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논산-계룡] 계룡산(鷄龍山) 향적봉(香積峰)

작성일
2013-05-06 09:15
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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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논산-계룡] 계룡산(鷄龍山) 향적봉(香積峰) - 2013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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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에서 노란 동그라미가 향적봉이다. 오가면서 항상, 빤히 바라다 보면서도 막상 등산을 할 마음을 먹은 것은 계룡산에 뿌리를 내린지도 17년 정도가 흐른 다음이니 참으로 무심하다면 무심한 낭월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여하튼 날씨가 맑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안개의 기운이 다 없어지려면 가을이나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압박을 하면서 길을 나서게 만들었다. 이 사진은 감로사의 지붕에서 찍었는데 앞에 소나무들이 높아서 조금만 보인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높은 곳은 무서워서 교정하느라고 정신없는 화인을 불러내서 한 장 찍어달라고 했다.

제목이 왜 논산-계룡이냐면, 오늘 오르게 될 향적봉은 논산시와 계룡시의 경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알고 보면 계룡산에서 논산시가 갖고 있는 지분은 참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감로사 뒷산으로 해서 금강대학교를 거쳐서 향적봉 일대까지만 논산시 관할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계룡시의 영역까지 논산시였을 적에는 그래도 제법 지분이 있었는데 계룡시로 갈려져 나간 다음에는 계룡산에서는 그냥 숱가락만 얹어놓은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고 해야 하지 싶다.


물론 향적봉에서 연산까지도 논산이기는 하지만 그냥 볼 것 없는 산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향적봉까지라고 해야 하겠는데 그것도 향적봉 정상은 계룡시에 속해 있는 모양이므로 참으로 논산에서 주장을 할 영역은 대단히 조금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룡산이라고 하면 공주계룡산이라고 하지 논산계룡산이라는 말은 잘 하지 않는 모양이다.



때는 계사년의 5월 5일의 오후 2시 15분이다. 점심을 먹고 한 숨 잔 다음에 물병 하나 챙겨들고 연지님이랑 길을 나섰는데 가야 할 코스는 다음과 같다.



네이버지도에서 출발지와 도착지를 넣었더니 빙빙 돌아서 가야 한다는 안내를 해 주는데, 그 코스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오늘은 가야 할 길을 포토샵에서 마우스로 경로를 그었더니 위와 같이 된다. 출발은 금강대학교에서부터 걷기로 하고 능선으로 올라간 다음에 그곳에서부터 향적봉까지 갔다가 내려올 적에는 대명리로 방향을 잡기로 하고 초행길을 나서게 되었다. 감로사에서 금강대학교 까지는 차로 약 4~5분 거리이다.




금강대학교는 불교 천태종에서 세운 종립대학인데 나름대로 알찬 운영을 하기 때문에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정확한 것은 모를 일이고, 적어도 같은 산줄기 아래에 대학교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쁘지 않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낭월이다.




등산로 입구에 차를 대었더니 중국산으로 보이는 옥부처가 자리를 잡기 전에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뒤로는 16나한의 상도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큼직한 전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위의 석상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대략 짐작을 할 수가 있는 산길로 조금 올라가니 국립공원의 구역표시가 나타난다. 당연히 계룡산 국립공원이다. 길은 편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심하게 가파르지도 않은 적당한 길이다. 작년 봄에 이 길로 내려왔었끼 때문에 두 번째의 길인 셈이다.




아는 사람에게는 양식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잡초인 풀들이 여기저기에 편안하게 자라고 있다.




이정도의 길이라면 걸을만 하다. 나무들의 가지가 햇볕도 가려주니 또한 초여름의 날씨이면서도 시원한 기운이 감돌아서 쾌적한 등산이 되었다. 적어도 가는 과정에서는 그랬다.




한참을 더 오르다 보니까 나무들이 사라지면서 저 멀리로 향적봉이 보인다. 특징은 방송중계탑이 서있어서 어디에서도 알아 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두어 번 쉬면서 오르다보니 능선에 올라서 앞이 탁 틘다. 벌써 향적봉의 눈높이가 많이 낮아져있는 것으로 봐서 한참 올라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겠다. 시간은 얼마나 걸렸을까?




