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8] 제43장. 여로(旅路)
20. 기현주(紀賢珠)의 열정(熱情)
================================
기현주와 함께 담소하고 있는데 시종이 숙소가 마련되었다고 전했다. 그러자 우창의 일행들에게 여장을 풀도록 말하고 말도 마구간으로 옮기고 여물을 넉넉하게 주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물도 뜨겁게 준비했으니까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객실에서 또 만나서 이야기 나누도록 해.”
여행하다가 이러한 대접을 받으면 그 감동은 몇 배나 컸다. 커다란 나무통에 따끈하게 데운 물을 가득 받아놓은 욕실(浴室)에서 묵은 피로를 풀었다. 가볍고 부드러운 옷으로 갈아입고 나니까 이미 절반은 해탈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도 상쾌했다. 그렇게 한 시진을 쉬었다가 객실로 나가자 자원과 삼진도 길에서 뒤집어썼던 흙먼지를 말끔히 씻어내고는 편안하게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담소하고 있었다.
“벌써 다들 나오셨구나.”
“덕분에 개운하게 씻었습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온 듯해서 좋습니다. 하하~!”
우창의 말에 기현주가 웃으며 앉았다. 이미 손에는 두툼한 종이와 붓을 챙겨서 들고나왔다.
“자, 이제 물값에 방값에 밥값까지 챙겨서 받아야지? 호호호~!”
참으로 배움에 대한 열정은 우창이 감동할 지경이었다. 그러면서도 소탈하게 말하는 것에서 나그네의 마음을 보듬는 배려까지도 느껴졌다.
“봐하니 경신(庚辛)의 삼혼칠백(三魂七魄)에 대한 이치를 가르쳐 달라는 말씀이시지요? 당연히 가르쳐 드리고는 또 우창도 학습비를 청구할 겁니다. 누님의 깊은 지혜를 절대로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으니까요. 하하하~!”
실로 우창도 이렇게 호학(好學)하는 사람을 만났으니 내심으로 기대가 컸다. 작은 가르침 하나라도 얼마든지 커다란 지진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현주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주객(酒客)은 동심(同心)이 되는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저 난향(蘭香)입니까?”
우창은 어딘가에서 그윽한 향이 나는 것이 궁금해서 둘러보다가 방의 한쪽에 우람하게 놓여있는 난초 화분을 발견하고서 말했다.
“응, 건란(建蘭)이 어제부터 향을 분출하고 있네. 귀한 손님이 온다는 것을 알고 준비한 듯이 말이야.”
“아, 건란이었습니까? 우창이 알고 있는 건란은 노란 꽃이 피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붉은 기운이 감도는 꽃은 처음입니다. 향도 이렇게 청아(淸雅)하진 않았는데 난의 세계도 참으로 무궁무진합니다.”
“사람이 다 같지 않듯이 난도 그런가 봐. 저 아이는 흑미인(黑美人)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어. 붉은 가운데에서 살짝 비치는 암흑색(暗黑色)으로 인해서 자꾸만 바라보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고나 할까?”
“춘란(春蘭)의 향과는 또 다른 향이로군요. 그윽한 것이 주인의 품격을 말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우창은 기현주의 매력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말하자.
“어머나! 주인을 기쁘게 말하는 방법도 알고 있었구나. 호호호~!”
순간 우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듣기에 따라서는 그렇게 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것을 본 자원이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그게 싸부의 병이에요. 공부하는 열정이 넘치는 여인을 만나면 정신없이 빠져들거든요. 호호호~!”
자원은 이미 우창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데 우창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느냐고 생각했다. 자원의 말을 듣고서 기현주가 말했다.
“맞아, 조은령(曺銀鈴) 낭자랬지? 조 낭자는 전생에 무슨 공덕을 쌓았기에 이렇게 멋진 스승과 동행하는 걸까? 나도 같이 따라나서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니까. 참으로 부러워라.”
기현주의 말에 자원도 내심으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자원(慈園)이에요. 공화 선생의 내공은 어쩌면 그리도 깊으신지 감탄만 하며 부러워할 따름이죠. 열심히 배울 테니 어서 지낭(智囊)을 풀어주세요. 호호~!”
“그래 퍼주든 퍼가든 그건 각자 알아서 하고 우선 그러한 가르침을 받은 책의 이름이 있으면 책을 알려주고, 스승이 계시면 존함을 알려줘.”
