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8] 제44장. 소요원(逍遙園)
31. 지관(地官)의 등급(等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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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현주도 자원과 우창의 눈짓을 보고는 잠시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다가 비로소 그 의미를 알고는 오히려 선수를 쳐서 감경보에게 물었다.
“약수 선생의 이야기야말로 참 재미있어요. 그것이 풍수라도 좋고 진동이라도 좋아요. 이렇게 재미도 없는 군신(君臣)이니 모자(母子)니 하는 내용보다는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기현주의 말에 자원이 손뼉을 쳤다.
“역시! 언니는 자원의 가려운 곳을 잘도 긁어주신단 말이에요. 호호호~!”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우창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감경보에게 물었다.
“다들 공부가 재미없나 봅니다. 약수 선생의 이야기에 관심이 가는 것을 보니 말이지요. 귀한 가르침을 청하겠습니다. 자원은 땅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모양이니 이에 대해서 한 말씀을 주시기바랍니다.”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감경보가 물었다.
“우창 선생은 지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계시는지가 궁금합니다.”
“예, 깊이는 모릅니다. 예전에 형님으로 모셨던 지사(地師)가 있었는데 그분을 통해서 화맥(火脈)과 수맥(水脈)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다만 옥녀탄금형이니 장군대좌형이니 하는 전문적인 것은 배우지 않아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아니, 수맥과 화맥을 알고 계신다는 말입니까? 이것은 참 의외입니다. 웬만한 풍수가도 그 언저리에서 맴돌기만 할 뿐인데 말이지요.”
감경보가 반기자 우창이 오히려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것이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었습니까? 그냥 설명해 주고 시연(試演)으로 보여주셔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말입니다.”
“상당한 수준의 내공이라고 봐야지요.”
“그렇다면 약수 선생은 그보다 더 높은 경지를 보여주실 테니 벌써 기대가 됩니다.”
“높은 경지라기보다는 또 다른 관법(觀法)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실로 공부는 해 보셔서 알겠지만 높고 낮은 것은 없으니까 말이지요. 모르면 높은 것이고 알면 낮은 것일 따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우창이 실언했습니다. 하하하~!”
우창의 말에 감경보가 미소를 짓고는 다시 물었다.
“우창 선생, 수맥과 화맥을 이해하셨다니까 여쭙습니다만, 그것은 어떤 형태이던가요?”
“형태라면.....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엮인 선(線)과 같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수맥이 지나가면 그다음에는 화맥이 지나가고 이렇게 가로와 세로로 또는 사선으로 얽혀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그것을 하등(下等)의 지사(地師)라고 합니다. 여기는 수맥이 지나가므로 조상의 시신을 안장(安葬)하면 안 된다는 식의 말을 하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면 달인(達人)의 경지가 아닌가 싶었는데 하등의 지사라고 하시니 의아합니다. 그렇다면 중등(中等)의 지사는 어떤 경지에서 노닐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중등의 지사는 지기(地氣)의 소용돌이를 알고 있습니다. 그 소용돌이는 다른 곳과 맞닿아 있는 통로와 같은 것입니다. 그 소용돌이는 상하로도 휘몰아치고 좌우로도 휘몰아 감도는 것이지요. 형상을 말씀드린다면 마치 허공에 바람이 제멋대로 회전하면서 돌아가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창은 내심 깜짝 놀랐다. 그렇게 적지 않은 시간을 지광과 같이 다녔으나 그러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신기한 이야기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니, 그런 경지가 있었습니까? 사람의 팔자는 순환(循環)하는 것이 아니고 나선(螺旋)으로 회전하는 것이라는 정도는 생각했습니다만, 지하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입니다. 그리고 내심으로는 믿어도 되는 말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우창의 말에 감경보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우창 선생은 솔직하십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이해한 것처럼 어물어물 넘어가시지 않고 확실하게 물어서 정리하시려고 말씀하시는 것에서 과연 학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십니다. 하하하~!”
