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7] 교권추락을 보면서 떠오르는 그 사절의 선생님들

작성일
2023-09-0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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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 교권추락(敎權墜落)을 보면서 떠오르는 그 사절의 선생님들 

 

 

긴 여름도 끝자락이고 가을이 시작된 지도 한 달여가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한낮은 여전히 폭염주의보가 끊이지 않는 9월의 나날이네요. 벗 님들은 긴 여름을 잘 보내고 계시려니 합니다. 어수선한 교육계의 모습을 바라만 보다가 오랜만에 한담의 문을 열어 봅니다.

 

1. 작금의 사태를 보며

 

연일 이어지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서 뉴스를 보기도 겁나는 시절입니다. 서이초교의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서 49재를 지냈다는 소식을 보면서, 그 행사를 치루며 할말을 다 못한 선생님들의 하고 싶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세상의 변화가 실감나기도 합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을 즐겨 쓰던 바둑 해설가 김수영 사범의 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되네요. 사도(師道)가 잘못 되었는가? 학부모가 잘못 되었는가? 학생이 문제인가? 생각으로 얻을 수가 있는 답은 아닙니다만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씁쓸한 마음이 되는 것은 낭월 뿐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책임지겠다는 다부진 결심을 하면서 교육계로 발을 들였던 푸릇푸릇한 젊은 교사가 그 막중한 사명감을 채 꽃피워 보기도 전에 견딜 수가 없는 심적인 압박에 생명을 스스로 거두는 일이 연일 터지고 있는 것이며, 학부모들 눈치를 보면서 쓸어 덮기에 급급한 학교의 책임자들 하며, 내 자식은 내가 지키겠다는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뒤범벅이 된 풍경을 보면서 낭월의 어린 시절에 겪었던 생각의 조각들이 되살아 났습니다. 하마 세월이 50년도 더 지난 아득히 먼 시간이었습니다만 기억은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니 이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싶기도 합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그 시절의 풍경을 적어볼까 합니다. 다 지난 일이지만 또 그것만은 아닌 것도 같아서 잠시 떠올랐던 것을 중언부언 두서없이 나마 적어볼까 합니다.

 

2. 만준(가명)이에 대한 선생님의 특별한 대우

 

안면도의 창기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만준이라는 동급생이 있었습니다. 낭월은 초등학교라는 호칭은 다른 세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이름인 국민학교가 더 정감이 가는 것은 왠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그 친구의 집은 백사장이었고 부친은 중선 배(규모가 큰 배)를 여러 척 갖고 있는 말하자면 부유한 선주 가정의 아이였지요. 도시락은 늘 고기 반찬이었습니다.  부친이 선주이니 당연하기도 하겠습니다만, 11살 낭월이 처음으로 그렇게 맛있는 반찬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대략 4학년쯤 되었나 봅니다.

 

하루는 벤또(라고 해야 제 맛이 나는 것도 세월의 흔적일까요? ㅋㅋ)를 열었는데 어머니께서 싸 주신 시큼한 김치 냄새가 교실을 진동했습니다. 아이들이 코를 막을 때는 창피스러워서 뚜껑을 도로 닫기도 하고 도시락을 들고 밖으로 나가서 나무 아래에서 혼자 먹기도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으니까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은 항상 주눅이 들어있었던 탓도 있었지 싶습니다. 경상도 창원에서 8세에 난데없는 안면도로 야밤도주를 한 부모님을 둔 인연으로 산 설고 물 설고 말도 선 타향에서의 삶이었습니다. ㅎㅎ

 


 

그 흔한 계란부침도 없었습니다. 어쩌다 김밥을 말아서 갖고 가기도 했습니다만, 낭월의 나이또래를 겪으셨던 시골마을의 출신이라면 아마도 공감이 되시지 싶습니다. 어머니께 김치냄새가 나서 창피스럽다고 하면 멸치를 볶아 주시기도 했습니다만, 여하튼 어느 날, 만상이가 자기 도시락 반찬을 보여주면서 "나랑 반찬 바꿔 먹을 사람 누구야? 내 반찬은 장어조림인데 이거 먹을 사람은 반찬을 보여줘봐" 라고 하는 말에 뚜껑도 못 열었는데 이 친구가 다가와서 내 도시락 뚜껑을 얼더니 시큼한 김치를 보고는 당첨이 되었습니다. 그 녀석은 김치가 그리웠던 모양입니다. 그때는 물론 이해를 못 했지만요. ㅎㅎ

