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1] 제42장. 적천수/ 11.포근한 햇살

작성일
2024-04-0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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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 42. 적천수(滴天髓)

 

11. 포근한 햇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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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창은 점심을 먹고 나서 운동삼아 마당을 거닐었다. 체감될 정도로 봄기운이 완연했다. 날이 풀리면서 벌거벗고 있던 매화나무에는 어느 사이에 꽃이 피어서 향을 내뿜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어제 공부했던 을목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과연 꽃과 향을 만들어서 인간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어제까지는 봄이 되어 매화가 피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오늘 본 매화는 어제의 매화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치열하게 자기의 삶을 꾸려가고 있는 생명체였다고 생각하니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때 마차의 소리가 들렸다.

잘 계셨는가? 조카가 보고 싶어서 잠시 들렸다네. 하하하~!”

문득 잊고 있었던 소주자사(蘇州刺史) 최도융(崔道融)이었다. 말로는 조카인 서옥을 보러 왔다고 하지만 실은 아기가 궁금해서 온 것으로 짐작을 한 우창은 인사를 하고는 편하게 이야기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줬다. 혈육인데 또 오붓하게 나눌 이야기도 있으려니 싶어서였다. 그 사이에 우창은 조용히 산책을 나섰다. 얼음이 녹은 개천에는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서 헤엄치는 모습도 보였다.

천변(川邊)을 천천히 걸으면서 자연의 변화하는 풍광(風光)을 바라봤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서 아지랑이가 아른거리기도 했다. 문득 이 모든 것이 제각각 분리된 것이 아니고 한 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이목구비도 있고 오장육부도 있듯이 이렇게 개천이 흐르고 고기들이 몰려다니고 버드나무에 연둣빛의 잎이 돋아나는 것이 흡사 같은 몸에서 일어나는 저마다의 변화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참 아름답구나~!’

문득 그렇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것들이 자기의 모습으로 어우러져서 조화를 이룬다는 생각이 들자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왔다. 한 걸음 두 걸음 옮기다가 보니 어느 사이에 한산사(寒山寺)의 경내(境內)로 들어가게 되었다. 절에서는 법회가 있었는지 선남선녀들이 많이 보였다. 그동안 공부에 전념하느라고 한산사를 둘러본 지도 무척 오래였다는 생각이 들자 대웅보전으로 들어가서 불전에 삼배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붐비는 바람에 한쪽에서 조용히 절만 하고는 밖으로 나오자 낯익은 화상이 눈에 들어왔다. 한산사의 지객(知客) 혜공(慧空) 화상이었다.

대사님 우창입니다. 그간도 편안하셨는지요.”

혜공도 우창을 알아보고는 합장했다.

오호! 오랜만이외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말한 혜공이 우창에게 물었다.

어떠시오? 바쁘지 않으면 들어가서 담소(談笑)를 나눠도 좋소이다. 허허~!”

마침 우창도 바쁜 일이 없던 차에 혜공과 이야기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어서 뒤를 따랐다. 지객실로 가는가 했는데 주지실로 향하는 것이었다. 마침 주지화상은 혼자서 경전을 읽고 있다가 우창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맞이했다.

어쩐 일로 우창 선생이 나들이하셨소? 잘 오셨소. 어서 오시오.”

우창은 오랜만에 고색(古色)이 풍기는 주지실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렇게 반가워하는 이면에는 혹 어떤 부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나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차가 참 향기롭습니다.”

우창은 목도 마르던 차에 시자가 따라주는 차를 두 잔이나 연달아 마셨다.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그래, 거처는 편안하시오?”

정말 감사한 말씀을 이루 다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부처님의 넓은 품에 머무르게 된 것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아니, 그런 말을 듣자고 한 것은 아니외다. 허허~!”

우창이 진심에서 드린 말이었지만 항상 겸양을 미덕으로 여기고 살아온 주지화상에게는 낯간지러운 말로 들릴 법도 했다. 이렇게 주객이 부드러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지객화상이 말을 꺼냈다.

