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② 용장성(龍藏城)
진도② 항몽유적지(抗蒙遺跡地) 용장성(龍藏城)
(탐방일: 2026년 5월 5일 화요일)

여행이라는 것이 꼭 돌이 있는 곳만 가야 할 필요는 없다.
흐름에 따라서 벽파진도 가 보고 용장성도 가보면서 더퉈보는 거지.
지질을 보지 못해도 가보고 싶었던 곳이 용장성이었고,
그래서 지는 해를 받으면서 부지런히 찾아갔다.
4.3km에 7분 거리다.
역사 유적지 산책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늘 그렇듯이, 사당의 문은 닫혀있기 마련이다.

직원에게 연락하라고 하지만 그것도 번거로워서 그냥 돌아서게 된다.
꼭 가서 봐야 할 일이라면 또 모르겠거니와,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기도 하다.
사당에는 배중손 장군이 봉안되어 있겠구나.
비문을 월매에게 써달라고 해 볼까? 잘 보이지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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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월매입니다. 전송해 주신 사진 속 비석이 어둡게 찍혀 글씨를 알아보기 다소 까다로우셨겠군요. 요청하신 대로 사진 속 비문의 내용을 텍스트로 변환해 드리겠습니다.
사진에 담긴 비석은 진도 용장성에 위치한 배중손장군 항몽순의비(裴仲孫將軍抗蒙殉義碑)입니다. 비석의 우측부터 세로로 새겨진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裴仲孫將軍抗蒙殉義碑 (배중손장군 항몽순의비)
울돌목을 사이에 두고 육지와 닿은 호남의 끝자락 보배섬 진도는 곳곳이 빼어나 예로부터 詩人墨客(시인묵객)이 절로 이어온 기품있는 고장, 詩書畵唱(시서화창)이 살아 숨쉬는 예향이다. 미루어 이 섬의 성격, 진도인의 맥에는 護國(호국) 투쟁의 강인한 기질을 대변하는 浩氣(호기) 서린 구국의 성지이기도 하다. 일찍이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물리친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이 그 상징의 하나라면, 그보다 앞서 고려조 여몽연합군에 맞서 결사항전했던 삼별초의 웅혼한 기상이 서린 곳이 바로 이곳 진도이다. 대몽항쟁의 주력부대였던 삼별초는 무신정권의 사병으로 출발했으나 뒤에는 국방의 주력이 되어 몽골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고려 왕조가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삼별초는 이에 불복, 배중손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배 장군은 진도를 근거지로 삼아 용장산성을 쌓고 연안 일대를 장악하며 독립된 해상왕국을 건설했다. 이들의 꺾이지 않는 기상은 몽골과 고려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나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진도 함락의 비운을 맞고, 장군은 이곳 남도진성 일대에서 장렬히 전사하니 그때가 고려 원종 12년(1271년) 5월 중순, 항쟁을 시작한 지 1년 만이었다. 비록 삼별초의 항쟁은 실패로 끝났지만, 자주독립의 화신 배중손 장군은 민족자주정신의 상징으로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아 후손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이에 진도군민은 장군의 거룩한 넋을 기리고자 그가 숨진 이곳 남동리 일대에 비를 세워 영령을 위로하고 애국애족의 참뜻을 길이 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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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라도 준수하다. 고맙구로. ㅎㅎ

고려항몽충혼탑이 서있고 저항하는 장군들의 형상도 있다.
마침 석양빛을 받아서인지 기울어가는 국운의 처절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좌우로 역사적인 설명도 되어 있다.