“의심하는 것을 단박에 눈치채셨습니까? 아무래도 납득(納得)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입니다. 조금만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우창이 솔직하게 의심스럽다고 말하자 감경보가 다시 차근차근 설명했다.
“지하의 소용돌이가 과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정상입니다. 그러한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 약수 선생이 실없이 허언하실 분은 아니라고 믿기에 그 실상을 들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러한 단계가 중등이라고 하시니 그렇다면 고등은 또 어떤 영역인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우선 중등의 현상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하에도 동공(洞空)이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 천연의 동굴도 있으니까 말이지요.”
“바로 그러한 곳이야말로 지기가 소용돌이를 치는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소용돌이치게 되면 그 안에 포함된 토석(土石)이 모두 견디지 못하고 튕겨 나가지요. 아니면 압축이 되기도 합니다. 가령 막대기를 땅에 꽂고서 빙빙 돌리면 주변의 흙들이 밖으로 밀리면서 가운데에는 구멍이 점점 커지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하! 설명을 듣고 생각해 보니 과연 일리가 있습니다. 이제 어렴풋이나마 지기(地氣)의 회전이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소용돌이로 인해서 바위에 구멍도 뚫리고 계곡도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연못도 만들어 지지요. 산상(山上)에 호수가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말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것도 지기의 소용돌이로 인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경보의 말에 우창이 의혹이 생겨서 물었다.
“우창이 듣기로는 그것은 화산(火山)이 폭발하고 그 자리에 물이 고여서 형성이 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보통 그렇게 말합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그것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말이지요. 이미 수억 년 전에 지기의 소용돌이가 일어나서 지하의 불덩어리를 밖으로 토해낸 것이 화산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습니다.”
“화산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면 화염이 소용돌이를 치면서 하늘로 솟아 올라갑니다. 그리고 화염이 줄어들면 또 검은 재도 그렇게 용틀임하면서 허공으로 날아오르지요. 그러한 것을 직접 보게 되면 참으로 장관입니다.”
“그러한 장관도 직접 보고 싶기는 합니다.”
“가끔은 멀쩡한 땅에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미리 감지한 사람은 얼른 자리를 옮겨서 화를 면하나 보통 사람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항상 있을 것만 같은 땅이라고 생각하다가 허망하게 희생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이야기는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언뜻 들어본 것도 같습니다. 말씀을 듣다 보니까 땅도 하나의 생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살아있는 거대한 동물이라는 느낌 말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을 알고 있는 지사(地師)가 중등의 수준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렇다면 상등(上等)의 지사는 어떤 경지인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해 주신다고 해도 이해가 되려나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능히 이해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생각은 못 하셨을지라도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에 떨어지는 의미인지는 알 정도의 수준이니 말이지요.”
“우선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좀 쉽게 말씀해 주시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하하하~!”
우창의 말에 감경보가 미소를 짓고는 설명했다.
“선(線)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직선(直線)이고, 둘은 나선(螺旋)이지요.”
“아, 그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입니까?”
“나머지 하나는 사형(射形)입니다.”
우창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어서 어리둥절했다. 그 표정을 본 감경보가 다시 이해하기 쉽게 말했다.
“방사형(放射形)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빛은 사형(射形)으로 뿜어져 나갑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자아(自我)가 있지요. 모든 중심에서 시방(十方)으로 쏟아져 나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잔잔한 물에 돌을 하나 던지면 물무늬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물결의 무늬가 동그랗게 번져나가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오행 중에서 가장 강력한 응집력(凝集力)을 갖고 있는 물조차도 진동을 받으면 퍼져나가는데 그 모양이 직선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하, 원형으로 번져가니까 그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빛이라면 방사형으로 쏟아진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수면(水面)에 햇볕이 닿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 그러면 윤슬이 아름답게 사방으로 반사(反射)됩니다. 이때는 흡사 방사형의 모습으로 쏘아지는 것을 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눈이 부시지요.”
“어떻습니까? 이제 이해가 되셨습니까?”