예전에도 우창 선생의 도움을 받고서 어려운 일을 만나서 해결을 잘했습니다만 근래에 작은 일이 하나 생겼는데 아무리 궁리해 봐도 답이 보이지 않아서 번뇌가 되었던 상황에서 때마침 우창 선생이 방문하셔서 더욱 반가웠던 것이었소이다. 허허허~!”

우창은 내심 짐작했는데 과연 그 짐작이 맞았다고 생각하면서 담담하게 물었다.

소생이 도움을 드릴 일이 있다면 당연히 드려야지요.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우창이 흔쾌히 말하자 지객화상도 더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답을 주시니 이미 해결이 된 것이나 다를 바가 없겠지 싶소이다. 실은 작은 일이기도 하지만 큰일이기도 해서 말이오.”

무슨 말씀이신지는 모르나 간단한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서 말씀해 주시지요. 들어보고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실은 주지화상의 사제(師弟)가 있는데 자신이 한산사의 주지가 되고 싶어서 자꾸만 주지의 허물을 찾아서 훼방하는 것이 두통거리가 되어서 말이오. 객관적으로 봐서는 전혀 밀릴 것이 없소이다만 세상의 이치가 어디 논리적으로만 된답니까? 자꾸 중요한 직책을 맡은 신도들에게 모함하는 바람에 지금은 여론이 반반이 되어버렸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을 할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그들이 매우 저돌적(猪突的)으로 달려들고 있어서 주지화상이 좀 난감한 상황이 되었소이다. 그래서 내심으로 걱정이 되었구려.”

지객화상이 이렇게 정황을 설명하는 중에도 주지화상의 표정은 덤덤했다. 아마도 수행의 힘으로 마음의 중심을 잘 잡는 것으로 보였다. 그제야 우창도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렇게 큰 혜택을 받으면서 좋은 자리에서 마음 편히 공부하고 있는데 주지가 바뀌게 되면 탐욕(貪慾)이 가득한 사제가 어떤 요구를 해 올지 알 수가 없는 일인지라 이것은 우창과도 무관한 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문득 한산사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겠다는 짐작도 되었다.

아하~! 절에는 가람(伽藍)을 수호하는 도량신(道場神)이 있다더니 과연 그렇구나. 오늘 내게 답을 구하게 하고자 불러들였다는 말이로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러자 시자가 다시 차를 따라주자 지객화상은 시자에게 나가도 된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지객화상이 낮은 말로 우창에게 말했다.

지금은 상황이 이래서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 조심하느라고 내보냈소이다. 혹시 몰라서 말이오. 허허허~!”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주지화상이 줄 것이 있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가려져 있던 뒤의 기둥에서 글자가 드러났다.

청산(靑山)

그것을 본 우창이 미소를 지었다. 주지화상이 선반에서 내려온 것은, 한 다발의 세필(細筆)이었다. 대략 봐도 백여 필은 되지 싶었다. 그리고 또 고급스러운 먹도 열 개나 들어있는 통이었다. 오행원은 공부하는 학당인지라 항상 필묵(筆墨)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잘 알고는 준비해 뒀다가 우창을 본 김에 선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귀한 것은 아니외다만 그래도 학인들에게는 필요할 것이니 나눠 쓰도록 하시오. 달리 선물을 드릴 것도 없으니 말이오.”

고맙습니다. 주지대사의 깊은 헤아림에 감복(感服)합니다.”

다시 주지가 자리에 앉기를 기다려서 우창이 말했다.

대사님은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우창이 너무나 시원하게 말을 하자 두 화상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우창에게 되물었다.

아니, 그렇게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서 신중히 움직여야만 하는 일이오. 과연 아무 일이 없이 위기를 잘 넘길 수가 있겠는지 잘 살펴봐 주시오.”