그늘이 져서 좀 어둡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햇살이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열 가지의 설명판을 새겨서 삼별초(三別抄)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글씨를 읽기는 어려워서 월매에게 자세하게 써 달라고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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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월매입니다. 낭월님께서 궁금해하시는 진도 용장성에 대하여 그 깊고 웅장한 역사를 이십 화에 걸쳐 상세하게 풀어내고자 합니다.
제1화: 역사의 숨결을 품은 땅, 진도 용장성
한반도의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보배로운 섬 진도에는 고려 시대 삼별초의 항몽 투쟁이라는 굵직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중심에 있는 곳이 바로 용장성입니다. 이곳은 단순한 성곽의 유적을 넘어,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 했던 고려인들의 처절한 의지와 기상이 서려 있는 성지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무너진 성벽과 주춧돌만이 남아 그날의 함성을 침묵으로 대변하고 있지만, 그 터에 서면 여전히 뜨거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장엄했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겠습니다.
제2화: 몽골의 거센 말굽과 고려의 시련
용장성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십삼 세기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던 몽골 제국의 팽창과 고려의 시련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칭기즈칸의 후예들은 유라시아 대륙을 휩쓸며 무서운 기세로 영토를 넓혀갔고, 그 거센 말굽은 마침내 고려 땅까지 뻗어왔습니다. 고려는 국력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세계 최강의 기마 군단을 앞세운 몽골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국토는 유린당하고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결국 무신정권을 이끌던 최우는 몽골의 기병이 힘을 쓰지 못하는 바다를 방어벽 삼아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는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는 장기 항전을 위한 고육지책이자, 고려 조정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제3화: 나라의 방패로 거듭난 삼별초
강화도에서 항전이 이어지는 동안 고려의 군사력 중심에는 삼별초라는 특수 부대가 있었습니다. 본래 삼별초는 무신 집권자 최우가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한 야별초에서 기원하였습니다. 야별초에 소속된 군사들이 점차 늘어나자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고, 몽골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하여 이 셋을 합쳐 삼별초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무신정권의 사병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대몽 항쟁기를 거치며 이들은 점차 국가의 정규군을 능가하는 최정예 전투 부대로 성장하였습니다. 몽골군과 직접 맞서 싸우는 최전선에는 항상 삼별초가 있었고, 이들은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국방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제4화: 굴욕적인 강화와 개경 환도
수십 년에 걸친 강화도에서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고려 조정 내부에서는 점차 전쟁에 지친 기색이 역력해졌습니다. 무신정권이 붕괴하고 왕정이 복구되면서 고려 원종은 몽골과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맺기로 결단합니다. 몽골의 요구를 수용하여 육지인 개경으로 다시 도읍을 옮기려는 환도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는 몽골의 내정 간섭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굴욕적인 처사였습니다. 삼별초를 이끌던 장군 배중손은 이러한 조정의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습니다.
“우리는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은 개경의 조정에 따를 수 없다. 끝까지 고려의 자존심을 지킬 것이다!”
배중손의 이 외침은 삼별초 전체의 뜻이었고, 이들은 몽골에 굴복한 원종의 조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여 독자적인 항전을 이어갈 것을 결의합니다.
제5화: 승화후 온의 즉위와 남하 결의
개경 환도를 거부한 삼별초는 왕실의 종친이었던 승화후 왕온을 새로운 고려의 국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이는 개경의 원종 정권과 맞서는 또 다른 고려 정부의 수립을 의미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삼별초는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라 외세의 압제에 저항하는 자주적인 국가의 군대로서 대의명분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강화도는 개경과 가깝고 육지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되기 쉬웠기에, 이들은 새로운 항전의 근거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회의 끝에 그들은 남쪽의 바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섬, 진도를 새로운 도읍으로 삼기로 결정합니다. 천 여 척의 배에 군사와 백성, 그리고 수많은 물자를 싣고 진도를 향해 출발하는 그들의 앞길에는 거센 파도와 험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6화: 남방의 요충지, 진도의 전략적 가치
삼별초가 수많은 섬 중에서 하필 진도를 새로운 항전의 무대로 선택한 데에는 매우 치밀하고 전략적인 계산이 깔려 있었습니다. 진도는 한반도 서남해안의 해상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입니다. 특히 진도와 육지 사이를 흐르는 명량해협, 즉 울돌목은 물살이 거세고 험난하여 물에 익숙하지 않은 몽골군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운 천연의 방어막이었습니다. 게다가 진도 자체의 영토가 넓고 기름진 농토를 다수 보유하고 있어 수만 명의 군사와 백성들이 장기간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농성을 벌이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또한 남해안과 서해안을 잇는 길목에 위치하여, 하삼도 지역에서 개경으로 올라가는 조운선을 통제하고 물자를 확보할 수 있는 경제적 이점도 컸습니다.