기현주가 어느 사이에 붓을 들고는 우창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으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창이 물었다.
“흠, 누님의 심성을 봐하니 일간(日干)이 신금(辛金)이신가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나 적극적일 리가 없습니다. 하하하~!”
“뭐야? 그렇다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을 보고 있다는 뜻인가?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겠는걸.”
기현주는 우창의 말을 듣자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여전히 삼혼칠백의 생각에서 답을 찾는 것으로 보였다.
“경(庚)에 어찌 하늘만 있을 것이며, 정령만 있겠습니까? 그러니 신(辛)엔들 또한 신령만 있겠느냔 말씀이지요. 누님도 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하하하~!”
잠시 눈을 깜빡이던 기현주가 붓을 놓고 웃으며 말했다.
“아이코~ 내가 한 대 맞았구나. 아퍼라~!”
“잘 압니다. 우창도 그랬으니까요. 하하~!”
“알면 어서 말해 줘야지. 그렇게 빙글빙글 돌리면 내가 멀미 난단 말이야.”
기현주의 말에 우창이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으면 한밤중에 축객(逐客)을 당할까 염려가 되기로 말이지요. 하하~!”
“그래, 잘 알고 있구나. 어서~!”
그러자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던 자원이 나서서 말했다.
“다행히 그건 자원도 알아요. 책의 이름은 『심리추명(心理推命)』이고 지으신 분은 하충(何忠) 스승님이세요.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을 전하신 분은 경순(敬淳)이라고 하는 분이시고요. 혹 공화 선생도 알 수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들어보셨어요? 경순이라는 분을요.”
자원의 말에 기현주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경순(敬淳)이 아호라면, 혹 이름은 곽성(郭成)이라고 하지 않아?”
“맞아요~! 어쩐지 알고 계실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역시 맞았네요. 호호~!”
“자원은 또 그 선생을 어찌 아누? 나도 책만 보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는 몰라서 궁금했는데 자원의 인연도 참 대단하네. 부러워.”
“맞아요. 다른 복은 몰라도 스승의 복은 넘치는 것 같아요. 호호~!”
“그런데..... 곽성의 책은 자평(子平)이 아니라 천문(天文)이었던 것으로 생각되어서 잠시 헛갈렸잖아. 그분이 자평도 연구했단 말이지?”
“그런가요? 그야 자원은 모르죠. 그분이 ‘심리추명’을 알려주셔서 알게 되었을 따름이니까요. 자세한 것이야 싸부가 말하겠지만요.”
자원의 말에 기현주는 다시 우창을 보며 말했다.
“나도 그 책은 들어보지 못했어. 책을 구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 오늘 우창에게 잘 듣고 적어놔야겠다. 그 책에는 뭐라고 되어 있는지 알려줘.”
이렇게 말하고는 밖에다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오석아! 서기(書記)를 좀 불러줄래?”
이렇게 일러놓고는 다시 우창에게 말했다.
“실은 내가 생각은 빠른데도 손이 느려서 가끔 중요한 이야기를 듣게 될 때는 소중한 가르침을 기록하려면 속사(速寫)를 잘하는 사람이 필요하거든.”
“아,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우창은 감탄만 합니다. 하하~!”
잠시 후에 세필(細筆)을 들고 나타난 사람은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조용히 목례(目禮)하고는 저만치 앉아서 글을 쓸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그것을 본 자원이 감탄하며 말했다.
“처음 봤어요. 이야기하는데 그것을 받아서 적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에요. 참 신기해요. 호호호~!”
자원이 재미있어하는 것을 본 기현주도 웃으며 말했다.
“응, 현청에 가끔 놀러 가면 현령이 재판에 주관할 때 원고나 피고의 대화를 기록하는 서기관(書記官)이 있어서 내용을 적는 것을 보고 나도 응용한 거야. 마땅한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현청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얼른 채용했잖아. 실로 글을 빨리 쓰는 것도 타고난 재능이니까 말이야.”
“정말 여러 가지로 감탄하게 되네요. 참으로 멋지세요. 호호~!”
자원의 말에 미소를 짓고는 다시 우창을 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 내가 신금(辛金)이겠다고 한 까닭은 뭐야?”
우창은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정색하고 물으니 일순간 난감했지만 그래도 괜히 한 말이라고는 더더구나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댔다.