지객화상은 믿고 싶으면서도 과연 어떤 근거로 그렇게 말을 하는지 설명해 달라는 말이었다. 우창도 당연히 설명해 주려고 생각하던 차였다.

여쭙겠습니다. 대사님의 등 뒤의 기둥에 쓰인 글은 무슨 뜻입니까?”

우창의 말에 뒤를 돌아다 본 주지화상이 말했다.

, 이것 말이오? 이것은 청산(靑山)이라는 뜻이오, 반대편 기둥에는 백운(白雲)이라고 쓴 글과 대구(對句)가 되는 뜻으로 머물러 사는 사람은 청산이라고 하고 잠시 있다가 떠날 사람은 백운이라고 하는 것이오. 그런데 이것이 무슨 뜻이라도 있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다음에 그 사제가 담판을 지으러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그 자리를 고수(固守)하시고 사제는 백운의 자리에 앉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만으로 사태는 해결이 될 것입니다.”

우창이 확신에 찬 듯이 말하자 주지화상도 안도가 되었는지 다시 물었다.

그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는 무슨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설명을 듣고 싶구려.”

청산(靑山)에 그러한 뜻이 있는 줄은 우창도 몰랐습니다. 다만, ()은 목()이고 산()은 토()입니다. 이것을 간지(干支)로는 갑진(甲辰)에 배속(配屬)시키게 됩니다. 흡사 거목(巨木)이 땅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천년을 살아가는 형상을 취하게 되지요. 이것은 다른 말로 풀이하면 산중(山中)의 대호(大虎)가 자기 영역을 확실하게 지키고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창의 설명에 주지화상은 기뻐하면서 말했다.

오늘 우창 선생을 만나서야 그 일이 해결을 보는 모양이오. 실은 빈도(貧道)가 호년생(虎年生)이오. 참 절묘한 해석인데 그것은 무슨 점술을 사용한 것이오?”

무슨 점술이냐고 물으시니 간지변환술(干支變幻術)이라고나 해야 할까 봅니다. 자연의 모든 현상을 간지로 바꿔서 살펴보는 방법이니 말입니다. 하하~!”

아하, 그것참 절묘한 비법이구료. 그러니까 호랑이가 자기 영역을 굳게 지키고 있듯이 남에게 빼앗길 까닭이 없고, 천년송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오래도록 버틴다는 말이 그렇게 해서 나왔구료. 허허허~!”

주지화상이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그러자 우창이 다시 또 선물로 받은 필묵을 앞에 놓고서 말을 이어갔다.

여기 먹은 검은색이니 수()가 됩니다. 도량의 수호신들이 주지대사를 지켜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더구나 열 개의 수량은 십간(十干)입니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에 황제(皇帝)가 치우(蚩尤)와 탁록(涿鹿)에서 싸움을 할 적에 승리를 안겨 준 것과 같습니다. 어찌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우창의 말에 한껏 고무된 주지화상이 다시 물었다.

아니, 그렇게도 해석이 된단 말이오?”

이것이 바로 조짐입니다. 부처는 온갖 것이 모두 설법의 자료가 되듯이 우창에게 보이는 모든 것은 점사(占辭)의 실마리가 되는 셈이지요. 대사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백 개의 붓은 수호신장입니다. 104위의 호법신이 계신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지금 우창에게 붓을 선물하신 공덕으로 도량신께서 기꺼이 호위(護衛)하는 신장(神將)이 될 것이 틀림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하하하~!”

대체로 위로를 할 적에는 웃음을 선사하는 우창이었다. 웃음소리에 온갖 번뇌가 녹아내리기도 하는 까닭이었다. 심각하게 생각한 일은 일소(一笑)에 일소(一掃)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우창의 설명을 들은 두 화상은 감탄하면서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지객화상이 말했다.

역시 우창 시주의 탁월한 예지력은 이미 예전에도 영험을 봤기 때문에 믿음이 저절로 난단 말이오. 그렇다면 이제 한산사에는 구름이 사라지고 화창한 햇살이 가득해지겠구료. 허허허~!”