제7화: 용장산의 품에 터를 잡다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 지도부는 방어에 유리하면서도 한 나라의 도읍으로서의 위엄을 갖출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곳은 진도 북부 지역의 용장산 자락이었습니다. 이 일대는 산세가 험준하여 외부의 적을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앞으로는 바다가 넓게 펼쳐져 있어 수군을 운용하고 해상로를 장악하기에 적합했습니다. 또한 용장산의 깊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성안의 사람들에게 충분한 식수를 제공할 수 있었습니다. 삼별초는 이곳에 위치한 기존의 용장사라는 거대한 사찰 주변을 중심으로 삼아 성을 쌓고 궁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훗날 역사에 널리 알려지게 될 진도 용장성의 시작입니다.
제8화: 산세를 품어 안은 성곽의 축조
용장성의 축조 방식은 산의 자연스러운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는 고려 시대 산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줍니다. 성곽의 둘레는 약 십삼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흙과 돌을 섞어 쌓는 토석 혼축 방식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험한 능선 구간은 흙을 다져 쌓고, 성문이나 중요한 방어 거점에는 견고한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아 올렸습니다. 특히 방어력이 취약한 계곡 부분에는 성벽을 이중 삼중으로 보강하여 적의 침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습니다. 성벽을 따라 곳곳에 치성과 적대를 설치하여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점은 삼별초가 지닌 뛰어난 군사적 식견을 잘 보여줍니다. 짧은 시간 안에 이토록 거대한 성곽을 축조했다는 것은 삼별초의 강력한 통솔력과 백성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9화: 만월대를 빼닮은 행궁의 구조
용장성의 중심에는 새로 추대된 국왕 승화후 온이 머물고 정사를 돌보던 궁궐, 즉 행궁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발굴 조사 결과 드러난 용장성 행궁의 터는 매우 독특하고 장엄한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평지에 지어진 일반적인 궁궐과 달리, 산의 경사면을 따라 여러 단의 거대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계단식으로 건물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멀리서 바라볼 때 궁궐 전체가 산맥을 타고 승천하는 용의 모습처럼 웅장하게 보이도록 하는 시각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계단식 건물 배치는 고려의 원래 도읍이었던 개경의 만월대 궁궐 양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삼별초는 비록 쫓기는 신세였지만, 진도에 개경의 궁궐을 재현함으로써 자신들이 고려의 진정한 정통성을 이은 합법적인 정부임을 천하에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제10화: 남해안을 호령하는 해상 왕국의 건설
용장성을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는 수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남해안 일대를 장악해 나갔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가진 함선들을 이끌고 인근의 섬들은 물론, 멀리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의 내륙 깊숙한 곳까지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무엇보다 삼별초의 가장 위협적인 행동은 조운로의 차단이었습니다. 남부 지방에서 거둬들인 곡식과 특산물 등 세금을 세금 배에 싣고 개경으로 향하던 조운선들을 나포하여 막대한 물자를 탈취했습니다. 이는 개경의 원종 정권에게는 치명적인 경제적 타격이었고, 반대로 삼별초에게는 장기 항전을 유지할 수 있는 든든한 물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진도 용장성은 바야흐로 남쪽 바다를 지배하는 독자적인 해상 왕국의 수도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제11화: 민초들의 함성, 항쟁의 불꽃을 키우다
삼별초의 항쟁은 단순한 군벌의 권력 투쟁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몽골군의 잦은 침략과 수탈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던 고려의 평범한 백성들, 특히 농민과 천민들에게 삼별초는 외세에 맞서 싸우는 구원자처럼 여겨졌습니다. 삼별초가 진도에 자리를 잡고 남해안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하자, 몽골의 압제와 무능한 개경 조정에 분노하던 수많은 지방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삼별초에 합류하기 시작했습니다.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조운선을 호위하던 관군을 물리치고 곡식을 삼별초에게 바치는 일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용장성 항쟁은 군사 정예 부대와 민초들의 뜨거운 애국심이 결합된, 거대한 민중 항쟁의 성격을 띠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습니다.
제12화: 개경과 대도의 당혹, 연합군의 결성
삼별초가 진도에서 강력한 해상 왕국을 구축하고 민심을 얻어 날로 세력을 키워가자, 개경의 원종 정권과 몽골 제국의 수도 대도의 쿠빌라이 칸은 큰 충격과 당혹감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일본 원정을 계획하고 있던 몽골의 입장에서는 남방의 제해권을 장악한 삼별초가 그들의 계획에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결국 고려와 몽골은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대규모 연합군을 결성합니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과 몽골의 장수 흔도와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군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적을 자랑하던 몽골의 기병도 바다 건너 섬에 웅거한 삼별초를 공격하는 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13화: 일본을 향한 국서, 외교적 타개책
용장성의 삼별초 지도부는 무력 항전뿐만 아니라 치밀한 외교전을 통해서도 위기를 극복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고려의 합법적인 정부를 자처하며 이웃 나라인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에 국서를 보냈습니다. 삼별초의 사신은 몽골 제국이 무력으로 천하를 유린하고 있으며, 이제 고려를 넘어 일본마저 침략하려 한다는 사실을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몽골이라는 거대한 공동의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일본 측에 군사적 동맹과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비록 일본이 이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하지는 않았지만, 이는 삼별초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으며, 단순한 무장 집단을 넘어 독립된 주권 국가로서 치열한 외교 활동을 펼쳤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제14화: 폭풍전야, 다가오는 최후의 결전
