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9] 삶, 존재(存在)와 사유(思惟)

작성일
2016-08-31 16:03
조회
4168

[699] 삶, 존재(存在)와 사유(思惟)


 

안녕하세요. 낭월입니다. 제목이 그럴싸 하지요? 하하~

제목만 그렇습니다. 가을인데 뭔가 좀 있어보이는 제목으로 한담을 장식하고 싶은 욕심이 났던 게지요. 그래봐야 허접한 생각 쪼가리들의 나열일 뿐입니다만 그렇거나 말거나 틈이 나면 그래도 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나는 것, 「삶」이네요. 오늘의 존재가 과연 존재인가 아니면 연명인가?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맞이 합니다.

그제는 안산의 대부도에서 장모님 생신 잔치를 했습니다. 잔치라기 보다는 자녀들이랑 모여서 저녁 한끼 나누자는 정도입니다만 그래도 팬션을 빌리고 서로의 시간을 조정하는 일들은 필요했습니다. 그러면서 노환으로 힘들어 하시는 장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려 본 제목이기도 하네요. 거창하고 있어 보이는 글자를 모아서, 「삶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존재를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사유를 할 수 있어야 삶인가?」 뭐 이런 생각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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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션에서 누워계시는 모습이 많이 쇠약해 지셨다는 걸 느낄 정도입니다. 이미 여러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이 자리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시다고 해야 할 정도이니깐요. 특히 폐질환이 계셔서 자칫하면 산소마스크를 써야 하는 상황이어서 요양원에 계시다가 잠시 밖으로 모시는데도 가족들은 긴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하늘이 보고 싶으시다고 해서 유리창 가로 자리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마침 하늘의 풍경도 볼만 해서 아마도 시원하셨으리라고 짐작을 해 봅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열심히 먹거리를 만들고 담소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만남의 회포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생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념 사진도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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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까지만 해도 다들 희희낙락이었습니다. 큰 촛불을 여덟 개나 켤 수 있어서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러고 보니 올해가 을해생이시니 여든 둘이신가 봅니다. 그만하면 서운치 않은 나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만 그래도 건강장수를 발원했습니다. 늘 그러잖아요. 건강하게만 사신다면 100살을 살은들 누가 마다고 하겠느냐고요. 이렇게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처할 적에 어떤 것이 옳은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끌시끌하게 놀다가, 8시가 넘어서 다시 요양병원으로 모셔야 할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병원으로 출발을 한 팀이 원래의 자리로 모셔드리고 온 다음에도 옆 호실의 시끌시끌한 소란 통에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맞이 했습니다. 새벽에는 낚시광의 동서께서 구봉산 솔숲길을 가봐야 한다고 해서 나섰지요. 이건 여행기에 해당하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아침을 먹는데 요양원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입니다. 매우 위중하시다는 연락입니다. 그러니 보호자가 와야 하겠다는 이야기지요.

아마도 전날 바람을 쐰 것이 무리였었나 싶기도 하고 생신이라고 기분이 좋으셔서 그나마 꺼져가는 에너지를 과소비 하시는 바람에 몸살이 나셨나 싶기도 했습니다만 여하튼 방아다리 선착장에서 덕적도 가는 배편을 알아보고 있던 낭월의 계획은 말끔히 취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도착한 요양병원..... 가래를 뽑아내는 석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분위기만으로는 바로 임종을 지켜봐야 할 상황인듯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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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중증환자 처치실인가 하는 곳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모두가 다 참석을 수가 없는 일종의 중환자 실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모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들입니다. 이것이 현대적인 효자 효녀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풍경이라고 하지 싶습니다.

중환자실.......

과정을 보려고 들어간 곳이지만 참으로 분위기는 10만 6천 근이었습니다. 묵직~~ 하게 내리 누르는 압력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둘러 봐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빈 자리가 없이 빼곡하게 들어 찬 침대와 각각 그 침대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들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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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코에는 산소호스를 하나씩 꼽고 목에는 약물과 죽을 넣을 관을 하나씩 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어찌 남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겠느냔 생각이 겹쳤기 때문입니다. 낭월도 이제 세상을 60년 살았으니 아마도 그러한 모습에 처할 가능성이 더욱 높아졌다고 해야 할, 어쩌지 못할 운명의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으니 말이지요......

물론 가는 길이 나이 순이 아닌 것은 벗님도 아실 겁니다. 그러니 언제 다가오더라도 의연하게 마지막을 의식하면서 삶을 마무리 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가끔은 생각을 해 보게 되더란 말이지요. 벗님은 어떠세요? 아마도 낭월의 짐작대로라면 당연히 낭월과 같은 생각을 하셨을 것으로 봅니다. 떠나는 장면이야말로 삶의 최대 이벤트니까 말이지요.

분명히 이름과 나이를 갖고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만, 사유는 어떨까요? 낭월이 생각하는 것은 사유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살아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늘 하게 되는 구먼요.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고 보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 누군가와 더불어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존재야말로 삶이라고 할 수가 있다면......