당연합니다. 오늘의 바깥 풍경을 보시면 알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화사한 날이 될 것임을 보여주는 하늘입니다. 번뇌의 구름은 말끔히 흩어버리고 태양이 허공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오호! 그것이 또 그렇게 해석된단 말이오? 어제는 온종일 구름이 가득해서 음울(陰鬱)했는데 오늘 아침을 지나면서 하늘이 맑아지고 있소이다.”

이러한 것도 지금 대사께서 물으시니 의미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으면 그냥 하루일 따름이지요. 그래서 계기(契機)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름을 부르는 순간 교감(交感)이 되고, 계기를 보는 순간 조짐이 되는 것입니다. 우창이 산책을 나왔을 적에는 계기가 없었으나 대사께서 질문을 하는 순간에 계기가 생기는 것이지요. 하하하~!”

우창의 말과 웃음소리에 두 화상의 근심은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우창이 작별하고서 천천히 걸어서 돌아오면서 한산사의 인연을 다시 생각해 봤다. 이렇게 필요할 적에 한두 마디의 조언이 도움을 주게 되는 것도 다행스럽지만 일이 늦어지기 전에 이러한 조짐을 알려주는 것도 감사한 일이었다.

우창이 서재로 돌아와서 글을 정리하다가 깜빡 졸았던 모양이다.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 만개한 연못을 아들 일석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서옥은 뒤를 따라오면서 흐뭇하게 웃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염재가 부르는 소리에 잠이 깼다.

스승님, 염재입니다.”

, 들어오게.”

아마 두어 번은 불렀던 모양이다. 우창의 대답을 듣고서야 들어온 염재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공양미(供養米)를 탁발(拓拔)하셨습니까? 한산사에서 공양미 일백 석이 전달되었습니다. 웬 백미냐고 했더니 스승님께 말씀드리면 아실 거라고 말했답니다. 그래서 곳간에 받아놨습니다.”

잘했네. 실은 고민이 있으시다기에 점을 한 대 봐 드렸더니 고민이 해소되었던가 보군. 하하하~!”

그러셨습니까? 백 가마니짜리의 점괘를 보고 오셨군요. 덕분에 창고가 넘쳐서 빈방에까지 가득 채웠습니다. 몇 달은 온 대중이 걱정 없이 먹고 살게 생겼습니다. 하하~!”

희색이 만면한 염재에게 좀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 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할 것은 당연한 까닭이었다 우창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염재가 말했다.

정말로 혼자 듣기에는 너무 아까운 이야기입니다. 오늘 저녁에 백차방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제자들도 환희심(歡喜心)이 솟아날 것입니다.”

이미 즐겁게 공부하고 있는데 무슨 필요가 있겠나?”

아닙니다. 주마가편(走馬加鞭)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항상 새로운 자극이 필요한 제자들입니다. 저녁 공양을 마치고 제자들을 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시던가. 하하~!”

 

저녁을 먹고는 염재의 안내를 받은 제자들이 모두 백차방에 모이자 넓은 차방이 가득 채워졌다. 모두 모였다는 것을 확인한 염재가 우창에게 와서 말했다.

스승님, 모두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창이 백차방에 들어가자 중앙의 자리를 비워놓고는 빙 둘러서 기다리고 있다가 모두 일어나서 합장했다. 우창이 자리에 앉자 모두 자리에 앉아서 연화가 만들어 준 차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우창은 말없이 차를 한 잔 다 마시면서 분위기가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실은 별일도 아닌데 염재가 괜히 호들갑을 떨었나 싶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이야 점가지상사(占家之常事)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기꺼이 재연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창이 이렇게 서두를 꺼내자 옆에 앉아 있던 채운이 물었다.

