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 제43장. 여로(旅路)/ 29.비봉산(飛鳳山) 자락

작성일
2024-11-2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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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 43. 여로(旅路)

 

29. 비봉산(飛鳳山)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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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현령의 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담소하다가 잠을 자고 나니 해가 중천이었다. 현령의 부인이 일어나는 우창의 일행에게 오미자차를 따끈하게 끓여와서 권하며 말했다.

잘 주무셨어요? 어제는 늦게까지 재미있는 말씀을 많이 나누셔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몰랐어요. 조금 있다가 조반(朝飯)을 드시고 봉황산을 같이 가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현령의 부인은 마음이 벌써 비봉산에 가 있는 듯했다. 그것을 보면서 우창이 미소를 짓고서 말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가보고 난 다음에 산을 사겠습니까? 아니면 산부터 사놓고서 둘러보시겠습니까?”

어머,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만약에 둘러본 다음에 산을 사기로 한다면 조용히 두어 사람만 다녀와야 할 것이고, 산을 먼저 사기로 한다면 돈을 주고 난 다음이므로 문서를 받게 될 테니 모두 가서 천천히 둘러봐도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아무도 그 산을 살 사람이 없을 텐데 그렇게까지 조심해야 할까요?”

부인은 우창의 말뜻을 벌써 알아차리고서 이렇게 물었다. 혹시라도 산의 주인이 산을 살 사람이 있다는 낌새를 느끼고는 돈을 더 받아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에 대한 대비(對備)라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여 천기가 누설되면 파리도 생쥐도 얻어먹을 것이 있으려나 싶어서 달려들기 마련이니까요. 하하하~!”

정말이네요. 그럼, 남편과 의논해 봐야 하겠어요. 잠시 차를 마시며 쉬고 계세요.”

이렇게 말하고 나간 부인이 현령과 같이 들어왔다. 현령은 차를 마시는 일행에게 그대로 앉아 있으라고 한 다음에 말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소. 지금 바로 가서 산을 사버립시다. 어제의 조짐을 봤을 적에 우물쭈물하고 있을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오. 아침 밥을 먹는 대로 가서 값을 지불하고 점심을 먹고서 천천히 산을 둘러보도록 하면 되지 않겠소?”

그렇습니다. 그럼 누님은 서둘러서 다녀오시고 그사이에 우리는 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오전에는 여유롭게 쉬면서 기현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우창도 조짐을 보고서 판단은 했으나 막상 봉황산에 가서 절을 지을 만한 터가 없다면 그것도 난감한 일이라는 생각에 내심 안절부절하며 들락거렸다. 그것을 본 자원이 말했다.

싸부, 뭘 걱정하세요? 편히 쉬셨다가 오후에 둘러봐요. 분명히 멋진 자리가 있을 거니까요. 더구나 현령도 기감(氣感)이 있으시잖아요? 그리고 언니도 그 정도는 볼 줄 아니까 재미있는 풍경을 만날 것으로 믿어요. 호호호~!”

우창은 자원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막상 확인하기 전까지는 마음 한 자락에 걱정스러운 것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시(午時)가 다 되어서야 기현주가 희색이 만면해서 바쁘게 돌아왔다.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하게 맺힐 정도로 서둘러 돌아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기다리던 일행에게 외쳤다.

성공~!”

그 사이에 현령은 정사(政事)를 보러 등청(登廳)하고 없었다. 자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기며 말했다.

언니, 가셨던 일이 잘되셨나 보네요. 애쓰셨어요. 호호호~!”

, 오라버니에게 이야기하고 급히 온 거야. 문서도 깨끗하게 끝냈지. 이제 누가 봐도 비봉산의 남면(南面)은 내 소유가 맞아. 호호호~!”

거금이 들었겠어요. 얼마나 들였어요?”

원래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은 곳이어서 많이 들지는 않았어. 그들도 얼른 떠나고 싶은 마음에 어렵지 않게 12천 냥으로 끝냈지 뭐.”

그것도 적은 돈은 아니네요. 땅은 몇 평()이나 되는 거죠?”

문서를 보니까 대략 80만 평은 되나 보더라. 그 정도면 뭐라도 하겠지?”

어머나! 그렇겠어요. 정말 거저 줍다시피 하셨어요.”

그나마 지금 그 댁 사정이 어수선한 바람에 기회가 좋았으니까 순전히 우창 동생의 덕이라고 봐야겠지? 호호호~!”

우창에게 공을 돌리자 우창도 미소를 짓고 말했다.

