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4] 부친의 장례를 5일 전에 치렀는데 친구가 모친상이랍니다.
작성일
2022-09-29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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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4] 부친 장례를 5일 전에 치렀는데 친구가 모친상이랍니다.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날씨가 화창해서 책 읽기 참 좋은 시절인가 싶습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하루에 한 권도 읽고, 이틀에 한 권도 읽으니 만고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마당가의 코스모스도 피고지고를 반복하고 있으니 그 풍경도 볼만합니다. 어디로 가을바람을 쐬러 갈까 싶기는 한데 짬을 보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국화축제를 한다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뭔가 핑계를 찾기 위함입니다. ㅎㅎ
1. 상가집에 가도 될지를 묻는 일이 잦네요.
가을이 되어서인지 노환으로 고생하는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더 많은가 싶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 보자니까 가야할 상가도 생기고 가도 되는지를 묻는 말이 들려서 그런가 싶습니다.
"부친께서 5일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친구가 모친상을 당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걱정이 되어서 여쭙습니다. 가도 괜찮을지요?"
새벽에 이러한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문득 아무래도 한담을 한 편 쓰라는 계시인가 싶어서 맘을 일으킵니다. 아, 답은 이렇게 했습니다.
"큰 일을 치루느라 고생이 많으셨네요. 그런데 또 친구상까지 만났으니 많이 바쁘시겠습니다. 그렇지만 부친상을 치룬 것으로 인해서 친구의 상을 돌보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확실한 것으로 인해서 확실한 친구의 어려움을 돕지 않는 것과 같으니 아무 염려 말고 가서 힘써 도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 친구도 부친상에 와서 도와 주셨을 테니 말이지요."
우리는 주변에서 늘 그러한 것을 접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확실하지 않은 곳에 확실한 현금을 쑤셔 박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코인이나 주식이나 도박과 같은 것을 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낭월이 뭘 몰라서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로 깊이있게 공부를 해 보지는 않았으니까요.
자신이 직접 해 보지 않고서 가타부타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줄은 압니다. 그렇지만 그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은 익히 듣고 있기에 미뤄서 짐작을 하는 것이지요. 특히 상담하러 와서 '알거지가 되었다'면서 한숨을 쉬는 고객을 보면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아도 대략 알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까 말이지요.
그러니까 내가 초상을 치뤘는데 그로 인해서 꼭 가봐야 할 문상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도 별반 다를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입니다. 과연 무엇이 두려워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그 점이 또 낭월의 궁리주머니를 두드리기에 화창한 이 아침에 한 마음을 일으켜 보는 것입니다.
2. 귀신들이 해코지를 할 지도 모른다는 뜻일까요?
사람들 중에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경우도 있습니다. 영계(靈界)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특히 신(神)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면 그로 인해서 벌어지는 공포심은 천 갈래 만 갈래로 벌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하늘이 두려운 줄을 알고 자신의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는 것이야 선순환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만, 뭔가 확실하게 몰라서 누군가에게 물었을 적에 그 사람이 해주는 말 한마디는 진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게 의지하다가 보면 나중에는 가스라이팅이 되어서 맹목적으로 거부하지 못하고 따라야 만 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스스로 신이 되어서 행세하는 사람을 추종하는 경우도 심심찮게 접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물질만능이니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시대이니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스스로 그 마음에 두려움이 싹트고 있다면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우선 영혼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습니다. 만약에 영혼은 몸의 그림자와 같아서 몸이 사라지면 그림자도 사라지듯이 영혼은 육신의 죽음과 함께 없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문제로 1초라도 고민을 할 까닭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는 아무리 세월을 두고 생각해 봐도 없다고는 못할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답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낭월입니다.
여러 고인의 가르침을 접하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간단합니다. '영계와 인계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지요. 똑 같습니다. 앞서 올린 저승에서 재판을 했다는 그 사람의 경우를 봐도 아마 그렇지 않겠나 싶습니다. 뭐, 윤회해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약간은 참고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벗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러니까 아주 가끔은 아무런 까닭도 없이 지나가는 내게 달려들어서 폭행을 행사하는 불한당을 만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뉴스를 통해서 늘상 접하는 이야기이도 하니 그런가보다 해도 되지 싶습니다. 영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끼리 어떤 충돌이 나서 싸움에 말려들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지요.
