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 제44장. 소요원(逍遙園)
9. 보타암(寶陀庵)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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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이에 오늘도 하루해가 저물었구나. 열심히 학문을 닦았으니까 저녁에도 만찬을 즐겨야지? 맛있는 음식으로 몸을 기르고 지혜로운 가르침으로 맘을 살찌우니 여기가 바로 선경(仙境)이지 않겠어?”
쏟아지는 석양의 햇살을 보면서 말하고 있는 기현주의 얼굴에도 꽃이 피어나는 듯했다. 깨달음의 순간에는 몸도 그것을 알아보는 듯했다. 자원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좋아요! 낮에 공부를 많이 했으니 이제 공부는 내려놓고 오감(五感)을 즐겨도 좋겠어요.”
“그렇지? 악사(樂士)도 불렀으니까 음주(飮酒)와 가무(歌舞)로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면 나도 좋지.”
이렇게 말하고는 잠시 쉬도록 하고 기현주는 바삐 어디론가 가더니 오래지 않아서 대여섯 명의 가인(歌人)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그들은 저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악기를 손질하고는 음악으로 분위기를 돋웠다.
음식은 그릇에 담아서 한쪽 벽에 나란히 배열해 놓고 저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져다 먹도록 하고 악사들도 편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흥겹게 즐겼다. 우창도 먹고 마시며 학문의 즐거움에 이어서 음식의 즐거움을 누렸다. 서로 권하며 나누다 보니 모두 만족스러운 저녁을 보냈다.
우창이 눈을 뜨니 머리가 띵했다. 아무래도 지난밤에 음주가 과했던 모양이다. 눈만 뜨고 있는데 기현주가 다가와서 말했다.
“잘 주무셨어? 아마도 속이 거북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녹차(綠茶)를 따끈하게 끓였는데 시원하게 한 잔 마시고 푹 쉬어. 그러면 가뿐해질 거야.”
“예, 조금 띵합니다. 그런데 누님은 멀쩡하십니까? 누님도 제법 마셨을 텐데 말이지요.”
“응, 즐거워서 나도 과음했어. 그래서 얼른 준비했지.”
기현주가 만들어 준 차를 마시자 이어서 잠이 깬 일행들에게도 한 잔씩 챙겨줬다. 우창도 그것을 마시고 나자 머리가 곧 맑아지는 것 같았다.
“누님, 이건 그냥 녹차는 아닌 것으로 생각되는데 무엇을 첨가해서 만들었나 봅니다. 상쾌한 향이 무척 좋습니다.”
“아, 술을 즐겨하시던 부친(父親)을 위해서 어머니가 항상 만들던 음료야. 이것을 믿고서 나도 때로는 과음하기도 해. 호호호~!”
“향도 좋은데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도 좋고 갈증도 이내 해소되는 것 같습니다. 기분이 이내 상쾌해졌네요. 하하~!”
모두 기운을 차린것으로 보이자 기현주가 말했다.
“어때? 공부도 열심히 했으니까 오늘은 나들이하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말이야.”
기현주의 말에 우창이 대답했다.
“아니, 여기보다 더 풍광이 좋은 곳이 또 있습니까? 백화가 만발하여 선경인데 말입니다.”
“고맙구나.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아무리 좋은 꽃도 자꾸 보면 그 싱그러움이 감소하잖아. 그래서 바깥으로 나들이하고 돌아오면 더욱 반갑기도 하니까.”
“아, 그것도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래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
“여기에서 십 리쯤 가면 바위 벼랑에 까치집처럼 지어놓은 암자가 있는데 이름이 보타암(寶陀庵)이야. 폭포와 송림이 어우러져서 나도 가끔 머리가 복잡할 적에 찾아가면 편안해지는 곳이 있어.”
기현주의 말에 자원이 반갑게 동의했다.
“정말 상상만으로도 경치가 좋아 보여요. 꼭 가보고 싶어요.”
“역시 자원이 장단을 잘 치는구나. 그럼 잠시 후에 출발하도록 해.”
기현주가 마차의 앞에 앉아서 말을 몰았다. 옆에는 자원이 앉고 우창과 삼진은 뒷자리에 편히 앉아서 느긋하게 풍경을 구경하면서 보타암으로 향했다. 대략 한 시진이 지나서 마차는 거대한 바위 벼랑 앞에 멈췄다.