“어렴풋하게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모든 사물에도 그렇게 작용하는 것을 간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촛불의 경우를 생각해 봐도 빛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말입니다.”
“들판에 서 있는 나무는 어떻습니까?”
“아하! 그것도 방사형으로 뻗어가는 가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 주변에는 온통 그러한 모습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역시 알아야 보인다는 고인의 가르침은 만고의 진리인 듯싶습니다.”
“불상의 후광(後光)은 어떻습니까? 비록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방사형으로 광채가 뻗어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는 또 어떻겠습니다. 무엇을 물어도 답을 하는 것에 걸림이 없다는 것이 어느 방향에서 바라봐도 일그러짐이 없는 것이기에 두루 원만(圓滿)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창은 물론이고 기현주와 자원과 삼진까지도 방사형의 설법에 대해서 모두 깜짝 놀라서 열심히 생각을 정리하느라고 말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본 우창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선생의 말을 들어봐서는 유선(有線)과 무선(無線)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까? 직선(直線)은 곶게 나가고 나선(螺旋)은 돌아서 나가는 일정의 선이 있다고 한다면 방사(放射)는 선을 떠나서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되어서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해도 되는 것입니까?”
우창의 말에 감경보가 동의하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정말 우창 선생은 체득하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사물의 움직이는 모습에서 선형(線形)과 사형(射形)을 바로 가려내시니 말입니다.”
“말씀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볼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음성(音聲)을 생각해 보면 이것도 선이 아니라 쏟아지는 것으로 봐서 방사(放射)라고 해야 하겠다는 것도 생각해 봤습니다.”
“과연 빠르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방사입니다. 사유가 선(線)의 방식인 사람은 과거와 미래를 한 줄로 엮지 못하면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어제가 없는 내일이 어디 있느냐는 고정관념(固定觀念)에 사로잡혀서 돌연변이(突然變異)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말이지요. 하하하~!”
“그렇겠습니다. 조상을 생각하고 자손을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보이지는 않으나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선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선은 속박(束縛)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속박할 적에 얽어매는 것도 줄이니 이 또한 선이지 않습니까?”
우창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는 듯이 말했다. 목소리는 약간 흥분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왜 미처 해보지 않았던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線)의 반대는 무선(無線)이며 방사(放射)입니다. 그리고 선(線)은 속박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속박의 반대는 해탈(解脫)이 되는 것이지요. 선을 벗어나면 해탈이니까요. 사유가 자유로운 사람은 엉뚱하기도 하고 발랄하기도 합니다. 다만 어디에도 속박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孔子)는 선(線)이고 장자(莊子)는 방사(放射)라고 할 수가 있지요. 그는 선을 벗어버렸기 때문에 선의 관념으로 본다면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경보의 말에 기현주도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짓다가 말했다.
“아하! 부처님이 선악(善惡)에 매이지 말라고 한 말이 그런 뜻이었나요? 예전에 생각하기에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이치가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문득 그것도 틀렸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현주의 말에 감경보가 다시 물었다.
“생각해 보시지요. 권선징악은 선(善)은 좋은 것이고 악(惡)은 나쁜 것이라는 선악의 개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당연히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알겠어요. 공자의 무리가 만들었다고 봐야 하겠어요. 그러니까 배움은 시작이 있으니 선(線)의 형태나 소용돌이가 있지만 배움을 벗어나면 자유로워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다는 말이죠? 그야말로 자유인이잖아요?”
“바로 소요자재(逍遙自在)가 되는 것이고 이곳의 주인이 꿈꾸는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이름이 괜히 소요원이지는 않을 테니 말이지요. 하하하~!”
“아, 맞아요. 바람처럼 물결처럼 자유롭게 머물다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지은 이름인데 이제 약수 선생의 설명을 듣고 보니까 꽤 괜찮은 이름이었네요. 호호호~!”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자, 갈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이목이 갈만을 향했다.