이제, 이와 같이 존재는 하지만 스스로 자연에 대해서나 이치에 대해서 사유를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적에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언어로 소통은 하지 못해도 의식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귀로는 소리들이 들린다는 이야기지요. 그것이 더 못할 짓이라는 생각도 들기는 합니다만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까지 말 소리는 들린답니다...... 그래서 의식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도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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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을 세월이면 딸도 긴 피로감을 이기는데 쉽지 않은 나이라는 것도 대략 짐작이 됩니다.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20년 후의 자신에 대한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늙었을 적에는 어떤 모습이 될까.... 사유를 하다가 문득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는 없을까? 물론 자연적으로 그러한 임종을 맞이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럴 적에 떠오르는 법화경(法華經)의 한 구절....

여신진화멸(如薪盡火滅)......
짚의 불이 다하니 이내 사그러지는 모습.....

철학자의 임종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을 해 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얼마나 맑은 정신으로 얼마나 많은 수행을 쌓아야 할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희망사항은 아마도 대부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깊은 숨을 두 번 들이키고는 조용히 떠나가는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그러니까 삶의 마지막 모습은, 불이 다 타고 나서도 이글거리는 장작불이 아니라 불이 꺼지면 재도 이내 사그라지는 짚불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을 떠올려 봅니다. 시골에서 짚으로 불을 피워보셨다면 이러한 느낌을 바로 확~ 느끼실 수가 있을텐데 말이지요. 경험이 인식하는데 참으로 중요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머님께 들었던 이야기가 또 떠오릅니다. 부친이 위독하다고 해서 부랴부랴 전쟁 통에 친정집에 갔더니 그렇게도 큰 딸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시더랍니다. 그리고는 딸을 보면서 한 마디 남깁니다.

이거... 좀 섭섭~한 걸...

이렇게 마지막 말씀을 남기고 떠나셨답니다. 나름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도인은 세상을 떠날 적에 알아본다는 말이 있는데 이렇게 떠날 수가 있다면 과연 욕망과 탐욕으로 얼룩진 삶을 아둥바둥 살아간 모습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정도만 된다면 사유의 연결로 다음 생까지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떠날 적에 떠나는 줄도 모르고 고통으로 약기운으로 삶의 집착으로 버리둥 거리다가 어쩔 수가 없이 저승 사자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남겨서야 스타일이 되겠느냔 말이지요. 죽는 마당에 스타일 따지게 생겼느냐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것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월간의 정관 때문일까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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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석션기를 달아놓고 논산으로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날 하루를 기다려서 장례식장을 알아보기 위해서 논산의 장례식장에서 어떤 절차로 진행이 되는지도 알아보고 비용도 대충 1천만 원 전후로는 잡아야 하겠더라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산의 딸들이 간호를 하면서 간간히 연락을 보내오는 소식을 들으면서 급한 고비는 넘겼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아마도 나들이의 무리가 갖고 온 반작용이었게니 싶었습니다. 여하튼 실낱같은 가는 몸에 태산 같은 병이 든다는 회심곡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숨 한 번 쉬는데도 에너지가 얼마나 소모되는지 보일 정도라고 해도 되지 싶은 정도입니다. 노쇠하다는 것은 이러한 것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어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어떻게 사유하다가 마지막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가끔은 생각을 해 봐야 하겠다는, 그러니까 말하자면 철이 쪼매 들어가는 생각도 하게 되더란 말씀입니다. 가을이 되어오니 연명(延命)의 의미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네요. 연명은 삶일까요? 삶과 죽음의 사이일까요? 또 사유일까요?

자녀들이 인공호흡기를 연결하겠다고 할 적에 과감히 손을 젓거나 손을 들 힘이 없다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이라도 할 힘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에 대한 감사의 행복을 더욱 느낄 수가 있는 순간이 새롭기만 하다는 점도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죽기 싫다고 몸부림 치기 전에, 살아서 순간을 만끽했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살아있고, 존재하고, 사유까지 할 수가 있는 이 8월의 마지막 날의 순간을 보내면서 어떻게 시간을 운영하는 것이 사업을 잘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자는 맘을 일으켰습니다. 경봉 스님의 말씀이 떠오르네요.

사바세계를 무대로 삼고,
연극 한 바탕 잘 하고 가거라.

경봉 스님께서는 짚불의 마지막이 아니라 장작불의 마지막이셨던가 싶습니다. 여러 인연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임종하는데 좀 힘들어 하셨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은 몸에 좋은 보약들로 인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늙으막에 보약을 많이 먹으면 떠날 적에 고생한다는 말이 생겼나 싶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다른 도인들 처럼 멋진 마무리를 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약물로 인해서 마지막 그림을 망쳤다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지금도 요양병원의 모습들을 보면서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쪼록 뇌가 움직일 적에 자연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시고,
발이 움직일 적에 좋은 곳도 많이 돌아 다니시고,
치아가 성할 적에 맛있는 음식도 즐겁게 드시고,
눈이 보일 적에 재미있는 책도 많이 읽으실 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16년 8월 31일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