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제45장. 만행(漫行)/ 15.용행십팔식(龍行十八式)

작성일
2025-08-20 06:25
조회
693

[610] 제45장. 만행(漫行)

 

15. 용행십팔식(龍行十八式)

===========================

 

모두 다시 탁자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상념으로 골똘하게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창도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밖으로 나와서 새벽에 걸었던 길로 향했다. 비단잉어들이 놀던 곳을 지나면서 보니까 수면이 고요했다. 바람이 살랑이면서 기분을 상쾌하게 하는 것을 느끼면서 천천히 호반을 거닐었다.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면서 파향이 들려줬던 여러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작게는 개자(芥子)의 씨앗에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정도로 작다는 것에 대해서도 사립체(絲粒體)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듣고 나서 더욱 명료하게 이해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까 크게는 우주를 담는다고 한 것도 미뤄서 이해되었다.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짙푸른 하늘을 보면서 그 많은 별은 어디로 갔을까 싶기도 했지만 단지 일락서산(日落西山)하고 대지에 어둠이 내리면 숨겨졌던 별들이 다시 또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게슴츠레하게 실눈을 뜨고서 보이지 않는 별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상상의 하늘을 바라봤다. 그 하늘 어딘가에는 무간지옥(無間地獄)에서 비명을 끝없이 지르면서 고통을 겪고 있는 곳도 있을 것이고, 한없이 아름다운 하늘 음악을 들으면서 매 순간을 기쁨이 가득한 순간으로 보내고 있는 극락세계(極樂世界)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까지로 이어졌다.

천천히 걷고 있는데 여정이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다보니 바삐 와서는 점심이 차려졌다고 알려준다. 담소하느라고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 알았어. 가자.”

음식은 넉넉하게 차려져 있었고 모두 둘러앉아서 우창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약간은 미안했다.

“아, 잠시 생각을 좀 정리하느라고 하하하~!”

자원이 우창을 보고 말했다.

“그러신 줄 알았어요. 어서 이리 앉으세요.”

여초가 미소를 짓고 앉아있다가 우창을 보고는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우창 선생 덕분에 참으로 많은 것에 대해서 알게 되었으니 오늘 오찬(午餐)은 내가 너무 흥겨워서 마련했으니 맘껏 드세요. 이러한 인연도 공화 덕분이니 공화도 많이 먹고. 호호호~!”

“언니, 우린 용정으로 유람가려는데 같이 갈래요?”

“그렇지, 서호에 왔으면 용정에 가서 녹차를 마셔야 서호 구경을 제대로 한 것이니까. 잘 생각했어. 나는 다 둘러봤지. 일없이 화초나 돌보면서 놀 테니 구경들 잘해요. 호호~!”

“정말 산수원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또 다음에 뵙게 되길 바랍니다.”

“언제든지 와서 편히 쉬어요.”

일행이 길 떠날 준비를 하자 여초도 문밖에까지 배웅하고 일행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숙소로 돌아오자, 여정이 마차를 준비했다.

“오늘은 용정에서 쉬도록 할 거야.”

모두 마차에 올랐다. 용정촌(龍井村)까지는 대략 20여 리의 거리였다. 주변의 풍광을 보면서 느긋하게 한 시진(時辰) 남짓 달리니 입구에 커다랗게 용정촌을 알리는 화려한 안내판이 나타났다.

 


 

 

“서호에서 피어오르는 안개를 먹고 자란 용정차가 일품이라고 하니까 오늘은 차향(茶香)에 젖어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여기로 선택했어. 어제 오늘 공부를 너무 많이 했으니, 머리도 좀 식힐 겸 말이야. 호호호~!”

기현주가 우창을 보면서 말하자 다른 일행도 고색창연한 차관(茶館)이 즐비한 풍경에 호기심을 갖고서 여정이 마차를 대는 것을 보고서 같이 주변을 둘러보면서 천천히 걸었다. 주변에는 온통 차나무가 가득한 풍경도 이채로웠다.

“어서 오십쇼~! 용행십팔식(龍行十八式)을 보지 않는다면 용정에 왔다고 해도 안 오신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곧 시작합니다~!”