“자, 다 왔어요~!”
기현주의 말에 모두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과연 감탄할 만했다. 자원이 기현주에게 말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멋진 절경이 있었네요. 참 좋아요.”
“방향은 먼저 갔던 비봉산과는 반대편이 되는 셈이야. 볼만하지?”
“참 오랜만에 멋진 풍경을 보네요. 그런데 까치집 같다던 암자는 어디에 있어요? 안 보이는데?”
“응, 여기에서 조금 걸어서 올라가면 돼. 벼랑으로 통하는 석굴이 있거든.”
“석굴까지 있어요? 정말 재미있어요. 호호호~!”
기현주가 앞서 안내하는 대로 따라 올라 가자 사람의 키만큼 동굴이 나타났다. 석굴의 중간에 구멍이 뚫린 곳이 있어서 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그래서 어둡지는 않아서 걸을 만했다. 숨이 조금 가빠질 정도로 한 시진 정도 오르자 시야가 트이면서 벼랑 밖으로 통하는 곳에 도달했다. 우창은 석굴을 지나면서 문득 우성암(牛聖庵)에서의 시간을 떠올려 봤다. 화련도 잘 있는지, 지광은 또 어디에서 지내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는데 어느 사이에 다 올라 왔다는 기현주의 말에 위를 바라보니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굴을 벗어난 것이다.
“아, 보타암이구나.”
우창이 감탄하며 말했다. 암자가 바위의 벼랑을 의자하고 붙어있다시피 했는데 묘하게도 바위가 난간을 이루고 있어서 안전해 보이는 곳에 지어진 작은 암자였다.
“여기에 모셔진 관음보살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서 원근(遠近)을 불문하고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은 찾아와서 정성으로 기도를 드리고 소원을 이룬다고 하니까 동생도 간절한 염원이 있으면 기도해 봐 소원이 이뤄질 거야.”
“알겠습니다. 저마다 소원 하나씩은 가슴에 품고 다니니까요. 하하~!”
법당은 좁아서 다섯 사람이 서서 절하기에도 복잡했다. 그래도 저마다 염원을 담아서 삼배(三拜)를 올리고는 다시 밖으로 나오자 암주(庵主)로 보이는 화상(和尙)이 나타나서 기현주에게 합장하고 말했다.
“기 시주님께서 오랜만에 방문하셨습니다. 그간 편안하셨지요. 나무아미타불!”
“주지 스님, 잘 지내셨어요? 손님들이 놀러 왔기에 멋진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서 동행했어요.”
“잘하셨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우창도 마주 합장하고 인사를 하고는 기현주를 따라서 법당 옆으로 들어 가자 그 안은 의외로 넓은 동굴의 요사채(寮舍寨)가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의 형태로 봐서 천연의 굴이 있는 것에 일부를 손질해서 벽을 만들고는 방을 들인 것인데 기거하기에는 아무런 불편이 없어 보였다. 다만 높은 곳이라서 물이 귀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수는 넉넉합니까?”
우창이 묻자 주지화상이 석굴의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수각(水閣)에 맑은 석간수가 철렁하게 담겨있었고 흘러서 넘치는 물은 흘러내렸다. 그것을 보자 과연 사람이 사는 곳에는 물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역시 물이 있으니 사찰이 자리를 잡았군요. 참 좋습니다. 하하~!”
“아마도 창건한 것은 언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전란을 피해서 은둔하게 된 것이 점차로 알려지면서 암자가 자리를 잡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만 해 봅니다.”
주지의 말을 듣고 우창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사명(寺名)이 보타암이네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무슨 뜻인지요?”
“아, 보타(普陀)는 서역(西域)의 말로 ‘작은 흰 꽃’이라는 뜻입니다만, 그보다는 관세음보살이 상주(常主)한다는 보타락가(補陀落迦)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곳에는 관음보살이 항상 머물러 계신다는 뜻이지요.”
주지는 무표정하게 늘 그렇게 설명했다는 듯이 간단하게 말했다. 그러나 우창의 궁금증은 해소되지 않고 다시 이어졌다.