2시 반에 금강대학교에서 출발했는데 지금 시간이 3시 20분이 채 못 된 것으로 봐서 대략 50분 정도를 걸었다는 것을 알겠다.




군사시설보호구역이다. 이 능선의 뒤쪽이 바로 계룡대이니 당연하다고 해야 하겠다.




향적봉을 향해서 조금 걸어가다가 한 등성이 올라서서 전망이 좋길래  뒤를 돌아다 봤더니 멀리도 가까이도 아닌 저만큼에서 계룡산의 천왕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렇게 조금을 더 올라가니 바위암벽이 있고 그것을 감돌아 오르니까 안내팻말이 나타난다.




"앗~!"
이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안내문 내지는 경고문이다. 그리고 감로사 뒷산의 능선에 붙여진 이름이 '멘재'라는 것도 처음으로 알았다. 그동안에는 그냥 어느 풍수가의 말을 빌어서 '일자문성형(一字文星形)'이라고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 산 이래에는 큰 배움터가 생겨야 하는데......라는 말을 하고, 그로부터 수년 후에 금강대학교가 들어서기에 '그 양반 뭔가 알기는 하네....'라고 했었는데, 여기에도 이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멘재를 다른 말로는 현령(懸嶺)이라고도 부른다는데 항적산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매달려 있다는 표현은 왠지 자연스러운 느낌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자연발생으로 생겨난 이름이어서인지 다른 표기로는 맨재라고도 한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감로사는 계룡산의 멘재(혹은 맨재)의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싸리재라고도 한단다.

네이버지도에서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해소되었다.




이 지도에서 보면 감로사 뒤쪽의 위편과 금강대학교 뒤쪽의 아랫편은 구체적으로 등고선이 잘 그려져 있는데 그 중간의 한 도막은 흐릿하게 처리를 해놔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냥 별로 볼 것이 없어서 그랬나보다 싶은 정도만 생각을 했지 이렇게 출입통제구역이었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통행을 하는 것은 불법이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한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거 참.......




여하튼 그 사이에 고사리밭을 발견하고는, 비닐봉지를 꺼내서 꺾어 담느라고 정신없이 바쁜 각시를 불러서 인증샷을 찍었다. 안개가 여전히 아스무레한 흔적을 남기고 있어서 아쉬웠지만 그래도 윤곽이나마 보여서 다행이라고 위로를 했다. 자연의 힘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러고나서 카메라에서 지원해주는 파노라마 기능을 이용해서 전체적인 풍광을 담았다. 예전에는 손으로 들고서 찍었더니 깨끗하지 않아서 이번에는 아예 삼각대를 펼쳐놓고 찍었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과연 전보다는 훨씬 양호한 품질의 사진이 되었다.




풍경을 감상하는 마음에 너무 작은 풍경사진의 갑갑함을 없애기 위해서 최대한 크게 담아봤는데 사진을 클릭한다면, 조금은 시원한 계룡산의 천황봉 주변과 계룡대의 일부분이 눈앞에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노닥거리다가 다시 삼각대를 집어넣고 향적봉을 향해서 전진이다.




그렇게 한 참을 더 가니까 이번에는 기가 막힌 석탑이 눈을 호강시켜준다. 이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었다고 해야 할지 자연이 만들었다고 해야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확인도 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딱 이자리에 이렇게 있다는 것은 멋지다고 해도 되지 싶다. 크기가 가늠되지 않는다면 다음의 사진을 보면 참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인공으로 했다는 것에 대해서도 쉽사리 수긍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또 자연적으로 이렇게 생겼다고 하는 것도 주변의 분위기를 봤을 적에 어울리지 않아서. 그래도 둘 중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사람의 힘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으로 방향을 잡아 본다. 피라미드도 만든 인간이니까 이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에 비중을 뒀다. 여하튼 그렇다고 치고.