한 차관 앞에서 행인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기현주가 일행에게 들어가자고 하고는 차관으로 향했다. 차관의 이름은 「끽차루(喫茶樓)」였다. 그야말로 ‘차를 마시는 누각’ 정도로 해석이 되는 소박한 이름이라서 더 맘에 들었다. 중앙에는 꽤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용행십팔식을 펼칠 무대인가 싶었다.

 


 

 

잠시 후에 차관은 차객(茶客)들로 가득했다. 광고의 효과가 있었다. 대여섯 명의 악사(樂士)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는 연주를 시작했다. 그러자 홍의(紅衣)와 청의(靑衣)의 두 낭자가 주둥이가 긴 차관을 들고 나타났다. 그것을 본 관객들이 모두 박수로 환영했다.

두 낭자가 차관과 하나가 된 듯이 용행십팔식을 펼치는데 차관이 흡사 한 마리의 용이 몸을 감고 돌아가듯이 일사불란(一絲不亂)했다. 우창도 그 신기(神技)에 가까운 광경에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홍의 낭자가 어느 순간에 긴 주둥이를 우창의 앞에 놓인 작은 찻잔에 쪼르륵~ 따르고는 다시 기현주에게도 따랐다.

우창이 깜짝 놀라서 여인을 바라보니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다시 두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이렇게 하면서 찻잔에 차를 채워주는 것임을 비로소 알았다. 이번에는 청의 낭자가 삼진과 자원의 찻잔을 채웠고 그렇게 돌아가면서 우창이 앉은 탁자에 모두 차를 따르고는 다시 찻물을 채워서 또 다른 동작으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더니 이번에는 옆의 탁자에도 차를 따랐다.

차는 향기로운 청향이 풍겨 나와서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 

“지금 따라드리는 차는 올봄에 수확한 사봉용정(獅峰龍井)입니다~!”

 


 

 

소개하는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다. 차를 마셔보고 맛이 좋으면 구입도 가능하다는 의미로 이해가 되었다. 흥미롭게 그 광경을 보면서 차를 마시던 자원이 물었다.

“저 차호의 이름이 궁금해요.”

그 말을 들었는지 차예(茶藝)를 펼치던 홍의 낭자가 다가와서 말했다.

“이 차호의 이름은 장취동호(長嘴銅壺)라고 해요. 풀이하면 ‘주둥이가 긴 구리로 만든 차호’라는 뜻이겠네요. 나들이하셨는데 편안한 음차(飮茶)가 되세요~!”

“고마워요 낭자~!”

궁금한 것이 풀린 자원이 포권하며 인사했다. 낭자는 귀엽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싸부, 홍의 낭자가 참 매력적이지 않아요?”

자원의 말에 우창이 내심 흠칫했다. 그렇지 않아도 참 뭔가 모를 품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원이 그것을 콕 찍어서 말하는 바람에 내심을 들켰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원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었던지 바로 간파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말했다.

“자원이 보기에도 그랬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어.”

“원래 싸부는 저렇게 생긴 낭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나도 알잖아요. 춘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 하니 싸부가 좋아하는 인상일 줄 알았죠. 호호~!”

“그게 보였단 말이지? 참 신기하군. 하하~!”

“그럭저럭 밥을 먹을 시간이네요. 차를 마셨으니 이제 오반(午飯)을 먹으러 나가봐요. 어디로 가면 맛있는 한 끼를 해결할 것인지 누구에게 물어봤으면 좋을텐데 말이죠.”

자원이 이렇게 말하는데 예의 홍의 낭자가 어느 사이에 하늘색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면서 말했다.

“소녀를 따라오세요. 후회하지 않을 식당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일행이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말없이 뒤를 따랐다. 홍의 낭자가 자원에게 다가가서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언니는 육류(肉類)가 좋아요? 어류(魚類)가 좋아요?”

“난, 다 잘 먹어요. 그런데 싸부는 비린 것을 더 좋아하니까 우선 그쪽으로 가봐요.”

“그렇다면 쏘가리찜을 잘하는 곳이 있어요. 그곳으로 인내할게요.”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서 조금 더 걷자, 무척 오래되어 보이는 식당이 나타났다. 상호는 만어루(萬魚樓)였다. 아마도 물고기는 모두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지 싶었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여인이 밖으로 나와서 일행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봐하니 리리가 손님을 안내했구나. 고마워. 호호~!”

