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지질탐사⑦ 양촌면 노두

작성일
2025-02-03 07:43
조회
269

논산지질탐사(論山地質探査)⑦ 논산천과 지석묘 

 

(탐사일 : 2025년 1월 25일)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양촌면 신기리 논산천변

 


 

법계사를 둘러보고서 찾은 곳은 논산천변에 있는 노두였다. 지질도를 보면서 여기저기 열심히 살폈지만 막상 노두가 보이지 않으니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은 노두를 찾아가는 나그네의 몫일 따름이다. 그러다가 발견한 곳이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지질도의 현위치를 찾았다. 색깔을 보니 푸르딩딩이군. 그렇다면 옥천습곡대(沃川褶谷帶)라는 이야기네. 이제 이 정도는 통달했다. 그런데 습곡대(褶谷帶)와 습곡(褶曲)이 약간 다르긴 하지만 느낌은 비슷하지 싶다. 좁은 의미에서 암석에 나타난 습곡은 습곡(褶曲)이라고 표시하고, 거대한 규모로 형성이 되어서 암석에서는 보이지 않더라도 실제로는 습곡구조를 하고 있다면 이때는 아마도 습곡(褶谷)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지식백과에서 뚜렷하게 한자로 표시하지 않아서 나름 짐작해 봤다. 그나저나 바위에서 볼 수가 없으니 실감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질도에서 또 딱 나눠진 경계선이 보인다. 위쪽은 옅은 파랑이고, 아래쪽은 짙은 파랑이다. 이것도 지질층이 다르게 나뉜다는 의미다. 그리고 드러난 바위 절벽은 옅은 쪽이니까 찍어보니 예상한 대로 옥천층군으로 나온다.

 

시대 미상

옥천층군 창리층

점판암, 흑색 셰일, 천매암, 석회질 점판암

 

엇? 창리층? 가야곡에서도 만났던 창리층이 여기에서도 드러났구나. 가야곡에서는 반야사의 오른쪽 골짝에서 겨우 발견한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는데 이렇게 거대한 절벽이 나타나다니 과연 노력하는 자에게는 돌신도 복을 주시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입구쪽은 뭐지? 그것도 확인해 봐야지.

 


 

시대 미상

옥천증군 마전리층

호상 석회암, 결정질 석회암

 

마전리층도 이미 만난 적이 있었지. 반야사에서 석회암 광산의 동굴이었지. 그러고 보니까 창리층은 마전리층과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정리를 해도 될 듯 싶다. 다만 마전리층의 지역에는 암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벼랑을 옆에서 바라보려니 보이는 부분이 극히 제한적이다. 앞을 보니 강변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가까운 곳을 살펴보고는 강변 저쪽으로 가서 살펴야 하겠구나.

 


 

 

 

 

 


 

 

 

 

 


 

 

 

 

 


 

여기까지 살펴보고는 논산천 건너편으로 이동했다.

 


 

거리가 좀 있는 것은 괜찮다. 낭월에겐 400mm렌즈가 있으니까.

 


 

사진에 표시를 해 보면 이렇게 창리층과 마전리층으로 나눌 수가 있겠다.

 


 

연지님이 뭘 하나 싶었던지 차에서 내려서는 증명사진을 찍었구나. 그래서 위치를 파악하는 용도로 써먹는다. ㅎㅎ

 


 

겨울을 지내고 있는 오리들이 나그네를 경계하고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다. 

 


 

 

 

 

 


 

 

 

 

 


 

 

 

 

 


 

 

 

 

 


 

 

 

 

 


 

 

 

 

 


 

 

 

 

 


 

 

 

 

 


 

 

 

 

 


 

 

 

 

 


 

 

 

 

 


 

 

 

 

 


 

 

 

 

 


 

 

 

 

 


 

 

 

 

 


 

 

 

 

 


 

 

 

 

 


 

 

 

 

 


 

 

 

 

 


 

 

 

 

 


 

 

 

 

 


 

 

 

 

 


 

 

 

 

 


 

설명을 하고 싶어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냥 기록만 할 따름이다. 예쁘지는 않구나. 원래 옥천습곡대는 예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것도 봐야지. 예쁜 것이 전부는 아니니까. 그 속을 들여다보는 것이 재미있으면 된 거라고 생각하고 최대한 자세하게 살펴 볼 따름이다.

 


 

이쪽은 마전리층이겠구나. 그냥 바라만 본다. 마전리층은 반야사에서 충분히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망외소득으로 지석묘가 있다는 정보를 접했다.

 


 

일정에는 없었지만 이렇게 발견하는 유적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지. 어차피 이것도 돌을 보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ㅎㅎ

 

 

 

 

 

 

 


 

 

 

 

 


 

논산 신기리 지석묘[論山 新基里 支石墓]

지정별 : 문화재 자료 278호

위치 : 논산시 양촌면 신기리 340-2

시대 : 청동기 시대

고인돌 이라 부르기도 하며 청동기 시대에 널리 유행하던

무덤 양식의 하나이다. 신기리는 동 서 양측이 산지로

둘러 쌓이면서 하곡[河谷]으로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하상

[河床 : 하천의 바닥]에 형성된 충적평야로 하천은 이

고인돌의 동쪽에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다. 이 지역은 여

러 형식의 고인돌이 섞여 있는 지역으로 남한 지역의 중요

한 고인돌 분포지 가운데 하나이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

기는 출토품으로 보아 서기 전 7~5세기 경으로 추정하며

유적지의 위치와 구조적 형식으로 보아 금강유역 청동기

문화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8. 4.

 

 

 

 

 

 

 


 

입구에 세워놓은 안내석과 대동소이하지만 약간 다른 것은 출토된 유물에 대한 언급이구나.