길가에는 아직 진달래도 다 지지 않았는데 철쭉이 피어있어서 고운 자태를 뽑낸다. 다른 철쭉은 아직 봉오리만 짓고 있는데 이 녀석은 무지하게 급했던 모양이다.




능선에서도 함참을 걸어서 4시가 넘어서야 헬기장에 도착을 했다. 물론 사진찍는다고 꾸물댔으니 시간이 많이 흐른 것은 당연하고. 헬기장에서는 향적봉에 오르는 길이 두 갈래였다. 그래서 가까운 거리를 선택했는데 그것은 오른쪽으로 오르는 길이다.




국사봉 정상을 가리키고 있는 방향으로 난 길을 들어섰다.




그냥, 이름이 길이니까 길인가보다 하지, 실제로는 가파른 돌비탈일 뿐이다. 왜 가까운지 그 의미를 이렇게 들어선 다음에서야 알게 된다는 것이 바로 인생이 아닐까 싶었다. 돌아가면 편안할 길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항상 향적봉의 지표가 되었던 철탑이 나타났다.



대전방송국의 향적산 중계소란다. 향적산? 향적봉?




정상의 표석은 계룡수요산악회에서 세웠나보다. 향적산 국사봉이다. 해발표고는 575m란다. 정상인 천황봉이 845m이라니까 정상보다 270m가 낮은 자리라니까 정상은 많이 높다고 해야 할 모양이다. 그런데 이름이 국사봉이란다. 이것은 또 무슨 이야기람.......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향적봉으로 알고 있었는데 향적산이라고 하는 말도 헷갈리는데 다시 국사봉이라는 말까지 등장을 하였으니 이것을 정리해 보면 계룡산으로 볼 경우에는 계룡산 향적봉이 되는 것이고, 향적산으로 따로 볼 경우에는 향적산 국사봉이 된다는 뜻인가 싶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좀 생각을 해 봐야 하겠다. 이 산이 계룡산이 아니고 향적산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감로사의 뒷산도 이 산과 이어졌으니 향적산이라고 해야 하나? 하나를 물고 늘어지면 걸레가 되도록 물어뜯어야 속이 시원한 낭월에게 큰 숙제가 떨어졌다. 그래서 자료를 찾아서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다.(물론 이렇게 여정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정리하면서 말이다. 산에서 든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으니 돌아오자마자 관련 자료를 찾아나섰다는 이야기~)

자료를 찾아서 정리를 한 결과, 계룡산 향적봉으로 정리를 했다. 물론 낭월만의 정리이다. 왜냐~! 향적봉이 계룡산의 머리라고 하는 설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계룡산이라는 의미가 되는 까닭이며, 이성계가 계룡산에 올라 국사봉에서 조선의 미래를 논해다는 것을 봐도 계룡산으로 보는 것이 문제가 없겠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왜 향적산이라는 말이 나왔을까? 그것은 향적봉을 대우해서 그렇게 호칭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원래 봉(峰)의 윗등급이 산(山)인 것은 당연한데 그냥 봉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대단해서 별도로 향적봉에 산을 붙여서 향적산이 되었다고 이해를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정역을 만든 일부선생이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했는데, 이곳에서 공부를 했던 것은 확실하다. 아니 이 봉우리 조금 아래에 있는 향적산방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계룡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향적산에서 도를 닦았다고 해야 말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을 해 보니까 계룡산 향적봉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국사봉은 이성계와 연결시켜서 나중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서 정리해 버렸다. 이렇게 정리를 해야만 생각고리가 흐트러 지지 않기 때문에. 물론 다른 이견에 대해서는 짐짓 모른 채 할 참이다.

어쩌면, 절대로 그럴리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일부 김항선생이 머물던 토굴의 이름이 '향적산방'이서 혹 향적산으로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만약에 그랬다면 그것은 너무도 뭘 모르는 생각으로 붙여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향적봉 아래의 산방(山房)' 즉 수행자의 토굴(土窟)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을 확대해서 '향적산의 방'이라고 생각했다면 이것이야말로 그냥 웃고 말아야 할 이야기다. 아니, 그러니까 애초에 그럴리가 없을 것이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택도 없는 이야기라는 말.