시절 인연이 도래한 까닭이지 우창이 한 것은 없습니다. 덕이라면 강행성의 덕이라고 해야 하지 싶습니다. 하하~!”

그러자 기현주도 강행성을 잊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 맞아! 그 녀석이 일을 벌이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확장이 되지도 않았겠구나. 정말 일이란 어디로 흘러갈지 아무도 모르는 것인가 보다. 호호~!”

그래서 길화위흉(吉化爲凶)도 있고, 흉화위길(凶化爲吉)도 있지 않습니까? 참 오묘한 것이 삶의 흐름인가 싶습니다.”

맞아,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더니 이러한 일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또 아무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지?”

맞습니다. 모쪼록 자연의 순리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랄 따름이지요.”

혹시 우리가 뭘 잘못 했을까?”

아닙니다. 오 부자의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서로 맞아떨어졌으니까요. 그야말로 공동승리인 셈이죠. 하하~!”

그런 거지? 그래도 내심으로 남의 불행을 내 행운으로 삼은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조금은 께름칙한 마음이 있었는데 말이야.”

전혀 그럴 일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님의 명의로 구입은 했으나 누님 소유도 아니지 않습니까? 현령께서 말년을 대비해서 저축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큰 공덕이 되겠습니다.”

, 그건 맞아, 항상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걱정했는데 이렇게 준비해 놓으면 그로 인한 걱정은 모두 덜어버릴 수가 있을 것이고, 현직(現職)을 떠나더라도 편히 머무를 별장(別莊)도 하나 마련한 셈이니 축하해야 할 일이구나.”

그럼 점심을 먹고 둘러보러 가도 되겠습니다. 과연 그만한 터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또 걱정 아닙니까? 하하~!”

이제 판은 벌어졌으니 좋은 자리가 있는지만 찾으면 되겠구나. 그리고 현령의 복에 달렸으니 동생이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봐. 호호호~!”

 

점심은 흡사 잔치하는 집처럼 성찬(盛饌)이었다. 기현주도 현령을 위해서 뭔가 도움을 줬다는 것이 흐뭇해서 연신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것을 본 우창이 말했다.

누님, 산에 오르시려면 든든하게 드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비봉산의 맞은편에도 산이 있는지요?”

? 그건 왜?”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지 않습니까.”

무슨 말이지?”

그러자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자원이 한마디 거들었다.

에구! 언니도 참. 보통은 총명하신데 그런 때는 깜깜이시네요. 호호호~!”

도대체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막상 산에 들어가면 숲에 가려서 주변이 안보일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산에 올라가서 조망(眺望)하겠다는 싸부의 생각이죠. 호호~!”

자원의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역시 동생의 심모원려(深謀遠慮)는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나는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어. 내가 갔더라면 우거진 비봉산을 배회하다가 그냥 돌아올 뻔했잖아? 그래서 길잡이를 잘 만나야 헛된 고생을 하지 않는 법이네.”

그러자 우창이 기현주에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다만 예전에 지광(地廣)이라는 지사(地師)와 동행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배웠습니다. 산에 오르면 항상 멀리 펼쳐진 주변의 산맥들을 관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거든요. 당시에 지사가 말하기를 산에서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우창도 감탄했습니다. 하하~!”

우창의 말을 듣고서 기현주가 말했다.

맞는 말이야.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고서야 그 고마움을 알고, 스승이 곁을 떠나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알고,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고 나서야 부유했음을 아는 것과도 같은 이치구나. 그렇지?”

정말 누님의 주석(註釋)은 공자의 뺨을 치겠습니다. 하하하~!”

우창은 기현주의 소녀같이 순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려 깊은 품성이 맘에 들었다. 그래서 또 내심으로 강행성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 든든하게 먹었으면 산에 올라 볼까? 비봉산의 맞은편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름은 아마 자운산(紫雲山)일 거야. 오늘의 방향은 비봉산이 아니라 자운산이 되는 셈이지?”

우창에게 묻는 기현주의 말에 출발 준비를 끝낸 현령이 대신 대답했다.

과연 우창 선생의 도움을 끝까지 받는구려. 자운산을 오르면 동향현의 풍경도 보기 좋아서 5년 전엔가 정자까지 지어놨는데 오늘은 원족(遠足)을 떠나는 기분으로 둘러봅시다. 허허허~!”

 

기현주의 마차로 자운산의 입구까지는 대략 이각(二刻)이 걸렸다. 그야말로 지척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도착해서 살펴보니 우람한 비봉산을 뒤로하고 자운산이 동향현의 풍경을 막아주고 있어서 그 뒤쪽에 있는 비봉산은 아늑한 느낌이 들었다. 현령을 앞세우고 자운산의 정상에 오르자 동향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과연 정자를 지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겠습니다. 경관이 멋집니다.”

