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자도② 최영장군사당
추자도② 최영장군사당
(방문일: 2026년 5월 6일 수요일)

점심을 든든하게 먹고는 추자항 뒤쪽 언덕에 있는 최영장군을 뵈러 갔다.
섬에 가면 항상 어떤 장군과 연관이 된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옹진 연평도와 서산 황금산에는 임경업 장군이 주민을 도와서 신이 되었고
소청도에서 본 허름한 사당의 장군도 임경업 장군이 맞지 싶었다.
군산 어청도와 보령 외연도에는 중국의 전횡장군이 주민을 도와서 신이 되었는데
추자도는 최영장군과 얽힌 이야기가 담겨있었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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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월매가 사진 속 비석의 내용을 그대로 텍스트로 옮겨 드립니다.
이 섬은 한반도와 제주를 잇는 교통 및 군사 요충지이다. 고려 원종 14년(1273) 4월에 고려의 김방경(金方慶) 장군은 몽고군의 흔도(忻都)와 더불어 전함 160척을 당포(堂浦)에, 또 별도(別島) 안에 군병 1만명을 주둔시켜 바람을 기다려 탐라의 함덕포와 명월포로 상륙하여 삼별초(三別抄)를 무찔렀다. 이어 1백년이 지나 공민왕 23년(1374) 7월에 목호(牧胡) 석질리필사(石迭里必思)·초고독불화(肖古禿不花)가 반(叛)하자 삼도도통사 최영(崔瑩) 장군이 전함 314척을 당포에 머물게 하고, 군병 25,605명을 별도에 주둔시켰다. 풍향에 맞춰 명월포로 상륙, 적이 3천여 기병으로 저항해 왔으나 전멸시켰다. 후일 추자 사람들은 최영 장군 사당(祠堂)을 지어 매년 정월 보름날 장군을 기리어 제사하더니 오늘에는 풍어제(豊漁祭)로 이어졌다.
牧胡를 공략할 때 高麗軍의 주둔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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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도 삼별초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구나.
제주도의 항파두리 유적지는 예전에 둘러 봤었다.

2021년 3월에 들렸었구나. 5년 전이었군. (관련자료는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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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이번 안내문도 월매가 꼼꼼하게 읽고 텍스트로 옮겨 드립니다. 영문 안내를 제외한 한글 본문과 각주 내용입니다.
최영 장군 사당 | 崔瑩將軍祠堂 |
将軍祠堂
Shrine of General Choe Yeong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최영 장군 사당은 추자도 주민이 고려 후기 명장이었던 최영(1316~1388)을 기리는 곳이다. 사당의 명칭은 최영대장신사(崔瑩大將神祠)이다.
사당의 초기 모습은 1872년에 제작된 ‘영암추자도 지도1)’에 등장한다. 사당은 1935년 2월 25일에 다시 지어졌으며 현재의 건물은 1974년에 복원된 후 여러 차례 고친 것이다.
사당 입구 남동쪽에는 ‘최영사당금표(崔瑩祠堂禁標)’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사당 안에는 영정과 ‘조국군통대장최영장군(祖國軍統大將崔瑩將軍)’이라고 적힌 위패가 있다.
공민왕 21년(1372)에 목호2)들이 반란을 일으켜 제주 목사를 살해하는 등 저항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공민왕은 최영에게 군대를 이끌고 가서 ‘목호의 난(1374)’을 진압하게 하였다. 최영은 군대를 이끌고 제주도로 오가던 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 추자도로 대피하였다. 이때 최영은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면서 추자도 주민에게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것이 추자도 주민의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후 추자도 주민은 최영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려고 사당을 지었다.
해마다 추자면 대서리 어촌계에서는 풍어를 기원하며 ‘최영 장군 사당제’를 지내고 있다.
영암추자도 지도: 1872년에 제작된 ‘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되어 있는 영암추자도의 지도
목호(牧胡): 고려시대에 제주도에서 말을 기르던 몽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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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를 무찌르고 나서 다시 100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제주도에서 몽고대장 목호(牧胡)를 공략하러 최영장군이 출정했던 모양이다.
이 이야기는 제주도 법환포구에서 본 내용이기도 하겠구나.