혹 그렇다면 계룡산방이라고 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이견도 혹 나올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계룡산은 너무 넓다. 그래서 범위를 좀 축소해야 할 필요가 있으므로 향적산방으로 하는 것은 적절했다고 봐도 되지 싶다.









좌표는 북위 36도 17분 35초, 동경 127도 12분 07초라고 적혀있다. 친절하기도 하다. 물론 이것을 쓸 곳은 별로 없지 싶다. 미사일을 쏠 적에나 필요하려나..... 그냥 중요한 자리에 박혀있어서 또 사진을 찍었을 뿐.




향적봉에 오르니 특이한 석비가 두 개 나란히 서있다. 누가 봐도 특이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낭월도 이번의 향적봉 나들이에는 이 석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일조를 했다고 봐도 좋을 만큼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뭔지는 잘 몰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펴보기로 했다.



전체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두 개의 석비가 있고 그 주변으로 여덟개의 주춧돌이 보인다. 이것을 봐서 아마도 예전에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서 팔각정을 세웠거나 적어도 그것을 세우기 위해서 기초공사를 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중앙의 다소 큰 비와 그 왼편에 다소 작은 석비가 기단위에 서 있는데 각 면마다 글귀가 적혀있어서 정리를 해 봤다.



사면(四面)에 새겨진 글자를 보기 위해서 이렇게 만들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은 북쪽 면에 있고, 남두육성(南斗六星)은 남쪽 면에 있으며 불(佛)은 서쪽 면에 있고 천계황지(天鷄黃地)는 동쪽 면에 있다. 촬영을 한 시간이 오후 4시 반이므로 햇살이 비치는 곳이 서쪽이라는 것을 알겠고, 그것은 불(佛)의 면이라는 것으로 인해서 동남서북은 정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까, 1948년에 조이양 할머니의 며느리인 손씨부인이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이곳에 탑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이길구 선생의 『계룡산맥은 있다』에 기록이 되어 있단다. 그래서 이길구 선생의 책인 계룡비기도 구입해서 읽어봤다. 뭐든 일단 꽂히면 해결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낭월이니 어쩔 수가 없는 셈이다. 다시 자료를 추적한다.

평양에서 이주한 조(趙)씨 할머니까 매일 국사봉에서 기도를 하다가 황해도의 묘향산과 구월산에 산재한 단군성조의 얼이 이곳으로 옮겨왔다면서 국사봉을 신격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조씨 할머니는 8.15광복과 6.25전쟁을 정확히 예언하는 등 많은 것들을 예언하였다고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유명한 정치인이나 재계 인사들이 드나들었고 할머니는 이들의 점을 봐주면서 돈도 많이 벌었다. 그래서 며느리가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비석을 세웠다.

이 비석의 내용에는 한반도가 천년 이상 동방예의지국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단군성조의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천지창운비(天地創運碑)' 그러니까 이 석비는 향적산에서 비롯되는 천지의 운세를 나타내는 비석으로 북쪽의 묘향산과 구월산에 흩어져 있는 단군성조의 얼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자료만 봐서는 이 글귀를 조씨 할머니가 말한 것을 며느리가 새겼다는 것인지, 며느리가 알아서 시어머니의 공덕을 기려서 나름대로 새겼다는 말인지도 명료하지 않다. 그나마 조씨 할머니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겠지만 이 글귀를 새긴 인물의 모호해서 갑갑한 마음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행적으로 봐서는 조씨 할머니가 써 놓은 글을 며느리가 돌에 새겼다고 보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렇게 영통을 한 할머니의 관점에서 나온 글귀라고 한다면 또 비중을 두고 관찰하여 분석을 해 봐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신이 알려준대로 기록해 놓은 것이므로 인간의 능력에 따라서 나름대로 알게 된다고 생각하면 무난할 것인지도 아리송송~하다. 여하튼 글자를 보면 어떻게라도 요리를 하고 싶어지는 것은 먹물들의 본능이리라. 그런데 또 다른 연유도 전해진다. 향토자원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1923년에 당시 논산군 두마면으로 이주를 해 온 천도교의 초부당 이일형에 의해서 건립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국사봉의 자태가 천계황지 즉 '봉황이 깃드는 천하의 길지'로 봐서 당시에 항일투쟁과 국난에 위태한 국권이 회복되기를 기원하고자 세워다고 전한다.