인간계에 불량배나 폭력자가 있듯이 저쪽에서도 그러한 귀신들이 없다고 단정하지는 못하지 싶습니다. 다만, 그것은 영계의 일일 뿐입니다. 인간계와 영계가 서로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은 도로의 상행선과 하행선과 같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이 다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의 인간의 길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또 영혼의 길을 갈테니까 말이지요.
공자도 영혼의 이야기는 모른다고 하셨다면서요? 그냥 인간의 예를 다해서 공경할 따름이라고 하셨으니 낭월도 그 말이 맞지 싶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사유(思惟)에서 타당(妥當)하다고 생각되면 수용하고, 황당(荒唐)하다고 생각되면 거부하면 될 일입니다. 그러니까 영계에 대해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으니 그것은 생각으로 답을 구해야 할 것이고, 그 생각의 기준은 인간의 도리로 삼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낭월이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드리는 답이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상식적인 것이 도(道)'라고 하는 것을 믿습니다. 도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서산대사의 답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 외에 무엇이 있겠느냐는 것으로 그 나머지는 털어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좀벌레들이 파고 들 틈이 없겠습니다만, 온갖 것들에 대해서 직접 경험해 보지 않았거나 경험할 수가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 공포심까지도 갖게 되는 것은 이치로 생각해 봤을 적에 타당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 부모의 상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저승에도 가시기 전이라서 아직은 집에 머물러 계실지도 모르는데 또 다른 집의 상가에 갔다가 만에 하나라도 두 영혼이 서로 싸우기라도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큰일이 아닌가? 그로 인해서 신들이 화가 나게 되고 그 재앙이 우리에게나 아이들에게 미친다면 이것은 꺼려야 할 일이지 않겠나....?'
낭월이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 본 결과입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이유를 찾기는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두 집의 영혼들은 서로 싸울까요? 오히려 서로를 위로하지는 않을까요?
"에구~ 당신도 세상을 하직하셨구랴! 나도 육신을 벗어나고 보니 생전에 오만데가 아팠는데 그것도 말끔하니 참 좋구려. 우리 손잡고 저승길에 동행하게 되었으니 외롭지 않고 얼마나 좋아요."
아마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매우 많다고 생각됩니다. 마치 아이들은 아이들을 좋아하고 여인네는 여인네와 모여서 수다 떨기를 좋아하듯이, 술꾼들은 술친구를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즐겁듯이, 영혼은 영혼끼리 만나서 생전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위로할 테니 왜 꺼려야 하느냐는 생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입니다.
「내 부모를 대하듯 친구의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 옳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면 그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다만 낭월의 의견일 뿐이고, 낭월은 그러한 것에 구애받지 않고 여태까지 행했지만 그로 인해서 큰 재앙을 당한 것으로 생각이 되지는 않는다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을 뿐입니다. 다만 믿는 것은 자연의 이치와 이성적인 상식일 뿐이지요. 예외도 있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까지도 걱정을 하기로 든다면 어찌 문밖을 마음 놓고 나가겠느냐는 생각으로 번뇌이 싹을 잘라버려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왜냐면 문밖은 참으로 위험하니까요. 하하~
3. 상을 치루느라고 힘들었으니 휴식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이 의미가 가장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부모님을 잃은 상심도 큰데 이렇게 큰 일을 치루고 아직 기운도 차리지 못했는데 또 지인의 상에 가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산모가 아이를 낳으면 21일간은 그 집을 방문하지 않는 것이 고법(古法)이었듯이 말이지요. 왜냐면 몸을 풀고 온 관절들이 물러나 있을 테니 조리를 해야 하는데 손님이 찾아오면 마음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으니까 이러한 법을 만들어서 산모를 보호하려고 했지 않겠느냐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이것은 일리가 있다고 보겠습니다. 물론 그것조차도 이 시대(2022년)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라면 또 몰라도 장례식장에서 두 밤만 자면 되고, 화장하거나 매장하거나 끝나면 바로 사회생활로 복귀하는 이 시대에서 조차 3년을 시묘살이를 해야 했던 그 시절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핑계에 불과하다고 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그 정도로 심신이 지쳤다면 병원에서 링거를 맞고 쉬어야지요.
이것은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문상을 갈 상황이지만 몸이 너무 상해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하면 그러한 정황을 알릴 수도 있겠습니다. 며칠 전에 지인의 장모님이 별세했다는 연락이 와서 문상을 했었습니다. 상주가 하는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친구가 장례식장 입구라고 전화했기에 내려갔더니 봉투를 주면서 '어머니가 문상은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이렇게 봉투라도 전해 주려고 왔다'고 하기에 알았다고는 했으나 참으로 그러면 안 되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낭월이 답했습니다.