염재를 통해서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듣고 단지 백미 일백 가마니를 탁발해 오셨다는 것만 들었습니다. 그런데, 스승님께서는 왜 뜬금없이 걸음을 하지 않으셨던 한산사로 향하게 되셨는지요?”

나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까 한산사 경내였네. 그래서 기왕에 경내로 들어갔으니 대웅보전에서 참배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불전에 삼배(三拜)하고는 나오다가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지객화상을 만나게 되었다네.”

우창은 이렇게 저간의 사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채운이 물었다.

참으로 절묘(絶妙)하네요. 오늘 마침 목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청산(靑山)이 눈에 들어왔다는 것부터도 기이(奇異)하다고 해야 하겠어요. 그 청()은 갑()일까요? 아니면 을()일까요?”

채운은 하나를 물으면 꼬치꼬치 캐는 습관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려는 생각으로 질문했다. 우창도 잠시 생각했다. 왜냐면 그냥 목이려니 하고 갑진(甲辰)이라고 했는데 채운의 질문을 받고서 생각하니 그것도 구분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채운의 질문을 듣고 보니까 그것도 재미있는 착상(着想)이로군. 만약에 주지대사가 떠나는 것을 물었다면 갑진이겠고, 머무르는 것을 물었다면 을축(乙丑)이었겠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진명이 손을 들고는 말했다.

그 말씀의 뜻은 진명이 풀이해 볼게요. 갑진은 동물이 걸어가는 것이므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날 수가 있겠어요. 스승님께서 갑진(甲辰)이라고 해석해서 호랑이가 숲에서 백수(百獸)의 제왕(帝王)으로 머무른다고 하신 것도 이치로 타당하겠어요.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본다면 떠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으로 봐서 을축(乙丑)이 더 어울리겠어요. 그간의 공력으로 인해서 안정된 자리를 얻었으니 이동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미뤄서 짐작되니까요.”

진명이 이렇게 말하고는 자기의 해석이 맞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우창을 바라봤다. 그러자 우창이 동의하면서 말했다.

과연 청출어람(靑出於藍)이로군. 내가 풀이한 것보다 한 수를 더 내다 본 것이지 않으냔 말이네. 진명의 풀이에 내가 감동했어. 하하하~!”

우창의 말을 듣고 진명은 기분이 좋았다. 자기의 생각이 우창의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우창에게 합장한 진명이 다시 설명을 추가했다.

스승님께서 과찬을 해 주셔서 저절로 춤이 나와요. 호호! 조금만 더 설명을 보탠다면 백 자루의 붓은 대나무잖아요? 그러니까 그것도 이미 을목(乙木)임을 암시하는 것이겠어요. 그리고 청산(靑山)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산이라고 했다면 축()은 어울리지 않아요. 오히려 미()가 나을 것으로 보여요. 그러면 을미(乙未)가 되고 붓은 양 떼가 되는 것이죠. 스승님께서 호법의 신장이라고 하셨어도 문제는 없겠어요. 다만 현실적인 의미로 본다면 오히려 숲을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보고 싶어요. 을미(乙未)가 인월(寅月)에 포근한 햇살을 만났으니 그야말로 한목향양(寒木向陽)이고 삼양개태(三陽開泰)잖아요? 스승님께서 단지 두 글자를 본 인연으로 조짐이 발동했다니 참으로 오묘한데, 실로 양 떼거나 죽림(竹林)이거나 무슨 상관이겠어요? 결과적으로 주지대사가 머무는 한산사를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이 사찰의 이름도 우연찮게 한산(寒山)이네요. 한산에 볕이 드니 만사형통(萬事亨通)이 아닌가요? 그런데 열 개의 먹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호호~!”

진명이 이렇게 말하면서 옆에 있는 현지(玄智)를 바라봤다. 혹 현명한 생각이 있는지 의견이 있으면 듣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자 현지가 잠시 생각하고는 의견을 말했다.