1271년, 마침내 여몽 연합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삼별초를 향한 대대적인 총공세 준비를 마쳤습니다. 연합군은 수백 척의 함선을 새로 건조하고, 진도를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수륙 양면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그들은 삼별초의 강력한 해상 방어망을 뚫기 위해 조류와 바람의 방향을 면밀히 분석하며 공격의 시기를 엿보았습니다. 한편 용장성의 삼별초 역시 적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성벽을 높이고 무기를 정비하는 등 최후의 결전을 위한 방어 태세를 단단히 굳혔습니다. 진도 앞바다에는 마치 폭풍이 몰아치기 직전의 고요함처럼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병사들의 눈빛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는 비장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제15화: 벽파진의 짙은 안개를 뚫고
오월 중순, 여몽 연합군은 짙은 해무가 깔린 틈을 타 진도를 향해 삼면에서 동시 다발적인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김방경이 이끄는 주력 함대는 험난한 명량해협을 우회하여 벽파진 방면으로 진격했고, 다른 부대들은 진도의 좌우 측면을 동시에 노렸습니다. 안개 속에서 수백 척의 연합군 함대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삼별초 수군도 필사적으로 응전하며 바다 위에서 치열한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배와 배가 부딪히고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 아비규환 속에서, 조류의 변화를 절묘하게 이용한 연합군의 대규모 병력이 마침내 진도의 해안선에 상륙하는 데 성공하고 말았습니다.
제16화: 무너지는 성벽과 붉게 타오르는 행궁
해안 방어선이 뚫린 후, 연합군의 대병력은 곧장 삼별초의 심장부인 용장성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삼별초 군사들은 성벽에 의지하여 투석기와 활을 쏘며 목숨을 건 방어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압도적인 수적 열세와 몽골군의 강력한 공성 무기 앞에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처절한 공방전 끝에 결국 용장성의 성문이 부서지고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성 안으로 밀려든 연합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질렀고, 개경의 만월대를 꿈꾸며 지어졌던 장엄한 용장성 행궁은 붉은 화염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삼별초 병사들은 불길 속에서도 끝까지 칼을 놓지 않고 백병전을 벌이며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제17화: 지도자들의 비장한 죽음과 슬픔
용장성이 함락되는 혼란 속에서 삼별초의 국왕이었던 승화후 온은 적군에게 사로잡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를 왕으로 모시고 항쟁을 이끌었던 최고 지도자 배중손 장군 역시 인근의 다른 진성으로 후퇴하여 끝까지 항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것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던 지도자들의 연이은 죽음은 삼별초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습니다. 지휘부를 잃은 군사들과 피난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섬 곳곳에서는 포로로 잡히거나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진도의 붉은 동백꽃은 마치 그날 흘렸던 고려인들의 피를 머금은 듯 더욱 붉게 피어났고, 바다의 거센 파도 소리는 그들의 한 맺힌 통곡 소리처럼 들려왔습니다.
제18화: 탐라를 향한 험난한 뱃길
용장성이 함락되고 진도에서의 항쟁이 비극적인 끝을 맺었지만, 삼별초의 항쟁 의지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배중손 장군의 뒤를 이어 새로운 지휘관이 된 김통정 장군은 살아남은 잔존 병력과 백성들을 수습하여 다시 험난한 바다로 나섰습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진도보다 훨씬 더 남쪽,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는 섬 탐라, 즉 제주도였습니다. 끊임없는 패전의 상처와 피로 속에서도 그들은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거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용장성의 함락은 끝이 아니라 제주도 항파두리성으로 이어지는 또 다른 처절한 항쟁의 서막이었습니다. 진도의 영광과 좌절은 삼별초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거대한 흉터로 남았습니다.
제19화: 흙더미 속에서 깨어난 역사의 증거들
긴 세월이 흘러 수백 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용장성의 진면목은 현대의 치밀한 발굴 조사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다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수차례에 걸친 학술 발굴 결과, 웅장한 계단식 축대와 대규모 건물터의 구조가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특히 발굴 현장에서는 고급스러운 청자 파편들과 연꽃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진 수막새 등 최고급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글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들도 쏟아져 나와 건축의 연대와 성격을 규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용장성이 단순한 산성이 아니라, 완벽한 격식을 갖춘 고려의 임시 수도이자 행궁이었음을 과학적으로 확고하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20화: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불멸의 가치
지금까지 스무 화에 걸쳐 진도 용장성에 얽힌 치열하고 비장했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진도 용장성은 비록 여몽 연합군의 총공세로 짧은 영광을 뒤로한 채 잿더미가 되고 말았지만, 그 폐허가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삼별초의 끈질긴 항쟁은 비록 군사적인 실패로 끝이 났을지라도,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제국주의 세력에 맞서 한 나라의 주권과 자존심을 끝까지 지켜내려 했던 위대하고 불굴의 기록입니다. 그것은 외세의 부당한 억압에 결코 굴복하지 않는 한민족 특유의 자주정신과 숭고한 저항 정신의 상징으로 우리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없이 침묵하고 있는 용장성의 흩어진 주춧돌들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국가의 독립과 존엄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금 가슴 깊이 되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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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이건 제대론데? ㅎㅎ
삼별초에 대해서 자세히 풀어서 써 달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지.