“누님은 해물 중에 안강어(鮟鱇魚)라고 하는 생선을 아십니까?”
“안강어? 그런 생선도 있었나? 못 들어봤어.”
“보통 시장에서는 ‘아귀’라고 부르는 생선입니다.”
그러자 기현주도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귀야 알지, 무척 못생긴 생선이잖아? 그 고기의 이름이 안강어였어? 그런데 어쩌다 그 멋진 이름을 두고서 아귀라고 불리는 거지?”
“아마도 맛은 안강(安康)인데 모양은 아귀(餓鬼)라서 그런가 싶습니다. 맛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안강어가 되지만 모양만 본 사람에게는 아귀인 셈이지요.”
“그러니까 그 말은 내가 아귀와 같다는 것이렸다?”
“원 그럴리가요. 하하하~!”
“그런데 이런 순간만큼은 아귀라도 좋은걸. 지식을 습득하는데 아귀면 어떻고 객귀면 어떠냔 말이야. 호호호~!”
“그렇다면 누님은 아귀가 맞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좋지, 그런데 왜 신금(辛金)이 아귀냐는 것을 알고 싶은 거야. 아직 그 말은 하지 않았잖아?”
“아, 그랬군요. 신(辛)은 흑동(黑洞)이라고 했습니다. 비유한다면 굶은 범의 목구멍이라고나 할까요? 항상 굶주린 것이지요. 그래서 무엇이든 새로운 것을 만나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모습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그랬구나. 참 신기하네. 그런데 나는 을묘(乙卯)거든 이유야 어떻든 간에 설명은 잘 들었으니까 이제 사주를 내놔야 하겠구나. 그렇지?”
기현주가 이렇게 말하면서 붓을 들자 모두 궁금해서 붓끝에 눈을 모았다.
정축(丁丑) 임자(壬子) 을묘(乙卯) 정축(丁丑)의 사주를 보던 자원이 가장 먼저 감탄하며 말했다.
“어쩐지! 팔자는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을 다시 또 보게 되네요. 전생에 큰 공덕을 짓고 태어난 것이 틀림없네요. 더구나 끝없는 학문의 열정은 바로 정화(丁火)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으로 봐도 되겠어요. 부러워하면 안 되는데 공화 선생의 사주는 부러워해도 되겠어요.”
자원이 이렇게 말하자 기현주가 자원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선생이라고 하지 않아도 좋다면 그냥 언니라고 해 주면 어때? 알다시피 내가 격식을 갖추는 것은 잘하지도 못하지만 좋아하지도 않으니까 말이야. 어때?”
기현주가 이렇게 말하자 자원이 반기며 말했다.
“자원이야 진즉에 그렇게 부르고 싶었죠. 그래도 싸부가 누님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이모님이나 고모님이라고 할 수도 없어서 애매했답니다. 호호호~!”
“에구, 자원도 참내~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그러면 이렇게 정리하는 것으로 하지, 그리고 삼진 선생도 괜찮다면 편하게 호칭하기를 권하고 싶은데 괜찮을까?”
집주인의 마음에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의 마음을 배려하면서 삼진까지도 편하게 대하도록 하는 세심함이 느껴졌다. 그러자 여정이 말했다.
“여정은 그냥 마님으로 칭하겠습니다. 그것이 편하니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 알았어.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우창이 보니까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화하는 것을 서기(書記)가 열심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이 무척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나 운필(運筆)이 빠른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만 쓴다면 책 한 권이 나오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저마다 타고난 능력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이제 정리가 되었으니 갑(甲)부터 시작해 볼까? 『심리추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누님에게 말씀드릴 것은 온전히 하충 선생의 심리추명이 아니라 「우창(友暢) 식(式)」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면 책에서 공부한 것에다 나름의 소견이 추가되었을 테니 말이지요. 그리고 모두 다 그대로 담을 수도 없으리라는 점도 미리 말씀드리고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당연하지, 모가 난 돌도 개천의 돌이 자꾸 굴러가다가 강에 다다르면 둥글둥글하게 된다는 것이야 누가 모르겠어? 괜한 걱정은 말아. 분명히 구술자(口述者)가 우창 선생이라는 것을 밝혀놓을 테니 말이야. 호호~!”
기현주는 벌써 마음이 들뜬다는 듯이 설레는 표정으로 말했고 음성도 가늘게 떨렸다. 여태까지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즐겁다는 듯이 말하자 비로소 우창이 말을 시작했다.