“이모, 잘 지내셨어요? 오늘 문득 뵙고 싶어서 나들이했어요.”

“나야 잘 지내지. 오랜만에 보니 더 예뻐졌구나. 어서 와~!”

리리라고 불린 홍의 낭자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이모의 솜씨가 근방에서는 알아주시거든요.”

다른 손님들이 별로 없어서 식당 안은 조용했다. 창가 쪽의 탁자를 닦으면서 주인이 연신 리리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보니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였던 모양이다.

“이모의 품이 넉넉해서 가족처럼 지내는 사이예요.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시중은 소녀가 들겠어요.”

일행이 모두 원탁(圓卓)에 둘러앉기를 기다려서 리리가 차를 가져와 따라 주고는 말했다.

“소녀는 하염리(夏廉李)예요. 끝의 이름자가 리(李)라서 이모는 리리(理理)라고 불러요. 일행을 뵙는 순간에 예사롭지 않으신 분들로 보여서 조용하게 담소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쉬는 시간이 되어서 모시게 되었어요.”

하염리는 붙임성이 있는 음성으로 자기를 소개하고 일행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그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삼진도 그러한 느낌을 받았는지 웃으며 말했다.

“오! 하 낭자의 눈매가 보통이 아니시구려. 그러한 것을 단박에 알아채다니 말이오. 과연 잘 보셨소. 하하하~!”

삼진의 말에서 호감이 느껴졌다. 잠시 후. 식탁에는 미리 준비된 음식들이 하나씩 차려졌다. 하염리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오면서 기름에 튀긴 작은 물고기 쟁반을 들고 왔다.

“우선 요리가 준비되는 동안에 입가심으로 삼으시라고 은어(銀魚)를 튀겨 왔어요. 맛도 담백하고 비리지 않아서 좋아하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은어라는 말에 자원이 반기면서 말했다.

“어머나, 은어를 다 먹어보네. 비린 것이 아니라 수박의 향이 나는 것이잖아? 역시 리리 따라오기를 잘했네. 호호호~!”

조용히 앉아서 미소를 짓고 있던 기현주가 하염리에게 말했다.

“하 낭자의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고마워.”

“고맙긴요. 여사님께서도 즐거우신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자원에게는 언니라고 하고 나는 늙었다는 말이지? 여사라니. 호호~!”

“큰 언니! 미안해요. 언니라고 하고 싶은데 범접하기 어려운 품격이 압도하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이 나왔어요. 호호호~!”

하염리는 바로 큰 언니라고 호칭하면서 한 눈을 찡긋했다. 그것이 귀여워서 모두 웃자, 기현주도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랬던 거야? 그랬다면 내가 잘못 했으니 봐줄게. 호호호~!”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큼직한 접시에 색색의 고명으로 장식한 생선을 들고 주인이 나왔다.

“리리가 맛있는 쏘가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해서 이렇게 준비했으니 잘 드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래요.”

주인의 말에 일행이 모두 하염리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서였다.

“왜 그런 때가 있잖아요? 내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맛있는 것을 아무런 까닭이 없어도 대접하고 싶은 사람이 있죠. 오늘 그런 기분이었거든요. 그래서 제가 모셨으니 맛있게 드시면서 담소 나누시면 되죠.”

하염리의 말에 자원이 웃으며 말했다.

“알았어! 오늘 리리가 점심값을 제대로 받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맘 놓고 많이 먹어야지. 호호호~!”

“언니는 어쩜 그렇게 눈치가 빠르실까요? 어서 드세요. 따뜻한 음식이 식은 천하일미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호호호~!”

우창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뭔가 답을 구하는 일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차도 맛있는걸.”

밥을 다 먹고 차를 마시면서 그윽한 향에 취해서 기현주가 말하자 하염리가 말했다.

“원래 용정에 와서 차를 자랑하지 말라고 했죠. 차에 대해서는 용정이 천하제일이잖아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용정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염리에게 자원이 말했다.

“자, 천하제일의 쏘가리찜에 천하제일의 용정차도 마셨으니 이제 리리의 이야기나 들어볼까? 우리도 밥값에 차값까지 해야 할테니까 뭐든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말해 봐.”