기존의 용장사 터를 배경으로 하고 궁궐을 지었단 말이지?
그런데 용장사(龍藏寺)의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용을 숨기고 있는 절이라니. 용은 왕임을 알기는 쉽고
그러니까 왕이 거처할 절이라는 의미니까 뭘 알고 지었나 싶어서. ㅎㅎ
절이 있으니 들어가서 참배하고 가야지.
더구나 불상이 석불이라고 하니까 반드시 가 뵈어야지.
안내판은 AI에게 텍스트로 변환시키라고 있는 거니까 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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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월매입니다. 전송해 주신 사진 속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텍스트로 변환해 드립니다.
용장사 석불좌상
龍藏寺 石佛 坐像
Stone Seated Buddha of Yongjangsa Temple
용장사 석불좌상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17호)
용장사의 석불은 극락세계에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 아미타여래로 연꽃을 든 모습을 한 본존불과 호리병을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과 합장을 하고 있는 대세지보살을 좌우보처로 하여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본존불의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약병으로 오인하여 약사여래로 알려진 바가 있었으나 (약사여래의 약병은 손잡이 뚜껑이 있음) 본존불은 연꽃을 들고 있고, 좌우에 배치되는 불상이 관세음, 대세지일 경우 본존불은 아미타불로 모신다.
본존 석불 상은 사각형 대좌 위에 광배를 등에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대좌에는 단판연꽃무늬가 소박하게 묘사되어 있고, 광배는 의자의 등처럼 보이는데 세련된 무늬가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짙은 눈 썹, 작은 눈, 긴 코, 입은 투박하지만 안정된 모습이다. 가슴이 빈약하게 처리된 반면 어깨와 팔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다. 결가부좌로 앉아 있는 하체는 너무 높고 커서 비례 감이 떨어지는 고려 불상의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오른손을 내리고 무릎 위에 올린 왼손에는 연꽃이 들려 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발은 큼직하고 투박한 모양으로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양 어깨에 옷을 두른 통견의 법의는 물결모양의 옷 주름이 빈틈없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고려불상 특유의 형식을 나타내고 있다. 좌우로 서 있는 두 보살상은 본존불과 비슷한 인상인데 상체는 입지 않고 하체는 긴치마 모양으로 신라식 보살상을 나타내고 있다.
삼별초군이 패망함으로 사찰도 함께 폐사되어 석불이 오랜 시간 숲 속에서 방치되어 있었다. 1940년경에 용장마을에 사는 분들이 함께 비바람에 많이 훼손되어 있는 석불을 찾아내어 그분들 나름대로의 복원(시멘트를 바름 : 특이한 인상이 되어 있음)을 하였고 조그만 움막을 지어 드려서 비가림을 해 드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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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의 모습이 특이하구나.
주민들이 풍화로 허물어진 불상에 시멘트로 복구를 했다니까
그 정성만으로도 훌륭하다고 하겠다.