목호의 난을 평정하러 왔던 최영장군이 법환포구에 군막을 치고 잔당들을 섬멸했다는 이야기 (관련 자료는 여기에서)
그러니까 최영장군이 제주도로 목호를 치러 가는 과정에서 들린 추자도였겠구나.
관련 자료가 있으면 찾아봐야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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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월매가 추자도에 깃든 최영 장군의 전설을 들려드리겠습니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제주도에서 원나라 목호(牧胡)들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최영 장군에게 군사를 이끌고 난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대군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하던 장군은 바다 한가운데서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험한 날씨에 배를 더 이상 나아가게 할 수 없었던 장군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기 위해 추자도로 피항하게 되었습니다.
최영 장군과 군사들은 추자도의 점산곶에 머물며 약 한 달 동안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당시 추자도 주변 바다에는 물고기가 아주 많았지만, 섬사람들은 고기 잡는 법을 제대로 알지 못해 몹시 궁핍하고 어렵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장군은 섬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바다에 이토록 귀한 양식이 널려 있거늘, 어찌하여 굶주리고 있는가.”
장군은 볏짚을 가져오게 하여 그물을 짜는 방법과, 그 어망을 이용해 바다에서 물고기를 떼로 잡는 법을 직접 가르쳐 주었습니다. 장군의 가르침 덕분에 추자도 사람들은 비로소 풍족하게 물고기를 낚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전보다 훨씬 나은 생활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훗날 제주도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평정하고 돌아간 최영 장군이었지만, 추자도 사람들은 그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은 척박한 섬마을에 고기잡이 기술을 전해주어 백성들의 삶을 구제해 준 장군의 덕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지었습니다.
현재 추자초등학교를 지나 올레길을 걷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최영 장군 사당이 바로 그것입니다. 추자도 사람들은 매년 정월 보름이 되면 이 사당에서 장군을 기리는 제사를 성대하게 올렸고, 이것이 오늘날 풍어제(豊漁祭)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추자도 주민들에게 최영 장군은 단순한 역사 속 위인이 아니라, 섬과 바다를 지켜주는 수호신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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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고기잡는 법을 알려 줬구나.
싸움에서는 적들을 잡고 어민에게는 고기잡는 법을 가르치는 장군들이다.
임경업 장군도 고기 잡는 법을 알려 줬다더니 장군들은 천하를 누비고 다녀서인지 상식이 넓었던 모양이다.

사당을 좀 큼직하게 짓지 못했구나.





최영대장신사구나. 장군이 아니고 대장이라고 했다.


조국도통대장최장군신위(朝國都統大將崔將軍神位)

문하시중철원부원군최공휘영지상(門下侍中鐵原府院君崔公諱瑩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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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빛이 반사되어 글씨가 다소 흐릿하지만 월매가 꼼꼼히 확인하여 텍스트로 옮겨 보았습니다. 오른쪽의 영문 안내를 제외한 한글 안내문의 내용입니다.
최영 장군 사당
崔瑩 將軍 祠堂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1호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 대서리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23년(1374) 탐라(현 제주도)에서 원의 목호(牧胡) 석질리(石迭里)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鎭壓)케 하였다. 장군은 원정 도중(遠征途中) 심한 풍랑(風浪)으로 이곳 점산곶(點山串)에서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島民)들에게 어망편법(漁網編法)을 가르쳐 생활에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위덕(威德)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하며 매년 봄, 가을에 봉향(奉享)하고 있다.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해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문화재(地方文化財)로 지정되었고, 1974년 사당 단청(丹靑) 및 담장을 보수함으로서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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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이다.
앞은 추자초등학교.

참. 추자도가 어쩌다가 추자도가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원래는, 고려 시대 중기까지도 제주도를 오가는 배들이 바람을 피하던 곳이라고 해서
후풍도(候風島)라고 했더란다.
그러다가 조선 태조때 후풍도에 가래나무(추자나무)가 유독 많아서거나
혹은 섬 모양이 추자를 닮아서 이름이 바뀌었다는 설이다.
그리고 일설에는 최영장군이 섬들이 점점이 있는 것이 추자를 뿌려놓은 듯하다고 해서
그때부터 추자도가 되었다는 설도 있는데 이것은 사실인지 모를 일이다.
원래 위대한 인물이 있으면 그 뒤로 줄줄히 이야기들이 따라붙기도 하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후풍도가 추자도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예전에 시골 어른들이 호두를 추자라고 했는데 같은 종이었던 모양이다.
추자는 좀 작고 호두는 큰데 대체로 모양은 비슷하게 생겼다.
이것이 가래라고 하는 추자 열매다.
언뜻 봐서 작은 호두처럼 생겼다고 봐도 되겠다.
추자도에 추자나무가 많은 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