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논산] 계백장군유적지(階伯將軍遺跡地)

작성일
2013-05-02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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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논산] 계백장군유적지(階伯將軍遺跡地) - 2013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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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동을 하겠다고 결심을 한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날씨가 매우 춥거나, 눈이 오거나, 혹은 비가 내려서 작심삼일이 되고 말겠다 싶었는데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연지님이 바람을 넣는 바람에 운동화를 찾아냈다. 이 운동화는 특별히 남편의 건강을 위해서 구입한 매우 비싼 신발이다. 그래서 반드시 신어야만 하는데 사실은 발을 잡아주는 것이 매우 잘 만들어진 것 같아서 비싼 값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색 운동화는 그 동안 사용했던 것인데, 산에서 내려 올 적에 발가락으로 쏠려서 불편한 감이 있었다. 그리고 끈이 수시로 풀려서 밟히는 것도 불편했는데 이 하늘색 운동화는 끈도 없지, 발도 용천혈 쪽을 꽉(아플 정도로) 눌러주니까 마치 발가락이 없는 것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 단계 진화를 한 것으로 봐도 되지 싶다. 갑자기 웬 신발자랑? 그런데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신발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이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발이 고생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여하튼 그렇게 새 신발을 신고 계백장군묘로 길을 나섰다.












  그러니까 백제군사박물관 뒷편에 계백장군묘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앞으로는 논산의 탑정저수지가 있는데 저수지라고 하기에는 조금 커서 보통 탑정호라고 부른다. 그럼 감로사에서는 얼마나 멀리 떨어졌을까 싶어서 거리를 확인해 봤다.






  감로사에서 계백장군유적지까지는 20.9km라고 하니까 21km정도 잡으면 되겠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곳이면서도 기억에 없는 것을 보면 오히려 가까워서 가보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전과 논산의 국도변에서 들어간다.










매표소가 있는데 논산시민은 신분증이 있으면 무료입장이라고 한다. 낭월은 당연히 논산시민이므로 무료입장의 대상인데 사실은 지갑을 들고 오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았다. 그렇지만 우물쭈물하고 옆길로 가다가 보니까 입장료를 내지 않고 통과를 한 셈이 되었다. 뭐....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니깐...... 흐~





양지바른 곳에 넓게 터를 잡고 편안히 모셨으니 살아서의 만고풍상은 죽은 다음에 편안한 휴식으로 누리시는지 모를 일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5천 결사대가 나온다.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무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12척의 배만 갖고서도 싸워서 이겼으니 그 분이 더 뛰어난 장군일까? 여하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은 확실하다. 결사대와 함께 싸움에서 이겼더라면 또 어떻게 되었을까?





  낭월은 자칭 신라인이다. 무신...... 청도는 옛 신라땅이기 때문이라는 단순소박한 이유이다. 그래서 계백장군에게 왠지 참회를 해야 할 것 같은 미안함이 스물스물 배어나온다. 조상이 지은 빚을 후손이 갚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연지님은 백제인이다. 그녀가  태어난 곳은 부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연은 나제결합(羅濟結合)인 셈이다. 참 거창하군~









  여하튼 계백장군의 사당에 들어가서 참배를 해야지. 저쪽으로 보이는 것이 장군의 묘소이다. 사당의 이름은 충장사인데 넓직한 공간에 고즈넉하게 자리를 잡고 있으니 속세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난듯 싶기도 하다.









  위패를 향해서 3배를 했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해 봤다. 사당에서 절을 하는 것과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묘소는 몸이 쉬는 곳이라면 사당은 영혼이 쉬는 곳이다. 그렇다면 절을 해야 할 곳은 묘소가 아니라 사당이라고 하는 간단한 이치가 나온다. 그냥 덮어놓고 넙죽접죽 절을 할 것이 아니라 어디에다 해야 할 것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봤는데 과연 이것이 계백장군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미에서 옳겠다는 생각이다. 물론 계씨는 묘소에서 절을 해야 한다. 그것은 신체적으로 유전인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장군의 묘소에는 제비꽃처럼 보이는 보라빛의 꽃이 피어있었다. 묘소를 보면서 또 생각을 해 본다. 만약에 화장을 해서 유골함에 담아서 납골당에 안치했으면 어떤 느낌일까? 이렇게 멋진 자리에 앉아있는 듯한 느낌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화장을 해서 바다에 재를 뿌려버리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어딘가에 흔적을 남겨 놓고서 과거에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것도 뭐....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은 생각들......









위풍이 당당한 영정이다. 키 만큼이나 큰 칼을 들고 계신 것을 보니 잠시도 마음을 편히 쉬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칼을 들지 않아도 계백장군인 것을 알텐데 뭐하러 저런 것을 들고 계시게 만들었담...... 죽어서 영정에 앉아서도 칼을 놓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 그린 사람의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주문을 한 사람이 반드시 칼을 하나 들고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이 그랬을까? 그래서 1천년이 넘도록 칼을 놓지 못하고...... 원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 낭월이다. 이순신 장군도 칼을 들고 계신가?