“항상 머무른다고 하는 것은 이곳에 관세음보살이 거주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왜 보이지 않습니까? 스님의 눈에는 관음보살이 보이십니까?”
“예, 보입니다. 거사(居士)는 보이지 않으시는가 봅니다.”
우창은 더 말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외운 대로 지껄이는 것처럼 말하는 화상에게 뭔가 쏘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피어올랐는데 기현주의 체면을 봐서 참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다. 그 표정을 본 기현주가 우창에게 말했다.
“어머, 동생이 스님과 대화하고 싶은가 봐. 스님이 그리 막힌 분은 아니니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마음이 내키는 대로 여쭤봐. 또 많은 공부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호호호~!”
그 말을 듣고서 우창이 편한 마음으로 주지에게 물었다.
“지금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까 환상(幻想)에 사로잡힌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데 제 생각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지혜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창은 주지가 뭔가 착각 속에서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러나 주지는 애초에 특별한 표정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우창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요.”
“예? 본인이 어떤 상태인지도 잘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빈승(貧僧)의 상태는 빈승의 상태일 따름입니다. 혹 빈승의 상태를 거사께서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까?”
이번에는 주지가 우창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우창이 준비하고 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현실 세계를 잊고 환상의 생각 속의 세계에서 머물러 계신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우창의 말에 기현주가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동생에게 이러한 면이 있는 줄은 또 몰랐어. 호호호~!”
우창이 기현주를 한 번 바라보고 미소를 짓자 주지가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게 맞을 겁니다.”
“예? 그걸 알면 그곳에서 빠져나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길을 모르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한순간에 정신을 차리고 눈에 보이는 실제의 세계를 관한다면 허상에서 벗어 나는 것이 즉시로 가능한데 말입니다.”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거사가 말하는 실제 세상과 헛된 환상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창입니다.”
“아, 우창 선생이군요.”
우창은 거사라는 말이 거북해서 아호를 말하자 주지도 얼른 알아채고는 그렇게 불렀다.
“우창 선생은 환상에 잠겨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지의 반격이었다. 잠시 얼떨떨한 우창이 다시 말했다.
“세상의 풍광을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게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환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환상입니다.”
“예?”
순간 우창은 말문이 막혔다. 예상 밖의 답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주지의 내공이 만만치 않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물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환영을 보며 실체라고 생각하니 그것이 바로 환상인 게지요.”
“왜 실제의 세상을 환상이라고 하십니까? 그 정도로 사리(事理)와 판단(判斷)이 안 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창은 점점 주지의 말에 말려들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싸우자고 시작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제는 자존심이 그대로 물러날 수가 없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여쭙겠습니다. 이 자리에 관세음보살이 계신 것이 맞습니까?”
“당연히 맞습니다.”
“음……”
우창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생각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대답하는 주지의 모습에서 허투로 대응하면 본전도 못 건지겠다는 일말의 두려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런데 왜 제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우창은 결국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렇게 묻자, 주지는 다시 예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눈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주지를 보며 우창은 순간 후회했다. 괜히 시비를 걸어서 얻을 것은 없고 망신만 당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때 삼진이 옆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끼어들었다.
“대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실상(實相)인지요?”
“그렇습니다.”
중년의 주지는 대략 쉰은 넘어 보였다. 다만 화상들의 모습은 거의 차림새가 비슷비슷해서 정확한 가늠은 어려웠다. 기현주와 비슷한 연배일 것으로 짐작만 했다. 삼진의 물음에 간단하게 시인하자 우창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삼진과 대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삼진이 다시 물었다.
“현상의 세계는 모두 거짓된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그렇습니다.”
“그 이유는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만든 세상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실제의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삼진이 대화하는 것은 우창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스스로 답하는 입장에서 질문을 하는 것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답을 해야 하는 것은 우창이 아니라 주지가 되었던 셈이다. 주지가 답했다.
“심외무일물(心外無一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벗어난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까?”
“맞습니다.”
“지금 이렇게 대하고 있는 스님은 누구입니까?”
“허깨비입니다.”
우창은 그 말을 듣고서 하마터면 실소(失笑)할 뻔했다. 그야말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삼진이 진지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서 참고 기다렸다. 무슨 말로 결말이 날 것인지가 궁금하기도 했다. 애초에 형체도 없는 관세음보살이 여기에 있다고 한 주지의 말에 삼진도 말려드는 것처럼 느껴져서 다소 불안감이 생기기도 했다. 삼진의 말이 이어졌다.