 

본래 20여기가 있었으나 현재는 15기가

남아 있으며 밀집된 형태로 위치하고 있다. 출토품으로는 간돌검(磨製石劍) 1점,

돌화살촉(石鏃) 15점이 출토하였다. 이 지역은 여러 형식의 고인돌이 섞여 있는

지역으로 남한 지역의 중요한 고인돌 분포지 가운데 하나이다. 고인돌이 만들

어진 시기는 출토품으로 보아 서기 전 7~5세게로 추정되며, 유적의 위치와

구조적 형식으로 보아 금강유역 청동기 문화권에 속하느 것으로 보인다. 

 

지석묘에 세워 놓은 안내판이 훨씬 구체적이구나. 간석기의 시대였던 모양이다. 이건 신석기(新石器)로 보던가? 그러니까 간석기 이전에는 뗀석기의 시대라고 해서 구석기(舊石器)로 구분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돌로 돌을 내리쳐서 날카롭게 만들어서 사용하던 시대를 지나서 이제 돌을 갈아서 날카롭게 만들었던 시대였고, 그 시대를 이어서 석기시대(石器時代)는 끝이 나고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가 되면서 유물들을 남긴 것으로 보면 되겠다. 지석묘(支石墓)는 무슨 뜻이지? 짐작은 되지만 구체적으로 사전적인 의미가 필요하단 말이지.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강화군 하점면 부근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이 중 부근리 고인돌이라 부르는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이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전체높이는 2.6m이며, 덮개돌은 길이 6.5m, 너비 5.2m, 두께 1.2m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 고인돌에 대한 발굴조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인근 삼거리에 있는 고인돌에서 무문토기조각과 간돌검(마제석검), 돌가락바퀴(방추차)를 비롯한
유물들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2000년 12월 고창, 화순 고인돌 유적과 함께 강화 고인돌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강화도 지석묘를 기준으로 설명했구나. 청동기는 강화도에서도 나왔는데 책상처럼 다리를 탁자처럼 세운 것은 북방식이고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 놓은 것은 바둑판식이라고 하는 남방식인 모양이구나. 그래도 머릿속의 고인돌은 북방식인데 이것이 강화도 고인돌로 인해서 였나 싶기도 하다.

 

 


 

 맞아! 이게 고인돌이라고만 생각했지. 다리가 없는 것도 고인돌이라고 하는 것은 화순의 고인돌군에 가서야 확인한 셈이구나.

 


 

 

 

 

 


 

 

 

 

 


 

 

 

 

 


 

 

 

 

 


 

 

 

 

 


 

 

 

 

 


 

 

 

 

 


 

이게 고인돌이라고? 카니카지 아무런 설명을 보지 않고서 지나다가 봐서는 모르겠다. 그냥 넙대대한 바위덩어리로 밖에는 보이지 않으니 말이지. 

 

 

왜 이렇게 생겼을까? 그러니까 남방과 북방의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뭐냔 말이지. 그래서 또 잠시 생각해 보니까. 

 

 


 

북방의 고인돌이 다리를 갖고 있는 것은 주로 유목민들이었을 것으로 짐작을 해 볼 수 있지 싶다. 평생을 말을 타고 다녔으니까 죽어서도 말의 다리를 닮은 형태의 묘를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지 않겠느냔 말이지. 

 

 


 

그렇다면 남방은? 남방은 농사를 짓느라고 항상 딱바닥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땅바닥을 떠나면 큰일 나는 줄 알았을 수도 있겠지. 결론은 간단하네. 바닥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바둑판식 고인돌로 무덤을 만들고, 기마생활을 하다가 죽으면 탁자식 고인돌로 무덤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상상이다. 말이 되는 것도 같고... ㅋㅋㅋ

 

 

 

 

 

 


 

 

 

 

 


 

 

 

 

 


 

그나저나 무슨 돌을 썼을까? 안내판에는 돌에 대한 언급이 없구나. 강화도는 화강암을 썼다고 했는데 당연히 북쪽의 경기육괴로 되어 있는 지역이었으니까 그렇겠거니 하겠는데, 이 돌은 아무리 봐도 화강암은 아니고, 법계사 뒷산에서 본 응회암의 형태가 보인다. 그렇다면 어딘가에서 응회암 바위를 가져다 묘로 썼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도 되지 싶다. 다만 지질도에서 봐서 가까운 곳에 응회암이 있었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쌓은 돌도 멀리서 가져왔다잖여.

 


 

응회암을 가져오려면 어차피 대둔산 자락이었지 싶다. 가까운 곳은 그곳뿐이라서.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직선거리로나마 따져보자.

 


 

대략 3~4km쯤 되겠다. 그래도 그 시대에 이 정도의 큰 돌을 가져오려면 쉽지 않았을 텐데...... 혹시.....? 수로(水路)? 어디...

 


 

오호~ 보인다 보여!! 물길로 뗏목을 이용해서 옮겼겠구나.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은 그 정도의 운송수단은 사용할 줄 알았을 것으로 봐도 되지 싶다. 비가 많이 내려서 논산천 오산천의 물이 불을 때 옮겨 놓으면 된단 말이지. 끄덕끄덕~~

 

 

그 시대의 마음으로 살펴보면 저 멀리 응회암으로 된 산이 보인단 말이지. 앞에 보이는 창리층은 돌이 부서져서 크게 뜯어내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지. 그러니까 당연히 성스럽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 산의 응회암으로 무덤을 만들기 위해서 뗏목을 이용했을 법하지 않느냔 말이지. 아마 그랬을 걸로 우겨대자. ㅋㅋ

 

양촌의 지질탐사는 대략 이 정도로 마무리 하면 되지 싶다. 다음에 둘러 볼 곳은 이웃하고 있는 벌곡면이구나. 이것은 또 내일 탐사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