이것은 위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느낌으로는 오히려 영기운이 밝은 할머니의 작품보다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리고 정자를 만들었는데 팔도에서 흙과 물을 가져와서 비석과 정자의 기둥 밑에 넣고서 세웠다는 말도 있다. 낭월도 이 글귀들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자신의 생각 속에 들어있는 의문점에 마침표를 찍어버려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딘 눈망울을 굴리면서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얻어 낸 나름대로의 결론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밝은 혜안의 관점으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면 미련한 낭월에게 말이 되도록 알려주시기 바란다.

[북두칠성(北斗七星)에 대하여]

북두칠성은 칠성신앙의 대상이고 한국인에게는 천신이나 천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절마다 칠성각이 있어서 칠성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는데 그들의 이름은,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인데 이들은 인간계를 지배하는 신들로써 제각기 자신이 맡은 일을 수행하여 길흉화복을 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두제일 탐랑성군 : 자손이 번성하여 가문이 융창하도록 하는 신
북두제이 거문성군 : 삶에서 장애를 없애고 무사무탈하게 하는 신

북두제삼 녹존성군 : 자신이 악업을 지었을 경우 참회하면 풀어주는 신
북두제사 문곡성군 : 원하는 것을 모두 얻도록 해 주는 신
북두제오 염정성군 : 백가지의 장애물을 모두 없애버려주는 신
북두제육 무곡성군 : 복과 덕을 모두 갖추도록 해 주는 신
북두제칠 파군성군 : 수명을 길게 만들어줘서 장수하게 하는 신

이상이 북두칠성이 맡고 있는 주요 업무이다. 그 중에서 거문과 염정의 일이 겹치는 것 같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역할분담이 잘 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하튼 원래 북두칠성이 불교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장담하기 어렵고 오히려 도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아울러서 이러한 명칭은 풍수학에서도 그대로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속에서는 통상 칠성님으로 칭하고 인간사의 모든 길흉화복을 좋은 방향으로 만들어주는 전지전능의 신으로 인식하고 있다.

어쩌면 조씨 할머니께서 이 글귀를 새겼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신들을 대표하는 북두칠성님이 굽어 감응하시라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서산대사나 무학대사가 새겼다고 한다면 또 그분들의 관점에서 생각해 봐야 하겠지만 영통과 연관이 된 할머니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길흉화복을 놓고서 나쁜 것은 막아주고 좋은 것은 길러주는 염원을 담아서 북두칠성님께 기도할 적에 절을 하는 대상으로 삼으려고 새겼다고 봐서 무난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했다.

[남두육성(南斗六星)에 대하여]



북두칠성은 서북의 하늘에 있고 남두육성은 남쪽하늘에서 볼 수가 있는 실제의 별이다. 모양이 북두칠성과 닮았다고 해서 남두육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이름은 천부(天府), 천량(天梁), 천기(天機), 천동(天同), 천상(天相), 칠살(七殺)이다.

보통 북두칠성은 죽어서 갈 곳이라고도 하는데 하늘나라로 간다는 것은 북두칠성으로 간다는 의미와 서로 통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북쪽은 저승을 의미하기도 하므로 그런 의미에서 죽음과 연결을 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까지 파고 들어가는 것은 그 글을 쓴 할머니의 생각을 너무 앞지르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짧은 상식을 얼버무리는 낭월이다.