"그 친구가 효자로구먼요."
어머니의 말씀을 얼마나 하늘처럼 받들고 있느냐는 의미이면서 한편으로는 마마보이라고 하는 의미를 숨겨뒀습니다. 아니, 그러면 문상은 하고 어머니께 돌아가서는 문 앞에서 전해주고 왔다고 하면 될 일이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상주도 '그렇게 하면 되겠는데 말입니다.'라고 하며 웃었습니다.
아마도 자신도 영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어머니는 그러한 전통이 몸에 배서 그렇게 이어가고 있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성적으로 기준이 서지 않으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꺼림칙한 것은 피하고 보자는 마음조차도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닙니다. 지난 음력 9월 초하루에 법회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는데 신도님들의 표정이 떨떠름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 물었습니다.
"아니, 표정들이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하라고 시킬 표정이니 말입니다."
그러고서 나온 답을 듣고는 낭월도 기가 막혔습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가르쳤건만 이 노인네들 마음 속에는 '혹시라도 그로 인해서 내 자식에게 해로우면 안 되니까 절대로 보낼 수가 없다'는 마음이 철벽같이 방어하고 있다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도 변화하기 어렵다면 그 나머지야 말해서 뭘 하겠는가 싶기도 하네요. 참으로 사람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것만 느꼈습니다. 하하~
'혹시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말도 헛말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온갖 두려움은 바로 이 '혹시나'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국어사전에 나온 말입니다. 확실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사유를 통해서 판단하고 그 결론에 따라서 행하면 되지 싶습니다. 그런데 잘 모르겠는 것은 일단 회피하고 보자는 생각으로는 무슨 이치를 깨닫겠느냐는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벗님께서는 이 정도의 단계는 진작에 벗어나셨을 줄로 압니다.
실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두려움은 심하면 공황장애까지도 유발시키게 됩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 상황까지도 이어질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4. 어쩌면 어르신들의 가르침이 옳을 수도 있을 겁니다.
낭월이라고 해서 세상의 모든 이치를 대낮에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알 수는 없으니까요. 아마도 1000분의 1이거나 혹은 백만 분의 1이라도 그러한 일로 인해서 재앙을 당할 수도 있을지는 또한 모를 일이니까요.
어쩌면.....
상가집에는 온갖 뜨네기 귀신들이 모여든다고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중에서 매우 불량한 객귀(客鬼)가 있다가 어리버리한 녀석이 문상을 왔을 적에 귀싸대기를 올려 붙이기라도 하면 상가집에서 병을 얻어왔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없으리라는 보장은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내 소중한 가족에게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방비하자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것도 께름칙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또 순응하다가 대대손손으로 이어진 것이 이러한 상가집의 문제일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그렇지만 아침에 집을 나간 사람이 저녁에 집에 걸어서 돌아오지 못할 확률보다도 훨씬 못한 문제로 인해서 스스로 걱정과 근심으로 응당 해야 할 상갓집 문상을 포기한다는 것은 과연 옳다고 해야 할 것이냐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지요.
행여라도 이러한 일로 주변의 사람들이 의논을 해 온다면 어떻게 말씀하시렵니까?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것을 묻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쪽에서는 그러한 말의 위력이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을 생각하면 또한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점점 이성적인 생각이 전통적인 생각을 누르게 될 것으로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도 하니까요.
그때는 어머니의 말씀이 옳았다고 여겼지만,
생각해 보니까 그것을 꼭 믿고 그렇게 따라야 할까....
이렇게만 되어도 변화는 빨리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다. 낭월의 생각은 간단합니다. 그런 일로 인해서 마음에 짐을 지고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니까요. 허허(虛虛)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면 그 뿐인 것이 인생이려니 싶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이러한 문제로 걱정을 해 보셨거나 앞으로 하게 되신다면 약간이나마 참고가 되시려나 싶어서 중언부언 했습니다.
이 상쾌한 가을에 멋진 사유로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밝고 지혜로운 소식들을 가득 얻으시기 바랍니다. 오늘을 즐겁게 살아가는 자만이 극락이나 천국에 도달할 수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고맙습니다.
2022년 9월 29일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