“정말 귀중한 말씀을 들으면서 문득 생각해 봤습니다. 일전에 나눈 대화에서 제칠식(第七識)인 말나식(末那識)을 거론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말나식의 앞부분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인식이라고 봐서 선형(線形)이라고 말한다면 뒷부분은 논리를 떠나서 상황을 인식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은 방사형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만의 말을 듣고서 우창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구나. 그런데 그다음도 있었던가? 제팔식(第八識)의 단계 말이지.”
“제자가 드리고 싶은 것도 바로 그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합니다. 조부께서 집단무의식을 설명하시면서 만약에 방사형에 대한 비유를 들으셨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의 조부께서는 접근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선의 개념으로 접근했더라면 당연히 방사에 대해서 깨달으셨을 테니까.”
“맞습니다. 조부께서 접근하신 방법은 정신의학(精神醫學)이었지요. 조부의 스승이 정신분석(精神分析)의 대가였으니까요. 그러다가 그 스승님이 지나치게 완고한 고정관념으로 정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논리적인 것에 치우친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는 결별하고 홀로 연구하셨다고 했습니다.”
“오호~! 그것도 참 의미심장하구나. 그러니까 정신(精神)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것을 의학적으로 치료도 한다는 말이 아닌가? 참 멋진 치료법이잖은가? 사람의 질병이 몸에서도 일어나지만 아마도 절반은 마음의 병이라고 하니까 정신적인 질환을 생각하면서 접근한 것이 매우 탁월했다는 생각이 드는걸.”
우창이 이렇게 말하자 갈만도 신이 나서 다시 설명했다.
“그러니까 조부의 스승께서는 육식(六識)까지의 분석을 뛰어나게 잘하셨습니다. 오감(五感)과 오욕(五慾)의 바탕에서 비롯된 인간의 정신으로 국한(局限)해서 집요하게 연구하고 임상하셨으니까요. 다만 안타깝게도 제칠식에서 제팔식으로 전개되는 과정에는 미치지 못하셨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에서야 논리도 선(線)이고 고정관념(固定觀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선을 떠나서 존재하는 초월의식(超越意識)을 말했던 조부가 한동안 고초를 겪으셨던 것입니다.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갈만이 이렇게 말하면서 잠시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학문을 벗어난 세계를 설명하느라고 고심하셨을 조부의 노고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우창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감경보에게 물었다.
“약수 선생에게 묻고 싶습니다. 팔자는 나선(螺旋)이지 않습니까? 연주(年柱)도 60년을 기준으로 해서 빙빙 돌아가고 월주도 일주도 시주까지도 마찬가지인데 지금 말씀을 들으며 생각해 보니까 팔자도 시간의 굴레에 가둬둘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여기에 대해서 혹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창의 말에 기현주와 자원은 물론이고 삼진까지도 관심을 보이며 감경보의 설명을 기다렸다. 우창의 질문이 만만치 않은 의미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감경보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꺼냈다.
“그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이야기라고 여겨져서 선뜻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사주는 나선형으로 생긴 구조가 넷이 모여서 하나의 무리를 이루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일간을 중심으로 방사형(放射形)으로 살펴보게 된다면 통근(通根)의 개념부터가 흔들리지 않겠습니까?”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가령 일주(日柱)가 을유(乙酉)일 경우에는 통근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게 되지만 연지(年支)에 해자수(亥子水)가 있다면 이것이 방사형으로 거래가 된다고 하면 당연히 통근이 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강약의 균형은 일대 혼란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돌로 탑을 쌓은 것처럼 느껴지던 자평법의 이론이 허물어지고 연기나 바람으로 쌓은 것처럼 모였다가 흩어지는 과정의 반복 속에서 살펴야 할 것이니 간단히 한마디로 말씀을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창이 감경보의 말을 듣고도 잠시 생각했다. 참으로 간단하게 단정할 문제가 아닌 것은 분명해 보였다.