 

하루는 시험을 봤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시험을 보기 전에 몇 점 이하는 손바닥 열 대를 맞는다고 선포를 하셨지요. 여하튼 낭월은 손바닥을 맞지 않을 정도의 점수는 유지했습니다. 워낙 학교에는 흥미가 없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최소한으로 하고 만화책이며 도서관에 있었던 아동문학독본을 보는 것에는 최대한으로 심혈(?)을 기울였으니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때 『러시아 아동문학독본』에서 「닐스의 이상한 여행」을 보고는 그 내용에 매료되어서 천하를 떠돌아 다니고 싶었고, 어쩌면 일찌감치 출가를 했던 것도 그 영향이 없었다고는 못하지 싶습니다. ㅎㅎ  

 

만준이가 성품은 착합니다. 흔히 말하는 '있는 집 자식 같지 않은' 아이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옷이며 학용품은 항상 최상급이었지요. 미술시간이 되면 왕자표 크레파스 42색을 쓰는 것은 참으로 부러웠습니다. 기껏 24색 크레파스도 색깔을 한가지만 쓰면 다른 것은 버린다면서 자꾸 사 줄 수가 없으니 골고루 쓰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지요.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그림의 세계에서 만큼은 내 주관대로 살고 싶었지요. 여하튼 바다만 보고 살아서인지 항상 파랑색이 가장 먼저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초록과 노랑을 섞어서 칠하는 방법도 시도해 보고 했습니다. 나름대로 색깔 배합을 시도했던 것이지요. 물론 그것조차도 맘에 들진 않았습니다만.


만준으로 가명을 쓴 이유도 그렇습니다. 이 친구가 성품은 착한데 공부는 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점수는 아래쪽에서 오락가락했지요. 당연히 선생님과 약속한 점수에는 미달이었고, 점수를 확인한 선생님의 당황한 표정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일지(日支)에 암장된 정화(丁火)의 편인 작용이 삐딱하게 발동했던 모양입니다. 말이 없다고 해서 생각조차 없겠느냔 말이지요. 


당시 아이들로부터 눈찌그댕이, 예망총, 엽총으로 화려하게 별명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으니 심리적으로 느끼는 열등감은 상당했습니다. 항상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표현력도 부족하고 그래서 늘 뒷전에서 찌그러져 있었던 자신의 초상화를 떠올려 봅니다. 선천적으로 백내장이 있어서 오른쪽 시력을 상실했던 것으로 인한 것이지만 뭐 어쩌겠느냔 말이지요.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말이지요. 표현이 없다고 해서 생각조차 없겠느냔 말이지요. 오히려 구멍 속의 생쥐처럼 눈을 반짝이면서 모든 사물을 살피는 내공은 또 별개로 자랐었나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낭월을 실망시켰습니다. 다른 아이들, 그러니까 가정형편이 별로 볼 것이 없고, 그래서 부모님이 선생님을 찾아 뵙고  특별히 인사를 드릴 정황도 없는 아이들에게는 팔에 힘이 들어갔었는데 만준이에게 내려지는 회초리는 소리가 달랐습니다. 이건 그냥 넘어가고 싶지만 어쩔 수가 없으니 이해하라는 식으로 시늉만 하셨던 것을 예민한 낭월의 눈길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교권(敎權)이요? 그게 교권이라면..... 대단한 교권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서글프고 속상한 심정이었던 모양입니다. 돈이 없어서 부모가 가난하니까 공부를 못해도 귀여움을 받는구나. 그 선생님의 불공평한 행동을 지켜본 것은 아무래도 월간(月干)의 갑목(甲木)인 정관(正官)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선생님께 따졌느냐고요? 어떻게요? 그랬다가 더 맞으려고요? 선생님의 권위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래서 촌지를 자주 전달하면 선생님도 같은 제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잖아요? 정당하게 점수를 받았기에 망정이지 낭월도 점수가 미달이었다면 더 억울했지 싶습니다. 집에 가서 어머니께 그 말을 했지만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얼마나 씁쓸하셨을까 싶습니다. 그래도 당시에는 너무 화가 나서 누군가에게는 말을 하고 싶었나 싶습니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선생님에 대해서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11살의 어린 아이에게 속을 보인 셈인가요? 뭐 그랬습니다. 만준이의 부모님이 찾아오면 선생님의 표정이 매우 밝으셨거든요. 그래서 낭월의 기억에 있는 선생님은 무섭기만 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의 사태는 더욱 놀랍기도 한가 싶습니다.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고나 할까요? 알고 계시겠습니다만, 국민학교는 한 학년을 한 담임에게서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2,3,4,5,6년이라고 해봐야 기껏 다섯 분의 선생님을 만날  수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기억에 남아있는 선생님들의 모습도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요. 아, 1학년은 창원에서 마쳤습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말이지요. 2학년 짜리가 1학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꼴이라니요. ㅎㅎㅎ