  



  아마도 지휘봉을 들고 계신 것 같군.  오른쪽은 김유신인데 그도 칼을 차고 있기는 하다. 아마도 육군은 칼을 들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칼의 길이를 보니 김유신이 좀 짧아보인다. 하긴.... 그게 뭐 그리 중요한 일이라고 일할 머리 없이 하하~






  이번에는 칼 뿐만이 아니라 아예 말까지 타고서 적군을 지키고 있는가보다. 기념상이니까 어쩔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계백장군의 마음이 있다면 어떻게 생각을 할까? 아마도 말이라면 지긋지긋하고 칼이라면 소름이 돋지 싶은데 그래도 무심한 후손들은 그러한 것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위풍도 당당하게 묘사를 했다. 예전에 서울의 낙성대를 가보니까 거 곳에는 또 강감찬 장군이 마을 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장군들은 죽어서도 말을 타고 칼을 휘두르는 것을 면할 수가 없는 것은 아마도 생전에 지은 업이 그래서가 아닐까 싶은 택~도 없는 생각을 혼자 한들 누가 말리랴~ 흐~




운동을 나온 것이 확실한 낭월인지라 유적지를 한 바퀴 돌기로 하고 묘소를 지나서 산으로 올랐는데 황산루(黃山樓)가 쉬어가란다. 그리고 설명해 놓은 안내판을 보니까 황산루의 뒤쪽이 바로 황산벌일 것이라는 고증에 따라서 그림을 그려놓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 뒤로 돌아가서 황산벌을 내려다 봤다.







  저 멀리 높고 낮은 산들이 올망졸망한 장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당의 군사들이 이 산을 뛰어올라서 마침내 부여로 진격했으려니...... 새카맣게 달려드는 5만의 악마들(5천의 백제군이 봤을 적에는)을 바라보면서 모골이 송연했을 분위기를 생각해 본다. 풍경을 조금 크게 보고 싶은 경우를 생각해서 사진을 클릭하면 되도록 했으니 참고 하시도록.








  황산루에서 신라군이 바라봤을 시선으로 백제땅을 넘겨다 봤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데 내땅과 남의 땅을 구분하여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도 운명이었을까? 뭐 그런 감상에 젖어보는 것도 한가로운 자의 여유라고 해두자. 목숨을 걸고 두려움에 떨면서 창검을 들고 숨이 턱에 닿아서 돌격을 외쳤을 장정들이 적의 성을 함락했을 적에 어떤 마음일까? 그래서 난폭하게 변해서 겁탈하고 강간하는 것도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런 세월을 다 잊고서 편안하게 누워계시는 모습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다. 예전에 현공풍수를 공부할 때 같으면 아마도 나경(羅經)을 챙겼을 것이다. 그래서 이 자리에 앉아서는 산좌수향(山坐水向)을 논하면서 길지이니 흉지이니 했겠지만 이제 그러한 것으로부터는 자유로워진 모양이다. 정리를 하면서 이 사진을 보니까 문득 이러한 생각이나마 들었던 것이지 사진을 찍을 적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지리(地理)가 명리(命理)보다 엉역이 큰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자신이 누릴 복록에 따라서 결정되어지는 것이기에 결국은 남의 떡을 바라보면서 군침을 흘릴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쥐어진 보리떡이라도 감사하는 것이 자연에 순응하는 길임을 깨달았기에.......




인물들이야 별로 볼품은 없어도 또한 이날 이 시각에 우리 둘은 이 자리에 있었노라는......
그리고 먼 훗날에 어느 후손이 여기에서 무엇을 봤느냐고 묻거든,
조그만 제비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노라고.....




새끼묘..... 자명스님을 따라서 풍수공부를 할 적에 들었던 말씀이 문득 생각난다. 좋은 묘터 옆에 자리를 잡으면 혹시라도 자신의 자식 중에서 장군은 그만두고라도 소령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 열망에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부모가 된 자의 소박한 바람일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기(地氣)를 이해하면서 지척이 천리라는 이치를 알고 나서는 본 자리와 옆 자리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이러한 자리에 조상을 모신 사람이야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또한 운명일 터.





  따사로운 햇살에 미래의 희망들이 계백장군의 위대한 정신을 배우고자 나들이를 했던 모양이다.





  계백장군묘를 바로 앞에 두고 충곡서원의 팻말이 서 있다. 나오는 길에 들리면 되는데 원래 장군을 위해서 분향하던 곳이었다기에 세트가 될 것 같아서 잠시 가던 길을 멈췄다.





  아마도 원래 터만 남아있던 자리에 나중에 건물을 세웠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안내판에 지(址)가 붙어있겠지. 외삼문과 내삼문으로 구성되어있고 사당은 굳게 잠겨져 있어서 위패는 접할 수가 없었다.













  어느 계절인지를 말해주듯이 자목련이 자태를 뽑내면서 객을 맞이한다.





총 운동시간을 보니까 9시 반에 도착해서 마지막 사진을 찍은 시간이 11시 39분이니까 두어 시간 돌아다닌 셈이다. 그 정도면 하루의 운동으로는 충분하겠다는 자기만족을 하면서 부지런히 귀가해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2013년 5월 2일에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