[불(佛)에 대하여]

부처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아미타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해 봤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불교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신을 섬기는 경우에는 부처님이라고 하지만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주문을 생각해 보더라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추론이다. 그리고 칠성님과는 또 다른 세계에서 중생들을 행복하게 해 줄 이름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이 글자의 면이 서쪽이라는 것이다.

특히 그 위치가 서쪽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이 서방(西方)의 극락세계(極樂世界)이기 때문에 그 위치가 서쪽에 배열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니, 후천세계이니, 미륵불이니 혹은 개벽이니 하는 이야기와는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으로 봐도 되지 싶다. 여하튼 낭월의 소견으로는 이 정도의 관점으로 봐도 크게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맨 아래에는 심(心)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네 면이 모두 같은 것으로 봐서 글귀와는 무관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풀이를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 통과~!

[천계황지(天鷄黃地)에 대하여]

자,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리고 궁금하기도 한 글귀가 등장을 했다. '천계황지(天鷄黃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은데 낭월도 이 글귀를 보면서 곰곰 생각을 해 보니까 대략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되는 것 같다. 물론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소설인지는 읽으시는 벗님이 생각을 할 부분이고 낭월은 이렇게 생각하고 정리를 해 버릴 것이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낭월이 풀이한 글귀이 뜻은 이렇다.

'하늘에서 내려온 닭이 머무는 곳은 황제의 땅이다.'

너무 간단한가? 간단해서 나쁠 이유는 없다. 천계(天鷄)는 하늘 닭이다. 그리고 하늘의 닭이라고 한 것은 계룡산은 하늘에서 내려 준 길지(吉地)라는 의미도 되는 것으로 생각해 봤다. 황지(黃地)는 황제가 머무는 땅이고, 중앙에 머무는 땅인데 계룡은 예로부터 중악(中岳)이라고도 불렸으니 그런 의미에서도 황지와 상통(相通)한다. 그래서 간단하게 정리하면, '하늘의 축복을 받은 계룡산'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것이 낭월의 평소 생각이다. 그래서 이 글귀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풀어버렸다.

그리고 이 글귀가 자리하고 있는 방향은 동방이다. 그렇다면 더욱 명료해진다. 동방은 어디를 말하는가? 바로 조선땅을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니 조선 땅의 중앙이 되는 계룡산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물인 닭의 땅이고 닭은 어둠을 몰아내고 새벽을 맞이하는 가장 부지런한 짐승이니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면서 비결을 풀이하는 것도 그리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중얼대는 낭월~




네 면에 한 글자씩 새겨져 있는데 앞에서 본 북두칠성의 비석과는 연관이 없어보인다. 여기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을 해 봤다. 그런데 의외로 뜻은 쉽게 풀어진다. 네 글자를 퍼즐식으로 조합을 해 본 결과 가장 근접하고 매끄러운 조합은 이렇게 나왔다. 이름하여 '오화일취(五火一聚)'이다. 다른 의미로 조합을 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해 봤지만 이렇게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무슨 뜻일까?

그대로 풀어보면 '다섯 개의 불이 하나로 모인다.'라는 간단한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을 한 줄로 새기지 않고서 왜 각 면마다 나눠서 새겼을까? 그것이 오히려 더 궁금했는데 그것은 바로 옆에 있는 비석이 그렇게 했으므로 일종의 모방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비석을 가리켜서 오행비라고도 한다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오행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낭월이다. 단지 '오(五)'라는 글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면 아무래도 헛웃음이 나올 뿐.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글귀를 적어놨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일종의 선동적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과거에 동학군이 인연을 하였던 곳이라는 글을 봤는데 그렇다면 농민봉기와 연결을 시켜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봤다. 그러니까 오화(五火)는 '오방(五方)의 횃불'인 것이다. 동서남북과 중앙의 불타는 청년들이여~~! 라는 의미로 해석을 하면 되지 않을까? 조금 더 풀어들어가면, '온 천지에서 왕권에 대항하여 새로운 세계를 열어 갈 마음의 준비가 된 불타는 열혈청년들이여~!'가 된다. 왜냐하면 오방은 결국 동남서북과 중앙이므로 '온천지'를 의미하는 까닭이다. 엉? 온천지? 왜 갑자기 신천지(新天地)와 연결이 되지? 사실 신천지라는 종교단체에서 이 향적봉을 사려고 시도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일취(一聚)는? 그야 한 곳으로 모여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은 촛불을 들고 시청으로 모이던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만화일취(萬火一聚)거나 억화일취(億火一聚)라고 하면 될 것이다. 여하튼 흩어진 불은 힘이 없다. 그래서 한 자리에 모여서 농민이 다스리는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는 염원을 이렇게 돌에 새겨서 천추만대에 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뛰어난 혜안종사가 계셔서 우둔한 낭월에게 가르침을 주시고자 한다면 감읍할 것이다.