우창의 말에 현령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격무(激務)에 심신이 피로할 적에는 가볍게 이 정자에 올라와서 고을을 내려다보며 백성들이 편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지곤 한다오. 허허허~!”

현령의 말을 듣던 기현주가 우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봐야 할 곳이 앞의 풍경보다 뒤쪽인 거지?”

맞습니다. 이제 비봉산을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우창을 따라서 모두 정자의 반대편으로 이동해서 앞을 바라봤다. 아담하지만 웅장한 느낌이 나는 비봉산이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 말이 없이 산세(山勢)를 살피는데 자원이 먼저 느낌을 우창에게 말했다.

주봉(主峰)이 뾰족해서 새의 부리처럼 생겼는데 좌우의 봉우리도 그 아래에 펼쳐져 있어서 이름이 비봉산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하네요.”

자원의 말에 우창도 산의 아래 삼부능선(三部稜線)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아하, 자원도 그렇게 느꼈구나. 고인들이 산을 보면서 정명(定名)할 때 형기(形氣)와 물상(物象)을 보면서 정한다고 하더니 비봉산은 형세를 물상으로 놓고 이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겠네. 그리고 아래쪽의 넓은 터전을 살펴보니 대가람(大伽藍)은 몰라도 중가람이 들어설 자리는 충분해 보이는걸.”

우창이 가리킨 곳을 모두 바라보는데 기현주가 말했다.

다행이네. 조물주가 천연의 정원(庭園)을 거기에 점지하셨을 줄이야~!”

그러자 현령도 살펴보고는 맘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내가 봐도 과연 아늑해 보이니 사명(寺名)이 포란사(抱卵寺)가 된 이유가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구료. 어떻게 현장을 답사하지도 않은 채로 이름까지 나오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한 일이오. 허허허~!”

이것을 일러서 점연일치(占然一致)라고 하지 않겠어요? 호호호~!”

기현주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현령에게 웃으며 말했다.

? 그런 말도 있었나?”

있었기는 뭘 있어요. 지금 만들었지. 점괘(占卦)와 자연(自然)은 하나로 일치하는 장면을 보면 저절로 이런 말이 떠오르잖아요? 호호~!”

그럼 자리를 옮겨서 포란사의 터로 가볼까?”

현령이 이렇게 말하자 기현주의 말이 이어졌다

저 넓은 터전을 빙 둘러서 100그루의 벽오동을 심으면 되겠네. 그리고 지금 가봐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숲이 저렇게 우거졌잖아요?”

그럼 가서 봐야 할 필요는 없겠군.”

현령의 말에 기현주가 말했다.

그동안 여기를 수시로 오르내리셨다면서 비봉산은 자세히 보지 않으셨죠?”

당연하지. 비봉산이 자운산을 감싸고 있는 병풍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런데 오늘 자세히 보니 자운산이 비봉산을 감싸고 있는 것으로 흐름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도 신기한걸.”

맞아요. 관심이 가야 보이는 법이니까요. 봉황의 둥지를 감싸고 있는 자주(紫朱)색의 구름이라니 정말 기가 막히죠? 밖에서는 봉황의 둥지가 보이지 않으니 편안하게 알을 품고 있겠어요. 호호호~!”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우창이 현령에게 말했다.

잘 살펴봤습니다. 우선 그대로 뒀다가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고 나거든 터전의 자리에 있는 수목(樹木)을 베어서 현민(縣民)들이 땔감으로 가져다 쓰도록 하면 일지 선생의 덕망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물론 만약에 일부러 그것을 바라고 한다면 위선(僞善)이라고 하겠습니다만, 기왕 베는 것이니 여름에 베는 것보다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작업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에도 부합합니다.”

지당(至當)한 말씀이오. 동감이외다.”

우창의 말에 현령도 당연하다는 듯이 공감하자 다시 설명을 이었다.

그리고 내년 봄에는 벽오동나무 묘목을 200주 구입해서 사방공사(砂防工事)를 전개하면 좋겠습니다. 그때도 주민들을 불러서 나무를 심도록 하고 품삯도 넉넉하게 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런데 공화(空華)가 말하기로는 일백 그루를 말하지 않았소?”

맞습니다. 처음에 계획의 배()가 되는 묘목을 심어도 도중에 자라지 못하고 죽는 것과 수형(樹形)이 못생긴 것을 제거하고 나면 절반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때 다시 추가로 심게 되면 균일하지 못하여 풍경을 헤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창의 말에 현령이 감탄하면서 말했다.