 


 

 

“그렇게 정색하고 말씀하시면 무안하잖아요. 호호~!”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이제나저제나 말할 기회를 얻으려나 싶어 했던 하염리가 반갑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리(李)는 약간의 잔재주로 호구지책을 삼고 있으나 항상 기회가 온다면 자연과 더불어 이치를 궁구하면서 호호탕탕(浩浩蕩蕩)하게 천하를 떠돌면서 살아가고 싶은 것이 꿈이에요. 그런데 선생님들의 표정을 보면서 첫눈에 그와 같은 삶을 누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것이 착각이 아니라면 이에 대해서 귀중한 안내의 말씀을 듣고자 해요. 어떻게 하면 이 굴레를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면서 아무런 구속도 없이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어쩌면 마음속에 품은 말을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혼자서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겠구나. 그렇지?”

“언니, 맞아요. 예전에는 나이가 어려서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안했는데 이제 나이도 좀 들고 보니 언제까지 이렇게 기술을 팔면서 세월을 보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니, 그렇긴 한데 그동안 그러한 이야기를 나눌 길손을 만나지 못했던 거야?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일 텐데 말이지.”

자원이 의아하다는 듯이 이렇게 묻자, 하염리가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가끔 속의 말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어요. 오히려 탐심을 드러내는 사람이 더 많아서 이제는 말을 꺼내기도 두려워져서 그냥 잊고 있었죠. 그러다가 언니를 보는 순간 잔잔한 호수같은 평온함이 느껴졌어요. 여태 많은 사람을 만났으나 언니의 편안한 표정은 쉽사리 접하기 어려웠어요. 그래서 이번 기회는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다음 공연의 기회를 후배에게 떠넘기고 얼른 따라나선 거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해맑게 웃는 것을 보고서 기현주가 말했다.

“아니, 참 대책이 없는 낭자구나. 우리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그렇게 쉽사리 마음을 드러낸단 말이야? 세상은 넓고 험악한 사람은 얼마나 많으며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어앉아서 이익을 추구하려고 호시탐탐(虎視耽耽) 기회를 엿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쩌려고. 쯧쯧~!”

기현주의 말에 하염리가 합장하며 말했다.

“알죠~! 그것도 다 생각해 봤고, 이미 여러 차례 겪어봤어요.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해 주시는 분도 큰 언니가 처음이에요. 그래서 염리가 판단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만 더해 주시는걸요. 호호호~!”

일점의 의혹도 없다는 듯이 호방하게 웃는 하염리의 표정을 보면서 우창은 처음에 춘매를 만났을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춘매는 순수(純粹)해서 세파에 물들지 않은 모습이었는데 오늘 하염리를 보니 세상 물정을 다 겪어서 이미 탁세(濁世)의 이런저런 꼴을 다 알고 있는 표정이 서로 다를 뿐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짠한 마음이 일었다. 어찌 보면 아직 어린 나이인데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었다는 듯이 달관한 듯한 표정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자 문득 산수원의 고요한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으로 안내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혹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면 딱 적당한 곳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선 의견을 물어봐야겠지?”

우창의 말에 하염리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음을 써 주시니 말이에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너무 고요한 것은 쓸쓸해서 싫어요. 적당히 소란스러운 것은 감당이 되는데 적막(寂寞)한 것은 지난날의 추억들만 떠오를 수도 있고 해서 말이에요.”

하염리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럴법했다. 저마다 개성이 있어서 원하는 것도 같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잠시 말이 없자 하염리가 우창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께서는 어떤 분야에 종사하시는지도 여쭙지 않았잖아요? 무엇을 하시든 괜찮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제라도 여쭙는 것이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말하는 모습을 본 자원이 대신 대답했다.

“싸부는 오행을 연구하는 학자시고 주업은 명학(命學)의 분야(分野)라고 하겠네. 여기 동행들 모두가 이렇게 공부하는 것으로 보면 되겠지?”

“어머나~! 어쩐지 깊이 통찰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원래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우선 염리의 추명(推命)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야 당연하지, 우리도 밥값은 해야 하잖아? 호호호~!”

자원의 말에 하염리가 반가워하면서 말했다.