이렇게 평소에 궁금했던 향적봉의 석비에 대해서 나름대로 해석을 하고 보니, 생각보다 깊은 의미는 없었던 것 같아서 기대를 할만 한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혹시라도 정역(正易)을 풀이할 열쇠를 끼워놓기라도 했으려나 싶은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물론 이것은 낭월이 아는 만큼만 본 것이므로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에게는 또 어떤 내용으로 해석이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사이에 연지님은 기다림에 지쳤을 것이다. 그래도 전망하나는 기차게 좋아서 안개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런대로 둘러볼만 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하기로 했다.



하산은 반대편으로 내려왔는데 길부터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마도 삶에서 운이 좋아지면 이렇게 정성들여서 만든 길로 가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하튼 올라간 길과 내려가는 길은 그야말로 천지차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오늘에서야 알게 된 이름인 '멘재 능선'이 천황봉을 향해서 구불구불 달려가고 있는 모습도 아름답고 신록(新綠)의 빛깔은 더욱 아름다우니 비로소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즐거움이 새삼스럽다. 원래 이 능선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이라던가? 그래서 덕유산에서 힘차게 역류하여 대둔산에서 서향하고 천호산을 거쳐서 향적봉에서 숨을 고르고 천황봉으로 달려간다던가..... 여하튼 올라오는 길은 힘들어도 바라보는 기분은 삼삼하다.




계단의 아래에 있는 대피소이다. 악천후를 만났을 경우에 잠시 피하라고 만든 것 같기는 한데 좀 허름하기는 하다. 여하튼 오늘은 이것을 이용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헬기장에서 상월면 대명리로 간다는 길로 접어들어 봤는데 그 길이 사람잡는 길이었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알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 이 길로 갈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단언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열 번도 더 했다.




이렇게 험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되돌아 갈 시간도 없다. 앞으로 가는 수 밖에 없으므로 연지님을 격려하면서 계속해서 하산했다. 길이도 1.8km라고 했는데 한참을 그렇게 걸어서야 겨우 힘겨운 내리막길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출입제한의 팻말을 보게 되었으니 원래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물론 초행길이라 그렇긴 했지만 출입제한을 걸어놓은 곳은 가능하면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기에서 올라가는 길은 향적봉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에 멘재 능성으로만 가지 않으면 불법은 아니라고 봐도 되겠다.



맑고 차가운 감로수.



금강대학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암자에는 고운 등을 주렁주렁 달아서 부처님 오신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금강대학교로 들어가는 길도 마찬가지로 등불을 달아놨는데 천태종 구인사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금강대학교가 구인사의 소속이라는 이유로 인해서이다.




마침내,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6시 25분이었다. 빤히 보이는 곳을 다녀오는데 네 시간이나 걸렸으니 한나절의 등산이라고 해야 할 모양이다. 여하튼 그 바람에 궁금했던 많은 것들에 대해서 해소가 되었으니 충분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다음에는 반대쪽에서도 한 번 올라가면서 향적산방에 대해서도 살펴봐야 하겠다는 나머지공부를 남겨 놓는다.


2013년 5월 6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