오호!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소이다. 멋진 가르침이오. 그대로 시행하리다.”

순차적으로 터전을 다져가면 될 것입니다. 수시로 자운정(紫雲亭)에 오르셔서 종전처럼 마을도 굽어보시고 벽오동이 잘 자라고 있는 비봉산의 명당도 살펴보면서 염력(念力)을 넣으시면 나무도 더욱 잘 자랄 것입니다.”

잘 알겠소이다. 빈틈이 없는 가르침이오.”

이렇게 하다가 10년쯤 지난 다음에 터전의 형태가 이뤄지고 나면 비로소 터를 닦고 절을 지으면 될 것입니다. 다 살펴봤으니 그만 하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수고를 해 주셨으니 그 고마움을 말로 다 못 할 지경이오.”

부인께서 걱정하시는 것과 일지 선생의 명식에 드러난 암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함이니 우창도 보람된 일입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으셔도 되겠습니다. 오히려 변변치 못한 사람의 말을 경청해 주시고 그대로 따라 주시니 고마울 따름이지요. 하하하~!”

비로소 일이 끝났다. 귀로에 현령을 관청에 내려주고 다시 소요원(逍遙園)으로 향했다. 흔들리는 마차에서도 기현주는 일련(一連)의 정황들이 참으로 재미있다는 듯이 연신 말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우창 일행도 덩달아 흐뭇했다. 특히 새로운 경험들로 인해서 정신없이 기억하느라고 여념(餘念)이 없던 여정은 아직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지 멍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본 우창이 말했다.

여정도 오늘 많은 공부가 되었지?”

스승님의 원대한 계획에 감탄만 했습니다. 그런데 공부의 길이 이렇게나 험난한 것인 줄을 몰랐으니까 내심으로 두려움도 생겼습니다. 얼마나 공부해야 그렇게 손바닥처럼 살필 수가 있을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제자가 범접할 영역은 아니라는 생각만 듭니다.”

당연하지. 누구나 처음에는 쉽게 생각하고 달려들었다가 중도에는 두려움만 품고서 포기하는 사람이 열에 아홉은 된다고 봐야지. 그래도 관문을 돌파(突破)1할의 사람들이 맛보는 세상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보상받게 되는데 그때까지는 인고(忍苦)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겠군.”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현주가 여정에게 말했다.

아니, 이렇게나 훌륭한 스승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무슨 걱정을 한단 말이야? 나를 봐. 하루라도 동생을 더 붙잡아 두면서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는데 여정이야말로 천복을 타고났잖아? 정말 부럽다니까. 호호~!”

대인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공부를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갑자기 대인은 또 뭐야?”

기현주가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물었다.

,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어쩌다가 대인이 되신 거죠? 얼마나 학덕(學德)을 갖추셨기에 벼슬도 없는데 현령은 그렇게나 존중하는 것인지 신기하기조차 했어요.”

자원의 말에 흐뭇하게 미소를 짓던 기현주가 말했다.

별것도 아니야. 이렇게 필요할 때마다 약간의 도움을 줬는데 현령은 그것이 크게 느껴졌나 봐.”

별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죠. 유비(劉備)의 제갈량(諸葛亮)처럼 항상 의지하고 필요할 때마다 상의하고 고견을 들을 수가 있는 사람이 있는 관리(官吏)야말로 큰 복이죠. 어디 물을 곳도 없이 혼자서 모두 떠안고 해결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그런가? 그렇기는 하겠네. 여하튼 나는 대인이 아니야. 학인(學人)이라면 또 몰라도 말이지. 거북하기는 해도 현령이 그렇게 불러주겠다니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 그냥 두는 거야. 호호호~!”

기현주의 말에 우창도 말했다.

우창이 현령이라고 해도 누님과 같은 사람이 옆에 있다면 든든할 것입니다. 그러니 현령의 극진한 대접은 얼마든지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래 알았어. 어서 가서 적천수의 다음 구절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만 든단 말이야. 다음은 체용(體用)편이던가?”

맞습니다. 체용(體用)의 의미는 잘 알고 계시지요?”

그야 알지. ()은 체()고 비견(比肩)은 용()이잖아?”

아니, 거기까지 생각하셨습니까? 참 놀랍습니다.”

또 있지. 본질(本質)은 체가 되고 작용(作用)은 용이 된다는 것도.”

과연 일문천오(一聞千悟)가 있다더니 누님을 두고 한 말이었군요. 하하~!”