“마음밖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는데 지금 화상의 마음은 어디에 머물러 있으십니까?”
“머무르는 곳도 없습니다.”
주지의 말을 듣고 삼진은 우창을 바라봤다. 더 계속해서 대화를 원하느냐는 뜻이었다. 그것을 본 우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주지를 가르쳐서 깨우치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환상에 사로잡힌 화상을 그 허상의 세계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것을 본 삼진이 다시 물었다.
“스님께 여쭙습니다. 왜 이 세상은 허상(虛像)입니까?”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삼진이 옆에 있는 차관(茶罐)을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바라보고 있는 차관은 무엇입니까?”
“그대 눈이 지은 속임수입니다.”
그러자 삼진이 그것을 손에 들고 다시 물었다.
“이렇게 묵직한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대의 촉감이 지은 속임수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눈이 없다면 차관도 없을 것이고 촉감이 없다면 차관의 존재도 느낄 수가 없을 테지요.”
우창이 가만히 듣고서 생각해 보니 그것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처음에는 황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실로 오감(五感)이 없다면 과연 세상이 존재하는 것인지를 확신할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삼진의 말에 점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삼진의 질문이 이어졌다.
“스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몸을 의지한 지각(知覺)은 모두 허망하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진실한 것은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모두가 반연(絆緣)으로 생기는 까닭입니다.”
“아,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도 허상입니까?”
“허상이기도 하고 실상이기도 합니다.”
“답변이 애매합니다.”
“질문이 애매한 까닭입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어떤 때에 실상이고 어떤 때에 허상입니까?”
“무심으로 관하면 실상이 되고, 망념으로 관하면 허상이 됩니다.”
“그렇군요. 무심이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바라는 것이 없으면 무심이 됩니다.”
“얼마나 많은 불자가 소원이 이뤄지기를 바라면서 관세음보살 전에 기도하는데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망념이 현실에 구현이 되도록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그것을 일러서 망념으로 허상을 향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필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간절할 경우입니다.”
“바라는 것은 모두 망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간절함도 망념일 테니 스님의 말씀에는 모순이 있어 보입니다.”
“오해입니다. 간절하되 바라는 것이 없다면 그것을 일러서 기도한다고 합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간절하더라도 망념이 되어버립니다.”
삼진이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물었다.
“예전에 듣기에 어느 젊은 스님이 관세음보살 전에 일구월심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목적은 오로지 성불을 원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비몽사몽으로 화관(花冠)과 영락(瓔珞)으로 장식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시자 스님은 환희심(歡喜心)이 일어서 감격했습니다. 그러자 관세음보살이 말씀하셨답니다. ‘네 성기를 자르면 성불하리라~!’라고 말이지요. 그러자 정신을 차려보니 관세음보살은 없었습니다. 그러자 즉시로 칼을 들고는 자기의 성기를 잘랐습니다. 이것은 간절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망념입니다. 그가 생각으로 관세음보살을 지어놓고 기도하다가 환각에 사로잡혀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왜 그러한 지시를 했을까요?”
“그랬을 리가 있습니까? 자기 상념에 사로잡혀서 헛된 짓을 한 것이지요.”
“말씀대로라면 그것은 관세음보살의 형상을 한 마귀가 아닙니까?”
“아닙니다. 잘못 알아들었을 따름입니다.”
“그러한 것도 막아 줘야 불보살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아닙니까?”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은 불보살도 구제하지 못합니다.”
“왜 그 스님이 어리석었다는 것입니까?”
“이치를 모르고 기도만 했던 부작용입니다.”
“무엇을 이치라고 합니까?”
“안이비설신의가 느끼고 보고 듣고 맛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망념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 스님은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기도하다가 화관으로 장엄한 관세음보살이 나타나도 무심코 흘려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은 점점 자유로움으로 향해 갔을 것이고요. 그것을 ‘경계에 걸린다’고 합니다.”
“혹시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과 같은 것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우창도 기현주도 자꾸만 빠져들어 갔다. 그리고 잠시도 딴생각하면 생각이 흐트러질까 봐서 집중하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