이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낭월에게 교권추락(敎權墜落)이라는 말은 다른 나라의 말처럼 들릴 수 밖에요. 이렇게 생각하다가 보니 또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아마 12살, 그러니까 5학년 때의 일로 기억이 됩니다. 이 이야기도 써 보겠습니다. 지금쯤 이면 그 선생님도 아마 돌아가셨겠거니 싶습니다. 화가 나면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서 마구 머리며 등짝을 후려치던 박 선생은 논하지 않겠습니다. 

 

3. 재민(가명)이가 당하는 것을 보며 분했는 기억

 

그 선생님은 특활로 체육을 담당하셨습니다. 다혈질의 성품을 갖고 계셨습니다. 더구나 총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마 군에서 제대한 다음에 학교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머리가 스포츠형으로 짧았던 기억인 것으로 봐서 그렇게 유추해 봅니다.

 

그날도 별일 없이 학업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재민이가 사소한 일로 칠판에 글을 쓰고 있던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렸나 봅니다. 별 것도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는 순간 얼굴의 표정은 이미 평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무서웠거든요.

 

"이쎄끼~나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합니다. 그 싸늘하고도 분노에 찬 음성은 모골이 송연했으니까요. 순식간에 교실은 얼음장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재민이에게 그렇게 가혹한 체벌을 가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평소에도 장난을 좋아하던 쾌활한 친구여서 그 정도의 소란은 평소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그야말로 재민이의 제삿날이었지요. 우선 귀싸대기를 후려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안면을 마구 갈겼습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요? 그럴 수도 있었다는 것을 목격자로서 말하겠습니다.


몇 대를 맞은 재민이는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코피가 터져서 얼굴은 더욱 볼 수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선생님의 화는 누그러지지 않으셨던가 봅니다. 오히려 피를 본 뭣처럼 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솟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칠판 옆에다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쓰러지는 대로 몽둥이로 종아리와 잔등을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팼습니다. 이것은 4학년 선생님이 만준이에게 인자한 마음을 베푸신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 올랐지요. 그래도 용감하게 나서서 그러시면 안 된다는 말을 감히 꺼내지 못했습니다. 불똥이 튈까 봐서 지요. 비겁했습니다만 선생님의 표정을 봐하니 무슨 말을 해도 멈출 것 같지 않기도 했습니다. 교실은 완전히 공포 분위기였지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재민이가 만준이였어도 그랬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저것은 너무나 지나친 폭력이라는 생각은 했습니다만, 요즘말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재민아....'


그래서 우리 학급의 모든 아이들은 심적인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낭월만 그랬을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낭월의 이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조회시간에 줄을 잘 못 섰다고 눈에 불을 켜고 구령대를 뛰어 내려와서 화가 솟구쳐서는 달려왔던 기억이 납니다. 앞 사람의 뒤통수를 보고 똑바로 서라고 외치셨고 낭월도 그렇게 했습니다만 선생님이 앞에까지 뛰어 오셨을 때까지도 내게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지요.




그 무서운 선생님이 화가 잔뜩 나셔서 앞에 섰을 적에 소심쟁이 낭월은 어땠을까요? 분명히 앞의 친구 뒤통수를 보고 섰거든요. 그래서 너무 억울했습니다. 이때는 정말로 분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노려 봤습니다. 내게 왜 그러시냐는 것이었겠지요. 그제서야 선생님도 낭월의 신체적인 결함을 느끼셨던 모양입니다. 한쪽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뿜어져 나오는 것에 데일 뻔했다는 ㅋㅋㅋ 무협지를 너무 많이 봤습니다. 민망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순간 융통성이 없는 자신을 깨달았지요. 그후로는 줄을 똑바로 설 수가 있었습니다. 앞 사람의 뒤통수를 보라고 할 적에는 뒤통수에서 오른쪽으로 5cm지점을 보면 된다는 시차(視差)를 극복했던 것입니다. 역시 인간은 시련으로 성장하는 것이 맞습니다. ㅎㅎ 


4. 세상만사는 춘하추동의 이치겠거니.....  