“원래 갑(甲)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하충 선생의 관점은 좀 달랐습니다. 우주에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중심에서 논하는 방법을 취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쩐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니까 십간(十干)은 우주인데 그 중심에는 경(庚)이 있다는 거지?”
“맞습니다. 경은 주체(主體)가 되고 신(辛)은 종체(從體)가 됩니다. 삼라만상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태아가 처음에 생길 적에 이목구비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탯줄에 이어진 배꼽부터 생기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잊고서 얼굴부터 떠올릴 따름이지요.”
“와우~! 흥미가 점점 돋는 이야기잖아? 그 말은 내가 여태까지 술수학(術數學)을 종횡(縱橫)으로 섭렵했지만 처음 듣는 말이네.”
기현주는 이미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간 듯이 보였다. 삼진과 자원도 흥미롭게 우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상세하게 설명을 듣는 것도 오랜만이지만 언제 들어도 같은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항상 새롭고 재미있게 들리는 우창의 풀이였다. 여정도 틈이 나는대로 자원에게 간지에 대한 기본적인 것은 이해했기 때문에 이 정도의 설명은 어렵지 않게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우창의 설명이 이어졌다.
“주체가 무너지면 자신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굳건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경(庚)은 건궁(乾宮)에 통합니다. 강강(剛强)한 존재가 되는 까닭이지요. 그러므로 원형이정(元亨利貞)이 아니겠습니까?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춘하추동(春夏秋冬)이 흐르듯이 그에 따라서 움직이되 자신의 주체를 항상 지키고 있는 존재로 보게 됩니다.”
“정말 멋진 말이구나. 건(乾)을 양금(陽金)으로 보니 그 이치에 부합하면서도 천간의 경을 새롭게 바라볼 수가 있는 이치가 이미 그 안에 있었다는 말이잖아? 건괘(乾卦)의 강건함이 경(庚)의 주체에서 나왔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오늘 공화가 개안(開眼)을 하네.”
이렇게 말하면서 눈을 깜빡이던 기현주가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우창에게 물었다.
“경(庚)이 건(乾☰)이면 신(辛)은 곤(坤☷)이 되나? 그래야 삼혼은 하늘로 가고 칠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말과도 부합될 테니 말이야. 건(乾)은 천(天)이니가 당연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현주는 재미있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듯이 소녀의 감성으로 말했다. 우창은 그러한 모습을 참으로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문득 춘매(春梅)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 춘매와 닮아 보이기도 했다. 그 순간 춘매가 그리웠다. ‘지렁이는 발이 여덟 개’라고 해도 믿을 춘매였는데 지금 기현주를 보니 많은 면에서 닮아있었기 때문인가 싶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곤은 기(己)가 담당합니다. 그러니 신(辛)은 해당이 없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탯줄을 만든 것은 우주의 중심과 같다면 이것을 경(庚)이라고 하고, 그 탯줄로 모체(母體)의 영양분을 마구마구 흡입하는 것은 바로 신(辛)이 됩니다. 이것은 토양(土壤)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어? 그건 말이 되는걸. 그러니까 최초에 인신(人身)이 모체에서 생겨나는 과정을 생각해 본다는 거잖아. 내가 너무 평면적으로 상식에 갇혀서 좁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겠어. 듣고 보니 참으로 근사한걸.”
“하늘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우주의 중심에 있는 것이 자아(自我)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부친을 우주의 중심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팔괘도(八卦圖)에는 중심이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 비어 있는 것을 대변하는 것이 건괘(乾卦)라고 생각하면 되지 싶습니다. 어떻게 생각되시는지요?”
“아니, 팔괘에서 건(乾)은 부친인데 이것을 나 자신이 되는 것으로 본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걸까?”
기현주는 얼른 이해되지 않는지 잠시 생각하는 것을 본 우창이 말했다.
“누님의 아호가 왜 공화(空華)이겠습니까? 우주의 중심이고 누님 자신이 공화인 까닭이지 않습니까?”