극락전 옆의 전각은 염불당이다. 들어가 보진 않았다.
저만치 궁궐터가 깨끗하게 정돈되어있다.







터에 석축만 남아있는 옛 궁궐터를 한바퀴 돌아본다.
자료가 없으니 형체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겠구나.
고려를 되살리고자 하는 열정으로 3년 여에 걸쳐서 지었다는데
일설에는 미리 사람을 보내서 작업을 했을 거라는 말도 있었다.
이 정도의 공사를 3년 안에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지.
하물며 뒷 산의 능선을 따라서 13km에 달하는 산성까지 고려하면 말이지.
그 와중에 미리 사람을 보내서 진도에 성을 지을 생각을 했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지질탐사가의 눈에는 축대도 예사롭지 않다.
응회암으로 보이는데...
용장성 주변의 지질은 어떻게 되는지 살펴봐야지.

현생누대 신생대 제4기
애추
애추
애추가 뭐지? 다시 월매를 소환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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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월님, 보내주신 지질도 이미지를 보니 궁금해하실 만한 용어가 딱 눈에 띄네요. 화면 캡처 2026-05-14 172946.jpg 파일의 지질 정보창을 보면 기호 Qt로 표시된 지층과 대표 암상이 애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추(崖錐)는 영어로 Talus(테일러스) 또는 Scree(스크리)라고도 불리는 지형을 말합니다. 한자 뜻을 풀이하면 '벼랑 애(崖)'에 '송곳 추(錐)'를 써서, 절벽 아래에 송곳처럼 쌓인 지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애추의 특징과 형성 과정
형성 원인: 절벽(단애)의 암석들이 풍화 작용이나 얼고 녹는 과정(동결 파쇄 작용)을 반복하며 부서져 내립니다.
지형적 형태: 이렇게 떨어진 돌덩어리들이 경사면 아래쪽에 부채꼴 모양이나 원뿔 형태로 쌓이게 됩니다.
주요 구성: 주로 모나고 거친 돌무더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입자가 큰 바위들이 아래쪽에, 비교적 작은 것들이 위쪽에 위치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질도상에서 Qt라는 기호는 'Quaternary Talus'의 약자로, 비교적 최근인 신생대 제4기에 형성된 퇴적층임을 나타냅니다. 쉽게 말해, "오랜 세월 동안 절벽에서 떨어진 돌들이 쌓여 만들어진 경사면"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풍경 사진을 찍으실 때 산비탈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돌무더기만 흘러내린 듯한 곳을 보신 적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지질학적으로 '애추'에 해당합니다. 낭월님의 예리한 관찰 덕분에 지질도의 암호가 하나 더 풀렸네요!
이 지형과 관련해서 혹시 더 궁금하신 점이 있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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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니까 궁궐을 지었던 용장성은 돌무더기였다는 말이구나.
여기에서 굴러 내린 돌들로 축대를 쌓았을 가능성이 많겠네.
그렇다면 그 뒤쪽에 산을 이루고 있는 돌들이겠거니...

현생누대 중생대 백악기
백악기 분류녹암층 반암질 응회암
반암질(斑巖質) 응회암(凝灰巖)

얼룩이 있는 형태의 응회암이라는 뜻이려니 싶다.
이 돌들을 이용해서 축태를 쌓고 궁궐을 지었으니까 석공들도 편했겠다.




둘러보고 내려오니 용장산성 표석이 서 있다.

햇볕이 기울고 땅거미가 밀려오는 용장성이다.
전경 한 컷 남기고 걸음을 진도읍으로 향한다.
맹골군도 유람하면서 이틀 묵었던 대동모텔이다.


고단하신 연지님은 안마의자가 반가워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중에 토스랑 노느라고 바쁘다. ㅋ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