있었다는 말인가?”
“그야 모르지. 우리가 풀이했던 의미가 최선(最善)이었는지도 궁금하니 말이네. 혹시라도 누군가 더욱 높은 경지에서 바라보게 된다면 그의 설명을 통해서 또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었지. 다른 것에 대해서는 미련이 없지만 뭔가 모를 아쉬움이 아련하게 남아있으니 말이네.”
“그렇다면 아직도 명쾌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이 남아있다고 봐야지. 직접 적천수를 지은 경도(京圖) 선생을 만나기 전에는 추측하고 풀이하고 이해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네.”
무엇이든 쉽게 생각하는 고월과 달리 꼼꼼하게 파고들어서 물 한 방울도 새어나갈 틈이 없도록 하는 우창의 꼼꼼함에는 늘 감탄하고 있었지만 이미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적천수를 아직도 가슴 속에 품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 말했다.
“그야, 고월과 우창의 차이가 아니겠나? 고월은 마치 험산(險山)에 길을 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 길에 돌과 자갈을 치우고 깊게 파인 곳을 찾아서 메우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테니까 말이지.”
우창도 모처럼 고월과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옛날의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서 지나가던 자원이 서재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아니, 두 분이 오붓하게 차를 즐기고 계신 건가요? 괜찮으시다면 자원도 끼워주세요. 호호호~!”
“자원도 나왔구나, 같이 마시면 더 좋지. 하하~!”
우창이 찻잔을 하나 자원에게 놓아주고는 뜨거운 차를 따랐다. 차의 물방울이 튀는 것을 보면서 자원이 말했다.
“옛날 생각도 새록새록 나네요.”
자원이 찻잔을 들면서 말하자 우창도 대꾸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어. 그리 오래된 세월도 아닌데 까마득하게 느껴지니 말이지. 그사이에 참 여러 일이 많았다는 의미도 되기는 하겠지만 이렇게 셋이 모이니 참 오붓하니 좋군.”
“그럼 자원도 옛날처럼 불러볼래요. 두 싸부와 함께 공부하면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이 가끔은 문득 그립곤 하거든요. 호호호~!”
“그 시절은 정말 날마다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사이에 시간이 흘러서 이렇게 중책(重責)을 맡아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니 그 시절로 돌아가기는 불가능하게 되었잖은가?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듣고서 고월도 한마디 했다.
“비록 환경은 달라졌으나 사람은 그대로이고, 모습은 달라졌더라도 더욱 지혜가 깊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냔 말이로군. 이렇게 함께 하니 축하해야지. 하하하~!”
그렇게 잠시나마 지난 시절을 회상(回想)하면서 차를 마시고는 다시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우창도 바람을 쐬고 싶어서 조용히 산책을 나섰다. 이른 아침에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좋았다. 어느 사이에 산천의 빛은 초록으로 변했고, 하늘거리는 수양버들의 여유로운 모습이 여름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