우창이 갑자기 아호를 놓고 이야기하자 기현주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우창이 그것을 어떻게 알았어? 실로 처음에는 백합(百合)이나 규화(葵花)를 생각하다가 또 연화(蓮花)도 생각했는데 마침내 공화(空花)가 된 거야. 모두가 아름답고 다 좋은데 그 모두를 담으려면 ‘허공을 가득 채우는 꽃’밖에 없더란 말이지. 그런데 꽃은 이내 시들고 말아서 화(花)를 화(華)로 바꾼 거야. 같은 꽃이면서도 실물의 꽃이 아닌 정신적인 꽃의 의미를 담고 싶었던 거지. 그러니까 영원토록 허공에서 빛을 쏟아내는 셈이지. 호호호~!”
기현주의 말을 듣고 있던 자원이 말했다.
“정말 언니의 말이 멋지네요. 공화에 그렇게 의미심장한 뜻이 있을 것으로는 생각지도 못했죠. 듣고 보니 건괘(乾卦)와 경(庚)과 하늘과 공화가 모두 한 줄에 꿰어지는 짜릿함이 느껴져요. 안다는 것은 그런 것인가 봐요. 호호호~!”
그러자 기현주도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 말이 그 말이잖아. 경에서 이러한 이치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같이 아찔한 심경을 느꼈어. 그런데 더욱 놀라운 말이 신(辛)은 땅이 아니라는 것이지. 차라리 지상(地上)이든 지하(地下)든 땅이라고 하고 이것은 곤(坤)에 대응한다면 너무나 간결한데 그렇지 않다는 말에 또 혼란이 일어나려고 하잖아.”
우창은 기현주의 솔직담백한 성품에 마음이 끌렸다. 진리를 향해서는 완전히 경계를 풀고 몰입하는 모습에서 그야말로 진리에 살고 죽는 전사처럼 보이기조차 했다.
“누님은 신(辛)이 태양까지도 빨아들인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정말 이해되지 않는걸. 설명해 줘봐.”
“건괘(乾卦)가 나왔으니 태괘(兌卦)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태괘는 서방(西方)에 자리하고 있잖아. 그리고 건괘는 서북방(西北方)에 있지. 그런데 왜?”
“해가 어디로 넘어간다고 합니까?”
“해가? 그야 서쪽이잖아?”
“맞습니다. 그리고 그 서쪽은 바로 유방(酉方)이고, 유방은 신방(辛方)이고 팔괘에서는 태괘(兌卦)가 되는 것이지요. 태괘가 소녀(少女)인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맞아, 건괘가 부친이고 태괘는 소녀로 막내딸이라고 하니까. 그런데 그게 무슨 뜻이 되다는 거지?”
“아니,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소녀가 아닙니까? 뭇 사내들의 정신을 모두 빨아들이는 존재라고 말한다면 허황하다고 하겠습니까?”
우창의 말을 듣던 기현주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무슨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말인가 했는데 듣고 보니 아니라고 못 하겠는걸. 비록 확대해서 해석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야. 과연 우창의 통변은 상상을 초월하네. 더구나 신(辛)이 태양조차도 빨아들인다는 말엔 감탄을 넘어서 감동이야. 호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면 우창은 또 어깨춤이 절로 나오지요. 하하~!”
“당연히 잘하는 것을 잘한다는데 뭘. 다른 팔괘도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을 듣고 싶어. 너무 재미있잖아.”
우창은 기현주가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생각을 정리하면서 말했다.
“정동(正東)을 생각해 볼까요? 지지(地支)로는 묘방(卯方)이 되니 천간(天干)은 을(乙)인데 여기에는 식물(植物)로 대입합니다. 계절은 봄날이라고 한다면 만물이 소생하고 하루로 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생각할 수가 있겠는데 하충 선생은 을(乙)을 성장하는 식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식물은 맞네. 원래 을목(乙木)은 화초(花草)라고 했잖아? 그건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그대로 이해하면 되는 거야?”
“우선은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인간의 신체(身體)도 을(乙)이라고 했다는 것이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하겠습니다.”
우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현주는 다시 놀라며 말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사람은 경(庚)이었잖아? 갈수록 재미가 있는걸.”
“경은 정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신체라고는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만. 하하하~!”
“아니, 심신(心身)을 분리해서 적용한단 말이야?”
“맞습니다. 보통은 함께 묶어서 생각합니다만 하충 선생은 분리해야 한다고 보신 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입하게 되면 오히려 인간의 내면을 궁리하는데 유용한 점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단 말이지.....? 음.....”
우창은 이쯤에서 십성궁(十星宮)을 설명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