“만약에 이러한 점을 해결하려면 전체적인 균형에서 살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득령(得令)이나 득지(得地)의 의미가 사라지고 전체적으로 인겁(印劫)의 비중과 식재관(食財官)의 비중을 나눠서 살펴야 하는 세력의 판도에서 답을 찾게 될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바로 여기에 대해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앞으로 또 시간을 두고 어떻게 적용해서 판단해야 할 것인지를 연구해 봐야 하겠지요.”
감경보가 유보하는 듯이 말하자 우창이 이렇게 마무리하는 것은 아쉽다는 생각이 들어서 물었다.
“예전에 감명(鑑命)할 적에 월지(月支)에 갇혀서 큰 비중을 두고 판단했었습니다. 조후법(調候法)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격국론(格局論)도 그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감경보가 우창의 말에 맞장구를 치자 우창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창이 접한 심리추명(心理推命)이라는 고서를 보면 사람의 심성(心性)은 일간을 위주로 해서 방사형(放射形)으로 관찰하는 방법이 나옵니다. 즉 월간(月干)과 시간(時干)과 일지(日支)의 상황을 동시에 관찰하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복잡하고 어려워서 추론이 어려웠습니다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활용법이 익숙해진 다음에 생각해 보면 이것이 바로 선(線)을 벗어나서 관찰하는 방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창의 말에 감경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건 무슨 비법(秘法)입니까?”
“아, 그러니까 이치는 간단합니다. 일간의 가까이에서부터 있는 간지의 영향을 받는다는 이론입니다. 물론 간지(干支)의 구분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일간을 중심에 놓고서 가까이에 어떤 십성이 있느냐는 것만을 살펴서 통변하는데 대체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풀이하면 듣는 상대방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짓고 말도 해 줍니다.”
감경보가 우창의 말을 듣고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물었다.
“보통은 월지(月支)의 십성(十星)을 살펴서 정인(正印)이면 학문에 힘쓴다고 하고 정관(正官)이면 공직에서 국무(國務)를 수행하는 것으로 풀이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월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하지 않고서 우선 일간을 중심으로 놓고서 풀이한다는 말이잖습니까?”
“맞습니다. 그렇게 풀이합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이 있는데 기존의 명학(命學)에서는 일간(日干)을 비견(比肩)으로 놓고서 대입하여 풀이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그렇다면 그것도 각기 다르게 풀이한다는 의미입니까?”
감경보가 처음 듣는다는 듯이 말하자. 우창이 다시 설명했다. 갈만도 우창의 이야기에 넋이 반쯤 나간 사람의 표정으로 빠져든 것으로 보였다.
“우선 경(庚)을 위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비견입니다. 왜냐하면 경의 본질이 정신(精神)이고 주체(主體)이고 자아(自我)이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일간의 자리에 다른 천간이 있더라도 그 근저(根底)에는 경(庚)이 잠재된 것으로 살피게 되지요.”
“재미있습니다. 그렇다면 신(辛)은 어떤 의미입니까?”
“신(辛)은 탐욕(貪慾)입니다. 임(壬)은 궁리(窮理)가 되고, 계(癸)는 저장(貯藏)되지요. 또 갑(甲)은 지배(支配)하는 심성이 되고 을(乙)은 치밀(緻密)한 성향이 됩니다.”
“오호! 그렇다면 병(丙)은 어떻습니까?”
“병은 명쾌(明快)가 됩니다. 정(丁)은 또 열정(熱情)이 되고, 무(戊)는 허공(虛空)이 되며 기(己)는 대지(大地)가 되는 것으로 살피게 됩니다. 그러니까 갑(甲)이 정(丁)을 보면 상관(傷官)이라고만 살피지만 하충의 심법(心法)에서는 편재(偏財)인 갑(甲)이 정관(正官)적인 상관(傷官)인 정(丁)을 본 것으로 풀이하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그런 추명법이 있습니까? 금시초문입니다. 어떻게 하는지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제 명식으로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감경보가 감탄과 함께 자신의 사주로 풀이를 듣고 싶어서 청했다.
“아, 어렵지 않습니다. 다시 약수 선생의 명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