먹에 대해서는 이미 스승님께서 풀이하신 것보다 더 멋진 생각은 할 방법이 없지 싶어요. 먹이 없으면 붓은 생명이 없으니 양들의 밥이 충분하고, 그 양들의 밥이나 대나무의 밥이기도 한데 그것을 수행하는 무리들이 열심히 갈아댈 터이니 오행원에 선물을 한 것이야말로 주지대사가 가장 잘하신 것 중에 하나라고 해야 하겠는데, 자신도 모르게 필묵을 선물했으나 실은 그것조차도 오행원의 습득(拾得)이 암시를 준 것이 아닐까 싶어요. 이렇게 자화자찬으로 풀이해도 괜찮은 걸까요? 호호~!”

현지가 풀이해 놓고서도 멋쩍게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수경이 나서서 한마디 거들었다.

스승님, 수경이 생각해 보기에는 열 자루의 먹은 완전체를 의미해요. 그야말로 도()잖아요? 그러니까 주지대사는 이미 도를 잘 닦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넘본다고 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보여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이렇게 사소한 물건이 오가는 것에서도 점기의 조짐을 읽어낸다는 것이에요. 어쩌면 허사로 진행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촘촘한 흐름을 느낄 정도예요. 그리고 백미를 백 가마니나 베풀었다는 것도 참 신기하잖아요? 그 먹을 갈려면 잘 먹어야 하는데 넉넉한 식량을 공급하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제대로 죽이 맞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이렇게 말하고 항상 열정적인 가르침에 감사하는 뜻으로 우창에게 합장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춘매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오랜만에 손을 들었다. 모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서 이목을 집중했다.

정말 그냥 흘려버리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인데도 이렇게 분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다가 보니까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먹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보니까, 먹은 나무를 태운 그을음이잖아요. 나무는 불을 만나서 그을음이 되었으니 그을음은 그 고향이 결국 목()이네요. 오늘은 온종일 목에 대해서 공부하는 하루였어요. 낮에 한 공부도 부족해서 밤중까지도 목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런데 나무를 태운 그을음은 약이 되기도 해요. 어린 아기들이 여름에 음식을 잘못 먹고 이질에 걸려서 곱똥을 누게 되면 솥 아래에 엉겨붙은 숯검정을 긁어서 곱게 가루로 만들고는 달걀을 삶아서 검정을 찍어서 먹이면 낫는다고 하잖아요. 그렇다면 먹은 화정(火精)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죠. 그 화정을 물에 풀어서 붓으로 글씨를 쓰니 화생수(火生水)하고 수생목(水生木)하고 다시 문자는 문명을 만들어 내니 결국은 목생화(木生火)도 되네요. 이러한 이치를 생각하면 참으로 자연은 오행의 순환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신비롭기조차 해요. 괜한 생각을 말씀드려보고 싶었어요. 호호호~!”

춘매의 말을 듣던 채운이 웃으며 말했다.

언니는 참으로 깊은 생각을 하는 능력을 타고나셨나 봐요. 먹의 오행을 단순히 검은색이라서 수()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것이 온 곳은 불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어요. 오늘도 언니 때문에 또 한 수 배웠어요. 호호~!”

모두 이야기를 다 나눴는지 우창에게 정리해 달라는 뜻으로 우창을 바라봤다. 우창도 그 의도를 이해하고 조용히 말했다.

모두 이렇게 더불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절정이 아닐까 싶군. 특히 연화의 향기로운 차가 함께 하니 이 밤이 깊어가는 순간조차도 대낮처럼 밝은 지혜의 등불을 환하게 밝힌 것과 같으니 말이지. 오늘은 그래서 또 즐거웠고 행복했으니 모두 꿀잠을 자고 내일 다시 공부방에서 열정을 불태워 봅시다. 이만~!”

우창이 합장하고 먼저 서재로 돌아왔다. 제자들끼리 남아서 뒤풀이를 할 것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늦어서야 겨우 오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곤하게 자는 서옥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