 


 

 

“염리는 쥐띠에요. 올해 스물둘이고요. 강호의 술사들이 봐준다고 이러쿵저러쿵했는데 모두 신임이 가지 않아서 그냥 흘려들었는데 오늘은 제대로 귀담아서 귀한 가르침을 듣고 싶어요. 비록 잘나지는 못했어도 제 팔자는 알고 있으니 그대로 불러드려도 되겠죠?”

자원은 이렇게 말하는 하염리가 무척 예뻐 보였다.

“당연하지! 어서 불러줘 봐. 호호호~!”

“강호에서 동분서주하다가 보니까 자기 운명의 여덟 글자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어요. 임자(壬子), 임인(壬寅) 을묘(乙卯) 정축(丁丑)이에요.”

하염리의 말을 듣고 자원이 종이에 적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우창이 말했다.

 

 


 

 

“오호! 오늘따라 자원의 손끝에 힘이 가득 들어갔는걸. 하하하~!”

“그러니까요. 왜 그럴까요? 이런 것도 어떤 조짐이 될까요?”

“당연하지. 이제 하 낭자는 자신의 중심으로 길을 찾아가게 될 조짐이 충분히 되고도 남는다고 봐야지.”

“아니, 팔자에 그러한 해석이 나온다는 말씀인가요?”

하염리가 듣기에 너무 좋아서인지 반신반의(半信半疑)하면서 물었다. 그것을 본 자원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아냐~! 그냥 간지를 써놓은 것만 보고서 싸부가 느낌이 동해서 한 말이지 뭘. 사주풀이는 이제부터 해 줄 테니까 잘 들어봐. 나도 궁금하네. 호호호~!”

“선생님, 기탄없이 보이시는 대로 풀이를 청합니다. 무슨 말씀이든지 다 받아들일 수가 있으니까요. 호호~!”

하염리의 사주를 지그시 바라보던 우창이 한 마디 던졌다.

“선곤후유지명(先困後裕之命)~!”

“그 말씀은 젊어서는 고단하게 살겠으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여유로워진다는 의미잖아요? 아마도 용신은 식신생재(食神生財)로 보신 거죠?”

자원이 풀이를 겸해서 설명을 곁들였다. 그 말을 들은 하염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잠시 말이 없는 것을 보면서 아무도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킨 다음에 하염리가 말했다.

“그간 고단한 삶에 대해서 부모를 원망했는데 비명(批命)의 말씀을 들어보니 그 또한 팔자소관(八字所關)이었던가 보네요?”

“다행이지 뭐야. 선곤후곤(先困後困)도 있는데 말이지. 호호호~!”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정말 말씀만 들어도 희망이 보여요. 호호호~!”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말하는 하염리의 표정이 귀여웠다. 사주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기현주가 우창에게 물었다.

“그런데 동생, 모른다고 탓하지 말고 가르쳐 줘봐. 이 팔자 정도라면 부유하게 살아야 하는 거잖아? 어떻게 거리에서 기술을 팔아서 밥을 벌 수가 있는 건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 말이야.”

우창이 기현주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자원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원이 우창을 대신해서 설명했다.

“언니도 참. 천하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라고 하더라도 어린 7~8세의 아이라면 어찌 힘을 쓸 수가 있겠어요? 그래서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마련해 둔 사자성어가 있죠.”

“왜?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하고 싶은 거야?”

“맞아요. 호호호~!”

“그렇구나. 그런데 또 궁금한 것이 있어. 사주에 관살(官殺)이 없는 것으로 봐서 남의 지배(支配)를 받기 어렵다고 해야 하겠는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걸.”

기현주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다시 자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자원이 미소를 짓고는 다시 조곤조곤 설명했다.

“언니, 아까 용행십팔식의 기예(技藝)를 봤잖아요? 그것은 무엇으로 부린 재주일까요?”

“그야 손재간이잖아? 말로 재주를 부린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맞아요. 손기술로 밥을 벌었다면 식신생재(食神生財)일까요? 아니면 상관생재(傷官生財)일까요?”

“음…… 예전에 듣기로는 식신은 손이고 상관은 입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식신생재는 손기술로 밥을 만들어 먹는 재능이 된다는 건가?”

이렇게 말하던 기현주가 비로소 알았다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오호~! 그런 뜻이었구나. 정말 신기하네.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