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음양을 결합시키는 그 무엇

작성일
2007-09-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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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과 양은 서로 대립을 하면서도 반목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사실은 음과 양은 서로 조화를 이뤄가면서 뭔가를 창조하는 성분이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질적인 성분이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과연 무슨 힘에 의해서일까?

낭월이는 이러한 성분을 중(中)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음양중(陰陽中)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림으로 나타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음양중이라는 형태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가 보니까 어떤 형상이 떠올라서 이렇게 나타내 보는 것이다.




(삼태극의 모양을 스켄으로 그려서 삽입)




위의 그림에서 보면 음과 양이 있는 영역의 사이에 어떤 성분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성분은 중용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인데, 음과 양이 서로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중간에 있는 형태의 힘에 의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러한 성분에 대해서는 단순히 음양의 대립되는 구조로만 살펴본다면 전혀 생각을 해볼 겨를이 없게 된다.

움직이는 성분은 음양이고 움직이지 않는 성분은 중간이라고 생각된다. 보통의 안목으로는 움직이는 것만 살피게 되지 움직이지 않는 것에는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다. 움직이는 것을 살피는 것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것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 마음도 움직이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어떻게 가능한가?

움직이지 않는 마음은 삼매(三昧)에서만 가능할 것으로 본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비로소 움직이는 이면에 존재하는 그 무엇이 실체륾 드러낼 것이라고 추리를 해본다. 그러니까 이렇게 쉬임없이 흐르고 있는 마음으로는 그 실체를 도저히 파악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러한 결론을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달리 더 명확한 방법을 찾을 방법을 모르겠다.

비록 이러한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을 하려면 도인의 경지에서 삼매에 몰두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상상만으로 어떤 결론을 유도한다는 것이 무리인 것은 알겠으나, 상상을 하는 것조차도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이 영역은 아마도 명리학을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영원한 숙제가 될런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언젠가는 이 영역에 대해서 분명하게 어떤 설명을 할 수가 있을런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정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을 바로 인식한다면 비로소 음양의 대립되는 경지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좀더 확대해석을 한다면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대 자유인이 된다는 말이다. 선이나 악이라는 굴레, 혹은 천당과 지옥이라는 분별심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경지를 역학에서는 중화(中和)라고 할 수가 있겠고, 불교에서는 중도(中道), 혹은 해탈(解脫), 또는 열반(涅槃) 이라는 말로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분명한지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생(永生)도 이 영역에 포함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상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될것이고, 이때에야 비로소 도인(道人)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을 것이다.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윤회를 벗어나지 않고서는 완전한 자유를 이야기 하기가 불가능 할것이라는 생각만을 해본다. 지금의 우리는 다만 음양의 중간에 있는 그 무엇에 대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리라고 생각된다. 이 정도로써 어찌 생각해보면 남의 다를 긁고 있는지도 모르는 중간(中間)에 대한 말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