무슨 소릴, 일문이오(一聞二悟)만 되어도 감지덕지(感之德之). 호호~!”

알았습니다. 여하튼 체용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신 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또 생각해 봤는데, 신체(身體)는 체()가 되고 정신(精神)은 용()이 되는 것도 맞지?”

기현주가 말하는 것을 들으며 우창이 미소를 지었다. 우창이 얼른 맞장구를 치지 않는 것을 본 기현주는 뭔가 정답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물었다.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아?”

물론 생각할 나름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만 우창의 생각은 좀 다릅니다.”

,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뒤집으면 되잖아. 정신은 체가 되고 신체는 용이 된단 말이지?”

맞습니다.”

아니, ? 뒤집는 거야 간단하니까 말은 했으나 이치는 잘 모르겠는걸. ”

몸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야 몸이지 누구겠어? 아니 정신이 주인인가?”

누님의 몸이 자운산에 갔습니까? 누님의 정신이 자운산에 갔습니까?”

그야 몸이 갔잖아?”

정신이 원치 않아도 몸이 간 것일까요?”

기현주는 그제야 우창이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하는지를 이해하고서 말했다.

오호라! 이제 알았다. 나를 지배한다는 것이 내 몸을 지배하는 것이었구나. 내 몸이 마음을 지배할 수는 없으니 말이야. 그렇지?”

물론 드물게 몸의 지배를 받는 마음도 있기는 합니다. 다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마음이 몸을 지배해야 하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여태까지 이것조차도 모르고 거꾸로 생각하고 살았나 보다. 체용의 이치가 이렇게 명료(明瞭)하다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음양(陰陽)이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한 것이잖습니까? 하하하~!”

아니, 체용도 음양이었어? 어떻게?”

음체양용(陰體陽用)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정신이 음이고 신체는 양이다?”

맞습니다.”

그런가? 몸은 고정되어 있고, 정신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데도 그렇게 봐야 할 이유는 뭐지?”

어떤 것은 동정(動靜)으로 체용을 볼 때가 있고, 또 어떤 것은 선후(先後)로 체용을 볼 때가 있습니다. 명암(明暗)으로 볼 때와 상하(上下)로 볼 때도 있으니 이것을 가릴 줄만 안다면 음양 공부는 마무리했다고 봐도 되겠습니다.”

우창과 기현주의 대화를 들으면서 가장 즐거운 사람은 여정이었다.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는 상태였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니 저절로 음양의 공부가 깊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창의 설명이 이어졌다.

정작 움직이는 것은 몸일까요? 아니면 마음일까요?”

그야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하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마음이지.”

우창은 비로소 기현주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늠했다. 너무 깊은 공부만 하느라고 정작 기본적인 개념을 못 잡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문제를 알고 나면 해결도 쉬운 법이다.

누님, 20년 전의 누님을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 그때는 참으로 꽃다운 시절이었지. 천하를 유람하면서 자유자재로 노닐었던 순간이었으니 말이야.”

그 마음과 지금의 마음이 변했습니까? 같은 기현주입니까?”

...... 그야 같은 나지. 어찌 다른 사람일 수가 있겠어?”

맞습니다. 몸은 계속해서 생성되고 소멸이 됩니다. 어딘가에서 전해 듣기로는 1년의 기준은 신체의 모든 기능이 새로운 것으로 교체되는 기간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단(不斷)하게 새로운 몸으로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생존할 수가 없는 것이라는 점이지요.”

그건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음식을 먹는 이유가 그것이잖아.”

그렇습니다. 어제 먹은 음식이 오늘 내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신은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도 그대로지요.”

기현주가 비로소 이해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아하~! 그런 것이었구나. 정말 나는 그동안 뭘 공부했는지 모르겠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전혀 모르고 살았으니 말이야. 모르니까 생각할 방법도 모르고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는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잖아. 다시 처음부터 판을 짜야 할까 봐. 그래서 스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것이었어.”

이렇게 담소하는 사이에 마차는 소요원에 도착했다. 시동이 나와서 맞이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별일 없었지?”

, 아무런 일도 없었습니다. 아 참, 현령 나리 댁의 집사께서 다녀가셨습니다. 귀한 손님들께 대접하라고 하시면서 술과 고기를 많이 갖다 놓고 가셨습니다.”

 

 

그 사이에 현령이 마음을 써 준 것이 고마웠다. 평소에 기현주는 음식도 담백한 음식을 좋아해서 손님들의 대접이 소홀하게 대접할까싶어서 기름진 것을 챙겨 보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