 

이렇게 아득하게 지난 시절의 흔적 한 조각이 세월이 흘러서 고목이 된 낭월의 기억 속에서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려서 펄럭이고 있었던가 봅니다. 물론 훌륭하고 헌신적인 선생님들이 많다는 것은 명사들의 추억담이나 어린 시절에 대한 회고를 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안면도의 섬 구석에서 선생 노릇을 하던 당시의 몇몇 극소수의 선생님에 대한 못난이의 추억 조각일 뿐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이것도 현실이고 사실이고 생생하게 겪은 일임에는 틀림없으니 말이지요.

 

세월이 흘러서 어쩌다 보니 낭월도 한 분야의 선생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든 오래도록 하다가 보면 그렇게 되나 봅니다. 그리고 인연이 된 선생들이 낭월에게 스승님, 사부님하고 말을 할 때면 가끔은 문득 그 시절의 선생님들 모습이 스쳐 지나갑니다. 누구라도 차별을 하지 않으려고 나름 노력을 합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느끼는 것은 또 그 시절의 주현처럼 차별을 느낄지도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수양이 부족한 탓이겠거니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만준이를 대하시던 4학년 때의 선생님처럼 대하지는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또한 그럴 리도 없겠습니다만, 때로는 속 터지는(!) 질문을 해도 절대로 5학년 때 재민이에게 했던 그 선생님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여하튼.

 

지금, 2023년을 겪고 있는 교사들에게는 혹독한 겨울인가 싶습니다. 그 화창했던, 그러니까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되었던 시절을 지나서 이제 바닥까지 간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가슴 시리게 파고 드는 맹 추위를 어떡하든 온 몸으로 견뎌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봄이 오기 위해서 이렇게도 시련이 큰가 싶기도 합니다. 아마도 오래지 않아서 다시 파릇파릇한 새봄이 다가올 것은 분명하지 싶습니다. 이또한 자연의 이치이니까 말이지요.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연가를 내고서 49재에 참석한 교사들에게 법적인 책임을 묻겠다고 서슬이 시퍼렇던 교육부도 한결 수그러진 모습인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교사의 계절이 절기로 치면 대한(大寒)의 끝자락인가 봅니다. 자식이 귀해서 왕의 DNA를 물려받았다고 감히(!) 교사에게 호통을 치는 학부모조차도 있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허탈한 기분이 들지..... 미뤄서 짐작을 해 보기도 합니다. 이것도 세월의 흐름이겠거니 싶기도 합니다.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에게 명령하는 학부모라면 결국 그 재앙이 자식에게 돌아갈 것임을 모르는 것이겠거니 합니다. 인과(因果)는 그렇게 알든 모르든 수레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돌아기가 마련이거든요. 자식을 가르치는 선생을 대하면서 시험점수를 많이 맞게 해 주는 로봇 정도로 생각하는 수준이라면 그 자식은 결국 부모의 얼굴에 무슨 칠을 하게 될지 짐작이 되고도 남으니 말이지요......

 

"만약 제 자식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면 이 회초리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언젠가는 학부모가 이런 편지를 담임 선생님께 보내게 될 날도 오겠거니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 위해서 또 많은 이들의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겠지 싶습니다만,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차면 기울고 기울면 또 차는 음양의 이치가 존재하는 한은 말이지요.


설마 요즘 세상에도 4학년때의 선생님이나 5학년때의 선생님 같은 교사는 안 계시겠거니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낭패네요. 훈육을 빙자하여 폭행과 스트레스 해소로 삼을 아이들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입니다. 요즘의 풍경을 보면서 어서 이 상황이 정상화가 되어서 교사는 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에 전념할 수가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교사는 교사 답고

학생은 학생 답고

정치인은 정치인 답고

나라는 나라다운

그렇게 되는 날이기를 오늘도 빌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본 오늘이었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나라의 모든 것이 정상화 되기를 기원합니다.


2023년 9월 6일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